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취재. 촬영. 편집:헤리티지
2월에는 보리밭에 추가로 영양분을 주고 (추비), 겨울에 땅에서 들뜬 보리의 뿌리가 얼어죽지 않도록 밟아주는 시기입니다.
지난 시절 시골의 보리밟기 행사.. 지금은 잊혀진 그 시절의 모습을 기억하고 계시는 분들은 반갑고 어쩌면 그리운 모습이라 생각이 듭니다. 잊혀지고 사라질 정도로 그만큼 오래전의 모습들이기 때문입니다.
혜통에서 혜초로 이어지는 신라 승려의 환상
출가담도 출가담이려니와 그런 혜통이었으니 수행 또한 남달랐다. 혜통은 당나라로 가서 무외 삼장無畏三藏을 뵙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무외 삼장은 선무외 삼장善無畏三藏, 곧 중인도에서 태어나 716년에 당나라로 온 밀교의 시조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혜통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해가 665년이므로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밀교의 대표적인 승려였으므로 기록자가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스승이 혜통을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혜통은 가벼이 물러서지 않고 부지런히 3년을 수행했다. 그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혜통은 뜨락 앞 에 서서 머리에 화로를 이었다. 잠깐 사이에 이마가 터지는 소리가 벼락처럼 났다. 스승이 듣고 와서 이를 보더니, 화로를 치우고 손가락으로 찢어진 곳을 만지며 주문을 외웠다. 상처가 이전처럼 아물었는데, ‘왕王’자 무늬 같은 자국이 남았다. 그래서 호를 왕화상王和尙이 라 했다. 혜통의 정진精進이 목숨을 건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혜통이 이런 사람이었다면 또 한 사람 우리가 경의를 다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혜초(慧超, 704~787) 아닌가 한다. 그 또한 밀교를 연구하였고, 인도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719년 중국의 광주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에게 배웠고, 723년경에 4년 정도 인도 여행을 한 뒤, 733년 에 장안의 천복사에 거주하였으며, 780년에는 산서성의 오대산에서 거주하였다. 필자는 혜초가 혜통의 어떤 연장선상에 있는 신라인의 기개로 환상될 때가 많다.
한번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던 순례자들
사실상 혜초는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인도로 가는 그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사람이 혜초인데 말이다. 오직 『왕오천축국전』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차디찬 눈은 얼음과 엉기어 붙었고 / 찬바람은 땅을 가르도록 매섭다 / 넓은 바다 얼어서 단을 이루고 / 강은 낭떠러지를 깎아만 간다’ 혜초가 쓴 시의 일부이다. 『왕오천축국전』이 돈황敦煌석굴의 깊은 곳에 묻혔다가 세상의 빛을 다시 본 것이 지금으로부터 겨 100여 년 전, 그나마 신라 출신이라는 사실 말고는 고향이며 죽은 곳도 알 길 없지만, 719년 열다섯살의 나이에 중국에 들어가 5년 동안 수학한 다음 결행한 4년간의 인도 여행을 어렴풋이 전해준다.
겨울날 투가라국에 있을 때 눈을 만나 그 느낌을 읊은 위의 시에서 우리는 무시무시한 고행의 한 단면을 읽을 뿐이다. 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용문龍門엔 폭포조차 끊기고 말았으며 / 정구井口엔 뱀이 서린 듯 얼음이 얼었다 / 불을 들고 땅 끝에 올라 노래 부르리 / 어떻게 저 파밀고원 넘어 가리오’
뱀이 서린 듯 얼어붙은 얼음길을 오르는 그의 가슴 속에는 불같은 열정이 가득 차 있다는 뜻일까? 그럼에도 파밀고원은 멀기만 하고 생사를 오가는 여행길은 불안하기 그지없었으리라. 그런데도 두려운 마음을 때로 기도하며 때로 노래하며 풀어내고, 사막과 얼음 구덩이로 발걸음을 옮긴 그에게 도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던 것일까? 같은 길을 따라 거슬러 왔던 전도자들을 생각하며 걸었던 것일까? 이런 여러 의문에 대한 답으로 그의 진취적인 정신밖에 댈게 없다.
