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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중계]남도(南道)들노래(국가무형문화재 제 51호) 정말 흥이 납니다. 신이 나지요. 진도 아낙네들의 들노래와 춤사위를 만끽하시지요.

문화재방송 2022. 3. 15. 00:02

기획. 취재. 촬영. 편집:헤리티지

남도들노래는 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의 농부들이 농사일을 할 때 부르는 노래로 향토색이 짙고 가락이 매우 흥겨운 노래이다. 농부들이 들일을 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예로부터 어느 고장에서나 볼 수 있으나, 특히 전라도 서남지역의 노래는 종류가 많고 음악성도 뛰어나다. 남도들노래는 논일 노래와 밭일 노래로 이루어진다. 논일 노래 중 모판에서 모를 찔 때에는 〈모 뜨는 소리〉를, 논에 모를 심을 때에 〈모소리(상사소리)〉를, 논에서 김을 맬 때에는 〈절로 소리〉를 부른다. 김매기가 끝나고 농부들이 마을에 들어올 때에는 〈길꼬냉이(길군악)〉를 부른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길꼬냉이〉이다. ‘만물(맘물)’이라고 부르는 마지막 논매기가 끝나는 날에 그해 농사가 가장 잘된 집과 가장 열심히 일한 ‘상머슴’을 뽑아 황소에 태워 행진하며 〈길꼬냉이〉를 부른다. 밭일 노래는 콩밭을 매며 부르는 〈콩밭노래〉, 목화밭 일을 하면서 부르는 〈미영밭노래〉가 있다. 〈미영밭노래〉는 논일 노래와 달리 전문 연희패의 노래 성향을 보여준다.

 

이 노래의 모든 곡은 메기고 받는 형식으로, 노래의 속도와 장단 구분이 분명하고 다양하며, 전라도 특유의 음악어 법인 육자배기토리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결과적으로 메기는 소리를 부르는 선소리꾼의 음악적 자질이 크게 요구된다. 남도들노래는 농사와 관련된 전통 문화와 지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글, 사진. 국립무형유산원 조사연구기록과

 

원숭이 기병에 코끼리, 흑인용병까지 참전한 국제전, '임진왜란' 

 

임진왜란의 국제적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사료로 유명한 것은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란

림입니다. 여기에 등장한 흑인용병인 '해귀(海鬼)'와 원숭이 기병대로 알려진 '원병삼백(猿兵三百)'은

당시 명나라가 조선의 원군으로 데려온 여러 부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답니다. 이 그림은 경북 안동의

풍산김씨 문중에 전해지는 세전서화첩 중 임진왜란에 파병됐던 명군 14만명이 귀환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에서 나타납니다.

 

이 원숭이 기병대는 충남 천안 일대 소사(素沙) 지역에서 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던 소사대첩에서

맹활약한 부대로 알려져있습니다. 이 병사들은 중국 남부에서 온 원숭이 부대라 하여 '초원(楚猿)'이라

흔히 불렸으며, 말을 다루는 솜씨가 사람 못지 않았으며 능히 적진에 돌진해 놀란 왜군을 물리쳤다.

 

선조26년 4월 기사 중에 당시 병조판소 이항복이 의주 부근에 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의

부대를 방문했는데, 이때  원숭이 기병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전투코끼리부대, 몽골 타타르의

거인 용사들, 흑인용병 등 각종 세계 용병들을 봤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임진왜란은 국제전이었지요/

 

(사진=영화 혹성탈출2 장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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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임진왜란 당시 소사전투 등 각종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알려진 '원숭이 기병대'의 실체에 대한 연구가 알려지면서 역사상 최초로 대륙별 용병들이 모두 활약했던 임진왜란의 국제적 성격이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그간 한·중·일 동북아시아 3국간의 전쟁으로만 부각됐던 이 대전이 실제로는 동북아를 넘어 아시아 각지는 물론 포르투칼 용병들까지 참전한 국제 용병들의 첫 집결지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
 
