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가을에 촬영, 오랜 세월이 흘러 화질이 선명하지 못 합니다 / 혹 영상이 끊기면 플레이를 다시 클릭해 주시지요>
기획. 취재. 촬영. 편집:헤리티지
금강산(金剛山)
한반도 북부 태백산맥에 북쪽에 솟은 높이 1,638m의 세계적인 명산. 동서폭 40㎞, 남북길이 약 60㎞, 넓이는 약 530㎢에 이른다. 외금강·내금강·해금강 지역으로 나뉜다. 예부터 삼신산의 하나로 꼽혔다. 신라시대 화랑도들이 심신을 수련했던 곳이며 불교도들의 순례지이기도 하였다. 일만이천봉우리들이 천태만상의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졌고, 깊은 계곡을 따라 흐르는 맑은 물은 특이한 산악미와 계곡미를 이룬다.
계절의 아름다움과 정취가 각각 달라 봄에는 온갖 꽃이 만발하여 화려하고 산수가 맑기 때문에 금강산, 여름에는 온 산에 녹음이 물들어 봉래산, 가을에는 단풍이 들어 풍악산, 겨울에는 기암괴석의 산체가 뼈처럼 드러나므로 개골산이라 한다. 절경을 이루는 일만이천봉우리·기암·폭포·호수·담(潭)·섬·식물·전망대 등 수많은 대상들이 천연기념물로 정해져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천연기념물은 비로봉·천선대·총석정·명경대·해금강문·구룡폭포·솔섬·금강국수나무 등이다.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아리랑, 우리 민족에게는 쌀과 같은 아리랑
아리랑 공연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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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은 한국은 물론 해외 한민족 사회에서 널리 애창되는 민요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 아리랑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라는 후렴과 사설로 이루어져 있는 형태의 노래로서, 특정 지역과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각 지역에서 구전으로 전승되어 온 것이다. 아리랑의 기원과 발생지를 명확하게 추적하기는 쉽지 않지만, 아리랑은 태백산맥 주변 지역에서 불리기 시작해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강원도 정선, 전라남도 진도, 경상남도 밀양 등지에서는 각 지역적 특징을 반영한 특유의 아리랑으로 남아 오늘에 전하고 있다.
아리랑에 대한 역사 기록으로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에 전국 각지에서 징발된 노동자들에 의해 불렸다는 내용이 전한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소식을 듣자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한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1900)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종은 밤만 되면 전등을 켜놓고 배우들을 불러 새로운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이번 곡은 ‘아리랑타령’이라고 했다. 이 타령이란 말은 곡조를 길게 빼는 것을 세속에서 일컫는 말이다. 민영주는 배우들을 거느리고 오직 아리랑타령만 전담하고 있으면서 그 우열을 논하여....금·은으로 상을 주었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고종 임금도 ‘아리랑’을 즐겨들었으며, 당시에도 우열을 논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아리랑이 불렸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영문가사와 서양음계로 채보하여 수록한 악보. 1896년 잡지 <Korea Repository>에 [Korea Vocal music]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제공: 정선아리랑연구소)
한편, 1896년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omer B Hulbert:1863~1949)는 <Korea Repository>라는 잡지에 [Korea Vocal music]이란 제목으로 아리랑을 영문 가사와 서양음계로 채보하여 수록하였다. 헐버트 선교사는 아리랑이 1883년부터 대중적인 애호를 받게 되었으며, 제각기 다른 내용이지만 후렴은 변하지 않고 쓰인다는 해설과 함께 ‘조선인에게 아리랑은 쌀이다’라고 하였다. 또,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이 아리랑을 들을 수 있고, 격정적으로 유행을 타지는 않지만 오래도록 불릴 노래라는 말도 덧붙였다
식민지 조선의 영화 <아리랑>
[아리랑] 포스터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리랑은 1926년 나운규에 의해 제작된 영화 <아리랑>의 주제곡이다. 영화 <아리랑>은 1926년 4월과 6월 사이에 서울 안암동에서 촬영이 시작되었으며, 그 해 10월 1일에 단성사에서 첫 상영이 되었다. 영화가 만들어지고 상영되던 1926년은 여러 사건이 일어난 해이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이 1926년 4월 25일에 서거하였다. 나운규를 비롯한 영화 스텝들이 서울 안암동에서 영화 아리랑을 촬영하던 시점과 묘하게 겹쳤다. 아마도 나운규와 그의 스텝들은 영화 촬영 중에, 또는 그 직전에 순종황제의 서거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순종 황제의 인산일(因山日)인 6월 10일에는 대규모 만세시위가 벌어졌는데(6·10만세운동), 이를 주도한 이들 중에는 영화 <아리랑>의 주인공들과 같이 농촌에서 상경한 유학생들도 많았다. 영화 <아리랑>이 첫 상영을 하던 날에는 경복궁 흥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의 건물을 완공하고 나서 이를 축하하는 낙성식이 있었던 날이기도 했다. 이렇게, 영화 <아리랑>은 1926년의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극적인 상황에서 제작, 상영된 것이다.