중국 정통 밀교의 법맥을 이은 혜초
그러나 순례자의 마음인들 범 인 의 그것에 조금이나 가까운 것이 있다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수구초심首丘初心의 하나일까? 혜초는 다른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내 고향은 하늘 끝 북쪽 / 땅 한 모서리 서쪽은 남의 나라 / 남천축 해 떠도 기러기 한마리 없어 / 누가 내 집으로 돌아가리’
기러기 발목에 편지를 묶어 날렸다는 고사가 있거니와, 그런 기러기조차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막막한 심정이 잘도 그려져 있다. 혜초가 언제 어떤 연유로 중국을 가게 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기록으로 그가 중국 밀교의 초조 금강지(金剛智, 671~741)의 문하에 들어간 것 이 719년, 곧 그의 나 이 열다섯살 때 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강지는 인도 출신의 승려이다. 스승의 문하에서 5년을 수학한 혜초는 감연히 인도 여행을 떠난다. 갈 때는 해로로, 돌아올 때는 육로를 이용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그가 남긴『왕오천축국전』은 오늘날 우리에게 8세기경의 인도 풍경을 소략하게나마 전해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물론 그의 존재는 1908년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P. Pelliot의 돈황 석굴 발견과, 1909년 중국인 나진옥(羅振玉, 1866~1940)의 손을 거쳐, 1915년 일본인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 1856~1945)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천년 세월의 긴 잠을 잔 책 이 바로『왕오천축국전』이다.
그대 서번이 멀다 한숨 짓는가 / 나는 탄식하네, 동쪽 길 아득하여 / 길은 거칠고 설 령雪嶺 높은데 / 험한 골짝 물가에 도적떼 소리 치네 / 새는 날아가다 벼랑 보고 놀라고 / 사람도 가다 길을 잃는 곳 / 한 생애 눈물 닦을 일 없더니 / 오늘은 천 갈래 쏟아지네’
「서번가는 사신을 만나」라는 제목의 시이다. 서번은 서쪽 오랑캐 나라인 토번이다. 지금은 서장이라 부르는데, 이때는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두 나라의 문물을 교류하며 번성하였다. 설령雪嶺은 눈 쌓인 봉우리이지만, 여기서는 히말라야산맥을 이른다. 한참 인도 여행 이 무르익을 무렵, 혜초는 우연히 서번으로 가는 중국 사신을 만나게 된다. 설령은 도적떼 출몰하는 계곡이었기에 대국의 사신답지 않게 코를 빼고 가고 있다. 처량한 모습이다. 그러나 하늘 나는 새마저 놀라는 길을 사람이 무슨 재주로 편히 지날 수 있겠는가. 승려인 혜초마저 펑펑 눈물을 쏟는다. 그런 고행의 대가代價였을까, 혜초는 귀국하여 스승의 총애 아래 수행 정진하여, 중국 밀교의 정통으로 일컬어지는 금강지 불공不空 법맥을 잇는 제자로 우뚝 섰다.
글. 고운기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동서문명의 교차로에는 천년의 세월동안 조성된 천불동이
막고굴(莫高窟, Mogao Caves)
막고굴(莫高窟)은 중국 간쑤성 둔황시의 동남쪽 25km에 위치한 천불동으로 명사산 동쪽 벼랑에 남북으로 1,600m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막고굴과 서천불동, 안서유림굴, 수협구굴 등 600 여 개의 동굴 속에 2400 여 개의 불상과 벽화가 그려져 있다.
동서문물의 교류 루트인 실크로드의 중심이었던 돈황에는 구법승, 대상, 병사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고 교역에서 얻는 경제적인 융성 뿐 아니라 서역문명과 조화된 돈황예술을 꽃피었고 그 대표격이 세계적인 불교유적지로 유명한 막고굴(莫高窟)이다. 기원 전인 전한시대에서 당나라 후기까지 긴 세월을 아우르는 불교유물로 총 면적은 45,000 ㎢이다. 1961년에 중국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에 지정되었고, 198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막고굴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승려 낙준(樂樽)이 이 곳에 석굴을 파고 불상을 조각한 동진(東晋)때인 366년부터라고 한다. 약 천 여개에 달하는 굴이 있어 천불동(千佛洞)이라 불리우는 막고굴은 천년이 세월이 지나 14세기 원대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승려와 조각가, 화가, 역경사, 석공, 도공, 목공, 시주 들의 손에 의해 끊임없이 조성된다.
