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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중계]전 세계에서 한국인 한 명만이 지니고 있는 독보적이고 희귀한 문화유산 '화각공예'(국가무형문화재 제109호), 후계자 없어 두 아들과 부인이 비법 이어 받아...

문화재방송 2022. 3. 5. 00:17

기획. 취재. 촬영. 편집:헤리티지/내레이션. 한송이

가장 한국적인 화려함을 표현한 공예

 

유일무이 한국에서만 만날 수 있는 공예 예술의 아름다움을 담은 화각은 소재에서 제작방법에 이르기까지 차별화된 면모를 가진다. 화각은 예로부터 귀족이나 왕실의 애장품에 주로 이용됐을 만큼 귀하고 값진 공예로 나전칠기(螺鈿漆器)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고유의 전통 왕실 공예이다. 화각은 투명도가 높은 쇠뿔을 종잇장처럼 얇게 펴 각지(角紙)를 만든 다음, 뒷면에 오색찬란한 단청안료(丹靑顔料)로 갖가지 문양을 그리고 채색하여 만들고자 하는 목기물 백골(白骨) 표면에 붙여 장식하는 것이 특징이다.

 

섬세하고 화려함을 자랑하는 화각은 적·청·황·백·흑 등 오색을 기본으로 하여 비교적 명도가 높은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실내분위기를 화사하고 생기 있게 해주는 가구와 생활용품에 활용했다. 표면에 광택을 칠하여 채색이 잘 벗겨지지는 않지만 튼튼하지 못하여 보존이 어렵고 재료가 귀하며 공정이 까다로워 생산에 한계가 있어 귀족층들의 기호품이나 애장품으로 이용되었고 일반대중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희귀 공예품이다.

 

조선시대에 전성기를 맞으면서 일부 계층으로부터 가장 소장하고 싶은 공예품으로 각광받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거의 자취를 감추어 접하기도 쉽지 않고 명맥을 이어가는 이들도 극히 드물어 더욱 귀한 가치를 가지는 화각. 사라질 뻔한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인 화각에 일생을 바쳐 그 명맥을 이어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무형문화재 이재만 선생의 뒤를 이어 아들인 이종민 이수자가 현재 화각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보존과 전승의 가치가 높지만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작업 자체가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대를 이어 부자가 화각에 뛰어든 데에는 그 고혹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된 것은 물론 이어나가야 할 귀한 문화유산이라는 것에 대해 책임감과 사명감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쇠뿔에 새기고 몸에 새겨 꽃피운 화각

 

이수하려는 사람이 극히 드문 까닭에 외로운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이종민 이수자는 태어나면서부터 화각과 함께해 몸에 자연스럽게 화각이 새겨졌다. 무형문화재인 아버지 이재만 선생이 늘 집안에서 화각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았고, 장난감처럼 화각 조각을 가지고 놀고, 도화지 대신 화각에 그림을 그리며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다.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에는 용돈벌이 삼아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며 화각 작업을 함께했다. 가장 기초이자 어렵고, 중요한 과정인 뿔을 굽는 것으로 화각에 입문해 쇠뿔과 친숙하고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러운 이끌림으로 본격적으로 화각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다.

 

“보고 자란 환경이 온통 화각이었으니 그 길을 걷는 게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섬세한 성향을 가지고 있고 그림도 좋아해 당연한 듯 화각을 하게 됐습니다. 평생 화각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고단하고 힘든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이어가야 하고 다행스럽게도 제게 재능도 있는 덕분에 이수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화각은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견디며 작업해 화려한 문양과 색채가 더해졌을 때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누구보다 화각의 매력을 꿰뚫고 있기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 작업하게 된다는 게 저의 장점이자 숙명처럼 느껴집니다.”

 

모든 것이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지만 특별히 화각은 길고 지난한 작업과정을 인내해야 하기에 훨씬 고단함이 느껴진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참고 기다리는 시간을 거듭하며 새기고 그리고 붙이는 복잡다단한 과정을 견뎌야 하며, 워낙 과정이 까다로워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수 개월이 소요되는 것은 기본이다. 규모 있는 가구의 경우 집중해서 제작해도 1년, 함 같은 경우 크기가 작더라도 2년 가까이 걸릴 정도로 섬세한 작품일 뿐더러 함 하나에 소 200마리에 해당하는 뿔이 들어갈 정도라 재료를 구하고 다듬는 데에도 긴 시간이 소요된다.