아리랑 상영예고 (동아일보 1926.9.19)
한편, 나운규는 <아리랑>을 제작할 때 ‘할리우드식의 빠른 전개와 유머를 도입하여 관객이 지루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려 했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상업적 요소와 더불어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의 자화상이 함께 그려졌기에 영화 <아리랑>은 상업적으로도 크게 흥행을 하게 된 것이다. 영화는 한반도 전역에서 순회상영을 통해 큰 인기를 끌었으며, 간도와 일본에 이르기까지 조선인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상영되었다. 이는 결국 영화 주제가인 아리랑 노래가 한반도에서 일본, 만주를 넘어 중앙아시아까지 꽃씨처럼 퍼져나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영화 <아리랑>은 무성영화였기 때문에 변사(辯士)에 의해서 대사가 전달되었으며, 배경음악은 단성사 악단에 의해서 실황으로 연주되었다. 이 때 극장에서는 바이올린으로 아리랑을 연주하였다. 한민족의 감성이 녹아있는 음악으로 상징되는 아리랑이 국악기가 아닌 바이올린으로 연주된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흥미롭다. 이 시기에 재정리된 아리랑이 이미 한국을 넘어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선율로 재탄생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26년 영화 <아리랑>의 성공 이후에 노래 아리랑은 한국인들 정체성의 상징이 되었다. 식민지 체제 하에서의 고달픈 삶 속에서도, 일본, 만주 등 타향살이의 서러움 속에서도, 심지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한 고려인들의 아픔까지도 달래주며 그들과 함께한 것은 바로 아리랑이었다. 그래서 머나먼 땅으로 이주한 한국인 1세대들은 한국어는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어도 어쩌다 들리는 아리랑 선율에는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한민족 통합의 아이콘, 인류무형유산으로서의 아리랑
이와 함께 아리랑은 한국인들을 다시 하나로 만드는 노래이기도 하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당시 남북한이 공동입장을 할 때 사용되었던 노래가 아리랑이었고, 2002년 월드컵 당시에도 빠르고 강한 리듬의 아리랑은 전 국민을 단합시키는 역할을 했다.
2002년 월드컵때에는 아리랑이 응원가로 쓰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아리랑이 2012년에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민족의 문화유산을 넘어서 인류의 무형유산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질까? 각 민족과 국가, 사회공동체가 전승하고 있는 노래가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는 경우는 많다. 하지만 아리랑은 한민족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세계인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선율과 감성을 가졌다는 장점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심사장면 |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아리랑 공연중인 장면 |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민간의 노래였지만, 아리랑은 한국의 대표 음악, 나아가 이제는 국민 대통합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하지만 아리랑은 원래 그러하였듯이 이 땅의 소박한 서민들의 노래이다. 그러므로 아리랑이 ‘누구의 것이다’라는 것보다 ‘아리랑’ 그 자체가 우리가 이 시대에 맞게 향유하고 즐길 줄 아는 그런 문화라는 인식, 그러한 가치의 발견이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한국인이 있기에 아리랑이 있기도 하지만, 아리랑이 있기에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존재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은 아닐까?
아리랑을 배우고 있는 학생들
더 살펴보기 - 영어로 보는 아리랑
아리랑에 대한 해외의 관심과 함께 아리랑을 세계인과 공유하기 위한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2010년 (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에서 발간한 「아리랑 악보집」 중 영문 번역을 발췌하여 소개한다.
아리랑 (Arirang)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저산에 지는해는 지고싶어지나
날 버리고 가시는 님은 가고 싶어 가나
Arirang arirang arariyo crossing over Arirang hill
He who left me behind will get sore feet within a mile
Do you think the sun over that mountain really wants to set at dusk?
Do you think the one who abandoned me really wanted to leave?
구조아리랑 (Old Arirang)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Arirang arirang arariyo
crossing over Arirang hill
He who left me behind will get sore feet within a mile
밀양아리랑 (Miryang Arirang)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보소
동지섣달 꽃본 듯이 날좀보소
밀양의 영남루 찾아가니
아랑의 정절이 새롭구나
Ari arirang sseuri sseurirang crossing over Arirang hill
Please look at me! Please look at me! Please look at me!
Please just take one look at me as though looking at the flowers that bloom in the depths of winter
Arriving at Milyang’s1) Yeongnam2) pavilion oh how new is Arang’s3) fidelity
진도아리랑 (Jindo Arirang)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문경새재는 웬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 눈물이로구나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속엔 희망도 많다
Ari arirang sseuri sseurirang my heart is broken
Arirang eungeungeung my heart is broken
What is this gate on a hill called Moongyungseje4),
this winding trail brings tears to my eyes
The clear blue sky holds innumerable little stars and,
likewise, inside our hearts we carry many hopes
해주아리랑 (Haeju Arirang)
아리아리 얼쑤 아라리요
아리랑 얼씨구 노다가세
아리랑 고개는 웬 고개냐
널어갈 적 넘어올 적 눈물이 난다
저기 가는 저 아가씨 눈매를 보소
겉눈을 감고서 속눈만 떳네
Ari ari eolssu arariyo Arirang eolssigu let’s have some fun
Each time I go back and forth over Arirang hill
why do tears come to my eyes?