임진왜란의 국제적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사료로 유명한 것은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란 그림이다. 여기에 등장한 흑인용병인 '해귀(海鬼)'와 원숭이 기병대로 알려진 '원병삼백(猿兵三百)'은 당시 명나라가 조선의 원군으로 데려온 여러 부대 중 하나로 알려져있다. 이 그림은 경북 안동의 풍산김씨 문중에 전해지는 세전서화첩 중 임진왜란에 파병됐던 명군 14만명이 귀환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이 원숭이 기병대는 충남 천안 일대 소사(素沙) 지역에서 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던 소사대첩에서 맹활약한 부대로 알려져있다. 이 병사들은 중국 남부에서 온 원숭이 부대라 하여 '초원(楚猿)'이라 흔히 불렸으며, 말을 다루는 솜씨가 사람 못지 않았으며 능히 적진에 돌진해 놀란 왜군을 물리쳤다고 나와있다.

임진왜란 당시 원숭이 기병대의 모습이 나와있는 것으로 알려진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 그림 모습. 원병삼백(猿兵三百)이라 쓰인 깃발 아래 털복숭이 원숭이처럼 보이는 병사들이 그려져있다.(사진=한국국학진흥원)

 
이 부대가 어디서 왔는지는 사실 명확치 않다. 당시 명나라에서 원군으로 온 명의 장수 양호(揚鎬)의 휘하에 잇었다고 하지만 실제 명나라에서 양성한 병력인지, 용병으로 온 다른나라 군대인지는 자세히 알려져있지 않다. 원숭이를 훈련시켜 열매를 따오게 하는 것은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등 동남아시아 일대 국가들에 남아있던 풍속이기 때문에 원숭이 기병대가 실제 존재했다면 이러한 동남아 지역에서 훈련받아 온 용병으로 추측된다. 일각에서는 동남아 일대에서 활약하던 종족 중 하나가 원숭이 모양의 옷을 뒤집어쓰고 용병으로 참전했을 것이란 설도 있다.
용병일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는 실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여러나라의 용병을 썼기 때문이다. 당시 황제 만력제(萬曆帝)의 사치와 태업 속에 각종 전쟁으로 재정악화에 시달리고 있던 명나라는 전비를 줄이기 위해 가급적 명나라 본군을 원군으로 보내는 것을 꺼리고 주변 국가 용병들에게 일종의 하청을 주기 시작했다. 이로인해 명나라 주변의 수많은 나라에서 힘깨나 쓴다는 용병들이 조선으로 갈 원군으로 고용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당시 재정상황을 고려치 않고 조선에 대규모 원군을 파병해 망국의 주범으로 불리게 된 만력제의 모습. 재정악화가 심해진 명나라는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주변국 용병들을 싼값으로 고용했다.(사진=위키피디아)


선조실록에도 이런 다국적군이던 명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선조26년 4월 기사 중에 당시 병조판소 이항복이 의주 부근에 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의 부대를 방문했는데, 이때 유정이 각 용병들의 무술을 소개한다. 이때 소개된 병사들은 태국, 인도, 티벳, 미얀마, 몽골 등등 아시아 전역에서 온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의 무기 또한 소개된다. 원숭이 기병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전투코끼리부대, 몽골 타타르의 거인 용사들, 흑인용병 등 각종 세계 용병들의 전시장이었던 셈이다.
이후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선조 31년 5월 기사 중에는 선조가 명나라 장수 팽신고(彭信古)와 만났는데, 이때 팽신고가 선조에게 파랑국의 해귀를 보여준다며 그들을 불러 검법을 시험케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파랑국은 포르투칼을 뜻하며, 해귀는 당시 포르투칼령 마카오에 거주하던 포르투칼 흑인용병대로 명나라가 마카오 총독부에 의뢰해 고용한 용병대였다.
이러한 임진왜란의 국제적 성격은 전후 임진왜란을 다룬 각종 문학작품에서 일종의 판타지처럼 남게됐다. 안타까운 점은 이때 잠시나마 국제 인종전시장이 됐던 조선은 전후 다시 폐쇄적인 국가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조선의 굳게 걸린 빗장이 열리고 국제사회에 문호가 완전히 개방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300년 가까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티벳 신비의 도시, 하늘 위의 초원 <샹그릴라>

 





아름다운 곳이 있다네.

