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문화재방송.한국 www.tntv.kr

나의 이야기

[백선엽의 6·25 징비록]화랑담배 연기처럼 스러져 간 그 이름들, 치열한 전투 속에 호국의 영령이 된 무수한 무명용사들

문화재방송 2022. 6. 20. 00:12

아군 1개 연대가 적 1개 사단과 싸워야 했던 다부동 전투

 

  • 국군 1사단에는 3개의 연대가 있었다. 11연대와 12연대, 그리고 15연대였다. 11연대는 다부동 초입이 있는 356고지와 297고지에서 석우동까지 이어지는 7.5㎞, 12연대는 수암산과 유학산 및 674고지를 잇는 9.5㎞, 15연대는 328고지를 중심으로 하는 3㎞ 길이의 전선을 맡았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11연대, 12연대, 15연대가 늘어선 형국이었다.

    개전 초기 서울을 먼저 점령함으로써 김일성으로부터 ‘서울 사단’이라는 명예를 얻었던 북한군 3사단은 우려했던 대로 왜관 북쪽에서 진격하다가 화력이 국군에 비해 훨씬 강력했던 미 제1 기병사단 방어지역을 우회해 15연대 지역으로 공격을 펼치고 있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대구 북방을 향해 직접 치고 내려오던 북한군 2개 사단과 미군 방어지역을 우회한 북한군 3사단이 모두 국군 1사단 방어지역인 다부동을 향해 밀려오는 상황이었다. 유학산 일대를 담당한 12연대 앞에는 북한군 15사단, 그 동쪽으로 서 있던 11연대 지역에는 북한군 13사단이 공격을 벌여왔다.

    우리는 따라서 다부동 전투가 막 벌어지던 무렵에는 각 연대가 북한군 1개 사단 병력에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특히 북한군 3사단이 밀고 들어오는 15연대 방어지역에서는 험한 지형 때문에 격전이 불가피했고, 12연대는 유학산 북사면을 먼저 점령한 북한군과 혈전을 벌여야 하는 형국이었다.
    1950년 11월 무렵, 대구에서 전선으로 떠나는 어느 신병의 어머니가 먼길 떠나는 아들에게 물을 떠와 먹이는 모습.
     
    매일 사단 지휘소로 날아 들어오는 보고는 그 격전과 혈전의 상황을 시시각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8월 14일 이후의 모든 상황은 아주 절박할 정도로 돌아갔다. 15연대는 고지를 두고 적과 뺏고 빼앗기는 접전에 들어갔다. 15연대 방어지역은 돌산이 많아 흙을 깊이 파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개인 참호를 제대로 파지 못해 인명 피해가 많았다.

    유학산의 12연대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대구 북방으로 800m 이상의 능선이 4㎞ 길이로 펼쳐져 있는 유학산은 방어를 하는 쪽인 우리가 정상을 향할 때 문제가 심했다. 700m 지점에 이르러서는 높이 70~80m의 아주 가파른 바위가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북사면의 완만한 경사를 올라 고지를 선점하고 있던 북한군은 우리의 공격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아군이 700m 지점에 이르렀을 때 수류탄을 던지면 더 이상 오를 수 없도록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상에 있는 적을 공격하기 위해 다가가다 죽거나 사망하는 병력이 급격히 늘어났다. 따라서 12연대는 야간 공격을 지속적으로 감행했다. 그러나 적의 반격이 거세 피해는 계속 증가했다.

    담뱃갑에 적은 신병 이름

    내가 있던 다부동 동명초등학교의 사단 지휘소에는 적의 고지를 공격하다 사망한 장병들의 시신이 나날이 쌓였다. 매일 전황 브리핑에서 보고받는 사망자 숫자가 자꾸 늘어나더니 2~3일이 경과하면서는 하루 700여 명의 손실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충격적인 숫자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사단 사령부를 나와 연대 전방 지휘소 등을 둘러보러 길을 떠날 때는 일부러 시신이 쌓여 있는 곳에 눈길을 두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참담한 그 광경을 보면서 괜히 투지(鬪志)가 꺾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미 그곳 일대는 무더운 8월의 날씨로 인해 주검이 부패하면서 번지는 냄새로 가득 차고 말았다.

    전쟁은 여러 가지의 책략과 전기(戰技)를 필요로 한다. 싸움의 얼개를 다루면서 전체 흐름을 조정하며 적에 앞서 유리한 지형과 시간을 선점하는 전략적 안목, 병력과 화력을 제때 동원해 공격과 방어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보내는 전술적 시야 등이 다 필요하다.

    그러나 그때 낙동강 전선 서쪽, 대구 북방에서 벌어진 다부동 전투는 그런 여러 가지 요소를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적을 맞아 끝까지 싸우려는 굵고 강하며 꺾이지 않는 투지였다. 적도 사력(死力)을 다해 전선을 허물고자 덤벼들었고, 우리 또한 그에 맞서 젖 먹던 힘까지 자아내 적을 막아야 했다. 당시의 전장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는 죽음을 무릅쓰고 적과 싸우겠다는 강인한 투지였다.

