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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천주교 박해로 흑산도까지 귀양 온 정약용의 형 정약전,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 어류 생태보고서 '자산어보' 남기고 이곳에서 숨지다.

문화재방송 2022. 2. 13. 00:01

정약전과 자산어보, 그리고 흑산도.

문화재청  2021. 12. 4. 9:00

조선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형이다. 순조 1년,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박해(신유사옥)’로 머나먼 섬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흑산도에서 정약전은 섬사람들에게 벗이었고 덕망 높은 선비였으며, 특히 어류학서 『자산어보』를 남겼다. 그리고 1816년 유배지에서 59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동생 정약용은 형을 잃은 슬픔을 편지에 담았다.

“슬프도다!

아! 어지신이께서 세상을 곤궁하게 떠나시다니. 원통하여 이 무너지는 마음을 호소하니 나무와 돌도 눈물을 흘리는데 무슨 말을 더 하리오! 외로운 하늘과 땅 사이에 우리 손암선생만이 나의 벗이었는데, 이제는 그 분마저 잃어버렸구나.

앞으로 터득한 지식이 있더라도 어느 곳에 입을 열어 함께 말을 하겠는가”

-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

 

2백년 전 유배된 학자가

- 해양생물을 과학적으로 분류·정리하다.

- 직접 해양생물을 해부하고 생태와 습성을 밝히다.

『자산어보(玆山魚譜)』는 정약전이 흑산도(黑山島) 유배시기에 쓴 어류학서이자 해양생물백과사전이다. 그가 만난 흑산도 백성들은 저마다 물고기를 부르는 이름이나 요리법, 민간요법이 달라 풍부한 수산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정약전은 흑산도 주변의 물고기와 해양생물들을 종류별로 분류하여 이름과 모양, 습성, 맛, 건강 효능, 민속, 고기잡이 도구와 방법 등을 『자산어보』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책이름은 왜 <흑산어보>가 아닌 <자산어보>일까? 정약전은 자산어보의 서문에 그 이유를 ‘자(玆)’는 ‘흑(黑)’의 검다는 뜻도 있어서 ‘자산=흑산’이며, 흑산이라는 이름이 음침하고 어두워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산’이라 썼기 때문이다”라고 소개하였다.

그는 문헌 기록에만 의존하지 않고, 흑산도 어부 장창대의 도움을 받으며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현장 지식을 쓰기 위해 노력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자산어보』는 필사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영남대학교 도서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 표준영정(1974년)

<정약용이 형에게 쓴 편지>

“책을 쓰는 한 가지 일은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되니 반드시 유의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해족도설(海族圖說)은 무척 기이한 책으로 이것은 또 하찮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그림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글로 쓰는 것이 그림을 그려 색칠하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중에서

『자산어보』 ,

1814년, 정약전(丁若銓, 1758~1816),

24.3×16.2cm,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 시기 저술한 어류학서로, 총 226종의 해양 생물이 수록되어 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책은 정약전이 원편(原編)을 저술하고 여기에 정약용의 제자 이청이 증보 혹은 재편집을 하여 완성된 공동저술로 파악되고 있다.

자산어보 서문 중 책이름을 자산으로 쓴 이유에 대한 글

자산(玆山)이란 흑산(黑山)이다. 나는 흑산으로 유배되었는데 '흑산(黑山)'이라는 이름이 검고 어두워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산'이라 하였다. '자(玆)' 역시 검다(黑)는 말이다.

자산(玆山)의 바다 안에는 어족(魚族)이 매우 번성하여 이름을 아는 자가 드무니 사물에 정통한 자가 마땅히 살펴야 할 바이다. 나는 섬사람들을 널리 만나보았다. 그 목적은 어보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 말이 다르므로 어느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섬 안에 장덕순(張德順) 창대(昌大)라는 사람이 있었다. 두문불출하고 손을 거절하면서까지 열심히고 서를 탐독하고 있었다. 다만 집안이 가난하여 책이 많지 못하였으므로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건만 보고 듣는 것은 넓지가 못했다. 성격이 조용하고 정밀하여 대체로 초목과 어조 가운데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을 모두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했다. 나는 드디어 이 분을 맞아 함께 묵으면서 물고기의 연구를 계속했다. 책을 완성하고는 '자산어보(玆山魚譜)'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이외에도 바다의 날짐승과 해초류까지 언급하여 후대 사람들이 상고(詳考)하고 증험(證驗)할 자료로 삼았다.