 
사람들은 그 곳을 찾아가려 하네.
 
그 곳은 사계절 항상 푸르고
 
새들 지저귀고 꽃들 향기로운 곳이라네.
 
그 곳은 고통, 근심, 걱정이 없는 곳이라네.
 
그 곳의 이름은 샴발라,
 
신선들의 낙원이라네.
 
아, 샴발라는 그리 멀지 않다네.
 
그 곳은 바로 우리들의 고향이라네.
 
- 티베트의 한 유행가 중에서




샹그릴라(Shangri-La)는 1933년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튼이 쓴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 - Lost Horizon>에 소개된 티베트 전설 속의 이상향입니다. 쿤룬(Kunlun)산맥의 서쪽 끝자락에 있는 숨겨진 장소에 소재하는 신비롭고 평화로운 계곡,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외부로부터 단절된 히말라야의 유토피아로 묘사되었습니다.
 


설산이 있고, 초원이 있으며, 야크 떼가 뛰놀고, 티베트 사원이 있고, 사람들은 평균적인 수명을 훨씬 뛰어넘어 거의 불사(不死)의 삶을 살 수 있는, 오래오래 장수한다는 샹그릴라. 세계 대공황의 황폐한 생활 속에 찌든 서구인들에게 소설 속에 묘사된 샹그릴라는 꿈에 그리던 지상낙원이었고 '이상향'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곳이지요.  







<잃어버린 지평선>은 금세 베스트셀러가 되어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샹그릴라는 지상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천국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습니다. 자본주의의 틀에 박히고 물질문명에 중독된 삶을 벗어나 정신세계에 몰입하는 젊은이들이 생겨났고, 단조롭고 무색무취한 생활에서 벗어나 젊고 활력 있게 살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등 이른바 '샹그릴라 신드롬'이 일어났습니다.
1937년 소설은 컬럼비아영화사에 의해 영화로까지 제작됐습니다. 소설과 영화로 샹그릴라를 접한 서구인들은 한 줄기 구원의 빛을 찾아 티베트로 떠났습니다.


샹그릴라를 찾아 나선 이 중에는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도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샹그릴라를 '순수 아리안 혈통의 진원지'로 규정하고 자신의 친위부대 탐험대를 7차례나 파견했습니다.
탐험대의 일원이었던 하인리히 하러와 페터 아우프슈나이터는 네팔 주둔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티베트로 탈출했고, 두 사람이 티베트에서의 생활과 체험을 쓴 논픽션은 훗날 영화 <티벳에서의 7년>로 만들어졌습니다. <티벳에서의 7년>은 중국이 티베트를 어떻게 강압적으로 점령했는지 잘 묘사하여, 중국정부로부터 반중 영화 1호로 낙인 찍혔습니다.








샹그릴라는 티베트말로 '내 마음 속의 해와 달'이라는 뜻입니다. 본래 샹그릴라는 티베트 불교에 전승되는 신비의 도시 샴발라(Shambhala, 香巴拉)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샴발라는 시간이 정지된 지상낙원에서 생로병사의 고통 없이 살고자 하는 티베트인의 염원에 깃든 극락정토이지요.
 


티베트인에게 샴발라는 단순히 전설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티베트인은 샴발라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대상지는 티베트인에게 세계의 중심축으로 여겨지는 성산 카일라스 부근인 다와쫑. 다와쫑은 달빛이 비치는 밤이면 셀 수 없는 바위들이 모두 부처님 형상이 되어버리는 신비의 계곡입니다.
 


샴발라의 전설과 유사한 대상지는 티베트 본토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도, 네팔, 부탄, 중국 쓰촨(四川)성 등 히말라야산맥의 여러 마을에는 샴발라와 유사한 설화가 내려져 왔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동안 히말라야 연변의 각국은 전설 속의 샹그릴라가 자국에 있다면서 경쟁했습니다. 한동안 샹그릴라가 어느 곳인지 여러 가지 견해가 있었던 중 중국이 선수를 쳤습니다.
 


