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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중계]심베 제조 과정을 노래한 '방림삼베삼굿놀이' 한국민속예술축제 최우수상 / 영화 <노틀담의 꼽추>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낮과 밤

문화재방송 2022. 1. 19. 05:36

기획. 취재. 촬영. 편집:헤리티지


방림삼베삼굿놀이 평창 대표 민속예술 ‘우뚝’한국민속예술축제 최우수상전통삼베 제조과정 재현 놀이


방림삼베삼굿놀이는 우리나라 전통의상 재료인 삼베를 만드는 과정을 재현한 놀이로 삼씨 뿌리기,삼치기,삼베기,화집쌓기,삼굿제올리기,삼꺼내 한마당 놀기로 구성됐고 경쾌한 몸동작과 구성진 노랫말,삼을 익힐 때 함께 넣은 음식으로 마을잔치를 벌이는 흥겨움 등으로 이번 축제에서 관광객들의 호응을 받았다. 
방림삼베삼굿놀이는 강포라 불리우는 강원도 삼베 가운데 비옥한 토질에서 자란 방림 삼베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지난 2005년 보존회를 설립하고 2006과 2007년 민속학술조사를 거쳐 민속놀이로 완성했다. 
지난 2016년 평창노산문화제 전통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지난해 강원민속예술축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이번 한국민속예술축제에 도 대표로 출전,국무총리상을 차지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낮과 밤 놓쳐선 안 되는 이유 / 영화 <노틀담의 꼽추(1996)>에서 종지기 콰지모도가 살았던 곳

[버락킴의 파리 여행기] #낮과 밤 #시테섬 #노트르담 대성당

 

시테섬으로 연결된 다리ⓒ 김종성
#낮과 밤 #여행지

'장소'는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의 '시간'은 '계절'보다는 훨씬 좁은 범위다. 그러니까 '햇볕(해가 내리쬐는 뜨거운 기운)'보다는 '햇빛(해가 비추는 빛)'에 가깝다. 다시 쓰자면, 장소는 햇빛의 '유무(有無)'에 따라 달라진다. 아니, 더욱 엄밀히는 햇빛의 '양(量)'일지 모른다.

여행을 하며 이곳저곳 돌아다니다보면, 문득 조금 더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장소와 마주하게 된다. 만약 그곳을 찾은 시간대가 '낮'이라면, '이곳의 밤은 어떨까?'라는 궁금증이 생기는 것이다. 자유 여행의 묘미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마카오에서 세인트 폴 대성당(Ruins of St. Paul's, 大三巴牌坊)을 만났을 때, 어두워지기 전에 홍콩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던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밤의 세인트 폴 대성당을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밤이 오기 전까지 시간이 제법 남았던 탓에 '로버트 호퉁 도서관'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고, MGM을 비롯해 마카오의 최고 산업인 카지노까지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파리에선 '시테섬'이 그랬다. 특히 노트르담 대성당(Notre-Dame de Paris)은 이곳의 밤을 꼭 만나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센 강(Seine River)의 중앙에 있는 시테섬(Île de la Cité)은 파리의 시작이자 중심이고, 더 나아가 프랑스의 중심이라 일컬어진다. 우리로 치면 한강 위의 '여의도'를 떠올리면 된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파리 1구와 4구에 속하고, 바로 옆에는 생루이섬이 위치해 있다. 시테섬에는 법원과 경찰청 등 주요 시설들이 위치해 있는데, 무엇보다 이곳에는 저 유명한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다. 파리를 여행하면서 노트르담 대성당을 빠뜨린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뿐인가. 시테섬에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유명한 '생트샤펠 성당(Église Sainte Chapelle)'과 마리 앙투아네트가 갇혀 있던 파리 최초의 형무소 '콩시에르쥬리(Conciergerie)'도 있다. 생트샤펠 성당은 햇빛이 좋은 낮에 그 아름다움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오후'에 꼭 방문해야만 한다. 퐁네프 다리(Pont Neuf)를 비롯해 샤틀레, 레알 지역과 시테섬을 연결하고 있는 로맨틱한 다리들은 시테섬을 더욱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든다. '낮'에도 좋지만, '밤'이 내린 후 펼쳐지는 야경은 가히 압도적이다.

앞서 노트르담 대성당을 언급하며 시테섬에서 낮과 밤 두 시간대에 모두 머무르고 싶어졌다고 말했지만, 사실 생트샤펠 성당이나 다리에서 바라본 야경(제법 차가운 날씨였지만,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등 그 이유는 훨씬 많다. 시테섬의 다양하고 풍성한 모습들을 모두 감상하기 위해선 오후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일정을 모두 쏟아붓는 게 좋다. 여행을 '패키지'로 뚝딱 해치워선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낮의 그곳과 밤의 그곳, 모두 놓쳐선 안 되기 때문이다.