    병력 보충은 후방의 육군본부, 전시 행정 채비를 갖춘 정부의 노력으로 비교적 원활하게 이뤄졌다. 그러나 다급한 전시의 상황이라서 새로 모병한 장병들에게 충분한 훈련을 시킬 수가 없었던 점이 문제였다. 이들은 각 연대의 임시 훈련장에서 한두 시간 소총 작동법 등을 배운 뒤 전선으로 갔다.

    각 고지에서 대원을 이끌고 있던 소대장들은 이렇게 올라온 신병들과 대화를 나눌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유학산 전선에서는 주로 밤을 틈탄 공격이 이뤄지고 있어 소대장은 신병이 올라오면 손전등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춘 뒤 “내가 소대장”이라고 소개한 뒤 공격을 이끌었다. 소대장은 또 신병들의 이름을 화랑 담뱃갑 쪽지에 적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나중에 전사자를 확인할 때 이름이나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6.25 전쟁 때 국군에게 배급된 화랑담배. 당시 우리 국군의 고난이 상징처럼 어려있는 담배다.
     
    돌아오지 않는 병사들

    15연대의 상황은 아주 처절했다. 참호를 깊이 팔 수 없었던 까닭에 아군은 적의 공격에 자주 몸을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사상자는 늘어만 갔다. 15연대 장병들은 쓰러진 동료들의 시신 뒤에 숨어서 적과 교전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신병들은 한번 올라간 뒤 내려오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열에 여덟아홉은 그렇게 산에 올라가 싸우다가 세상을 등졌다. 전사자 확인도 쉽지 않았다. 그들의 이름을 적었던 소대장 또한 전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설령 소대장이 살았더라도 신병들의 이름을 적었던 화랑 담뱃갑은 땀과 피에 젖어 적어 놓은 이름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희생당한 무명용사는 그런 이유로 해서 아주 많았다.

    11연대의 싸움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곳 정면을 공격하던 북한군 13사단은 다부동 일대를 향해 다가서던 북한군 중에 병력이 가장 많아 전투력이 강했다. 역시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과정에서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나는 피가 마르는 듯한 느낌에 빠졌다.

    쉴 새 없이 전선을 들여다보면서 급한 상황이 생기면 일선을 지휘하는 연대 지휘소로 달려갔다. 현황파악을 위해 그 밑의 대대급 부대도 방문했다. 일선에서 마주치는 전쟁터의 피해는 참담했지만, 나는 전황을 파악한 뒤 가혹할 정도로 단호히 고지탈환 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위기에 마주치면 잘 싸우는 민족이라는 점은 그때 알았다. 휘하의 장병들은 군말 없이 내 명령을 받고 전선으로 향했다. 지휘관들은 묵묵히 싸움터로 향했고, 겁에 질려 전선에 당도한 신병들도 명령을 내리면 어김없이 고지를 향해 달렸다.

    일보(日報)라는 게 있다. 매일의 작전 상황을 육군본부에 보고하는 문서였다. 다부동 전투 중에 우리 1사단은 감찰을 받은 적이 있다. 작전 상황을 보고하는 일보를 육군본부에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육군본부 감찰팀이 사단을 방문했을 때 그들을 직접 현장에 보냈다. 15연대가 공방을 벌이고 있던 지역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숨기기 위해 장사진 상륙작전을 전개했다. 이때 동원된 772명의 학생들은 대부분 전사했다. 
     
    그들은 15연대의 방어지역인 270고지에 다녀왔다. 일보를 올리지 않은 일은 문책 사유에 해당했다. 그러나 육군본부 감찰팀은 고지를 다녀온 뒤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현지의 전황이 아주 처참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시체 냄새 때문에 현장을 제대로 살필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북한군은 ‘제파(諸波)식’ 공격을 벌이고 있었다. 물결처럼 끊임없이 다가서는 방식이었다. 소련군이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선보였던 전술이었다. 돌파구를 설정해 그곳에 여러 차례의 공격 진영을 짜놓고는 계속 투입하는 방식이다. 소련의 작전계획을 따랐고, 그들의 전법까지 그대로 보고 배웠던 북한군은 최후의 돌파를 위해 인명의 손상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그런 전술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15연대 전면에서는 계속 공방이 벌어졌고, 유학산은 아군이 쉽게 정상에 오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11연대 또한 북한군 13사단과 치열한 공방을 전개하면서 희생이 나날이 커졌다. 8월 16일에는 유엔군의 대대적인 공습이 벌어졌다.