중국은 '샹그릴라공정'이라 불릴 만큼 저돌적이고 치밀한 준비와 작업을 통해 중국 윈난(운남성)의 서북부, 중뎬을 샹그릴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원래 티베트의 땅이었고 티베트 말로는 쵸텐입니다.
 


1997년 9월 중국 윈난(雲南)성 정부는 국내외 기자를 불러 모아 대규모 회견을 열었습니다. 윈난성은 "티베트 전설로 내려져 온 샹그릴라의 실체가 확인됐다"면서 쵸텐(중뎬)현이 전설 속의 샹그릴라와 똑같다고 발표했습니다.
 
윈난성은 "지난 1년여 동안 역사·지리·민속·언어·종교 등 각 분야 50여명 전문가들이 현지 탐험과 다양한 연구를 벌였다"면서 "중뎬은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 나오는 샹그릴라의 모든 자연·문화적 조건-찾는 이를 매혹시키는 아름다운 자연, 설산을 배경으로 한 드넓은 초원, 불심이 깊은 라마승이 사는 라마사원 등 이 일치한다"고 주장했습니다.


 
2001년 12월 윈난성은 쵸텐(중뗸)을 샹그릴라로 만들기 위해 이름마저 '샹거리라'(香格里拉)로 고쳤습니다. 200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시켰습니다. 샹그릴라로 개명한 위력은 컸습니다. 한 해 쵸텐을 찾은 관광객 수는 250만 명을 넘습니다. 관광객이 뿌린 돈도 10억 위안(한화 약 1950억원)에 달합니다. 1995년 한해 찾는 이가 7만 명에 불과했던 해발 3280m의 작은 티베트인 마을이 세계가 주목하는 관광지로 탈바꿈된 것입니다.


  


 

반세기 전 샹그릴라 일대에는 라마불교 최대 종파인 겔룩파(Gelukpa) 6대 사원 중 하나인 간덴 숨첼링싸 (Ganden Sumtseling Gompa 티베트어, 일명 송찬림사)을 비롯, 수십 개의 사찰이 있었습니다.
 
★ 숨첼링싸 ★

위의 사진, 1681년에 준공한 라마교(티벳불교) 사원으로, 한꺼번에 1,600여명이 앉을 만큼 넓은 대전(大殿)이 있으며, 아래층 대전(大殿)은 108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으며, 현재 승려 700여명이 수도하는 도량입니다.
 


1959년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하기 시작한 그 시점, 중국은 티베트의 사원 6천여개를 파괴한 것도 모자라 문화혁명 당시 한때 티베트 캄 지역에서 가장 흥성했던 라마사원은 중국 홍위병에 의해 전부 파괴되었고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불심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티베트인들에게 라마사원의 파괴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라마사원은 관광객 유치를 위해 1980년대 중반부터 복원을 시작하여 지금도 복원중이며 문을 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샹그릴라는 티베트가 아닌 중국 최대의 송이버섯 산지로 유명합니다.


커지는 빈부격차와 한족의 상권 장악도 문젯거리입니다. 샹그릴라 시내와 일부 관광지는 몰리는 관광객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여타 농촌 마을은 여전히 가난합니다. 농촌의 티베트 젊은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샹그릴라 시내에 오지만, 이 지역 상권은 대부분 한족이 차지하고 있어 관광객을 위한 식당과 카페에서 티베트인이 티베트 음식을 팔지만, 결국 돈을 버는 것은 자본을 댄 한족입니다.
 

 
그러나 ‘샹그릴라’는 긴 머리를 휘날리는 날카로운 눈빛의 티벳탄들이 살고 있는 땅. 금빛으로 빛나는 라마사원 ‘숨첼링싸’ 가 버티고 있는 땅. 붉은 옷의 라마승이 당신에게 손을 내미는 땅. 그리고 조금만 계단을 올라도 심장께가 뻐근해지는 땅. 샹그릴라는 해발 3천미터가 넘는 하늘 위의 초원입니다.
  