다만 내가 고루하여 이미 본초서(本草書)를 보고도 그 이름을 듣지 못하였거나, 혹은 예로부터 그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이 없어서 고증할 데가 없는 것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다만 민간에서 속되게 부르는 명칭에 의존하였으나, 표기하기 어려운 것들은 그때마다 감히 이름을 새로 만들었다.

후세의 선비가 이를 보완한다면 이 책이 병을 치료하고 이롭게 활용하여 재화를 다스림에 있어서 말할 나위도 없이 물음에 답하는 자료가 되리라. 그리고 또한 시인(詩人)들도 이들에 의해서 이제까지 미치지못한 점을 알고 부르게 되는 등 널리 활용되기를 바랄 뿐이다.

가경갑술년(1814, 순조 14)

신유박해 유배인의 또 다른 어류학서 <우해이어보>,

1803년, 김려(金鑢, 1766~1822),

31.7×20.4cm,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는 김려(金鑢, 1766~1822)가 유배시기에 쓴 우리나라 최초의 물고기 사전이다. 김려의 문집 『담정유고(藫庭遺藁)』 제8권에 실려 있으며, 어패류 약 72종류의 모양, 생태, 고기잡이 방법, 가치 등을 소개하였다. 김려는 1797년 강이천(姜彛天)의 유언비어 사건으로 함경도 부령(富嶺)으로 유배되었다가 1801년 천주교도 박해사건인 신유박해로 다시 경남 진해(현재 마산)로 옮겨졌다. 우해(牛海)는 진해(鎭海)의 다른 이름이며, 김려는 유배지에서 어부들의 도움을 받아서 『우해이어보』를 쓸 수 있었다. 김려는 1806년 아들의 상소로 10년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조선시대 어류학서

(오른쪽) 『담정유고』 중 <우해이어보> (김려, 1803)

(중앙) 『자산어보』 (정약전, 1814)

(왼쪽) 『난호어목지』 (서유구, 1820)

1801년, 신유박해와 정약전 형제의 유배

조선 23대 왕 순조1 신유년(辛酉年, 1801년),

실학자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는 천주교 박해사건 ‘신유박해[辛酉邪獄]’로 유배 형벌을 받았다.

정약전은 진주목사 정재원(丁載遠)의 4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4형제는 정약현(丁若鉉, 1751~1821),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다. 이 가운데 정약현을 제외한 세 사람은 서학(西學)을 공부하는 학자이자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신유박해 때 큰 피해를 입었다. 정약종은 참수되어 순교하였고, 정약전은 전라도 완도 신지도,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현재 포항 부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의 여파로 다시 정약전은 흑산도, 정약용은 강진으로 옮겨졌다.

정약전은 어느 유배지에서든 덕망높은 선비였다. 첫 유배지인 신지도를 떠날 때 백성들이 떠나지 말라며 길을 막았다고 한다. 그리고 1807년 우이도(당시 소흑산도)에서 흑산도(당시 대흑산도)로 유배거주지를 옮길 때도 섬사람들이 크게 서운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흑산도에서는 시와 글을 쓰며 유배생활의 고난을 스스로 위로했고 학자로서의 열정도 잃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사리마을에 사촌서당(沙村書堂)을 열어 섬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이후 유배 16년만인 향년 59세(1816년)에 유배지인 우이도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저서로는 『자산어보』, 『표해시말』, 『송정사의』, 『시문』, 『자산역간』 등이 있다. 현재 사촌서당 복성재가 복원되어 전라남도 향토사료 제26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동생 정약용은 57세 되던 1818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1836년 생을 마칠 때까지 조선후기 대표 지식인으로서 실학사상을 집대성하고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노력하였다.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 : 천주교 지도자이자 정약전과 정약용의 조카사위 ‘황사영’이 중국 천주교 주교에게 신유사옥사건을 알리기 위해 비단에 쓴 비밀문서가 발각된 사건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의 유배과정

<1801년>

- 2월 9일 / 신유박해로 형제 투옥되다. (정약전 44세, 정약용 40세)

- 2월 27일 / 정약전 신지도(현재 전라도 완도 신지도), 정약용 장기(현재 경상도 포항)로 유배되다.

