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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중계]경상도 지역 토속춤인 덧배기춤이 주된 춤사위가 특징인 '고성오광대', 덧배기춤은 발 디딤새가 강하고 움직임의 폭이 큰 춤이다

문화재방송 2022. 2. 18. 00:04

기획. 취재. 촬영. 편집:헤리티지

고성오광대는 경상남도 고성군에 전승되는 탈놀이로, 주로 정월 대보름과 농한기에 연행되었다. 고성오광대에는 양반과 파계승에 대한 풍자, 그리고 처와 첩의 문제 등 당시 서민들의 삶이 담겨있다. 고성오광대는 총 다섯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과장은 양반의 자손이지만 조상들의 죄업으로 문둥이가 된 인물이 신명을 통해 병을 극복하는 내용을 춤으로 표현한 문둥북춤이다. 다음으로 양반의 횡포와 어리석은 면을 비판·조롱하는 오광대 과장, 비비 과장, 승무 과장을 거쳐, 처첩갈등을 담은 제밀주 과장으로 끝난다. 고성오광대에는 경상도 지역 토속춤인 덧배기춤이 주된 춤사위로 나타난다. 덧배기춤은 발 디딤새가 강하고 움직임의 폭이 큰 춤이다. 반주음악에는 꽹과리, 징, 장구, 북 등의 타악기가 사용된다. 고성오광대는 귀신을 쫓는 의식춤을 추는 대신 오락성이 강한 놀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고성오광대의 연희 내용에는 춤 대목이 많으며 배역에 따른 인물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고성오광대의 문둥북춤과 제밀주 과장에는 삶에 대한 통찰이 나타나며, 양반 과장과 비비 과장에는 냉철한 민중 의식이 나타난다. 고성오광대는 지역 특유의 춤인 덧배기가 연희에 잘 표출되어 고성만의 색깔을 잘 간직하고 있다.


글, 사진. 국립무형유산원 조사연구기록과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국보

북한산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는 신라 제24대 국왕인 진흥왕(재위 540-576)이 북한산에 세운 비로서, 국보이다. 이 비의 성격은 첫머리에 ‘순수()’라는 표현이 있어,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순수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비봉()에 있었으나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선사, 고대관 신라실에서 전시하고 있다.

비봉에 있던 북한산진흥대왕순수. 신라 제24대 국왕인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순수한 것을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조선 후기에 비문 내용 발견, 진흥왕순수비 명칭 얻어

비석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비 몸돌의 높이는 약 155.1cm, 폭은 약 71.5cm, 두께는 약 16.6cm이다. 오른쪽 아래로 약 25.1cm 되는 지점에서 왼쪽 아래로 약 45.4cm 되는 지점에 걸쳐 절단되어 있으나, 접합하였다. 비의 윗부분에는 비의 덮개돌이 들어갈 수 있도록 너비 약 69cm, 높이 약 6.7cm 정도를 돌출시키고 있다. 이 비의 덮개돌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받침돌은 지금도 비봉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로 보아 이 비는 덮개돌, 몸돌, 받침돌의 세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문은 12행으로 각 행 21자 혹은 22자이나, 읽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북한산 진흥대왕 순수비, 신라 진흥왕16년(555년경), 높이155.1cm, 폭69.0cm, 두께16.6cm, 국보, 국립중앙박물관

이 비는 이끼가 끼어 있어 정확한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무학대사왕심비() 또는 몰자비() 등으로 불리어 왔다. 그러던 중 조선 후기 서유구가 10여 자를 판독하여 진흥왕순수비라 이름 지었고, 조선 순조 16년(1816)에 김정희가 친구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 승가사에 갔다가 이 비를 발견하여 ‘진()’자를 확인하여 신라진흥대왕순수비로 확정하였다. 그는 이듬해 조인영과 더불어 새로이 68자를 확인하였다. 김정희가 조사한 내력은 이 비의 옆면에 실려 있다. 비의 옆면에는 오른편으로부터 ‘   (이것은 신라진흥대왕 순수비이다. 병자년(1816년)7월 김정희, 김경연이 와서 비문을 읽었다)'라고새겨져 있고, 그 옆에 ‘  (기미년(1859년) 8월 20일 용인사람 이제현)’이 새겨져 있으며, 다시 예서로 ‘   (정축년(1817년) 6월 8일 김정희, 조인영이 함께남아있는 글자 68자를 심정하였다)’라고 새겨져 있다. 이 비는 김정희가 탁본하여 중국의 류연정에게 전달되었고 이것이 그의 [해동금석원]에 실리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이마니시 류(西) 등이 재조사하여 [대정오년도고적조사보고]에 실렸다.