티베트의 평화를 되찾는 날, 티베트 고유의 아름다움과 이상향인 샹그릴라는 티베트의 평화와 함께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 기행 - 변방의 인문학] 윈난성 샹그릴라현,  디칭자치주, 이상향 '샹그릴라' 지명 선점해 관광객 밀물

티베트고원 동남부 끝자락 위치
진사강 석양, 메이리설산 일출 장관
2002년 중뎬현→샹그릴라현 개칭
지역경제 관광업 중심으로 재편
소설·영화 속 이상향, 상업화 성공
고급 호텔·리조트 브랜드도 생겨

 
진사강 양안의 협곡은 절경을 자랑한다. [사진 윤태옥]
 
현실이 팍팍하거나 시대가 우울하거나, 자신에 대해 회의가 깊어지면 이상향을 떠올리기도 한다. 상실감이 클수록 공상이 가까이 다가오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코로나19로 길이 막힌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갑갑증이 매일 도지곤 한다. 앞의 글에서 루구호까지 닿았던 ‘나의 샹그릴라 가는 길’을 이어 가 보자.

루구호에서 소환선(小環線)을 타고 라보촌까지 80㎞ 정도의 꼬불꼬불 산길을 세 시간 정도 넘어가면 호수같이 고요한 진사강을 만나게 된다. 호도협을 무너뜨릴 것처럼 포효하던 진사강을 기억한다면 이곳의 고요함은 경이롭다고 할 것이다. 진사강을 건너는 거낭두(革囊渡)대교에서 바오산향(寶山鄕)의 석두성까지는 찻길도 있고 뱃길도 있다. 차를 타면 등골 서늘한 절벽 길에서 심장이 오그라지는 경험을 할 것이다. 작은 철선을 타고 고요한 진사강 물결에 실려 가면 양안의 절경에 숨이 넘어갈 것이다. 석두성은 가파른 경사에 불쑥 솟은 거대한 암반 위의 작은 마을이다. 그 위치가 워낙 기묘한 탓에 몽골군도 공략하지 못하고 지나쳤다고 한다. 석두성 객잔에서 바라보는 진사강의 석양도 멋진 오지의 한 장면이다.

『잃어버린 지평선』서 샹그릴라 언급

 

 

가파른 경사에 불쑥 솟은 거대한 암반 위의 작은 마을인 석두성의 주민. [사진 윤태옥]
 
석두성에서 남서쪽으로 산길을 굽이굽이 넘어가면 한국인들에게도 국민관광지라 할 만한 리장(麗江) 고성을 만난다. 리장에서 호도협으로 가면 세계적인 트레킹 코스를 1박2일 동안 걸을 수 있다. 하바설산 남록을 가로지르며 위룽(玉龍)설산의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중도객잔이나 나시객잔에서의 하룻밤은 호도협이 주는 또 하나의 짜릿한 낭만이다. 호도협 동쪽 출구에서 북으로 가면 백수대(白水臺)를 거쳐 샹그릴라시에 닿는다. 샹그릴라의 두커쭝 고성이나 송찬림사, 나파하이의 초원과 습지 역시 멋진 여행지다.

그러나 나의 샹그릴라 가는 길은 샹그릴라시까지가 아니다. 북서쪽으로 170㎞ 정도 더 가야 한다. 샹그릴라 대협곡의 바라거쭝(巴拉格總)을 들렀다가 바이마설산을 지나 메이리설산(梅里雪山)과 대면해야 한다. 바라거쭝은 한국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오히려 추천할 만하다. 바이마설산(5640m)이 차창으로 스치면 곧 더친현에 이른다. 더친현 중심을 빠져나가면 메이리설산 전망 포인트에 다다른다. 메이리설산은 6740m의 주봉을 포함해 6000m급 봉우리가 13개나 늘어서 있다.

 
란찬강 츠중 마을에서 생산되는 와인. [사진 윤태옥]
 
메이리설산의 절경은 전망대 위치도 큰 역할을 한다. 메이리설산은 서쪽으로는 고산들이 끝없이 이어지지만, 동록의 계곡으로는 단숨에 4500m를 내려앉는다. 그곳에는 란찬강(베트남의 메콩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다.