 

그야말로 인내를 거듭하며 뼈를 깎는 노력을 더해야 하는 공예가 바로 화각이다. 쇠뿔과 함께 고군분투하고 미적인 감각과 표현력을 더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인 화각이기에 본격적인 이수를 시작한 이후 이십여 년 남짓한 시간을 함께했지만 여전히 배우고 전수해야 할 것이 많다. 작품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해야 할 정도라는 이종민 이수자는 새로운 시도로 화각의 폭과 가능성을 넓히고자 노력하고 있다.


 

가장 전통적인 공예 본연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집중

 

다른 여러 전통 공예품과 마찬가지로 화각 역시 현대인의 생활 속에 스며들어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것이 전통을 이어가며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대화라는 작업과정을 적용하기에는 화각은 예외적인 요소가 많다. 반드시 투명도가 뛰어난 황소 뿔만 사용해야 하며, 특유의 문양과 색감이 전통적인 요소에서 벗어나면 은은한 아름다움과 기품이 빚어내는 화려함을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단순한 화려함과 섬세함이 아니라 화각이 가지는 은은함에서 발휘되는 고고한 기품을 표현하려면 반드시 전통적인 제작기법을 고수해야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작업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되니 화각과 가장 잘 어울리는 그림이 우리 고유의 색상과 정서를 담은 전통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방색이 들어가야 화각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화각의 독특한 질감과 형태를 돋보이게 한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결국 화각은 전통적인 요소의 어울림이 만드는 미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전통 소재에 우리 전통 그림과 색채가 어우러져 화각의 아름다움이 승화되는 것이죠.”


 

어느 정도 경지에 닿으니 전통적인 요소들의 가치가 제대로 보인다는 이종민 이수자는 철저히 전통 방식을 고수하되 품목을 다양화하는 방법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화각을 알고 느끼고 소유할 수 있게 하고자 보석함이나 거울, 필통, 향수병 등 전통의 가구류에서 벗어나 화각으로 만드는 소품에도 관심을 더해가고 있다. 무엇보다 소품은 조각난 쇠뿔로도 만들 수 있어 귀한 재료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 의미가 있다.

 

갈고 또 갈아 좋은 소재를 다듬고 섬세하게 그림을 그려 색을 입히는 등 총 36단계의 작업 과정을 거쳐야 하는 화각을 작업하는 것은 인고이고 극기이며, 다스림이라고 말하는 이종민 이수자는 그 시간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화각을 전승하는 일에서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글. 김영임 사진. 한정선

 

출처:월간 문화재사랑

 

멋과 흥의 악기, 가야금

 

첫 번째로 살펴볼 악기는 가야금이다. 우리 전통의 산조 가야금은 12줄이다. 이와 달리 현대음악을 연주하는 경우는 개량 가야금인 25현 가야금을 주로 사용한다. 피아노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또한 가야금 설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현을 받치는 기러기발 모양의 나뭇조각인 ‘안족(雁足)’이다. 여기서 ‘안’자가 바로 ‘기러기 안(雁)’자이다. 독특한 것은 이 안족이 악기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오른손이 현을 뜯거나 튕길 때 안족들이 각각 미세하게 움직이면서 고정된 음을 이탈하게 되는데 이때 왼손은 쉴 새 없이 안족들을 옮겨가며 음을 맞추게 된다. 가야금 연주를 감상할 때 연주자의 오른손과 왼손의 움직임을 살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 ‘기러기’일까? 기러기는 한 번 짝짓기를 하면 평생 그 짝과 지내며 한쪽이 죽으면 남은 기러기는 죽을 때까지 정조를 지킨다고 한다. 그래서 필자는 종종 관객에게 “안족문화재청은 연주자가 누르고 있는 현을 죽을 때까지 충성으로 받치겠다는 뜻을 품고 있다”라고 설명한다. 가야금의 몸통은 울림이 좋고 재질이 부드러우면서 공명이 잘되는 오동나무로 만든다. 산조 가야금은 크게 앞판과 뒤판으로 구성되는데, 뒤판에는 울림통이라는 것이 직사각형 형태로 넓게 뚫려 있어서 보통 가야금을 오른손으로 들고 이동할 때는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을 울림통 안으로 넣어서 들고 이동하게 된다. 그래서 가야금 케이스도 울림통에 맞춰 위아래로 소폭 개방되어 있다.