- 9월~10월 / 형제, 조카사위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한성(서울) 감옥에 다시 끌려오다.

- 11월 5일 / 형제, 다시 한성에서 유배지로 출발하다.

- 11월 21일 / 형제, 나주목 율정(현재 나주 대호동)에서 마지막 잠을 함께 잔 후, 정약전은 우이도(소흑산도), 정약용은 강진으로 가다.

<1805~1806년>

- 정약전, 우이도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기 『표해시말』을 집필하다.

<1807년>

- 정약전, 우이도에서 흑산도로 옮기다.

- 대흑산도 사리마을에 ‘사촌서당’ 열다.

<1814년>

- 어류학서(사전) 『자산어보』 집필을 마무리하다.

- 흑산도에서 우이도로 옮기다.

<1816년>

- 우이도에서 생을 마치다

<1818년>

- 정약용(57세), 유배에서 풀려나다.

<1836년>

- 정약용(74세), 생을 마치다.

정약용이 보낸 편지 「간찰」

1801~1816년, 정약전,

61.5×25.5cm,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쓴 편지로, 추운 날씨에 안부를 묻고 간호해줄 사람이 내려오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조선후기 지도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

1872년

72.5×47.5cm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정약전이 신유박해로 1801년 2월 처음 유배되었던 섬이다. 이후 그의 조카사위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다시 머나먼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신지도는 1896년 완도군에 편입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온다.

<신지도의 주요 유배인>

■ 1801년 정약전(1758~1816)

: 조선후기 병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 신유박해 때 유배

■ 1801년 윤행임(1762~1801)

: 조선후기 이조참판, 홍문관제학,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신유박해 때 유배

■ 1860년 이호(1832~1895)

: 조선후기 종부도감, 동지정사, 종정경 등을 역임한 왕족. 안동김씨 세도를 비난하다가 작호를 빼앗기고 신지도로 위리안치

■ 1887년 지석영(1855~1935)

: 우리나라에 최초로 종두법을 도입한 조선시대 의학자. 개화당과 도당을 이룬 죄로 유배

■ 1895년 이충구(미상)

: 대한제국기 경무사. 춘생문사건으로 유배

조선후기 지도 <전라도 강진현>

1872년

72.5×47.5cm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정약용이 신유박해로 1801년 유배되었던 강진 지도이다. 정약용은 처음 장기(현재 경상도 포항)로 유배되었으나, 이후 그의 조카사위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다시 머나먼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강진의 주요 유배인>

■ 1694년 이현기(1647~1714)

: 조선후기 전라도관찰사와 경상도관찰사, 우부승지를 역임한 문신. 갑술옥사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 전라도 강진 유배

■ 1724년 이진검(1671~1727)

: 조선후기 동부승지와 예조판서를 역임한 문신. 신임사화 가담죄로 강진 유배

■ 1776년 홍인한(1722~1776)

: 조선후기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정조 임금 직위를 반대한 죄로 강진현 고금도(현재 완도군 부속 섬) 유배

■ 1801년 정약용(1762~1836)

: 조선후기 실학자. 신유박해 때 강진 유배

■ 1872년 이명윤(1804~1863)

: 조선후기 휘릉별검,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한 문신. 진주민란 주동죄로 강진현 고금도(현재 완도군 부속 섬) 유배

정학유의 문집 『운포유고(耘逋遺稿)』

1809년, 정학유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丁學游, 1786~1855)’의 시문집(시집 8권, 문집 2권)이다. 『운포유고(耘逋遺稿)』에는 흑산도에 유배 중인 큰아버지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을 만나러 갔던 여정을 기록한 기행시 「현산잡시(玆山雜詩)」와 기행일기 「부해기(浮海記)」가 기록되어 있다. 『운포유고(耘逋遺稿)』 시집 8권에는 정학유가 1808년 4월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1년 넘게 아버지 정약용의 유배지 강진에 머물면서 아버지의 생활과 동선, 다산초당 등을 엿볼 수 있는 시가 시간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한편 정학유는 1816년에 우리말 노래집 「농가월령가」를 지어 농업기술 보급을 처음 시도하였다. 「농가월령가」는 농부들이 농업기술 내용을 계절마다 음률에 맞춰 흥겹게 노래로 부를 수 있게 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정학유의 흑산도 기행시 「현산잡시(玆山雜詩」

1809년, 정학유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丁學游, 1786~1855)’의 시문집 『운포유고(耘逋遺稿)』(시집 8권, 문집 2권)에는 흑산도 여정을 노래한 12수의 시(詩)가 있다. 이 가운데 「현산잡시(玆山雜詩」 7수는 해녀와 흑산도 특산 벼루, 병자 치료를 위해 무당을 찾는 풍습 등이 담겨 있다. 이 외에도 바다 위에서의 하룻밤, 목포보와 고하도에서의 감흥, 고래를 만난 감회, 흑산도 풍물과 절경 등을 시에 담았다.