그러나 최후의 절경은 따로 있다. 바로 석양과 일출이다. 붉은 해가 설산 너머 기울어 가면서 설산 위의 넓고 높은 하늘에 시뻘건 노을이 광대하게 펼쳐지곤 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차례나 뒤집힌다. 신속하고 거대한 붉은 빛의 향연은 하늘을 통째로 휘두르는 춤사위 같다.

일출도 상상을 절한다. 전망대의 등 뒤로 해가 떠올라 전망대 앞의 설산을 비추기 시작하면 메이리설산의 백옥 같던 눈과 빙하는 붉은 기운이 도는 찬란한 황금빛을 반사하기 시작한다.

 
샹그릴라 대협곡의 바라거쭝. [사진 윤태옥]
 
일출 후에는 한참이나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그리고는 란찬강으로 내려가 강을 따라 남으로 길을 이어가야 한다. 메이리설산 전망대까지의 겨울 날씨와는 전혀 다른 봄이 포근하게 받쳐 준다. 표고차이 때문이다. 란찬강 강가의 츠중(茨中)이란 작은 마을도 찾아볼 만하다. 이곳에는 1867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당과 포도원이 지금도 남아 있다. 포도원은 당시 선교사들이 가져온 로즈허니(Rose honey, 玫瑰蜜)라는 품종의 와인을 지금도 생산한다.

샹그릴라가 허구의 지명이란 것은 누구나 안다. 그것을 향해 솔깃해지는 마음은 실제의 샹그릴라를 만들어 내곤 한다. 나만 해도 답사여행 중에 종종 듣는 노래 ‘우리들의 샹그릴라(Our Shangri-la)’가 있다. 길 위의 음악친구가 되는 에밀루 해리스가 마크 노플러와 듀엣으로 부른 버전이다. 대중화된 샹그릴라는 1933년 발표된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The Lost Horizon)』에서 비롯됐다. 샹그릴라는 윈난 리장에서 디칭 자치주로 가는 길목의 샹거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연유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작가의 창작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소설은 전쟁과 공황에 시달리던 시대의 상실감과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했다. 1937년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더 유명해졌다.

코로나 이후 첫 여행지로 계획해볼 만

 
메이리설산의 일출. 해를 받으면 백옥 같던 눈과 빙하는 붉은 기운이 도는 황금빛을 반사한다. [사진 윤태옥]
 
샹그릴라를 또 하나의 실물로 만들어 낸 것은 호텔업계였다. 1939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산타모니카에 동명의 호텔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전 세계에 체인망을 구축하고 있는 샹그릴라 호텔은 1972년 말레이시아의 부호 궈허녠이 싱가포르에서 창업한 것이다. 이상향의 이미지를 고급 호텔과 리조트에 가져와 브랜드로 사용하고 있다.

최근 십년 동안 한국인이 샹그릴라를 언급했다면 그것은 중국 윈난성의 디칭(迪慶) 티베트자치주 행정중심인 샹그릴라시(香格里拉市 2014년 시로 승격)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디칭자치주는 행정구역으로는 윈난성이지만 지리적으로는 티베트고원의 동남부 끝자락이다. 호적인구 36만9000 가운데 티베트인이 13만3000으로 32%를 차지한다. 리쑤족(11만2000), 나시족(4만7000)도 적지 않다. 한족도 4만이나 상주인구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다.