현과 활의 조화, 해금

 

두 번째 살펴볼 국악기는 독특한 음색을 만들어 내는 해금(奚琴)이다. 해금을 이루는 두 줄은 명주실로 만들어지는데, 몇 가닥을 몇 번 꼬았는지에 따라 현의 탄력과 음색이 정해진다. 특이한 점은 현과 현 사이에 활털을 넣어 연주하는데, 앞의 현을 밀기도 하고 뒤에 있는 현을 당겨서 연주하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해금 연주를 감상하면 그 차이를 보지 못한다. 해금 하단의 둥그런 모양의 울림통이 되는 주재료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나무 뿌리이다.

 

오동나무로는 울림통의 한쪽 면을 막아 현을 타고 내려온 소리를 공명시키는 복판의 재료로 사용된다. 송진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말총에 송진을 묻혀야만 현과 마찰이 생겨 소리가 나는데 송진 입자의 굵기와 활에 묻힌 정도에 따라 음색이 달라지기 때문에 좋은 송진을 써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해금 연주는 보통 왼손은 위쪽에서 손가락으로 현을 쥐었다 폈다 하며 음의 변화를 주고, 오른손은 아래쪽에서 활을 움직여 왼손 아래에 위치한 현과 마찰을 일으켜 소리를 내는데, 특히 왼손이 구사하는 운지법은 음의 폭과 빠르기에 따라 다양한 농현을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또 재미있는 점은, 보는 것과 달리 왼손으로 현을 쥐었다 폈다 하는 동작에서 생각보다 많은 힘이 요구된다는 것과 각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음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해금 연주자들의 왼손은 대부분 ‘악력’이 좋지 않을까 싶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해금 연주를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깊은 음색의 매력, 피리

 

마지막으로 살펴볼 국악기는 대나무와 바람으로 깊은 음색을 만들어 내는 관악기 피리(觱篥)이다. 피리는 향피리가 가장 많이 쓰이며 대부분 전체 음악을 아우르는 주선율을 담당한다. 향피리의 관대는 대나무의 일종인 ‘시누대나무’를 주재료로 삼는다. 그러고 보면 해금에도 사용되는 대나무는 참 고마운 나무이다. 피리의 구성요소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서(舌)’라고 할 수 있는데, 관대의 위쪽에 꽂아 입김이 가장 먼저 닿는 곳이다. 재미있는 부분은 피리 연주자를 보면 항상 컵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는데, 컵에 물을 채운 후 물 안에 ‘서’를 넣어서 불리는 과정을 반드시 거친다. 두 겹의 ‘서’는 마른 상태에서는 떨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피리를 바로 꺼내서 불도록 하는 것은 피리 연주자에게 예의가 아니다.

 

신비로운 소리에 한국인의 아름다운 흥 담겨

가야금, 해금, 피리가 한팀을 구성하는 완벽한 조화는 아니다. 저음을 내는 현악기인 ‘아쟁’이 포함되면 조금 더 안정된 소리를 낼 수 있다. 한편 피아노 반주 위의 가야금, 해금, 피리 소리는 각각의 음색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듣기 편안한 현대적 멜로디 위에서 연주되는 국악기는 혼자 내는 소리보다 더욱 안정감을 준다. 그래서 보편적으로는 정통국악보다 퓨전국악 내지는 현대국악을 감상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한 선입견이고 국악기 연주 감상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70분이 넘는 가야금 산조 한바탕 연주를 보고 있으면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 ‘기승전결’과 ‘희로애락’을 매번 다르게 느낀다. 연주가 끝나고 연주자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할 때는 눈물마저 흐른다. 연주자의 등에서 폭포같이 흘러내리는 땀의 소중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편안함을 느끼고 싶을 땐 가야금 음악을 듣고, 실컷 울고싶을 땐 해금 연주를 듣고, 강한 의지가 필요할 땐 피리 연주를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각각에 접근이 힘겨울 때는 다양한 국악팀의 다양한 악기 편성의 연주를 감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국악을 무조건 좋아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국악의 다양한 장르를 논하기 전에 가야금, 해금, 피리 본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운 소리를 가끔 만나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국악기 선율에 우리의 몸도 맡기고 우리 삶의 흥도 맡겨 보자. 그러면 우리는 ‘한국인’임을 다시금 알게 된다.