    미 8군으로부터 지시가 왔다. “8월 16일 오전 11시 58분경에 대규모 공습이 있을 예정이니 전 병력으로 하여금 진지에 그대로 남아 있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미 공군이 정확히 어느 곳을 폭격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지시에 따라 당일의 그 시간에 맞춰 전 병력에게 진지에서 나오지 말라고 명령했다.
    •    

       

      주먹밥과 탄약 날랐던 다부동의 노무자들, 처절했던 그들의 희생


    거대한 공습, 융단폭격

    하늘에서 그저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미 8군이 폭격에 대비해 참호 속에 들어가 나오지 말라고 했던 시간이었다. 하늘엔 굉음만 가득했다. 미군 폭격기들이 대구 북방과 왜관 쪽을 향해 새카맣게 몰려가고 있었다.

    예정 시간이 되자 폭발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맹렬했다. 땅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곧이어 폭발음과 함께 실제로 땅이 울렁거렸다. 융단폭격이었다. 지정한 지역을 융단 깔듯이 폭탄으로 덮어버리는 작전이다. 일본 오키나와와 가네다 기지에서 발진한 미군 B-29 전략 폭격기 98대가 날아와 전선의 지축을 흔들었다.

    폭격기들은 이날 오전 11시 58분에 폭격을 시작해 12시 24분까지 26분동안 400~900㎏에 달하는 폭탄 960t을 쏟아부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래 최대 규모의 폭격이었다. 다부동에서 벌어진 당시의 전쟁 양상이 그만큼 심각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날의 폭격은 왜관 북방인 구미 일대의 가로 5.6㎞, 세로 12㎞ 지역에 집중됐다. 우리로서는 적이 버티고 있는 곳이라 폭격 효과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늘이 울리고 땅이 흔들렸다는 점에서 폭격의 규모가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으리라는 짐작만 했을 뿐이다.
    일본 오키나와와 가데나 공군기지에서 출격한 미 폭격기들이 1950년 8월 구미 일대에 융단폭격을 하는 모습.
     
    나중에 드러난 결과는 이랬다. 낙동강 일대에서 대구로 나아가던 북한군 주요 병력은 사실 대부분 이미 강을 넘어 우리와 접전 중이었다. 미군 폭격기가 폭격을 감행하기는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곳의 북한군을 폭격하면 그들과 전선을 형성하고 있던 아군의 피해가 막심해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북한군 병력을 향한 폭격 효과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전선에 있는 북한군을 지원하는 후방의 물자 보급기지는 막심한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국방부가 펴낸 <6·25 전쟁사>에는 나중에 포로로 잡혔던 북한군의 증언이 나온다.

    그에 따르면 왜관 인근 약목 일대 북한군 3사단과 15사단 예비대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지원 포병과 공병, 전차, 탄약, 보급품 등이 미군의 융단폭격을 피해가지 못했다는 얘기다. 북한군 내부를 잇는 통신선 등도 모두 폭격으로 끊겼다고 한다. 북한군은 이를 ‘비밀’로 분류해 외부로 새나가는 것을 막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적은 코앞에 있었다. 다부동 일대 모든 방어선을 돌파하려는 적과 그를 막아 세우려는 아군의 끊임없는 살육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신병은 대구와 부산 등지에서 모집, 끊임없이 전선으로 보내졌다. 앞에서 적은 대로 그들의 희생은 아주 컸다. 당시 전선의 사병들은 새로 모집해 전선에 당도한 신병들을 ‘고문관’으로 불렀다.

    노무자들의 막심한 희생

    신병들은 대부분 총도 제대로 다룰 줄 몰랐고 전선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행동이 굼뜰 수밖에 없었고, 숙지하고 있는 사항이 많지 않으니 자연스레 겁도 많았다. 그런 신병들을 ‘고문관’이라고 부르면서 비하했지만, 사실은 안타까움이 묻어 있는 호칭이기도 했다. 그들은 두려움을 품고서도 결국 전선으로 올라가 목숨을 바쳤다.
    6.25 최후의 방어선이자 최대 격전지였던 낙동강 일대. 지난 2000년 4월, 6.25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추진된 전사자 유해발굴작업 도중 다부동 현장에서 발견된 군화 조각.
     
    그들 못지않게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사람들이 노무자였다. 이들은 대개 전선에 나가 직접 총을 잡고 싸울 나이를 넘긴 사람들이었다. 보통은 40대, 나이가 좀 더 들었으면 50대였다. 이들은 후방에서 전선으로 탄약과 식량 등을 나르는 이른바 ‘짐꾼’이었다.

    당시 이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다부동은 지키기 어려웠다. 지게에다 짐을 잔뜩 짊어진 노무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선의 장병들에게 짐을 날라줬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희생은 나날이 커져갔다. 당시 전선사령관이었던 나는 전선 상황에 매달려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희생이 얼마나 컸는지 잘 몰랐다.

    나중에 실시한 피해조사 등을 보면 노무자들은 신병을 포함한 일반 전선의 장병 못지않은 희생을 감수했다. 주먹밥과 탄약을 실어 날랐던 그들은 밤중에 고지를 향하다 적의 사격에 무수히 희생됐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건 항전이었다. 장병과 더불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일반인들의 처절한 희생이었다.