비문에는 정확한 연대를 알려주는 간지나 연호가 없어 여러학설이 있다. 대체적으로 진흥왕 16년(555)이나 진흥왕 29년(568) 무렵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확정되지는 않았다. 전자는 진흥왕이 16년(555)에 북한산을 순수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이 때에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고 후자는 북한산비의 내용이 568년에 세워진 마운령비, 황초령비와 비슷한 점과 비문 중의 ‘남천군주()’를 근거로 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진흥왕 29년(568) 10월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설치했다”는 내용과 연결하여 이 비는 568년 10월 이후에 세워졌다고 한다.

진흥왕 대의 지방 및 군사제도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

이 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제목 2)순수배경과 경과 3)왕을 수행한 사람 등을 기록하였다. 보이지 않는 글자가 많아 자세한 내용을 알기는 어렵지만, 내용 중에서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중요한 것이 있다.

이 비의 첫머리에 ‘진흥태왕()’이 나타나는데, 이전의 왕인 지증왕 법흥왕은 왕의 명칭으로 마립간, 매금왕, 태왕 등으로 일컬었으나, 진흥왕은 명실공히 자신을 태왕으로 칭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에서 사용한 태왕을 본떠서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신라의 달라진 위상을 알 수 있는 왕호이다. 다음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이 비문에 보이고 있다. 이 비에는 ‘사돌부 출신인 무력지가 잡간’이라고 하는데, 잡간은 신라 17관등 중에서 3등급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다. 김무력은 한강유역으로 확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장군으로 550년 무렵에는 5등급인 아간지였으나 561년 이후에는 잡간으로 승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이 석굴에 거주하는 ‘도인’이다. 도인은 볼교의 도를 닦아 깨달은 사람인 승려로서, 새로이 편입된 지역의 백성들을 교화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진흥왕은 단지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는 것에만 주력한 것이 아니라 종복지의 백성들을 교화하고자 하였다. 이 비에 보이는 ‘남천군주()’는 진흥왕대의 지방 및 군사제도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북한산 진흥대왕 순수비 탁본(왼쪽)과 김정희가 순수비 옆면에 새긴 글자(오른쪽)

이와 같이 진흥왕은 변경지역을 순수하고 순수비를 여럿 세웠다. 이는 진흥왕이 자신이 이룬 정복 활동의 성과인 영역을 과시하고 정복민을 통치하는 이념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진흥왕 순수비는 6세기 중엽 신라 진흥왕대 신라의 발전상과 이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관련링크 네이버뮤지엄에서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전시 보러가기

(백범과 어머니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

백범이 흔들릴 때… 할머니는 오십 먹은 그의 종아리를 때렸다

김구 선생 아들 김신 前 공참총장이 말하는 아버지와 가족
가족보다 동지가 먼저
형의 폐병 약 사달라 하자 “동지들도 폐병으로 고생, 아들만 살릴 수 없다”

13살에 처음 본 아버지
만났지만 알아보지 못해… 27살 돼서야 처음 겸상 꿈인가 생시인가 했지


기개 넘치던 할머니
생일에 비단옷·음식 받자 “윤봉길 의사 피 생각하라” 다 집어던지며 화내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에 있는 김구 선생 흉상 옆에 그의 아들 김신 장군이 섰다. 김신은 “나는 늘 죽음과 가까이 있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으로 버텼다”고 말했다. /김지호 객원기자
밸런타인데이와 대보름이 겹쳤던 지난 2월 14일. 이날이 안중근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날이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SNS를 통해 혹은 직접 경기도 부천 안중근 공원이나 그의 가묘가 있는 서울 효창공원 등을 찾아 그 의미를 기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한 때에 이 사람을 떠올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고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죽을 때까지 되찾으려 했던 백범 김구 선생. 효창공원 옆에 마련된 백범 김구기념관은 그의 숨결을 오롯이 간직한 듯했다.

"아버님이 1946년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 등 유해를 되찾아 오시지 않았어요? 안중근 의사 유해도 꼭 모시겠다며 효창공원에 가묘도 해 놓으셨는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기념관을 덮는 듯했다. 백범 김구의 아들 김신(92) 전 공군참모총장이었다. 왼쪽 귀가 잘 안 들리는 것 빼놓고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매일 신문 7개를 빠짐없이 읽는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회고록 '조국의 하늘을 날다'(돌베개)를 펴냈다. 1922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서부터 1994년 '백범일지' 중국판 출판기념회를 연 72년간의 기록을 담은 책이다. 조국과 아버지에 대한 사부곡(思父曲) 그 자체였다.