See that young lady over there passing by,
her eyes seem closed but she looks
through half-closed eyes
정선아리랑 (Jeongseon Arirang)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 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정선같은 살기 좋은 곳 놀러 한번 오세요
검은산 물밑이라도 해당화가 핍니다
맨드라미 줄봉숭아는 토담이 붉어 좋구요
앞남산 철쭉꽃은 강산이 붉어 좋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릿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정선의 구명은 무릉도원 아니냐
무릉도원은 어디가고 산만 층층 하네
Arirang arirang arariyo
Help me cross over Arirang hill
Looks like it will snow or rain or maybe it will pour down.
Over Mansu mountain, the dark
clouds gather over Mansu mountain
Come take a vacation in Jeongseon, a wonderful place to live.
The sweet brier blooms even in water,
The red cockscomb and impatiens grow well in the reddened earthen wall.
They like it if the rivers and mountains are red on the side of south mountain, on the side of south mountain
Boatman on Aooraji river would you please lend me a boat?
The young camellia blossoms of Ssaritgol have all fallen
Didn’t the old name of Jeongseon used to be Mooreung do won?
What happened to this ‘utopia,’ for only the mountains re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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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세 0원에 물려받은 ‘국보’를 판다고? 간송 왜 이러나 [아무튼, 주말]
국보를 경매 내놓은 간송
문화재계 싸늘한 이유
“기어이 ‘국보’를 경매에 내놨네요. 솔직히 이해가 안 갑니다. 지난번 보물 불상도, 이번에 경매에 나온 국보 불상도 전부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아니라 간송 3세의 ‘개인’ 소유물인데 왜 자꾸 재정난을 이유로 드는지….”(문화재 전문가 A씨)
“이번에도 국가가 사주길 바라고 내놓은 건데, 사실상 여론을 내세워 국립중앙박물관을 압박하는 거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간송 전형필이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재를 어렵게 지켜낸 공로에 대해선 더없이 감사한 일이지만, 3대째 내려오는 사유재산을 왜 국민 세금으로 사줘야 합니까?”(불교미술사학자 B 교수)
한국 문화재의 보고(寶庫)이자 상징인 간송미술관이 ‘국보(國寶)’로 지정된 불상 2점을 새해 첫 경매에 내놓은 데 대해 문화재·학계 전문가들이 싸늘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케이옥션은 오는 27일 열리는 올해 첫 메이저 경매에 국보 ‘계미명(癸未銘) 금동 삼존불 입상’과 ‘금동 삼존불감’을 출품한다고 밝혔다. 지난 2020년 5월 간송미술관이 재정난을 이유로 ‘보물’ 불상 두 점을 경매에 내놓은 지 1년 8개월 만이다. 당시 간송가(家) 소장품이 처음으로 경매에 나와 문화계가 충격에 휩싸였다. 두 점이 각각 시작가 15억원에 나왔으나 유찰됐고, 이후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여론에 떠밀려 국립중앙박물관이 30억원을 밑도는 가격으로 두 점 모두 구입했다.
이번에 나온 건 국가지정문화재 중 최고 가치를 인정받은 ‘국보’ 두 점이다. 계미명 금동 삼존불 입상은 32억~45억원, 금동 삼존불감은 28억~40억원으로 추정가가 책정됐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는 “2년 전 간송 측이 불교 관련 유물을 매각하겠다고 예고하긴 했지만, 이미 보물 두 점이 유찰돼 국가가 사들인 상황에서 또다시 국보까지 경매에 내놓는 건 이해할 수 없는 행태”라고 했다.
◇상속세 0원에 물려받은 ‘국보’를 판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은 공식 입장문을 내고 “2013년 공익적 성격을 강화하고 시대 변화에 맞추기 위해 재단을 설립한 이후 대중 전시와 문화 사업들을 병행하면서 이전보다 많은 운영비용이 발생해 재정적 압박이 커졌다”며 “구조조정을 위해 소장품 매각을 결정하게 돼 송구하다”고 했다.
하지만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 국보 2점의 소유자는 재단이 아니라 간송의 손자인 전인건 간송미술관장. 문화재청 관계자는 “간송 소장품 중 현재 국보·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 대부분은 간송 후손 세 사람의 공동 소유로 신고됐다. 간송 차남인 전영우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과 3세인 장남 전인건 관장, 차남 전인석 삼천당제약 대표”라며 “반면 2년 전 매각한 보물 불상 2점과 이번에 나온 국보 불상 2점은 모두 전인건 관장이 단독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간송가가 소장한 국보·보물 등 지정문화재는 모두 48건. 상속세 및 증여세법 제12조에 따르면, 지정문화재에 대해선 상속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간송재단은 “지난 2018년 전성우 전 재단 이사장이 별세한 후 상당한 비용이 발생했다”고 했지만, 적어도 국보·보물 등 지정문화재를 물려받으면서 간송 일가가 낸 상속세는 0원이라는 얘기다.