    전략적인 의도에서 벌인 폭격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공세는 집요했다. 전선의 총성은 멈추지 않았다. 전선을 모두 이끌고 있던 미 8군 사령부는 다부동 일대의 상황을 심각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미8군 사령부는 융단폭격에 이어 별도의 조치를 취했다.

    다부동 일대에서 분전(奮戰)하는 국군 1사단의 뒤를 받쳐줘야 한다는 판단을 했던 듯하다. 사실, 당시 국군 1사단 전력으로서는 전선을 지탱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군 1개 연대가 적 1개 사단 병력과 싸워야 했던 수적인 열세 때문이었다. 아울러 우리가 적을 압도할 만한 화력을 갖추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마산으로 급히 이동해 북한군 6사단 등 2개 사단의 공로를 좌절시켰던 미 25사단의 1개 연대를 빼내 우리 1사단의 우전방을 막도록 했다. 27연대장은 존 마이켈리스 대령이었다. 그는 처음 다부동에 왔을 때 계급이 중령이었으나, 도착과 동시에 대령으로 진급했다.

    미남 연대장 마이켈리스

    그는 매우 잘 생긴 미군이었다. 키는 크지 않았으나 얼굴 생김새가 웬만한 영화배우 못지않았다. 나는 미 8군 사령부로부터 “27연대가 다부동 방어를 위해 그곳으로 이동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당시로서는 몰랐는데, 그는 나중에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에 이어 제 4대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는 맥스웰 테일러 장군의 참모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막강한 전투력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던 미 101공수사단에서였다.
    존 마이켈리스 미 25사단 27연대장. 다부동 초입의 길목을 막기 위해 미 8군이 1950년 8월 그를 국군 1사단 방어지역으로 급파했다. 미남의 장교로, 나중에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라이프'에 실린 사진.
     
    당시 공수사단장이 맥스웰 테일러였고, 그의 참모장이 존 마이켈리스 대령이었다. 미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가장 막강한 전투력을 과시한 공수사단이었으니, 마이켈리스 또한 전쟁을 충분히 숙지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동명초등학교의 사령부로 나를 찾아왔고, 나는 그와 함께 상주로부터 다부동에 이르는 국도의 북쪽 길목인 천평동 초입으로 갔다. 27연대가 방어를 맡은 지역이었다. 그는 내가 보는 가운데 신속히 작전 배치에 들어갔다. 천평동은 작은 협곡의 지형이었다. 약 1㎞ 남짓의 폭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좌우 양쪽으로는 유학산 등의 산이 펼쳐져 있었다.

    그의 부대 27연대는 협곡 가운데에 해당하는 천평동 계곡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북한군은 당시 국군이 지니지 못했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고지를 두고 벌이는 전투와는 다른 양상의 싸움이 벌어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천평동이었다. 북한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몰려올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미 8군이 27연대를 보냈던 것이다.

    그는 경험 많은 미군 장교답게 천평동 계곡을 둘로 나눠 좌우 양쪽에 1개 대대씩을 배치했다. 맨 앞에는 지뢰를 매설했고, 중간에는 전차를 배치했다. 각 대대장에게는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지침만을 전달했다. 부대의 방어선을 정확하게 그었으며, 각 장교에게는 임무와 위치를 거듭 확인했다.

    나는 그 뒤를 줄곧 따라다녔다. 그가 하는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약 두 시간이 걸렸다. 그 짧은 시간에 연대급 전투 병력을 모두 배치했다. 말이 연대였지, 사실 그가 이끌고 온 부대는 여단 규모였다. 다부동 방어에 총력으로 나선 미 8군 사령관이 그에게 증강된 여단 병력을 이끌도록 했던 것이다.

    나는 당시 그가 끌고 왔던 병력이 우선 궁금했다. 마이켈리스는 내 의중을 알겠다는 듯이 “전차 1개 중대, 155㎜ 곡사포 6문, 105㎜ 18문에 공지(空地) 연락장교도 데리고 왔다”고 시원스레 대답해줬다. 그는 아울러 “포탄 사용량에도 제한이 없으니 그리 알고 있으라”면서 씩 웃어 보였다.

    경북 화령장에서 개전 이래 처음 한미 합동작전이 벌어졌었다. 그보다 절박한 상황에서 다시 국군과 미군의 합동작전이 벌어질 태세였다. 마이켈리스는 빈틈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든든했다. 그러나 한국군과의 합동작전은 그로서는 처음이었다. 그에게선 세계 최강 미군의 자존심과 함께 국군에 대한 일종의 불신감이 언뜻 보이기도 했다.


    • 밤중에 우리 사령부를 덮친 북한군, 전멸 위기에서 구해준 '밥심'

    •  

     


    하수구에 CP차린 미 연대장

    마이켈리스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스승과 제자로서가 아니라, 전선에서 경험이 많은 지휘관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그는 내게 많이 보여줬다. 그는 부대 배치를 끝낸 뒤 연대 지휘소를 의외의 곳에 마련했다. 하수구였다. 양쪽으로는 포대를 두텁게 쌓은, 물이 흘러 지나가도록 만든 하수구였다.