◇가족보다 조국이 먼저였던 아버지

"중국서 독립운동하던 형(김인)이 스물대여섯에 폐병에 걸렸다고. 형수(안미생·안중근 의사 동생의 딸)가 아버지한테 페니실린 좀 구해달라고 애원했지. 그때 아버지가 그랬어. 내 동지들도 폐병으로 수십명이 죽는데 내 아들만 살리자고 죽어가는 동지들을 버려둘 수 있느냐고."

결국 김인은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숨을 거뒀다. 광복 5개월 전이었다. "형수가 많이 힘들어했지. 섭섭했을 게야. 하지만 아버지 뜻을 왜 몰랐겠어. 장남의 죽음에 가장 슬픈 건 당신이었을 텐데 말이지. 그렇게 공(公)을 위해 사(私)는 모르는 분이야."

김신도 아버지에게 서운함을 느껴봤다고 했다. 어린 시절 꿈인 공군이 되고 싶어 1944년 쿤밍에 있는 중국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형 사망 뒤 졸지에 외아들이 되자 하루빨리 아버지를 곁에서 모시고자 했다. "아버지한테 가겠다고 편지를 썼는데 아버지 생각은 달랐어. '남자가 돼서 배우려면 끝까지 해야지 왜 멈추느냐. 나라가 수립돼도 너 같은 인재를 양성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시면서 말이지. 그렇게 단호할 수 없는 거야. 처음엔 굉장히 마음으로 섭섭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어."

◇나이 오십에 종아리 맞던 김구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요?

"열세 살인가 처음 봤지. 알아보지 못했어. 아버진 신변이 항상 위험해 못 보고 살았으니 익숙지 못하잖아. 좀 뚱뚱하고 시커멓고 곰보가 있고, 예쁘장스럽지 않은 얼굴이라…. 아버지랑 한집에서 오래 살았던 건 1947년 내가 공군 비행훈련 다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 경교장에 있을 때 2년 동안이었어. 내 나이 스물일곱에 평생 처음으로 겸상을 했는데 꿈인가 생시인가 그랬지."

―할머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아버님이 중국 창사에서 총 맞고는(1938년 후난성 창사 남목청에서 지청천 등과 회합을 갖고 민족주의 진영 3당의 통합 문제로 논의하던 중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은 일) 종잇장 한 장 차이로 살았어. 그때 할머님이 아버님을 향해 '무슨 놈이 어찌 동지한테 총을 맞아. 일본 놈한테 맞아야지'라고 꾸지람했어. 또 할머니 생신 때 주변에서 비단옷에 음식을 해왔는데, '우리가 지금 윤봉길 의사 피를 빨아먹고 살고 있는데 이게 무슨 짓이야' 하면서 다 집어던졌다고. 아버지가 나이 오십이 다 돼서 종아리 맞고 그랬어."

―종아리를요?

"아버님께서 '남들은 부모님 모시고 생일도 하는데, 어머님은 고생만 하신다'며 눈물을 보였어. 아버님 마음이 흔들리는 듯싶으니까 '종아리 걷어' 하신 거야. 그걸 때마침 찾아온 안중근 의사 어머님이 보시곤 '나이가 오십인데도 맞으니 젊었을 때는 얼마나 맞았습니까' 했더니 아버지가 '글쎄요. 기록을 안 해놔서'라며 허허 웃으셨다는 거지."

―할머님 기개가 대단했군요.

"그뿐인가. 아들을 위해선 걸식도 노숙도 마다치 않았어. 아버님이 1896년 중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하던 일본군 육군 중위를 죽이지 않았어요? 조모님은 아들 가져다준다며 동냥을 다니다 남의 집 바느질과 밥 짓는 일 해주면서 감옥에 매일 한 보따리씩 사식을 넣어 아버지를 돌봤어. 아버지 사형 날짜가 다가왔을 때인데, 한밤중에 서울에서 인천 감옥으로 전화가 왔어. 고종 황제가 중지를 시킨 거지. 조모님의 마음이 하늘에 닿았달까…."

◇평양행을 실망스러워했던 아버지

김신 장군에게 아버지와 함께했던 가장 기억나는 순간이 언제인지를 물었다. 그는 "곁에서 숨소리를 듣던 매 순간순간"이라고 답했다. 그는 아버지 김구를 모시고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연석회의에 참석했다. "아버지는 '(죽거나 붙잡혀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며 남으라 하셨지만 한순간이라도 같이 있고 싶었거든."