노트르담 대성당ⓒ 김종성
노트르담 대성당ⓒ 김종성
디즈니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노틀담의 꼽추(1996)>에서 종지기 콰지모도가 살았던 곳. <하늘을 걷는 남자(2005)>의 '필립'이 줄을 연결해 건넜던 곳.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 서자 알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전체 길이 130m, 폭 48m, 천장 높이 35m, 탑 높이 69m. 고딕 양식의 건물은 단단해 보였고, 위엄이 가득했다. 어린 시절부터 막연히 불렀던, 그래서 더욱 익숙했던 그 이름 앞에서 그 이름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렇다. 그건 신기함이었다. 유치하지만, 비로소 파리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트르담은 '우리의 귀부인'이라는 뜻인데,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노트르담 대성당은 '성모 마리아 대성당'인 셈이다. 역사를 간단히 짚어보자면, 1163년 공사가 시작돼 1330년에야 완공이 됐다. 무려 17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엄청난 작업이었다. 1455년에는 잔 다르크(Jeanne d'Arc)의 명예 회복 재판이 거행됐고,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는 포도주 창고로 사용됐다고 한다. 1804년에는 나폴레옹의 대관식, 1944년에는 파리 해방을 감사하는 국민 예배가 열리기도 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최후의 심판 문'ⓒ 김종성
노트르담 대성당 정면의 문은 총 세 개다. '성모 마리아의 문', '최후의 심판 문', '성녀 안나의 문'이 그것이다. 그중에서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가운데 있는 최후의 심판 문인데, 할 말을 잃게 만들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한 조각들이 시선을 잡아끈다. 최후의 날을 맞아 '심판'을 하는 예수의 모습과 그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표현돼 있다. 또, 악마가 예수의 저울을 지옥 쪽으로 끌고 가는 모습도 담겨 있다. 자, 이제 노트르담 대성당의 안쪽으로 들어가보자.

노트르담 대성당의 내부ⓒ 김종성
이상했다. 물론 어색한 이상함은 아니었다. '종교'를 떠나서, 오랜 역사를 지닌 장소, 신성함을 담고 있는 공간에 가면 경험할 수 있는 묘한 편안함이었다.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고찰(古刹)에 가면 왠지 모를 경건함이 온몸을 감싸는 것처럼, 노트르담 대성당의 성스러움이 지친 발걸음의 여행자를 위로하는 듯했다. 은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 속의 저들처럼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엄숙하지만 무겁지 않은, 짓누르지 않는 공기 속에 노곤함을 녹였다. 좀더 오래 이곳에 있고 싶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천주교에 대해, 더구나 노트르담 대성당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정확히 무슨 의식이 펼쳐지고 있는지 설명할 순 없지만, 아마도 저녁 시간마다 치러지는 행사가 아니었을까. 주교(主敎)인지 사제인지 역시 알 수 없었지만, 영화에서 익히 봤던 '빨간 옷'을 입은 성직자가 사람들 앞에서 서서 무슨 말을 하더니 파이프 오르간(8000개의 파이프로 제작)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옆에 한 여성이 자리잡았는데, 오르간 반주에 맞춰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밀폐된 공간 속을 헤집고 건물 내벽에 부딪쳐 돌아오는 오르간 소리 위에 아름다운 목소리가 얹히자 '천사가 노래를 부른다면 이럴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천상의 목소리는 마치 육신을 뚫고 영혼에 닿아 치유를 하는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힐링의 시간이었다. 눈을 감고 한참동안 그 노랫소리를 듣고 있다가(녹음까지 했다) 완전히 충전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평일은 저녁 6시 45분(토, 일은 저녁 7시 15분)까지 오픈을 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둘러봐야 했다.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의 모습ⓒ 김종성
노트르담 대성당 내의 성물 박물관(보물실). 5유로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김종성
'밤'이 내린 노트르담 대성당의 모습ⓒ 김종성
내부 구경까지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이미 어둠이 가득했다. 드디어 '밤'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볼 시간이 된 것이다. 건물 밖으로 나와 뒤로 돌아서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뒷걸음질을 하며 눈과 카메라에 저 황홀함을 가득 담았다. 어느덧 건물 전체가 한 프레임에 들어올 때까지 물러서자 웅장한 '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시테섬 전체를 가득 채우는 장엄한 울림이었다. 한동안 계속되는 고결한 종소리의 향연, 또 한번 생각했다. 파리에 오길 잘했다. 노트르담 성당에 오길 잘했다. '밤'에 이곳에 오길 잘했다.