    아울러 그는 전선에서 병력을 배치할 때도 직접 통신병 한 사람만 대동한 채 총탄이 날아다니는 곳을 정찰했다. 그와 함께 작전을 펼치고 있던 1사단 11연대 병력은 연대장이 통신병 하나만을 대동한 채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선을 시찰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다고 한다.

    이틀 뒤에는 폴 프리먼 대령이 이끄는 미 2사단 23연대가 전선에 왔다. 역시 다부동을 튼튼하게 막아두려는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결단이었다. 프리먼 대령은 이듬해 중공군 참전으로 벌어지는 1·4 후퇴 당시 경기도 가평 인근 지평리라는 곳에서 프랑스 대대와 함께 중공군 5개 사단 병력을 물리쳤던 전투로 이름을 크게 높인 인물이다.

    23연대는 마이켈리스 대령의 27연대 후방을 받쳐주면서 서쪽으로 우회해 대구로 진입할 지 모를 북한군 병력을 대구 진입로에서 막아 세우기 위해 보낸 병력이었다. 어쨌든 북한군의 발악적인 공세에 대응코자 미 8군은 여러 후속 조치를 취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어 국군 8사단 1개 연대도 1사단 방어지역으로 보낸다는 통보가 왔다. 다부동에서 동쪽으로 나있는 가산(架山)산성 쪽에 적군 병력이 모여들고 있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다부동을 통해 대구로 진입하는 공로가 막히자 북한군 일부 병력이 동쪽으로 나있는 가산산성을 노렸던 것이다. 그에 따라 우리 1사단은 미 25사단 27연대, 미 2사단 23연대, 국군 8사단 10연대의 병력을 증원받은 형국이었다.
    다부동 입구 천평동 다리에서 정찰 나갔던 전차를 보고 있는 미 27연대 병력. 다리 옆에서 등을 보이고 있는 이가 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이다.
     
    8월 18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군 8사단 10연대의 선발대가 곧 도착한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사단 사령부가 있던 동명초등학교 정문 앞에 나가 있었다. 전쟁을 치를 때 원군(援軍)의 의미는 각별하다. 사지(死地)와 다름없었던 당시 다부동 전투에서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오는 원군은 가물에 단비 이상의 귀한 존재였다.

    가산산성은 전략적으로 매우 큰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다부동을 뚫기 어려워 북한군이 그곳을 향하고 있다는 정보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그곳은 적이 박격포 등으로 대구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증원군이 필요했다. 1사단 병력으로서는 가산산성을 방어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오후 5시 무렵, 저 멀리 선발대가 보였다. 흙먼지가 풀풀 일어나는 도로를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앞에는 대대장 한 명이 대열을 이끌고 있었다.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1948년 정보국장 시절 데리고 있던 김순기 소령이었다.

    ‘밥부터 먹여야 잘 싸운다’

    나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움에 “순기야! 밥은 먹었냐!”라고 소리쳤다. 멀리서 내 얼굴을 알아본 그는 단걸음에 달려와서는 “사단장님, 아이고…, 먼길 오느라 아직까지 밥도 먹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영천에서 하루종일 시간에 쫓기며 굶으면서 행군을 했던 모양이다. 이어 도착하는 장병들도 피곤과 갈증, 배고픔에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이들은 사실 곧바로 전선을 향해 행군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가산산성의 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배고픈 군인은 전쟁을 잘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을 헤아렸다. 이들을 사단 사령부 운동장에 숙영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참모 한 사람이 “그래도 가산산성으로 먼저 보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을 우선 쉬도록 했다. 그 상태에서 전선에 올려 보낸다고 하더라도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으리라 봤기 때문이다. 나는 내친 김에 인근 마을에서 돼지 3마리를 사오도록 했다. 그리고 문형태 작전참모에게 “우선 배불리 먹고 쉬게 한 다음에 내일 아침 일찍 전선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사단사령부가 있던 동명초등학교 운동장은 갑자기 시끌벅적한 분위기로 변했다. 고달픈 행군에 지쳤던 증원군 부대원들이 오랜만에 먹는 돼지고기와 식사로 들떠 있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지켜본 뒤 사령부 안 집무실로 들어갔다. 밤이 늦어서야 나는 학교 운동장 뒤편에 있는 교사 숙직실로 가 잠이 들었다.

    꿈결에서 들었을까. 요란한 총소리가 마구 울렸다. 이어 무언가 깨져서 땅에 흩뿌려지는 소리도 들렸다. 잠결에 듣는 소리여서 나는 그저 꿈으로 알았다. 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숙직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나를 깨웠다. 부관인 김판규 대위였다. 목소리가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

    “사단장님, 사단장님, 큰일 났습니다. 적이 기습했습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나는 도대체 무슨 소린지를 알 수 없었다. 사단사령부에 적이 당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상황을 짐작했다. 저들이 소규모 부대로 기습을 벌였다는 얘기였다.