글. 허영훈(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외래교수, 한국콘텐츠진흥원 평가위원, 국악앙상블 ‘아라연’ PD) 자료. 우리악기 톺아보기

 

출처:월간 문화재사랑

 

145년만의 귀환...강제 개항과 문화재 수탈

 

 

 

아름다운 바다와 숲으로 유명한 강화. 다채로운 자연을 볼 수 있는 섬 곳곳에는 여전히 신미양요와 병인양요의 상처가 남아 있다. 하지만 강제로 조선을 개항하려했던 서구 열강의 흔적보다 더 아픈 역사는 눈에 보이지않는 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약탈당했지만 아직도 되찾아오지 못한 우리 문화재 이야기다.

 


- 삼랑성에서 울린 승전보

 

 

1866년 10월 16일,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군함 7척이 강화 앞바다에 출현한다.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한층 강화하며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한 해였다. 이 사건은 당시 제국주의의 선봉에 서 있던 프랑스에게 강제 개항의 빌미를 주었다.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보이는 갑곶돈은 이제 여유롭게 바다를 내려다보는 곳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프랑스군이 상륙했던 곳이자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지였다. 처음 강화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이곳을 점령하지만 곧 자신들이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선의 반격은 매서웠다. 삼랑성 안에 있는 전등사에 진을 친 조선은 양헌수(1816~1888) 장군이 이끄는 강계 출신의 포수 500여명으로 프랑스군을 크게 이긴다.
조선의 승전보가 울린 삼랑성의 남문에서 성곽을 따라 걷는다. 이끼와 덩굴에 뒤덮인 성벽이 가파른 산길을 끼고 계속해서 이어져 있다. 낯설기만 한 푸른 눈의 군대에 맞서 조선을 지켜낸 성벽들이 지금도 단단하게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 속에서

 

삼랑성에서 조선군에게 호되게 당한 프랑스군은 강화를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프랑스군을 무사히 쫓아낸 것은 다행이었으나, 어쩌면 이때 조선은 스스로 힘을 과신하면서 외세에 대해 대비할 기회를 놓쳤는지도 모른다. 굳게 걸어 잠근 빗장을 풀고 단계적으로 세계와 교류를 시작했더라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 때, 미군의 공격이 시작된 초지진으로 걸음을 옮긴다. 초지진은 둘레가 500미터 정도로 규모는 작지만,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입구 부근에서는 성벽에 남아있는 포탄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여전히 남아 있는 전투의 흔적은 오랜 시간을 건너 싸움의 현장을 생생히 떠오르게 한다.
전투는 초지진에서 멀지 않은 광성보, 덕진진으로 계속해서 번져간다. 신미양요 당시 가장 치열한 싸움이 있었던 곳은 광성보인데, 1871년 미국이 통상을 요구하면서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였을 때,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육박전이 벌어졌다. 당시 어재연 장군과 병사들은 열세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싸워 한 사람도 물러 서지 않고 장렬히 순국했다.
광성보 안에 있는 신미순의총은 당시에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이다. 당시 미 해병대의 기록에는 “우리가 전투에는 이겼으나, 아무도 이 전투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이 전투를 기억하고자 하지 않았다. 1871년의 조선 원정은 미국 해군 역사상 최초의 실패전이다. 우리는 물리전에서는 이겼다. 그러나 정신전에서는 졌다”라는 대목이 남아 있다. 적군마저 숙연하게 한 그들의 결의 앞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 도난당한 국가의 보물

 

 

광성보에서 내려다보는 강화의 바다는 이제 평온하고 아름답지만 전쟁의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다. 조선을 침략한 이들이 보물들을 훔쳐 달아났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군이 자국으로 돌아가기 전 책과 문서를 마구잡이로 약탈해 간 외규장각은 비운의 장소다. 지금은 크게 볼 것 없어 보이지만, 당시만 해도 이곳은 왕립 도서관으로 1,000여 종의 책을 보관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가져간 책 중에는 왕실의 각종 행사를 빠짐없이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의궤가 있었다. 이는 조선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지만, 우리는 민족의 보물이 프랑스에 도난당했다는 사실조차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기록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보니 모두 불타버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문화재 반환, 그 험난한 길

 

 