정학유의 흑산도 기행기 「부해기(浮海記)」

1809년, 정학유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丁學游, 1786~1855)’의 시문집 『운포유고(耘逋遺稿)』(시집 8권, 문집 2권) 중 문집 권2에 실린 흑산도 기행기이다. 그의 나이 24세였던 1809년 2월 3일부터 3월 24일까지 52일간 큰아버지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을 만나기 위해 흑산도를 다녀온 여정이 기록되어 있다.

정학유가 흑산도에 간 것은 아버지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당부 때문이었다. 정약전의 아들 학초(學樵)가 1807년 17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자신도 강진 유배 중이라 형을 직접 위로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아들 학유(學游)를 보냈던 것이다. 「부해기」에는 정약전의 유배 생활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흑산도의 풍물과 오가는 뱃길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고 있을 뿐 아니라, 흑산도의 인문지리적 환경과 당시 섬주민의 생활상, 특산과 지명, 경관 등 풍부한 자료가 소개되어 있다.

그는 당시 열악한 뱃길에 고생 끝에 흑산도에 가는 바닷길에서 난생 처음 고래를 보았고, 뱃사람들의 풍속과 주변의 경관도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흑산도 선유봉

「부해기(浮海記)」에 기록된 흑산도 너럭바위 위치로 추정되는 선유봉이다. 정학유는 1809년 2월 3일 강진을 출발해 영암 도씨포(현 도포리)에서 배를 타고 정개도, 목포보(목포 만호동에 있던 수군 진영), 고하도를 거쳐 팔금도와 비금도를 지나 흑산도에 도착했다. 이후 정약전과 만나 학문에 대한 공부를 점검받고 너럭바위와 소라굴 등 여러 승경을 유람하고, 정약전의 생일잔치까지 치른 뒤 강진으로 돌아왔다.

[참고자료] 정약전의 적거지(거주지) -영화 자산어보 촬영지-

[참고자료] 정약전의 적거지(거주지)에서 본 서해 바다 -영화 자산어보 촬영지-

[참고자료] 정약전의 적거지(거주지)에서 본 서해 바다 -영화 자산어보 촬영지-

유배인을 품은 풍요로운 섬, 흑산도

“흑산 바다의 어족은 지극히 번성하지만,

이름을 아는 어족이 거의 없어,

섬사람들에게 이것저것을 물어 어보를 짓고자 하였다...

부수적으로 바닷물새와 해초까지 확장하여 훗날 사람들의 참고자료가 되게 하였다.”

- 정약전의 『자산어보』 중에서 -

흑산도는 천혜의 자연유산 ‘바다’가 품은 섬으로, 고대부터 국제 해상교통로에 위치하여 역사·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흑산도’가 본격적으로 유배지로 활용된 때는 조선시대 숙종 시기이고 영조 때 크게 늘어났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제주, 거제, 흑산도 순으로 많았다. 흑산도의 주요 유배인은 김약행, 정약전, 최익현, 박우현 등이다. 당시 유배인들은 대부분 수군진(水軍鎭)이 설치된 소흑산도(우이도, 牛耳島)’에 거주지가 정해졌으나, 소흑산도와 대흑산도(흑산도)를 오가며 유배생활을 하였다.

정약전은 이곳 유배지에서 흑산 바다에 서식하는 물고기와 해양생물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였다. 당시 흑산도 사리마을(沙村)은 대부분 어업으로 살아갔다. 그는 섬사람들과 친분을 나누며 책에 나오지 않는 바다 지식과 오랜 관행, 풍속, 전해오는 이야기들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직접 바다에 나가 물고기, 해양조류, 해초류, 어족의 분포와 서식 환경까지 상세히 연구하였다.