    낙동강 전선에서 적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매복한 미군 병사들.

    숙직실에서 운동장으로 나가려면 교사(校舍)가 있는 건물을 거쳐야 했다. 중간에 복도가 길게 난 교실 앞을 지나는데, 사단 참모들 여럿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유리창이 거의 모두 깨진 상태였다. 기관총 탄알이 벽에 부딪치고 있었다. 수류탄도 함께 날아오는 상황이었다.

    나는 군화를 맨 상태에서 자는 버릇이 있다. 교범의 규정대로다. 그에 따르면 전시 중의 지휘관은 취침 시간에도 군화 끈을 매고 자야 했다. 나는 깨진 유리를 밟으면서 곧장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연병장에 숙영하고 있던 증원군 부대를 향해 소리쳤다. “순기야, 어서 나가라. 빨리 부대를 출동시켜. 적들이 앞에 있다!”

    대구에 날아든 적의 포탄

    김순기 소령은 다행히도 아주 기민하게 부대를 통솔했다. 일부는 곧장 개인화기를 지니고 나와 적이 노리고 있는 오른편 담장을 향했고, 일부는 정문을 빠져나가 적이 있는 곳으로 우회하면서 공격을 펼쳤다. 적은 곧 쫓겨 갔다. 김 소령의 일사불란한 지휘가 빛을 발했다.

    적은 사단을 직접 노리기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부동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지시대로 뚫리지 않았다. 발악적인 공세를 펼쳤지만 다부동을 지키던 국군 1사단이 쉽게 물러서지 않자 사단지휘부의 전멸을 노리고 들어온 기습이었다.

    거액의 현상금까지 걸었다고 했다. 국군 1사단장인 나와 사단지휘부의 목숨을 노린 것이다. 사단사령부는 평소 1개 헌병 소대 병력이 지켰다. 적의 기습을 막아내기에는 화력이 여러 모로 떨어지는 병력이었다. 북한은 그 점을 노리고 야밤에 직접 사단사령부를 공격해 들어왔다.

    사람은 전쟁 중이라도 먹어야 한다. 먹지 못하면 싸우지를 못한다. 배가 불러야만 적을 제대로 보면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이 평소 나의 소신이다. 그에 따라 하룻밤을 먹이고 재운 김순기 소령 의 병력이 결국 사단의 전멸을 막을 수 있었다. 당장 그들을 전선으로 올려 보내자는 참모의 제안을 따랐다면 국군 1사단은 적의 기습에 당했을 수도 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사단사령부의 자체 경계 능력을 높이기로 했다. 사단에서 2개 소대를 끌어와 사령부 경계를 맡겼다.

    경계는 그만큼 중요하다. 적이 다가서는 동향을 모를 바에는 경계라도 철저하게 해야 한다. 그에 빈틈이 생기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 놓이기 십상이다. 그날 밤에 있었던 적의 기습은 경계의 중요함을 새삼 일깨웠다.

    간발의 차로 위기를 넘겼지만 여전히 첩첩산중에 놓인 심정이었다. 유학산에서는 아직 고지를 점령하지 못한 아군의 희생이 늘어만 갔다. 15연대 방면의 전선도 적과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혈전을 치르면서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가산산성을 차지하려는 적의 움직임도 부쩍 활발해지고 있었다. 적은 이미 가산산성에 들어서 있었다.

    그곳은 대구를 직접 포격할 수 있는 위치였다. 아니나 다를까. 적의 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대구에서는 임시수도를 부산으로 옮겨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었는데, 대구역에 떨어진 북한군의 포탄은 심각한 파문을 일으켰다. 대구는 금세 혼란에 빠져들었다(계속)

지게부대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원문보기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1/27/2014112702692.html

 

 

 

 

 

6·25 전쟁의 영웅이자 창군(創軍) 원로인 백선엽(100) 예비역 대장이 10일 오후 11시 별세했다.

 

백 장군은 최근 지병으로 건강이 많이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백 장군 측 관계자는 “최근엔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했고, 6·25 70주년도 잘 모르시는 것 같았다”고 했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내가 물러나면 나를 쏴라”

 

1920년 11월23일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난 고인(故人)은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지낸 뒤 평양사범학교를 나왔고 1941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했다.

 

일본군 간도특설대에 배치됐던 백 장군은 해방 직후인 1945년 평양에 돌아왔고,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일하다 김일성이 권력을 잡자 그해 12월 월남했다.

 

월남 직후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간 백 장군은 1946년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부산 제5연대 중대장을 맡았다. 창군 원년 멤버가 된 것이다.

 

6·25전쟁 직전인 1950년 4월 대령으로 제1사단장이 되어 개성 지역을 담당했고, 전쟁 발발 당시 고급 간부 훈련을 받고 있었다.