문제는 수십억에 상당하는 국보·보물을 상속세 없이 물려받고서, 이를 제3자에게 판매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하는 것. 예술·문화재법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서유경 법률 사무소 아티스 변호사는 “국보·보물 등 지정문화재에 대해선 상속세가 비과세되기 때문에 이미 상속받은 국보를 경매나 매매를 통해 팔아서 차익이 생긴다고 해도 이후 상속세를 소급해 부과 징수할 수 없다”고 했다. 선대가 남긴 위대한 문화유산을 고이 간직해 대대손손 보존하라는 의미에서 세제 혜택을 주는 것인데, 현행법상으론 얼마든지 악용할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서 변호사는 “가령 대규모 자산가가 사망 전 국보를 사들이고, 이를 상속한 다음, 상속인들이 그 국보를 처분하는 경우, 상속세는 한 푼도 내지 않으면서 고가의 차익을 낼 수도 있다”며 “공개 경매가 아니라 사적 거래로 이뤄질 경우 사후에 문화재청에 신고만 하면 크게 주목받지 않고 거래가 성사될 수 있다”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주요 문화재 소장가 중 극히 일부이기는 하나, 평생 문화재 지정을 피해오다 상속과 유산 분할을 앞두고 뒤늦게 보물 지정 여부를 검토해 달라고 나서는 경우가 있다”며 “현행 상속세법으론 국보·보물이 탈세나 절세의 도구로 악용될 여지가 분명 있다. 단서 조항이라든지 제도 보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또 국가가 구입?
국보든 보물이든 경매에 내놓는 것 자체가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국가지정문화재도 개인 소장품인 경우에는 해외에 반출하지 않는 한 소유자 변경 신고만 하면 사고팔 수 있다. 문화재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17~2021년 보물 23점이 시장에서 팔렸고 그중 7점이 경매로 성사됐다.
하지만 벌써부터 여론은 국립중앙박물관을 향하고 있다. 워낙 가격대가 높은 유물이고,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상태에서 쉽게 응찰자가 나타나기 어려울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경매에 나오는 다른 문화재와 동일한 입장에서 신중하게 검토 중”이라며 “간송 소장품이라고 해서 박물관 예산을 전부 써버리면 정작 꼭 구입해야 할 유물이 나왔을 때 난감해질 수도 있다”고 했다. 중앙박물관의 한 해 유물 구입비 예산은 40억원. 이번에 나온 두 작품을 합하면 80억원에 달한다. 박물관이 한 작품만 구입한다고 해도, 1년 예산을 거의 쏟아부어야 하는 셈이다. B교수는 “박물관이 경매에 참여해 민간과 경쟁하며 가격을 높이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다”며 “박물관의 한 해 구입 예산이 전부 남아있는 새해 첫 경매에 내놓은 것부터 의도가 뻔히 보인다. 유찰되더라도 또 국가가 사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공익 재단을 만들어놓고도 상속세 없는 국보·보물은 유족들의 개인 소유로 등록한 채 연이어 경매에 내놓는 상황을 납득하기 어렵다”며 “경매 출품 전 박물관과 먼저 상의하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최대한 비싼 값에 팔려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수장고 건립 등 투입된 세금만 78억원
간송미술관은 1938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이다. 일제강점기에 간송 전형필(1906~1962)이 문화재 수집을 위해 헌신하며 지켜낸 유물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 국보 ‘훈민정음 해례본’부터 불쏘시개가 될 뻔했던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을 거두고,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을 대한해협 건너 찾아온 스토리가 감동을 줬다. 최고 문화재를 보유한 미술관이지만 ‘은둔의 미술관’이란 이미지가 강했다. 1971년부터 매년 봄·가을 열리는 특별 전시회에만 미술관을 열었기 때문이다.
2대인 장남 전성우 전 관장, 차남 전영우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거쳐 3대인 손자 전인건 관장이 맡으면서 변화를 시도했다. 2013년 공익적 성격을 강화하겠다며 재단을 설립하고, 2014년부터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와 5년 협업으로 외부 전시를 펼치는 등 활로를 모색했다. 그동안 ‘지원받으면 간섭도 받는다’는 이유로 거부해온 ‘사립 미술관 등록’도 2019년 9월 마쳤다. 미술관으로 ‘공식 등록’한 덕에 적지 않은 세금을 지원받고 있다.
간송 전형필이 1938년 지은 성북동 서울 보화각은 노후화와 항온·항습 유지 등 어려움으로 전시 관람은 물론 유물 보존에도 어려움이 컸던 게 사실. 재단은 보화각을 보수정비하고 현대식 수장고를 신축하기로 했는데, 오는 3월 완공 예정인 새 수장고 건립에 국비 45억2700만원과 지방비 19억4000만원이 각각 투입됐다. 간송 측이 부담하는 비용은 없다. 국보 ‘동국정운’ 보존 처리 및 영인본 제작, 보물 ‘이징 필 산수화조도첩’ 보존상태 진단 및 기록화, 간송미술관 내 비지정문화재 보존 처리 등을 포함하면 지금까지 지원된 액수는 총 78억원. 착공을 앞둔 대구간송미술관 역시 대구시 사업으로 건립 예산이 약 400억원 잡혔다. 이광표 교수는 “간송이 어렵게 지킨 유물이니 당연히 국가가 사야 한다는 인식을 이제는 재고해야 한다”며 “더 이상의 온정주의는 간송의 미래에도 좋지 않다”고 했다.