그러나 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자연 붕괴와 무지한 인간들의 파괴로 인해서 현재는 492개의 동굴만이 남아 있다. 492개의 동굴 중 수나라 때의 것이 97개, 당나라 때의 것이 225개이고 나머지는 서하와 원, 수나라 이전시대의 것 들이다. 동굴 안에 남은 유물은 소상(塑像)과 벽화(壁畵)가 주를 이룬다.
막고굴 초기에는 민간 신화를 다룬 벽화가 대부분이었지만 불교가 전래된 후한시대부터는 불교미술이 주를 이루게 된다. 굴 속에 서 있는 소상들은 시대별 특색이 표정과 자세에 나타나고 벽에 그려진 벽화와 천정화는 정밀하고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그려져 화려하고도 찬란한 불교미술의 정수를 보여 준다. 수 많은 굴들이 자리하고 있지만 불상의 형태와 벽화의 내용은 굴마다 제각각 달라 그 가치가 더 높다.
종교와 예술이 이루어 낸 결정체, 막고굴은 몽골의 침입과 이슬람세력의 확대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어 돈황과 함께 역사 속의 잊혀진 존재가 된다. 그러나 불교미술의 보고 막고굴은 다시 주목을 받게 된다. 1900년 초 둔황석굴을 지키던 태청궁 도사 왕원록에 의해 5만점의 고문서가 고스란히 남아있던 제 17굴, 장경동(藏經洞)이 발견되면서부터다. 변경에 위치한 탓에 이슬람 등 이교도의 잦은 침입으로부터 이 곳의 고문서를 지키기 위해 서하(西夏)의 지배를 받을 때 중요한 것들을 굴속에 넣고 폐쇄하였던 것이 몇 백 년의 세월이 지나 뒤 늦게 발견된 것이다. 이것으로 막고굴의 전모가 드러나고 전세계에 알려진 계기가 된다.
이후부터 막고굴은 서양 강대국들의 약탈의 대상이 된다. 1907년에는 오렐 스타인에 의해 약 7천점의 유물이 유출되어 대영박물관에, 1908년에는 폴 펠리오에 의해 약 7,000점의 유물이 프랑스로 유출된다. 우리의 신라스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이 때 함께 나간 것이다.
신라의 고승으로 704년에 태어나 787년에 중국의 오대산(五臺山)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입적한 혜초(慧超)생애는 그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새롭게 태어난다. 혜초의 고국이 신라라는 것은 여행기가 발견된 지 7년 후인 1915년에 처음으로 일본 학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에 의해 밝혀진다. 그 전에는 단지 그가 밀교승으로 알려졌을 뿐 국적은 미지로 남아있었다.
불교문화의 보고이며 돈황학으로까지 확립된 막고굴의 빛나는 유적과 유물들은 기력이 쇠한 청나라 말기 때 약탈로 인해 수만 점이 해외로 유출되어 직므은 10여 개국의 박물관과 도서관에 분산 보관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도 일본인 오타니가 일제 때 반입한 중앙아시아 문화유물 약 60여 점 중 일부 돈황의 유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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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ysriver21/5490353
145년만의 귀환
아름다운 바다와 숲으로 유명한 강화. 다채로운 자연을 볼 수 있는 섬 곳곳에는 여전히 신미양요와 병인양요의 상처가 남아 있다. 하지만 강제로 조선을 개항하려했던 서구 열강의 흔적보다 더 아픈 역사는 눈에 보이지않는 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약탈당했지만 아직도 되찾아오지 못한 우리 문화재 이야기다.
- 삼랑성에서 울린 승전보
1866년 10월 16일,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군함 7척이 강화 앞바다에 출현한다.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한층 강화하며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한 해였다. 이 사건은 당시 제국주의의 선봉에 서 있던 프랑스에게 강제 개항의 빌미를 주었다.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보이는 갑곶돈은 이제 여유롭게 바다를 내려다보는 곳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프랑스군이 상륙했던 곳이자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지였다. 처음 강화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이곳을 점령하지만 곧 자신들이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선의 반격은 매서웠다. 삼랑성 안에 있는 전등사에 진을 친 조선은 양헌수(1816~1888) 장군이 이끄는 강계 출신의 포수 500여명으로 프랑스군을 크게 이긴다.