 

고인은 1950년 6월25일 북한의 남침에 백척간두의 위기였던 조국을 구했다. 경북 칠곡의 낙동강 전선 다부동 전투에서 그는 패퇴 직전인 아군에게 “내가 앞장설 테니, 내가 물러나면 나를 쏴라”고 말하며 인민군이 점령한 고지로 뛰어올라갔고 전세를 뒤집었다.

 

많은 6·25 전사가들은 이 전투에서 패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서른 두살에 한국 최초의 4성 장군에

 

 

 

 

1951년 3월 서울을 탈환한 국군 1사단 사령부로 도쿄 유엔군 맥아더 총사령관이 예고 없이 방문해 백선엽 사단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백 장군이 이끄는 1사단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평양 진군의 선봉에 섰다. 1951년 중공군의 춘계 공세를 막아내 동부 전선 붕괴를 막아내기도 했다. 1952년 7월 백 장군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1953년 1월 전공을 인정받아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되었다.

 

정전 회담 때는 한국군 대표로 참가했다. 백 장군은 1959년 합참의장을 지낸 뒤 1960년 5월31일 예편했다. 태극무공훈장을 두 차례나 받았다.

 

백 장군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국군 장병과 함께 북한의 수도 평양에 첫발을 들여놨던 1950년 10월 19일을 꼽았다.

 

백 장군은 “우리는 6·25전쟁이 터진 뒤 다부동에서 김일성의 공세를 막아낸 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고 북진에 나섰다”며 “그때 정말 신났다. 공산당을 물리치고 곧 통일이 될 거 같았다”고 했다.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의 방한 때 한국군 증강 필요성을 브리핑해 참모총장 재임 당시 육군 10개 사단을 20개 사단으로 확대한 일화도 있다.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군 내부 남로당 숙청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대 주한미군 사령관이 가장 존경한 韓 군인

 

 

 

21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컨벤션에서 주한미군이 주관하는 백선엽 예비역 대장 생일파티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정경두 국방부장관과 로버트 에이브럼스 한미연합사령관, 박한기 합참의장, 해리해리스 주한미국대사 등이 참석했다.

 

예편 직후 주중(당시 대만) 대사로 부임한 백 장군은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프랑스·캐나다 대사 등을 지낸 뒤 1969년 교통부장관에 임명됐다.

 

하지만 일체의 정치 활동은 하지 않았다. 6·25 전쟁 초기 한국군을 ‘민병대’ 취급했던 미군도 백 장군에게만큼은 존경심을 표했다.

 

역대 주한미군사령관들이 백 장군을 향해 ‘존경하는 백선엽 장군’이라는 경칭을 붙이는 게 전통이 됐다. 2013년엔 명예 미8군 사령관에 임명됐고, 2016년엔 한국인 최초로 미8군사령관 이·취임식에 초대됐다.

 

좋아하는 고사성어는 ‘상선약수(上善若水·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기동력 있게, 겸손하게 살고 싶다는 뜻”이라고 백 장군은 설명한 바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노인숙씨, 아들 백남혁·백남흥씨, 딸 백남희·백남순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 발인은 15일 오전 7시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부하에게 시키지 말라』

 

6·25 전쟁 때 낙동강 전선을 방어하여 한국을 구한 白善燁 장군은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위기에 대처하는 리더십 8개항을 이렇게 피력한 적이 있다.

1. 과학적으로 예측하라.

리더는 수많은 생명의 안전을 책임진 사람이다.

2. 바닥을 살펴라. 지휘자는 부하 속으로 들어가고

현장을 뛰면서 민심과 사기(士氣)와 환경을 파악해야 한다.

3. 앞장서라.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부하에게 시키지 말라.

4. 공격하라. 방어로는 이길 수 없다.

5. 선동하지 말고 士氣를 올려라. 신바람은 오래 가지 못한다.

6. 부하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라. 칭찬하라.

7. 진심으로 설득하라. 설득은 선동이 아니다.

8. 위기일수록 원칙으로 돌아가라. 실패하면 원칙을 점검하라.

[만물상] 6·25 영웅 깎아내리기

조선일보

입력 2019.06.18 03:16

 

미군의 대표적 보병 훈련 기지인 조지아주 포트베닝의 육군보병박물관에 가면 한국 노병(老兵)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6·25전쟁 영웅 백선엽 예비역 육군 대장의 육성(肉聲)이다. 미군은 2009년 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백선엽을 포트베닝으로 초청해 6·25전쟁에 관한 생생한 증언을 녹음했다. 보병재단 회장이 직접 긴 편지를 보내 "역사적 전투 경험을 공유하게 해달라"고 요청해 성사된 것이다. 박물관은 이 녹음을 영구 보존한다고 한다.