―김일성을 만나보니 어떻던가요.

"키가 훌쩍하니 뚱뚱한 청년 한 사람이 와서 우리한테 대선배님 오셨다며 꾸벅 인사를 해. 우리 어르신(김구 선생)이 당시 73세이고 김일성이 37세였지. 군중 대회장 앞을 지나갈 때인데, 누가 한마디 구호를 하는데 거리 전체가 '김구 이승만 타도하자, 타도하자, 타도하자!' 하며 난리가 난 거야. 그걸 본 김일성 얼굴이 홍당무가 됐어."

―당시 '남한만의 단독정부는 안 된다'는 부분만 알려졌다던데.

"안타깝지. 아버님은 그 뒤 '북쪽에서도 단독정부를 세운다면 반대한다'고 했어. 회의장은 바늘이 떨어져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싸늘한 거야. '이 정도로 북이 사전 훈련이 됐으면 뭘 해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신 게지. 대단히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끼리 노력해서 합치는 건 안 되겠다 하고 굉장한 실망을 하셨다고."

그의 회고록 서문에는 '백범 김구의 가족이라는 사실은 자랑의 원천이었지만 늘 나와 가족의 어깨 위에 드리워진 버거운 숙명이기도 했다'라고 적혀 있다. 글자 하나하나 그의 고단한 삶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소원은 첫째도 통일, 둘째도 통일이라고 했다.
최보윤 | 기자

출처:조선일보

기사원문보기: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2/28/2014022802716.html?csmain

<안중근 의사 유서>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고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나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역사]는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이었다.

재판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구구하게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싫었다.

그래서 의사는 공소를 포기한 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그에 따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31세로
뤼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효창공원 삼의사(이봉창, 백정기, 윤봉길 의사) 묘역 옆에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습니다.

백범 김구선생은 안 의사의 유해를 찾게되면 여기에 모시라고 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해를 찾지 못해 가묘로 남아 있습니다.

 

2월 19일은 우수입니다.

24절기 중 두 번째 절기입니다.

 

봄 절기 중 하나인 우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합시다.

 

우수 뜻

 

우수의 뜻은 일단 한자 그대로 표현한다면

'비 우(雨), 물 수(水)'

빗물이라는 뜻으로 이는 겨울철 추위가 풀려가고

눈, 얼음, 서리가 녹아 빗물이 되고 한파와 냉기가 점차 사라지며

봄이 오는 것을 알리는 절기를 말합니다. 

 

보통 입춘을 봄의 시작이라고 하지만 보통 우수는 지나야지

한파가 끝나면 겨울의 마무리가 찾아옵니다.

옛 선조들은 우수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농사일을 준비하기 위한

농사계획과 씨앗을 봐두는 등의 일상을 보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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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풍습

 

우수의 풍습으로는 논두렁과 밭두렁을 태우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농약이 많지 않던 시절, 병충해를 피하기 위한

병충해 예방수단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수 속담

- 우수 경칩에 대동강 풀린다

: 우수와 경칩이 지나면 추운 날씨에 꽁꽁 얼었던 대동강도 녹는다는 의미

 

- 우수뒤의 얼음같이

: 우수를 기점으로 남아있던 얼음들이 녹는다는 의미

 

둘다 날이 따뜻해짐을 의미하는 속담 같습니다.

 

우수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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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즈음에는 정월대보름 근처라 오곡밥과 각종 나물

우수의 대표적인 절기음식이라고 합니다.

 

오곡으로 지은 밥을 지어먹고, 아침에는 부럼을 깨물어

딱딱한 껍질을 마당에 버려 일년 내내 부스럼이 생기지 않게 한다고 합니다.

 

그 밖에 우수가 있는 2월에 먹기 좋은 음식으로는

환절기 계절에 비타민이 많은 한라봉, 딸기, 바지락, 시금치 등이 있다고 합니다.

unsplash, pixabay 출처

우수는 봄에 가까운 절기이지만 아직 찬기운이 기승을 부리는 때입니다.

코로나19로 아직 몸 관리를 잘해야 하고 또한 '해빙기'로 얼었던 물이 녹으면서

각종 안전사고에 노출될 위험이 있어 유념하셔야합니다.

 

환절기로 각종 비타민을 잘 챙겨드셔서 면역력을 향상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 같습니다.

 

[문화재방송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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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