1814년 『자산어보』 집필을 마무리한 후 다시 우이도로 옮겨갔다. 우이도는 흑산도 보다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생 다산 정약용과 더 가까워, 훗날 동생이 바다를 건너오기 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형제는 다시 만나지 못한 채 생을 마쳤다.

조선후기 지도 <전라도 나주목 흑산도>,

1872년,

72.5×47.5cm,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흑산군도(현재 신안군 흑산면)는 전라도 서해안의 도서 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섬으로,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하여 검게 보인다는 뜻에서 흑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도의 대흑산도 아래 큰 섬은 소흑산도로 지금의 우이도이다. 오늘날에는 가거도를 소흑산도라 부른다.

조선후기 흑산도 지도 중 대흑산도(흑산도)

조선후기 흑산도 지도 중 소흑산도(우이도)

정약전이 유배기간 머물고 생을 마쳤던 우이도(牛耳島, 당시 소흑산도) 지도이다. 정약용은 형 정약전의 묘지명(先仲氏墓誌銘)에 그 사연과 과정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나의 아우로 하여금 나를 보기 위하여 험한 바다를 건너게 할 수 없으니 내가 우이보에 가서 기다릴 것이다”하고 우이도로 돌아가려 하니 흑산도의 호걸들이 들고 일어나서 공을 꼼짝도 못하게 붙잡으므로 공은 은밀히 우이도 사람에게 배를 가지고 오게 하여 안개 낀 밤을 타 처와 두 아들을 싣고 우이도를 향해 떠났다.

이튿날 아침 公(정약전)이 떠난 것을 안 흑산도 사람들은 배를 급히 몰아 뒤쫓아 와서 公(정약전)을 빼앗아 흑산도로 돌아가니, 公(정약전)도 어찌할 수 없었다. 1년의 세월이 흐른 뒤 공이 흑산도 사람들에게 형제간의 정의(情誼)로 애걸하여 겨우 우이보로 왔다.

흑산도

 

흑산도 사리마을(정약전의 유배지)

<섬사람들의 벗이 된 학자, 정약전>

“바다 가운데 들어왔을 때부터 술을 더 많이 마시며 섬사람들과 친구처럼 지내고 교만스럽게 대하지 않으니, 섬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며 서로 다투어 주인으로 섬겼다”

“내 형님 손암선생이 흑산도 귀양살이하신지 7년이 되었을 때 5~6인 아이들이 따르며 사서와 역사를 배우게 되어 초가 두서너 칸을 지어서 사촌서실(沙村書室)이라 이름 지었다.

- 정약용이 쓴 정약전 묘지명(先仲氏墓誌銘) 중에서 -

흑산도 사리마을의 유배문화공원(복원)

흑산도 사리마을의 사촌서당(복원)

정약전이 섬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전해오는 서당이다.

흑산도 사리마을의 사촌서당 현판

정약용이 쓴 것으로 전해오는 사촌서당의 현판이다.

[참고자료] 「기산풍속도」 중 서당

19세기 말, 김준근

숭실대학교박물관 소장

흑산도 유배인 <면암 최익현> 초상화,

1905년,

51.5×41.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일제 침략에 맞서 항일 활동을 하다가 제주도, 흑산도, 대마도 등으로 유배되었다.

제주도에는 1873년 흥선대원군을 비판하는 글(상소문)을 올렸다가, 흑산도에는 1876년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을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가, 그리고 대마도에는 1905년 을사조약 무효와 을사오적 처단을 외치다가 유배되었다. 결국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대마도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흑산도 유배시기 진리마을에 일신당(日新堂)이라는 서당을 열었고, 이후 천촌마을로 거주지를 옮겨서도 바닷가에 오두막을 지어 섬아이들을 가르쳤다. 천촌리의 바위에는 면암이 쓴 글씨가 남아 있고, 문하생들이 세운 면암 최선생 적려유허비(勉菴崔先生 謫廬遺墟碑)가 있다.

흑산도 유배인 최익현의 문집 『면암선생문집(勉菴崔先生文集)』,

1931년, 31.3×20.1cm,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최익현의 문집으로 서거한 뒤 문인들과 유림들이 선생의 상소문과 유배지에서 쓴 시 등 글들을 모아 엮었다. 특히, 흑산도 유배시기 내용이 담겨 있다.