조선의 승전보가 울린 삼랑성의 남문에서 성곽을 따라 걷는다. 이끼와 덩굴에 뒤덮인 성벽이 가파른 산길을 끼고 계속해서 이어져 있다. 낯설기만 한 푸른 눈의 군대에 맞서 조선을 지켜낸 성벽들이 지금도 단단하게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 속에서
삼랑성에서 조선군에게 호되게 당한 프랑스군은 강화를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프랑스군을 무사히 쫓아낸 것은 다행이었으나, 어쩌면 이때 조선은 스스로 힘을 과신하면서 외세에 대해 대비할 기회를 놓쳤는지도 모른다. 굳게 걸어 잠근 빗장을 풀고 단계적으로 세계와 교류를 시작했더라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 때, 미군의 공격이 시작된 초지진으로 걸음을 옮긴다. 초지진은 둘레가 500미터 정도로 규모는 작지만,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입구 부근에서는 성벽에 남아있는 포탄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여전히 남아 있는 전투의 흔적은 오랜 시간을 건너 싸움의 현장을 생생히 떠오르게 한다.
전투는 초지진에서 멀지 않은 광성보, 덕진진으로 계속해서 번져간다. 신미양요 당시 가장 치열한 싸움이 있었던 곳은 광성보인데, 1871년 미국이 통상을 요구하면서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였을 때,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육박전이 벌어졌다. 당시 어재연 장군과 병사들은 열세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싸워 한 사람도 물러 서지 않고 장렬히 순국했다.
광성보 안에 있는 신미순의총은 당시에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이다. 당시 미 해병대의 기록에는 “우리가 전투에는 이겼으나, 아무도 이 전투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이 전투를 기억하고자 하지 않았다. 1871년의 조선 원정은 미국 해군 역사상 최초의 실패전이다. 우리는 물리전에서는 이겼다. 그러나 정신전에서는 졌다”라는 대목이 남아 있다. 적군마저 숙연하게 한 그들의 결의 앞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 도난당한 국가의 보물
광성보에서 내려다보는 강화의 바다는 이제 평온하고 아름답지만 전쟁의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다. 조선을 침략한 이들이 보물들을 훔쳐 달아났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군이 자국으로 돌아가기 전 책과 문서를 마구잡이로 약탈해 간 외규장각은 비운의 장소다. 지금은 크게 볼 것 없어 보이지만, 당시만 해도 이곳은 왕립 도서관으로 1,000여 종의 책을 보관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가져간 책 중에는 왕실의 각종 행사를 빠짐없이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의궤가 있었다. 이는 조선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지만, 우리는 민족의 보물이 프랑스에 도난당했다는 사실조차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기록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보니 모두 불타버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문화재 반환, 그 험난한 길
외세의 침략이 시작된 이때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재들이 해외로 반출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고려나전경함’, ‘경천사 십층석탑’ 등도 수탈당했다가 되찾은 문화재들이다. 하지만 아직도 수많은 문화재가 해외에 있다고 하니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외규장각 의궤’ 역시 힘겹게 한국에 돌아온 문화재 중 하나다. 오랫동안 그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의궤가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인 것은 1975년.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었던 고(故)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 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별관 지하의 먼지 속에서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낸 것이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린 감
동적인 조우였다. 하지만 부당한 방법으로 한국을 떠나게 된 문화재인데도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기만 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지만 외규장각 의궤를 반환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계속되었고, 박병선 박사가 그간의 연구 성과를 책으로 출판하자 시민단체와 국민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 145년 만의 귀환
2011년, 이 땅을 떠난 지 145년 만에 마침내 외규장각 의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완전한 귀환은 아니었다. 양국이 소유권은 프랑스가 갖되 5년간 빌려주면서 기간을 연장한다는 것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우리 것이 아니니 소장인도 찍을 수도 없고, 지방 전시도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프랑스 측에서 기간 연장을 거부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프랑스로 보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소식에 박병선 박사는
“내가 책이라면 울면서 한국으로 갈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 번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를 되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더 가슴이 아픈 것은 외규장각 의궤와 같은 불법적인 약탈뿐아니라 개인적인 이익에 눈 먼 사람들에 의해 이 땅을 떠나는 문화재도 많다는 점이다. 문화재는 우리 민족의 삶과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보물이다. 당장 모든 문화재를 회수할 수는 없겠지만, 어디에 있건 우리 문화재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내야 하는 당사자는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함께 가보면 좋을 곳들
● 길에서 만난 이야기
원문보기
http://blog.daum.net/ysriver21/5490353
[문화재방송 캠페인]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