외세의 침략이 시작된 이때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재들이 해외로 반출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고려나전경함’, ‘경천사 십층석탑’ 등도 수탈당했다가 되찾은 문화재들이다. 하지만 아직도 수많은 문화재가 해외에 있다고 하니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외규장각 의궤’ 역시 힘겹게 한국에 돌아온 문화재 중 하나다. 오랫동안 그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의궤가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인 것은 1975년.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었던 고(故)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 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별관 지하의 먼지 속에서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낸 것이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린 감
동적인 조우였다. 하지만 부당한 방법으로 한국을 떠나게 된 문화재인데도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기만 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지만 외규장각 의궤를 반환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계속되었고, 박병선 박사가 그간의 연구 성과를 책으로 출판하자 시민단체와 국민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 145년 만의 귀환

 

2011년, 이 땅을 떠난 지 145년 만에 마침내 외규장각 의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완전한 귀환은 아니었다. 양국이 소유권은 프랑스가 갖되 5년간 빌려주면서 기간을 연장한다는 것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우리 것이 아니니 소장인도 찍을 수도 없고, 지방 전시도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프랑스 측에서 기간 연장을 거부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프랑스로 보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소식에 박병선 박사는
“내가 책이라면 울면서 한국으로 갈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 번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를 되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더 가슴이 아픈 것은 외규장각 의궤와 같은 불법적인 약탈뿐아니라 개인적인 이익에 눈 먼 사람들에 의해 이 땅을 떠나는 문화재도 많다는 점이다. 문화재는 우리 민족의 삶과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보물이다. 당장 모든 문화재를 회수할 수는 없겠지만, 어디에 있건 우리 문화재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내야 하는 당사자는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함께 가보면 좋을 곳들

 

 

 

● 길에서 만난 이야기

 

봄 기운 가득한 ‘경칩’, 건강 관리는?


최유진 (의학전문기자 cyj82@mcircle.biz)
                                                                                                                                                                                                                                                                                                                                                                                                                                                            

삼라만상이 겨울잠에서 깬다는 경칩이다. 경칩은 태양의 위치를 기준으로 한 해를 스물 넷으로 나눈 24절기 중 3번째 절기로 날씨가 따뜻해서 초목의 싹이 돋아나고 동면하던 동물들이 땅 속에서 깨어난다고 한다.

대륙에서 남하하는 한랭전선이 통과하며 급격히 불안정해진 대기층으로 인해 천둥이 울리며 땅속에 있던 개구리·뱀 등이 놀라서 튀어나온다는 말도 있다. 이처럼 만물이 약동하는 경칩은 한랭전선의 이동 등으로 밤낮의 기온차가 크며 꽃샘추위로 감기 등 호흡기질환에 걸리기 쉬운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 몸은 부위에 따라 추위에 반응하는 정도가 다르다. 그 중 ‘목’은 추위를 가장 많이 타는 부위이기 때문에 기온 차가 심할 때 목감기에 흔히 걸리게 된다. 이럴 때 머플러 등으로 목의 체온을 유지하거나 외출시 얇은 옷을 여러 겹 겹쳐 입는 방법으로 체온 조절이 가능하다.


또한, 겨울에 적응되어 있던 인체는 일교차 등 계절의 변화를 빨리 쫓아가지 못해 면역력이 많이 떨어지게 되므로 활발한 활동으로 몸의 열을 방출시키고 외출 후 손·발을 깨끗이 씻으면 면역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

예로부터 절기, 명절의 세시풍속에는 특별한 음식을 먹으며 건강을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다. 경칩도 마찬가지인데, 고로쇠 수액을 마셨다.

고로쇠(단풍나무과의 식물) 수액을 마시기도 했는데 바람이 불거나 날씨가 흐리면 좋은 수액이 나오지 않고 날이 맑아야만 약효가 있으며 경칩이 지나면 수액이 잘 나오지 않고 약효가 적다고 믿었다. 실제로 고로쇠 수액은 칼슘, 마그네슘, 미네랄이 풍부하며, 고로쇠 수액 마시기 풍속은 각 지방마다 다양한 축제로 바뀌어 진행되고 있다.

경칩 절기에는 큰 일교차와 함께 대기가 건조해 입술이 마르기 쉬우므로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는것이 좋다. 또한 식사 후 춘곤증으로 나른함을 느끼거나 졸음이 찾아오기 쉬운데, 딸기, 쑥, 냉이 등 봄 제철 음식을 섭취하면 도움이 된다.

생명이 깨어나는 절기인 경칩을 맞아 체온 보호, 적당한 운동, 비타민이 듬뿍 든 음식을 섭취하며우리 몸에도 봄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은 어떨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국에서 몰려 온 황사와, 오미크론 확진자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 현실이 더 무섭다.

 

[문화재방송 캠페인]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