흑산도 유배인 박우현의 문집 『율수제고(律修齊稿)』,

조선후기,

29.5×19.2cm,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조선후기 학자 금파 박우현(朴遇賢, 1829~1907)의 문집이다. 박우현은 1873년 최익현의 흥선대원군 비판 글(상소문)에 대해 유교적 가치관으로 논박하는 글(상소문)을 올렸다가 흑산도에 12년간 유배되었다. 여기서 최익현과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저서로는 『자산록』과 『금파유집』 등이 있다.

흑산도 유배인 김약행의 문집 『선화유고(仙華遺稿)』,

조선후기,

24.3×17.1cm,

김희동 소장

조선후기 문신 선화자 김약행(金若行, 1718~1788)의 문집이다. 김약행은 어린시절 아버지가 노론과 소론의 권력 투쟁이었던 신임사화(辛壬士禍)에 휘말려 10년간(1722~1732) 유배됨에 따라 50세라는 늦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순천부사, 좌부승지까지 지냈다. 그러나, 1768년 그가 올린 상소문 때문에 흑산도에 유배(1768~1771)되었다. 선화유고에는 유배지에서 기록한 「대흑산도 유람기(游大黑山記)」 「우이도유람기(游牛耳記)」 등이 실려 있다.

흑산도 유배인 김약행의 문집 『선화유고(仙華遺稿)』 중 대흑산도 유람기

조선후기 문신 선화자 김약행(金若行, 1718~1788)가 흑산도 유배시기(1768~1771)에 쓴 대흑산도 유람기이다. 김약행은 “훗날 이 기록을 보고 대흑산도를 추억할 것이다”라며 이 기행문을 쓴 이유를 밝혔다.

“지금 우이도 별장(別將)에 거주하는 수군진(鎭)을 설치하여 소흑산(小黑山)이라 칭하니, 귀양살이는 온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우이진(牛耳鎭)에 자리잡고 살게 된다”

- 대흑산도 유람기 중에서 -

흑산도 유배인 김약행의 문집 『선화유고(仙華遺稿)』 중 우이도 유람기

조선후기 문신 선화자 김약행(金若行, 1718~1788)이 흑산도 유배시기(1768~1771)에 쓴 대흑산도 유람기이다. 우이도에 머물면서 돈항(현재 신안군 도초면 우도 돈목리)과 부속 섬인 소우이도를 유람한 기록이다.

바닷가 청년 어부, 장창대와의 만남

“섬 안에 장창대(張昌大)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두문불출하고 손으로 거절하면서까지 열심히 고서를 탐독하고 있었다.

다만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건만 집안이 가난하여 책이 많지 않고, 보고 듣는 것은 넓지 못했다. 성격이 조용하고 정밀하여 모두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믿을만했다. 나는 드디어 그를 초대하여 함께 묵으면서 물고기 연구를 계속했다. 그것을 책으로 완성하고 『자산어보』라 지었다”

- 정약전의 『자산어보』 중에서 -

호기심 많은 학자,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쓰고 싶었다. 글공부만 하던 학자가 물고기의 생태를 연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많은 섬사람들을 만났으나, 평생 고기잡이를 해 온 어부들까지도 사람마다 이야기가 달랐다. 흑산도 바다 속에 물고기는 많지만 알려진 것은 매우 적었다. 이때 정약전은 섬의 20대 청년 어부 장창대(張昌大, 1792~?)를 만났다. 정약전은 그를 바닷가의 선비라 불렀다. 그는 현재의 흑산면 대둔도 사람으로,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총명하고 관찰력이 뛰어났다. 정약전은 신분과 나이를 초월하여 장창대와 벗이 되어 명작 『자산어보』를 완성하였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1934~1938, 영인본 1962년·1970년

24.3×17.1cm, 정약용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저술 154권 76책을 총정리한 문집이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는 손암 정약전의 시 30여 편이 실려 있는데, 이 가운데 정약전이 장창대에게 쓴 시 2편이 있다. 시문을 통해 유배생활 중 체류했던 공간, 교류인물, 작시의 주요 주제 등을 살필 수 있다.

사람들은 장창대를 남들보다 뛰어난 선비라 하지. 옛 책을 언제나 손에 들고 오묘한 도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네. 초저녁부터 이야기 나누다 보면 어느새 바다 소리가 들려오는구나. 어찌하면 한낮부터 밤이 다하도록 이치의 근원을 더듬어 볼 수 있을까.