원문보기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2/01/22/EDPHN6RR4VEUPKDWTAOYIWMWFE/
[포착] '조선 왕의 그림' 뜯었더니..시험 답안지 무더기로 쏟아졌다
김성화 에디터 입력 2022. 01. 19. 15:06 수정 2022. 01. 19. 15:09 댓글 17개
조선시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그림인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 뒷면에서 1840년 과거 시험 답안지가 무더기로 쏟아져나왔습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창덕궁 인정전의 일월오봉도를 2016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보존 처리를 진행하던 중 병풍의 틀에서 과거 시험 답안지인 시권(試券) 27장이 여러 겹 포개어 붙여진 사실을 확인했다고 오늘(19일) 밝혔습니다.
일월오봉도는 해와 달, 다섯 개의 봉우리, 소나무, 파도치는 물결을 화폭에 담은 궁중장식화로 영원한 생명력을 뜻하며 조선 왕의 존재와 권위를 상징합니다.
왕의 집무 공간에 설치된 일월오봉도는 창덕궁 인정전을 비롯해 경복궁 근정전, 덕수궁 중화전에도 설치되어있습니다.
182년 전 시험 답안지가 무더기로 발견된 인정전 일월오봉도는 어좌(御座·왕이 앉는 자리) 뒤에 있던 4폭 병풍으로 크기는 가로 436㎝ · 세로 241㎝입니다.
일월오봉도의 화면이 일부 파손되거나 안료가 들뜨고 병풍이 틀어지는 등의 손상이 진행되자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가 2016년 전면 해체하고 지난해까지 보존 처리를 했습니다.
사진은 창덕궁 인정전 '일월오봉도'에서 나온 과거 답안 시험지.일월오봉도에서 쏟아진 시험 답안지 - 누가, 무슨 문제를 풀었을까
이번에 발견된 과거 시험 답안지는 탈락자들이 작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과거에 합격한 응시자에게는 시권을 돌려주고, 불합격한 응시자에게는 시권을 돌려주지 않고 재활용했습니다.
윤선영 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 연구교수는 일월오봉도 보존처리 보고서에 수록된 논고에서 시험 과목과 문제가 확인되는 시권 2장을 분석해 1840년 시행된 식년감시초시(式年監試初試) 답안지라고 설명했습니다. 식년시는 3년마다 치른 정기 시험이고 감시초시는 생원시와 진사시를 뜻합니다.
윤 교수는 "시권의 글을 번역해 살펴본 결과 다섯 가지 유교 경전인 오경(五經) 가운데 한 구절을 골라 대략적인 뜻을 물은 과목과 사서(四書) 중 의심이 가는 구절에 대해 질문한 과목의 답안지였다"며 "시권 27장 중 25장이 동일한 시험의 답안이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식년시 응시자는 자비로 시지(試紙·과거 시험 종이)를 마련해야 했고, 권력 가문 자제들이 신분을 드러내기 위해 좋은 시지를 가져오는 폐습이 생기자 두꺼운 종이 지참을 금하도록 했다"며 "일월오봉도에 붙어 있던 1840년 즈음의 시권은 대부분 두껍지 않고 고급 품질 종이는 아니었다"고 덧붙였습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측 관계자는 "보존처리 과정에서의 이 발견을 통해 조선왕실에서 제작한 일월오봉도는 과거 시험 탈락자의 답안지인 '낙폭지'를 재활용해 제작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면서 "일월오봉도 제작 연대가 적어도 1840년대 이후일 것이라 특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사진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진행한 창덕궁 인정전 일월오봉도 보존 처리 모습.조선 왕실의 시험 답안지 재활용, 처음이 아니다?
'종이를 재활용했다'는 점을 통해 당시 종이 물자가 부족했음을 추론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조선 왕실에서 과거 시험 답안지를 재활용한 사례는 적지 않습니다.
지난해 국립고궁박물관 '안녕, 모란' 특별전에서 선보인 전통 예복 '활옷' 속에서도 1880년 과거 시험 답안지가 발견된 바 있습니다.
1960년대 신문지도 발견됐다고?
시험 답안지 이외 1960년대 신문지가 발견된 것도 의외인 부분입니다.
인정전 일월오봉도는 1964년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보수가 진행됐으나 이번처럼 '전면 해체' 방식의 보존처리는 아니었습니다.
연구소 측은 "1960년대 일월오봉도를 처리할 때는 조선 시대에 제작된 기존의 병풍틀을 재사용해 부분 보수만 진행돼 지금까지 이어져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센터는 보존처리 과정에서 20세기 초반에 촬영된 경복궁과 덕수궁 일월오봉도 사진 등을 근거로 녹색 구름무늬 비단에 꽃문양 금박을 붙여 장황하며 인정전 일월오봉도의 원래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장황이란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 책이나 화첩을 만드는 행위를 뜻합니다.
이번 일월오봉도 보존처리 보고서는 보존처리 과정을 소개한 글과 사진 외에도 '인정전 일월오봉도 변형과 전통 장황에 대한 고증', '인정전 일월오봉도의 과학적 분석'에 관한 논고가 실렸습니다.