 

▶미군은 백선엽을 '살아있는 전설'이자 '한·미 동맹의 상징'으로 예우한다. 6·25전쟁 당시 미군과 함께 마지막 전선(戰線)을 지켜낸 백선엽에 대해 미군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한국군 장교" "최상의 야전 지휘관"이라고 평가했다. 지난해 주한 미군이 백수(白壽·한국 나이 99세)를 맞은 백선엽을 위한 파티를 연 자리에서 군인 출신인 해리스 주한 대사는 무릎을 꿇고 노병의 두 손을 맞잡았다. 미군의 존경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이 전쟁 영웅이 정작 한국에서는 틈만 나면 폄훼와 매도 대상이 된다. 좌파 세력은 그가 일제강점기에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것만 부각해 '독립군 토벌 친일파'라고 매도한다. 백선엽이 회고록에서 "당시 중공 팔로군과 싸웠고 독립군은 구경도 못 했다"고 했지만 이런 해명은 외면한다. 친일진상조사위는 백선엽 이름을 친일 명단에 올렸고, 2012년 민주통합당 청년 비례대표는 그를 '민족 반역자'라고 불렀다.

 

▶이 정권 들어서도 육사가 6·25 당시 백선엽의 활약을 그린 웹툰을 홈페이지에서 삭제한 일이 있었다. 그러더니 얼마 전 야당 대표가 백선엽을 찾아간 것을 계기로 백선엽 깎아내리기가 본격화했다. 열린우리당 의원 시절 "북한 미사일은 미군 기지 공격용일 뿐"이라고 변호했던 광복회장은 연일 "백선엽은 철저한 토착 왜구"라며 거품을 물고, 여당 의원은 "윤봉길 의사가 분통해할 일"이라고 거들었다. 김일성 훈장을 받은 김원봉을 '국군의 뿌리'인 것처럼 추켜세운 대통령의 연설을 다시 듣는 것 같다. 

 

▶몇 년 전 향군회장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교육받고 일본 체제에서 근무한것을 탓한다면 백 장군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라고 했다. 6·25 때 대한민국에 총구를 겨눴던 인사는 칭송하고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쏘라"며 선봉에 섰던 호국 영웅에겐 침을 뱉는다. 전도된 의식을 개탄한다.

 

 

인천상륙작전을 위장하기 위해 장사리 상륙작전에 참전한 772명의 학도병

 

 

                                   경북 영덕군 장사리 상륙작전 순국 학도병 추모비

 

 

 

 

 

 

 

 

1950년 9월, 국군과 유엔군은 계속 되는 후퇴를 멈추고 기적과도 같은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한다.

인천 상륙작전에는 수백척의 연합군 함대, 미 10군단과 대한민국 해병대 병력 등 아군이 투입할 수 있는 모

든 병력이 투입 되었고, 약 5천 대 1이라는 이 도박과도 같은 작전은 성공 한다. 

그러나 인천 상륙작전과 같은 날 감행 된 또하나의 상륙작전이 있었다. 이 작전은 ‘도박’이라는 수식어도,

수백척의 군함도, 엄청난 화력지원도, 수천 수만의 병력도 없었다. 여기에는 낡은 LST 1척과 호위함 한척,

그리고 이제 막 총 쏘는 것을 배운 772명의 학도병이 있었을 뿐이다.

작전명 174호, 장사 상륙작전이다.

국군과 유엔군은 비밀리에 인천을 통한 반격작전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7번 국도를 타고 내려가는

포항 지역은 여전히 북한군 2개 사단의 파상 공세로 위기를 겪고 있었다.

 

또 하나 중요한 목적은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이었다. 적의 시선을 인천이 아닌 장사리에 집중

시킨다는 것, 이 작전은 그대로 들어 맞았다. 소수의 병력으로 강력한 적 2개 사단을 묶어 놓을 수

있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포항지역을 사수하고 7번국도를 통한 적의 보급을 차단하기 위한 결단을 내린다. 
소수의 군인들과 772명의 학도병으로 구성된 상륙전 부대를 보내기로 한 것.


그리고 마침내 1950년 9월 15일 새벽 그들을 실은 LST는 포항 장사리 해변 앞바다에 도착하지만,

 때아닌 폭풍으로 배는 좌초되고, 상륙을 시도한 학도병들은 적의 기관총 공격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져만 갔다.

 

총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772명 중 사망과 부상을 당한 학도병을 제외하면 모두

행방불명 상태였다.

 

지금 이 곳에는 추모를 위한 추모비와 기념공원이 들어서 있다. 

 

 

고마우신 블벗님, 헤리티지가 운영하는 문화재 방송국도 돌아 보시지요.

<아래를 클릭하시면 문화재방송으로 직접 가실 수 있습니다>

 

특히 '기타 문화재' / '영상문화'를 깊숙히 검색하시면 만족할만한 내용들이...

 

방송국 주소

www.문화재방송.한국

www.tntv.kr  

 

문화재방송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문화재방송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기타 문화재] > 최신게시물 제목 :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33개★ 미국 CNN 산하 CNN GO에서 선정     미국 CNN 산하 CNN GO에서 2012년 8월 2일 선정 ★대

www.tntv.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