<창대에게 부치다>

나주바다 서남쪽에 한 선비 기이하니 평생 본 적 없지만 서로 마음 알았네. 엄자릉(嚴子陵)처럼 인간사 초개같이 여겨 동강에 물러나 낚시줄이나 손질하네.

<창대에게 주다>

흑산면 대둔도의 장창대 묘

흑산면 대둔도의 장창대 기념비와 정약전 시비

 

장창대가 태어난 흑산도 주변의 섬 '대둔도'

아시아를 표류한 우이도 청년 홍어장수, 문순득과의 만남

“손암 정선생님(巽菴 丁公)이 이곳 바닷가로 유배와 있으면서 순득(淳得)의 구술을 받아 적어 표해록(漂海錄) 한 권을 지었다. 그 곳의 언어·토산·풍속·건축을 상세하게 모아 분류하고, 선박제도(船制)에 대해서도 또한 죄다 갖추어 놓았다”

- 이강회의 『유암총서』 중에서 -

유배시기, 정약전은 『자산어보』 다음으로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바로 우이도 청년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기이다. 문순득(文淳得, 1777~1847)은 우이도(牛耳島) 진촌(鎭村) 사람으로, 남평 문씨 문덕겸(文德謙)의 넷째아들이다. 그는 25세가 되던 해 커다란 역경을 겪었다. 1801년 섬사람들과 함께 홍어를 구입하기 위해 우이도에서 태도(대흑산도 부근의 섬)로 갔으나,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유구국(琉球國, 일본 오키나와)으로 표류하였다. 조선에 가기 위해 배를 탔으나 또다시 여송(呂宋, 필리핀 북부)으로 표류되었다가 오문(澳門, 현재 마카오)을 거쳐 1805년, 3년 2개월만에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문순득이 경험한 19세기 초 아시아는 새로운 세계였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실학자 정약전은 문순득의 표류이야기를 듣고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이용후생 정신으로 각 나라의 풍물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표류 과정과 각 나라의 언어, 옷, 건축, 풍속, 토산품 등을 소개했으며, 각 나라의 단어 112개를 번역하고 비교하여 기록하였다. (*이용후생 ; 백성의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실천적인 실학이론)

1816년 정약전이 세상을 떠난 후, 다산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李綱會, 1789~?)가 정약전의 흔적을 찾아 우이도에 왔다. 이때 이강회는 정약전의 기록을 보완하여 자신의 책 『유암총서』에 실었다. 이것이 오늘날 남아 있는 『표해시말』이다.

정약전의 유배지, 우이도

우이도에서 생을 마친, 정약전

정약전은 당시 소흑산도라 불린 ‘우이도’ 진촌마을에서도 오랜 기간 생활하였고, 1816년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1789년 기록 <호구총수>에는 우이도에 320명, 흑산도 920명 거주하였다고 한다. 조선후기 해양방어를 위해 나라에서 수군진을 설치하였고, 1745년에는 섬백성들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 우이선창을 만들었다. 현재 우이도에는 정약전 적거지, 정약전 사당골, 문순득 생가, 우이도 선창 등이 남아 있다.

정약전의 유배지, 우이도

정약전의 유배지, 우이도

정약전의 유배지, 우이도 진촌

정약전의 유배지, 해질녘 우이도 풍경

정약용이 보낸 감사편지 「간찰(簡札」

1816년, 정약용

23.3×37.2cm

강진군 다산기념관 소장

정약전이 세상을 떠난 후, 정약용이 우이도 문선생에게 쓴 감사편지이다.

우이도牛耳의 문선생文生이 와서 보내준 서찰을 받으니 애통하고 위안되는 마음이 진실로 간절하였습니다. 요사이 매우 추운 날씨인데 예전처럼 편안히 잘 지내시는지요?

달려가서 뵙고 싶은 마음이 깊습니다. 우리 가문의 운세가 불행하여 갑자기 형님仲氏의 상을 당하였으니 애통하고 박절한 마음情理을 어떻게 다 말씀드리겠습니까?

(중간 생략)

이번 여름에는 부의賻儀도 이처럼 후하게 해 주셨으니 이는 진실로 말속末俗에서 듣지 못하던 일입니다. 어떻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전복全鰒까지 보내 주셨으니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감사의 말씀을 일일이 다 못 드립니다.