이 보고서는 국립문화재연구소 누리집에서 누구나 열람이 가능하며 아래 PDF 파일을 통해서도 확인 가능합니다.
https://news.v.daum.net/v/20220119150600438
▶ [PDF 파일 내려받기] 창덕궁 인정전 일월오봉도 보존처리 보고서
[ https://url.kr/x1bays ]
시대를 앞서 간 여인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발자취 찾아
조선시대의‘이상적인 여인상’이라고하면 가부장제 아래 남편을 잘 섬기는 현모양처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 시기에도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꿈꾸고, 그 안에서 수준 높은 학문과 예술을 탐구한 여인들이 있었다. 현모양처의 이미지에 가려져 있지만 수준 높은 그림을 남긴 화가 신사임당, 중국과 일본까지 이름을 드높인 시인 허난설헌, 깊이 있는 지식세계를 구축한 성리학자 임윤지당, 나라를 되찾기 위해 앞장섰던 의병장 윤희순까지. 시대를 앞서 간 그녀들의 삶을 따라가본다.
- 현모양처의 틀과 여류 화가 신사임당
강릉에는 맑은 경포호와 푸른 바다만큼이나 유명한 두 여인이 있다. 바로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 그 주인공이다. 가부장적인 유교 문화 아래 두드러진 활동을 했던 여인이라는 점에서 둘은 종종 비교의 대상이 되곤 하는데, 경포호를 사이에 두고 마주해 있는 오죽헌과 허난설헌 생가에서 닮은 듯 다른 두 여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신사임당은 흔히 현모양처의 표본처럼 여겨지곤 하는데 그녀를 단순히 현모양처라고만 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녀가 남긴 그림과 글을 보면 훌륭한 예술가로서도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평가를 받는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아들 율곡이 워낙 훌륭한 인물인 탓에 그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크게 두드러진다는 것과 여성의 뛰어난 재주가 인정받기 쉽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유교 문화 아래 그녀를 현모양처의 틀 안에 가두어 남성의 시선으로 재단했다는 것이 주종을 이룬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아들 율곡을 낳은 오죽헌은 오천원권 지폐에 등장할 만큼 유명한 명소다. 그녀는 경기도 파주의 이원수와 혼인하였으나 결혼한 이후에도 강릉의 친정에서 주로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시집을 가면 죽어서도 시댁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 가부장적인 사상과는 달랐다는점에서 놀라게 된다. 오죽헌 안에 있는 율곡기념관에는 그녀의 ‘조충도’를 비롯해 ‘초서’와 ‘전서’ 등의 글씨가 전시돼 있는데, 기존의 이미지에 갇힌 신사임당을 고정관념 밖으로 꺼내어 다시금 돌아보아야 할 필요성을 저절로 느끼게 된다.
- 난초향과 눈처럼 깨끗한 성품을 지닌 허난설헌
오죽헌을 나서 경포호를 따라 건너편으로 가면 해송이 우거진 초당마을 한편에 있는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을 만난다.
허난설헌은 두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서 유일한 딸로 자랐는데, 그녀의 집안은 일반 사대부가와 달리 상당히 개방적이고 진보적이어서, 어린 시절부터 형제들과 함께 글을 읽고 논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허균 · 허난설헌 기념공원에 들어서자 다섯 개의 시비가 눈에띈다. 4남매와 아버지인 허엽의 글귀를 적은 것이다. 이 다섯을 허씨 5문장가라 칭하는데, 허난설헌은 이중에서도 글재주가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조선 말기의 문장가였던 매천 황현은 허난설헌과 허균, 허봉을 가리켜 “초당 가문에 세 그루 보배로운 나무, 제일의 신선 재주는 경번(허난설헌의 별호)에 속하였네”라고 칭송하였는데, 허난설헌의 글재주가 신선의 재주라 할 만큼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뛰어난 재능을 가진 그녀였지만 여인으로서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15세의 나이에 시집을 갔는데, 시댁은 가부장적 분위기가 강한 탓에 그녀가 글을 읽고 시를 읊는 것을 마땅치 않아 했으며, 고된 시집살이를 겪어야 했다. 그러던 중 친정아버지와 오빠가 세상을 떠나고 친정의 가세가 급격히 기운 가운데, 전염병으로 어린 아들과 딸까지 잃게 되자, 건강을 잃고 점점 쇠약해져갔다. 그녀는 ‘몽유광상산시’로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고, 결국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으로 자신의 글을 모두 불태워 주기를 부탁했는데, 남은 작품을 모두 모아놓고 보니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그런데 누이의 작품이 모두 불태워진 것을 아쉬워했던 동생 허균이 친정에 남아 있던 일부 작품과 자신이 외우고 있던 것을 문집으로 펴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 애틋한 강릉을 뒤로하고 떠나는 길
두 여인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길. 쭉뻗은 고속도로가 아닌 구불구불한 대관령 옛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정상 부근에서 또 한 번 신사임당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저 멀리 아스라이 강릉을 보며 시를 읊노라니 조선시대여인으로 겪었을 삶의 애환이 느껴져 애틋함이 더해진다.