원문보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w.aspx?CNTN_CD=A0002272093&rccode=lvRc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국보 제48호 월정사 팔각 구층 석탑, 눈옷 입은 모습



국보 제48호 오대산 월정사 팔각 구층 석탑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374-8, 월정사 (동산리)



강원도 평창 월정사의 팔각 구층석탑은 자장율사가 창건한 월정사 안에 있는 탑으로,
그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보살상이 마주보며 앉아 있다.




〈사적기 寺蹟記〉에 의하면 1307년(충렬왕 33)에 큰 불이 일어나 불타버렸으나 이일(而一)이 중창했고,
1833년(순조 33)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844년(헌종 10)에 영담(瀛潭)·정암(淨庵) 등이 재건했는
데, 1·4후퇴 때 군사작전상의 이유로 아군에 의해 칠불보전(七佛寶殿)을 비롯하여 10여 채의 건물이 전소
되었다.



이 팔각구층석탑은 고려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높이 15.2미터로 우리나라의 팔
각석탑으로는 가장 크다.

이 탑은 전체를 화강암으로 조성하고 상륜부에 일부 금동장식을 더하였는데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손상을
입은 부분이 있으나 오늘날까지도 본래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해 오고 있다. 기단은 아래층 각 면에 안상
(眼象)을 새기고 연꽃 장식을 베풀었다. 그 위로는 굄돌을 놓아 위층 기단을 정성스레 받들어 기단 전체가
마치 부처 님의 연꽃 대좌처럼 장식됐다.

탑신 안에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으며 기단 위에는 부처님을 앉히기 위한 방석과 같은 석재를 별도로
끼웠으며 탑 앞의 석조보살 좌상도 부처님과 같은 탑 앞에서 공양하는 자세를 하고 있다.



흐트러짐이 없는 정연한 상륜은 보탑(寶塔)의 격조를 한층 더해 주며, 여기에 금동장식을 더해 탑 위에 보
관(寶冠)을 얹은듯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러 번의 화재로 피해를 입은 팔각구층석탑은 1970년 해
체보수를 통해 1층 2층 6층 9층을 새 돌로 갈았으며 그 당시에 1층과 5층에서 총 12점의 사리구(舍利具,
사리를 담는 용구)가 발견됐다. 은제의 불상 1구와 4점의 청동 거울, 금동 향합과 향주머니, 진신사리경 등
총 12점의 유물들은 2003년 6월 보물로 일괄 지정됐다.




2001년, 2002년과 2005년 문화유산발굴조사단에서 석탑 주변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여 토층을 조사
한 결과 석탑 지표면 아래에서 편년(編年)이 확실한 중국 송대 (宋代)의 동전인 숭녕중보(崇寧重寶,
1102~1106)와 성송원보(聖宋元寶)를 발굴해 석탑 조성 연대가 12세기경임이 밝혀졌다.




사진출처:
나그네 산약초

 






월정사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 진부 IC -> 6번 국도 -> 4km -> 월정 3거리 (월정주유소) -> 좌회전 -> 4km 북상 ->
간평교 -> 삼거리 -> 좌회전 -> 4km -> 월정사 앞 주차장 -> 8.3km 북상 -> 상원사 앞 주차장

 

월정사(033-329-6800)

평창군청 문화관광과(033-330-2000)
 

술을 사랑한 문인, 그림이 되다

요즘 젊은이들이 직업 선택에서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꿈을 위해 도전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동양의 문인들에게 출사(出仕)와 은둔(隱遁)은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키워드였다. 과거 급제로 벼슬을 하든 은거를 선택하든 술은 문인들에게 즐거움과 예술적 영감을 선사하고 현실의 고통이나 어려움 따위를 잊게 하는 친구였다. 그 때문에 특정 문인의 술과 관련한 일화나 문학작품이 시공을 초월해 회자되며 회화작품으로도 그려졌다. 그중 에서 김홍도가 몇 번의 붓질로 간결하게 그려낸 <하지장도(賀知章圖)>는 애주가(愛酒家) 하지장(賀知章)의 일화를 그린 것으로 문인의 아취를 물씬 풍기며 보는 이의 눈길을 머물게 한다.1)

 

말 위에 앉은 관복 차림의 하지장은 만취 상태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귀가하고 있다. 그 곁에는 일산(日傘)을 든 하인이 있고, 술동이를 등에 맨 채 뒤에서 걸음을 재촉하는 나이 지긋한 남성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 이때 일산을 든 하인의 표정은 난감한 반면, 술동이를 맨 남성은 마치 하인이나 술 취한 하지장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눈가에 웃음이 가득하다. 화면의 좌우 여백에는 시문(詩文)과 관지(款識)가 있을 뿐 공간이나 시간에 관한 정보는 전혀 없다.