샹그릴라 상업화의 최대 히트작은 디칭이 샹그릴라를 행정지명으로 가져온 것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관광업을 일으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윈난과 쓰촨, 티베트 등 중국의 서남부뿐 아니라 미얀마, 네팔, 부탄, 인도 등지에서도 자기네 지역이 소설 속의 샹그릴라라는 주장은 많았다. 디칭자치주는 좀 더 적극적이었다. 1997년 자치주 건립 40주년 기념식에서 세외도원 샹그릴라가 바로 디칭이라고 선언하면서 지명을 선점했다. 그 이후 구체적인 조사연구를 보완하여 중국 국무원의 비준을 받아 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결국 2002년 디칭의 행정중심인 중뎬현을 샹그릴라현으로 개칭했다. 그 이후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디칭자치주 전체의 지역경제는 이제 관광업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됐다. 제임스 힐튼은 1920, 30년대 서구의 상실감에 오리엔탈리즘을 버무려 이상향 욕구를 자극했다. 70년 후에 중국은 그 허상을 가져다가 현실 속의 샹그릴라라는 간판을 세우고는 막대한 현찰 관광수입을 취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샹그릴라가 있을 수 있다. 나는 2018년 겨울에 루구호를 거쳐 메이리설산까지 8일간의 여행을 했다. 감동의 여정이었다. 다시 2019년 겨울, 1년 전의 여정에 진사강의 소형 철선과 바라거쭝 대협곡과 란창강 코스를 추가하여 19일간의 여행을 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은, 자신만의 샹그릴라 가는 길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없었다면 코로나19 이후의 첫 번째 여행으로 계획해보는 것은 어떠할까.

 
 
윤태옥 중국 여행객
중국에 머물거나 여행한 지 13년째다. 그동안 일년의 반은 중국 어딘가를 여행했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경계를 걷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엠넷 편성국장, 크림엔터테인먼트 사업총괄 등을 지냈다. 『중국 민가기행』 『중국식객』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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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 부여 - 공주 ) 박물관 기행

 

*  1편 부여 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은 이러한 문화적 배경 아래 1929년 발족된 부여고적보존회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약 80여년에 이르는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박물관은 충남 서부지역의 선사문화를 비롯하여 특히 백제의 문화유산을 보존 관리하는데 중심 역할을 다하여 왔습니다. 이외에도 유적·유물의 전시와 조사연구, 문화교육, 국제교류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널리 선양하는 데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 부여박물관 홈페이지 발췌)

 

 

국보 287호 백제 금동 대향로

 

국보 제287호. 이 향로는 1993년 12월 12일 부여 능산리의 백제시대 고분군(古墳群)과 사비성(泗泌城)의 나성(羅城) 터 중간에 위치한 백제유적 발굴 현장에서 백제시대의 다양한 유물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동체(胴體)를 연꽃봉오리로, 뚜껑은 산모양으로 만들어 많은 물상(物象)을 등장시켰고 정상에 봉황을, 아래에는 용을 배치하였다. 이로 보아 이 향로는 불로장생하는 신선(神仙)이 용과 봉황과 같은 상상의 동물들과 어우러져 살고 있다는 해중(海中)의 박산(博山) 즉 신선세계(神仙世界)이자 별천지(別天地)·이상향(理想鄕)을 닮게 만들었다는 전형적인 박산향로(博山香爐)임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

 

 

 

 

불교 전시관 서산 마애불과 태안 마애불

 

국보 293 호 금동 관음 보살입상

국립 부여 박물관 전경

 

 

부여 박물관을 둘러 보고 나와서 능산리 고분군을 찾어본다 ~

* 부여 능산리 고분군

능산리고분군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지를 옮긴후 사비시대 ( 538-660년) 백제 왕릉군이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왕릉군은 중앙의 7기가 지정되어있다~~

 

 

 

 

 

 

능산리 고분군 배치도

 

 

 

 

 

왕릉군 묘역 전경 ( 드론 촬영)

 

 

 

 

 

 

 

 

 

 

동하총 고분에는 네벽에 사신도가 천정에는 연꽃 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어 중요한 학술적가치가 있는고분이다

 

 

능산리 고분군내에 고분과같은 형태의 전시장이 있어 이곳 고분군에 관련된 유물에대해 설명을 해놓은 곳이다~

 

 

부여 나성

 

 

이곳은 능산리 사지터 전경

부여 능산리사지는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조성한 왕실사찰의 절터로서 일명 ‘능사(陵寺)’로도 불린다. 2001년 9월 29일 사적 제434호로 지정되었다. 능산리사지는 사비 도성의 외곽을 둘러싼 나성(사적 제58호)과 능산리고분군(사적 제14호) 사이의 골짜기에 위치한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

 

 

 

 

능산리사지 공방지터에서 발굴된 금동대향로 발견 당시의 모습을 현장에 재현해놓았다~~

 

 

공방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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