慈親鶴髮在臨瀛(자친학발재림영) 늙으신 어머님을 강릉에 두고
身向長安獨去情(신향장안독거정) 홀로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
回首北村時一望(회수북촌시일망) 둘러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白雲飛下暮山靑(백운비하모산청)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 가부장적 유교 사상에 반기를 든 임윤지당
조선시대 여인들의 활동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데다가 그마저도 대부분 그림이나 문예 등 국한된 분야에서만 활약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원주의 임윤지당은 이런 선입관을 깨고 성리학자로서 큰 획을 그은 여인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 찾은 원주에서 유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를 기리는 기념비는 원주역사박물관의 도움을 받아서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 기념비는 초라한 모습으로 철길 옆 비좁은 공원 한쪽에 놓여 있다. 생전에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들에게 가려 주목받지 못하던 그녀의 재능이 지금도 여전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임윤지당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형제들이 “네가 대장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탄식할 정도였는데, 혼인을 하고 시집살이를 하면서 스스로 재능을 숨기고 여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여자에게는 글도 가르치지 않던 당시의 문화 속에서 한문을 읽고 쓴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한글로 편지를 쓰고, 책은 모두가 잠든 밤중에만 홀로 숨어서 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결혼 8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어렵게 낳은 아이마저 잃고, 양자로 들인 조카까지 먼저 세상을 떠나는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런 시련 속에서도 학문에 매진하여 당시 성리학의 주요 쟁점이었던 ‘이기심성(理氣心性)’, 즉 우주와 인간의 본성을 둘러싼 심오한 원리를 체득했다. 이러한 그녀의 사상은 동생 임정주와 시동생 신광우가 유고를 정리해 『윤지당 유고』를 펴내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속에는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성리학적 논문과 중국의 역대 인물을 비평한 역사 평론, 교훈적 내용을 담은 운문 등이 실려 있는데, 사상은 물론 문학성 또한 높게 평가받고 있다.
묘소라도 찾아가 참배하고 싶었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원주시 호저면에 그녀의 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흔한 비석 하나 없는 탓에 추정만 할 뿐이다. 쓸쓸한 무덤 앞에 서니, 여인으로서 마음껏 기량 한번 뽐내보지 못한 그녀의 삶이 더욱 안타깝다.
-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의병이 된 여인 윤희순
한편 남자보다 용감하고 높은 기상을 자랑한 여인도 있다. 춘천 시립도서관 뜰에는 눈에 띄는 여인의 동상이 있는데, 한복을 입고 쪽진 머리를 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여인인 듯하나,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다른 손은 앞으로 뻗어 사람들을 이끄는 모습이 여느 대장부 못지않은 기상을 뽐낸다.
그녀의 이름은 윤희순. 일제의 침략에 맞선 여성 최초의 의병장이다. 그녀의 의병 활동은 시집와서 살았던 춘천시 남면에서 상세히 확인할 수 있다. 화서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그녀의 시댁은 위정척사 사상을 잇고 있었으며, 시아버지 유홍석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계기로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
윤희순은 시아버지와 남편의 의병 활동을 돕는 것에 그치지않고 의병가와 경고문을 만들어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의병 활동에 나설 것을 독려했다. 더 이상 국내에서 의병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시아버지와 함께 세 아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이어갔으며, 조선인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는 데도 힘을 썼다. 이후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1994년 고국으로 봉환되어 가족 묘역에 안장됐다.
그녀가 시집와서 살았던 곳에는 생전의 활동을 기록한 의적비와 그녀가 지은 최초의 한글 의병가인 ‘안사람 의병가’ 노래비가 들어서 있다. 나라가 위험에 처했는데, 여자라는 이유로 물러서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며 꾸짖는 그녀의 기개가 지금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척박하지만 깊은 기상이 서려 있는 강원도의 기운이 여인들에게도 전해져 깊은 학식과 굳은 성품을 갖게 한 것일까. 네 여인을 차례로 만나며 강원도의 어떤 힘이 이런 여인들을 키워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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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장자 14명과 함께 묻힌 금관… 大가야의 최전성기 상징
가야금관의 비밀
'야금(冶金)'은 광석에서 금속을 골라내거나 골라낸 금속을 정제해서 금속 재료를 만드는 일이에요.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야금 전시품은 바로 '가야금관'으로 불리는 금관입니다. 1971년 국보(國寶)로 지정된 이 금관은 이 선대 회장이 매일 출근할 때 밤새 잘 있었는지 물어봤을 정도로 가장 애지중지한 소장품이었다고 합니다. 대체 어떤 유물이기에 그리 아꼈을까요?
머리에 쓰는 관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분과 권위를 상징하는 역할을 하지요. 멀리서 봐도 재질과 형태 등으로 신분을 곧바로 드러내거든요.
지금까지 발견된 우리나라 금관은 모두 8점이에요. 그중 가장 많은 것은 신라 금관으로 6점이에요. 모두 5~6세기 때 신라 고분에서 출토됐어요. 일제강점기인 1921년 발굴된 금관총을 시작으로 금령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에서 잇따라 금관이 나왔지요. 나머지 두 점은 가야 시대 금관으로, 하나는 호암미술관에, 하나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있습니다.
고구려는 순금 금관은 없고 청동에 금을 입힌 금동관만 남아 있어요. 백제는 '검은 비단에 금꽃으로 장식했다'는 금관 관련 기록만 있었는데, 1971년 공주 무령왕릉에서 얇은 금판을 오려 만든 금관 장식이 출토됐어요.