- 1819년丙子年 11월 16일 복인服人 차茶餠 50개를 보냅니다 -

문순득 초상

2012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작

『유암총서(柳菴叢書)』

1805~1816년, 이강회,

24.0×15.5cm,

신안군 소장

다산 정약용의 강진 유배 시기 제자 이강회(李綱會, 1789~?)가 우이도(당시 소흑산도)에 머물면서 쓴 문집이다. 이 책에는 정약전이 쓴 우이도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기 <표해시말(漂海始末)>이 기록되어 있다. 이강회는 유암총서에 <운곡선설>, <거설답객난>, <제거설> 등의 글들을 실었다.

『유암총서』 중 <표해시말>,

1805~1806년, 이강회,

24.0×15.5cm,

신안군 소장

조선후기 우이도 홍어장수 문순득의 아시아 표류기이다. 3년 2개월간의 표류노정을 일기체로 서술하였다.

다산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李綱會, 1789~?)가 신안 우이도에 칩거하면서 자신의 글과 스승인 정약전, 정약용 형제의 글을 한데 묶어 놓은 문집이다. 이강회의 문집 『유암총서(柳菴叢書)』와 『운곡잡저(雲谷雜櫡)』는 다른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정약전의 저서 「표해시말(漂海始末)」(유암총서 수록), 「송정사의(松政私議)」(운곡잡저 일권에 수록)가 담겨져 있으며, 정약용의 속담 한역(俗談漢譯) 저술인 「백언시(百諺詩)」는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수록된 「이담속찬(耳談續纂)」의 초고본으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문순득 표류 여정>

1801년 12월 / 우이도에서 바다건너 섬 ‘태도’로 가다.

1802년 1월 / 태도에서 우이도를 가기 위해 배를 타다.

1802년 1월 29일 / 유구국(일본 오키나와)에 표류되다.

1802년 11월 1일 / 여송(필리핀)에 표류되다.

1803년 9월 9일 / 오문(마카오)에 도착하다.

1804년 11월 4일 / 중국 북경을 출발하다.

1804년 12월 16일 / 조선의 한양에 도착하다.

1804년 12월 30일 / 무안 다경포에 도착하다.

1805년 1월 8일 / 고향 우이도에 돌아오다.

1805~1806년 / 정약전, 문순득의 표해시말을 쓰다.

문순득 납속첩(文淳得 納粟帖)

1835년, 73.5×52.2cm, 신안군 소장

문순득이 국가에 재물을 납부하고 받은 교지(임명장)이다. 1835년에 헌종(憲宗)이 우이도 진촌에 사는 문순득을 가선대부로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이나 품계 등을 내려주는 문서이고, 가선대부는 조선시대 종이품(從二品) 동서반(東西班) 문무관(文武官)에게 주던 품계이다.

호패(號牌)

조선후기

신안군 소장

문순득 가족 중 문광길(文光吉)과 문상권(文祥權)의 호패(號牌)이다. 문광길은 문순득의 손자이다. 호패는 조선시대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발급한 것으로, 이 호패에는 <나주 우이(羅州 牛耳)>, <이름>, <태어난 해> 등이 적혀 있다.

 

'달이 떠 오른다', 2월 15일은 '정월 대보름'  전통 민속이 그리워진다.

 

정월 대보름(正月 大보름) 또는 대보름 음력 1월 15일로, 오기일(烏忌日)이라고도 하며, 한자어로는 '상원(上元)'이라고 한다. '상원'은 도교적인 명칭으로, 삼원(상원, 중원, 하원) 중 첫 번째이다. 새해 들어 처음 맞이하는 보름날로서 농사의 시작일이라 하여 매우 큰 명절로 여겼다. 대보름 전날인 음력 14일과 당일에는 여러 곳에서 새해의 운수에 관한 여러 풍습들을 행한다.

정월은 한해를 처음 시작하는 달로서 그 해를 설계하는 달이다. 1월 15일인 대보름날에는 점을 친다. 또 율력서에 "정월은 천지인 삼자가 합일하고 사람을 받들어 일을 이루며, 모든 부족이 하늘의 뜻에 따라 화합하는 달"이라고 설명된다.

 

<죄송합니다>

'다음'에서 페이지 용량이 넘쳤는지, 이 이상의 사진과 글을 더 올리지 못 하고 있습니다.

 

[문화재방송 캠페인]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