 

하지만 관모도 벗어버린 남성의 만취한 모습이나 피곤해 보이는 말, 일산 등에서 낮부터 시작된 술자리가 야심한 시각이 되어서야 겨우 끝났다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화면 속 인물들의 동작이나 시선 처리, 특정 지물로 공간이나 시간적 배경, 관련 메시지까지 은유적으로 전하는 것은 김홍도의 풍속화에서 보이는 독특한 표현기법이다. 이러한 면모는 그가 조선시대 최고의 화원화가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탁월한 문재이자 예술가, 하지장

만취한 하지장(당나라의 시인으로 시인 이백의 발견자로 알려졌으며 풍류인으로 유명하다)을 관복 차림으로 그린 것은, 695년 급제 이후 744년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 중종, 예종, 현종을 섬기며 관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관직 생활이 녹록치 않았는지 거의 매일 밤 문사들과 술을 마시며 탁월한 문재(文才)를 발휘한 예술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회향우서(回鄕偶書)」는 당시(唐詩)를 대표하는 천고의 명편(名篇)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신룡연간(神龍年 間 705-707)에 포융(包融), 장욱(張旭), 장약허(張若虛)와 함께 오중사사(吳中四士)로 칭송된 것은 그러한 사실을 입증 해준다.2) 또한 하지장은 자신보다 나이가 42세나 어린 이백 (李白)의 「촉도난(蜀道難)」, 「오서곡(烏栖曲)」 등을 읽고,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謫仙人]’이라 칭찬하며 그의 재능을 미리 알아본 일화로도 유명하다.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는 “하지장이 말을 타면 배에 오른 듯 흔들리고, 눈앞이 어지러워 우물에 떨어지면 물 아래 잠드네[知章騎馬似乘船 眼花落井水底眼]”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는 두보(杜甫)가 지은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의 첫 구절로, 하지장이 평상시 퇴청하면 매일 밤 몸을 가누지 못 할 정도로 술을 마셨기 때문에 온전히 귀가하지 못했던 일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3) 이러한 문구와 딱 들어맞는 하지장의 모습을 보면 무릎을 치며 ‘아!’라는 탄복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김홍도의 <하지장도>는 고사인 물도일 뿐만 아니라 시의도(詩意圖)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문인세계를 지향한 노년기의 김홍도가 백묘법(白描法)으로 대상의 특징만을 묘사하여 높은 화격을 보여준다. .4) 두보의 「음중팔선가」에 등장하는 문인들은 관직 생활보다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이들과 술을 마시고 시문을 지으며 예술가로서의 삶을 탐닉하였다. 동 시기 백성들은 음중 팔선의 행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보는 어떤 마음으로 시를 지었을까? 백성의 입장에서 그들을 지탄하고 싶었던 것인가 아니면 동경했던 것 인가? 오늘날 그의 생각은 알 수 없지만 「음중팔선가」는 오랫동안 회자되고 그림 소재가 되면서 어느 순간 동경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현대에도 샐러리맨들은 일과를 마치고 하루 회포를 풀거나 비즈니스의 연장이라는 미명 아래 술자리 문화를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 김홍도는 <하지장도>로 정조 연간에 관리들의 음주문화를 조심스럽게 꼬집고 던 것은 아니었을까?

 

1) 이 작품을 둘러싼 진위 논란이 있지만, 필자는 그 원형을 유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2) ‘오중사사’는 『신당서(新唐書)』 「유안전(劉晏傳)」에서 처음 보이며, 절강성 소주의 옛 지명인 오중(吳中)에서 활동했던 뛰어난 문사 4명을 가리킨다. 이들은 당나라 초기의 시가에서 뛰어난 장점을 수용함과 동시에, 경물과 작가의 감정이 하나되는 정경융합(情景融合)의 시가로 성당기 시가의 전범을 제시하였다.
3) 「음중팔선가」는 두보가 장안에 처음 도착한 745~746년경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팔선은 하지장을 필두로 여양왕(汝陽王) 이진(李璡), 좌승상 이적지(李適之), 최종지(崔宗之), 소진(蘇晉), 이백(李白), 장욱(張旭), 초수(焦遂)이다. 연장자 하지장을 맨 앞에 뒤고 그 다음부터는 관직 순서로 시를 읊었으며, 맨 마지막의 초수는 관직이 없었기 때문에 『당서(唐書)』 「전기(傳記)」에 수록되지 않았다.
4) 화면 왼쪽에 “갑자랍념단구사우서묵재(甲子臘念丹邱寫于瑞墨齋)”라 적은 다음 주문방인 “신홍도(臣弘道)”와 백문방인 “취화사(醉畵士)”가 찍혀 있다. 이는 김홍도의 <하지장도>가 1804년 12월 20일 동갑내기 화원화가 박유성(朴維城)의 서묵재에서 그려졌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글. 최경현(김포공항 문화재감정관실 문화재감정위원)

출처:월간 문화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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