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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舊迎新]지난 한 해 '문화재방송.한국'을 찾아 주신 블벗님 감사합니다.갈 수 없는 개성 선죽교(善竹橋), 포은(圃隱)의 혈흔(血痕)은 지금도?

문화재방송 2021. 12. 27. 08:59

지는 해, 뜨는 해… 한 곳서 두 해를 품다

 

저물어가는 해 - 충남 서천군 마량포구에서 바라본 일몰. 수평선과 맞닿은 해가 붉게 물든 하늘,

낮게 드리워진 구름, 점점이 흩어진 섬들과 어우러져 차분하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국사진작가협회 서천지부

 

서천 마랑포구에서도 동·서·남쪽으로 서해가 감싸고 있는 방파제 부근이 일몰과 일출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포인트이다. 낮이 짧은 겨울철에는 정동 방향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해가 뜨고 진다.

 

솟구쳐 오르는 해 - 마량포구 앞바다를 지키는 두 등대 사이로 떠오른 해가 비인만(庇仁灣)을 비추는 모습.

이곳은 갈고리 모양으로 튀어나온 지형 덕분에 서해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멋진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서천군

강화도 장화리는 일몰 풍경이 아름다워 아예 ‘낙조마을’로 불리는 곳이다. 일몰 때면 마을 앞 바위섬

뒤로 해가 겹쳐지며 장관을 연출한다. 장화리 일몰은 만조 때와 간조 때가 서로 맛이 다르다.

만조 때면 바다가 붉게 끓는 듯하고, 물 빠진 때는 붉게 물든 갯벌이 쓸쓸하고 처량해 보인다.

일몰 사진은 마을에 있는 제방 위에서 찍어야 잘 나온다. 앞으로 장애물이 없어 시야가 확 트인다.

 

 일몰ㆍ일출시간은 한국천문연구원 홈페이지(http://astro.kasi.re.kr/Life/twt-popup_t.html)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남 여수 향일암(向日庵)은 ‘해를 향해 있는 절’이기에 붙은 이름이다. 가파른 절벽에 절이 자리잡고

있는 데 해가 뜨면 너른 여수 앞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향일암에는 매년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5만~7만 명이 모여든다.

사진 애호가보다는 첫 해를 보며 소망을 비는 관광객이 더 많다. 여수 돌산읍 금오산 중턱에 있는데,

길이 잘 나 있어 오르기 수월하다.

충남 태안 안면도 꽃지해수욕장은서해안의 대표적인 해넘이 명소다. 풍경도 좋고, 주변에 관광시설도

많아 1박2일 여행코스로도 좋다. 꽃지해수욕장은 사진 애호가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장소다.

일몰 때면 바다 방향으로 카메라를 세운 삼각대 군단을 쉽게 볼 수 있다. 자리 경쟁도 치열한 편이다.

멋진 일몰 사진을 건지려면 바다 앞에 나란히 서 있는 할미ㆍ할아비 바위를 정조준하면 된다.

일몰 때 두 바이 사이로 해가 떨어지며, 극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원문보기

news.joins.com/article/19313147?cloc=joongang

저무는 고려를 향한 일편단심, 선죽교(善竹橋)를 밟을 수 없으나,

개성시 선죽동

 

선죽교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입니다.

919년 태조가 개성의 시가지를 정비하면서 하천정비의 일환으로 축조한 것으로, 1780년 정몽주의 후손인 유수 정호인이 주위에 돌난간을 두고 별교를 세워 보호했다고 합니다.

려말 포은의 굽힘 없는 충절이 방원(李芳遠)의 칼에 숨진 곳으로

충절의 선조가 죽임을 당한 자리를 아무나 밟아 욕되이게 되는것이 안타까워 그 자리를 지나지 못하도록 돌 난간을 세워 보호하고

대신에 그 옆으로 돌다리를 새로 놓아 옆으로 비켜 다닐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다리를 건너 보면 두 비각이 세워져 있고 한호(韓濩)의 글씨로 씌어진 선죽교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서편으로는 두 암수거북의 어제어필의 표충비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 거북을 만지면

자식을 얻고 뜻한바를 이룰수 있다해서

두 거북의 코끝은 새까맣게 손때가 타 있습니다.

 

은 정몽주(圃隱 鄭夢周,1337~1392)

대학자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 등과 함께 공부하였으며,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교육발전을 위해 5부학당과 향교를 세우기도 합니다.

시문과 서화에 뛰어나고, 당시 고려에 들어온 경서인 주자집주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강의 하니

그의 스승인 이색으로부터 '동방 이학의 시조'라 불리웁니다.

 

은은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조선창건에 반대하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겠다 합니다.

포은을 떠 보기 위한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는 이때쯤 등장을 하게 됩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에 포은의 답글이 이어집니다. 단심가(丹心歌)이지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몽주를 회유하기 위한 하여가나 충절을 굳게 지켜 나가겠다는 의지의 단심가.

왕조가 바뀌는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두 인물에 지금의 상황이 비추어짐은 왜 일런지요.

과연 지금의 우리는 정몽주의 충절과 절개가 필요할까요? 아니면 태종의 강력한 리더쉽이 필요할까요.

화도 회군후 군정을 손에 쥔 이성계를 이방원,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이 새 왕조의 임금으로 추대하려 할때

정몽주는 혁명의 반대에 섭니다.

조선창건에 회유되지 않고 이미 저물어가는 고려에 충절을 바친 정몽주는

그의 호인 포은(圃隱 : 몸을 피할지언정 뜻은 굽히지 않는다)과 같이 1392년 4월4일 이곳 선죽교에서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맞이 합니다.

은이 이성계를 방문할때 그의 어머니는 포은에게 이 시를 들려줍니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난 까마귀 횐빛을 새오나니

청강이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사진 아래쪽의 붉은 빛이 포은의 혈흔이라 하는데, 아마도 상징성으로 해석하는게 속 편하겠지요.

 

 

 

선죽교 서편의 표충비입니다.

 

 

 

암수 거북의 코를 만지면 득남을 하고 소원을 이루어 준다 합니다.

 

  

   

노모는,

어떤 소원을 비시는지, 두손으로 곱게 문지르십니다.

 


출처:

 

◀선조들의 숨결어린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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