신라 시대 금관들은 머리에 두르는 테두리에 가지 달린 나무를 형상화한 '출(出)자' 모양과 사슴뿔 모양 세움 장식들이 붙어 있어요. 또 테두리 아래엔 긴 드림 장식이 귀걸이처럼 늘어뜨려져 있어요. 가장 먼저 발굴된 금관총 금관은 높이가 44.4㎝(드림 장식 포함)예요.
신라 금관에 비해 호암미술관의 가야 금관은 높이 11.5㎝, 밑지름 20.7㎝로 크기가 훨씬 작아요. 그리고 머리에 두르는 띠 위에는 꽃 모양 장식 4개가 붙어 있는데, 신라 금관의 출(出)자 모양 장식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워요. 화려하고 웅장한 신라 금관과는 다른, 서정적인 분위기랍니다. 미술관은 이 금관과 함께 금관에 붙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원형·반구형 등 금제 장식과 귀걸이·반지 등도 함께 보관하고 있어요.
우연히 풀린 금관의 비밀
호암미술관에 있는 금관이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호암 수집 문화재 특별전'에서 처음 공개됐을 땐 금관 제작지가 어딘지 의견이 분분했어요. 1960년대 초 경찰에 붙잡힌 도굴꾼들이 대가야 때 조성된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순금관을 파냈고 이를 장물 업자를 통해 이병철 회장에게 팔았다고 털어놨어요. 그래서 이 금관이 가야 금관이란 의견이 있었지만, 당시 가야가 이런 금관을 만들 정도로 왕권이 강하지 않았다며 신라 초기의 금관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지요.
사실은 우연한 계기로 드러났답니다. 바로 미술관이 금관과 함께 보관하고 있던 부속 금제품이 결정적 단서가 됐어요. 1977년 계명대박물관이 고령 지산동 고분군 가운데 45호 고분을 발굴했어요. 이 무덤은 발굴 전 이미 도굴꾼들이 휩쓸고 가 토기나 철기 정도만 남아 있었는데, 도굴꾼들이 실수로 작은 금제품들을 남겨놨고 그걸 고고학자들이 찾은 거죠.
고고학자들이 찾은 작은 금제품 중 귀걸이가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금관 부속품 금귀걸이와 쌍둥이처럼 닮은 거예요. 이 금귀걸이들은 누금(鏤金·금실이나 알갱이를 붙여 장식하는 세공 기술) 기법으로 화려하게 꾸몄고 속이 빈 금구슬 장식을 덧붙인 독특한 것이었어요. 결국 호암미술관 소장의 금귀걸이가 지산동 45호 고분에서 도굴된 것으로 추정되면서 금관도 가야 것으로 여겨지는 거예요.
금관에 10여 명 순장자까지… 주인은 누굴까
금관이 나온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가야 연맹의 하나였던 대가야(大伽倻)의 지배층이 묻힌 무덤군으로, 현재까지 700여 기가 확인됐어요. 1세기 김수로가 한반도 남쪽 낙동강 유역에 세운 가야는 작은 나라들로 이뤄진 연맹 국가였어요. 초기엔 금관가야가 주도했지만, 후반에는 대가야가 중심 세력이 됐죠.
높은 구릉 위에 커다란 고분들이 밀집해 있는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의 최전성기를 보여주는 듯해요. 특히 금관이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45호 고분은 봉토 지름이 23m에 달하고, 무덤에선 14명이나 되는 순장자의 흔적이 확인됐어요. '순장(殉葬)'은 권력자가 죽으면 노예나 하인 등을 함께 매장하는 걸 말해요. 바로 옆 44호 고분(37명) 다음으로 많은 순장자 수라고 합니다. 금관까지 썼고 많은 순장자와 함께 묻힌 무덤 주인은 대가야의 왕이나 왕비였을 수 있어요.
삼국시대 국가들이 이렇게 거대한 무덤을 경쟁적으로 만든 건 현세에서의 삶이 죽어서도 이어진다는 '계세(繼世) 사상'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신라는 6세기 초 이후 대형 고분도 점차 사라지고 순장도 폐지했어요. 대신 현실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 산성을 축조하고 군사력을 키웠죠. 하지만 가야는 여전히 종전 장례 풍습을 고수했어요. 500년 넘게 번성하던 가야가 결국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한 이유도 어쩌면 이런 시대적 흐름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금관의 나무 장식, '수목 숭배' 보여줘요]
만들어진 국가와 상관없이 금관에는 나무나 꽃 모양 장식이 많아요. 그건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수목(樹木) 숭배' 사상과 관련이 있대요. 수목 숭배는 나무가 죽은 자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자 생명이 내려오는 장소라고 생각해 신성시하는 거예요. 넓게는 '식물 숭배'라고도 해요.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하늘에서 처음 지상으로 내려온 곳이 신단수(神壇樹)라는 나무 아래였던 것도 이런 사상을 보여주죠. 그래서 고귀한 신분이 쓰는 금관에 나무 장식을 했다는 거예요. 마을 어귀 나무 앞에 돌 무더기를 쌓아놓고 비는 '서낭당' 역시 이런 수목 숭배를 보여줘요. 서양의 크리스마스트리도 나무가 나쁜 기운을 물리쳐주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은 데서 시작했다고 해요.
[문화재방송 캠페인]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