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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선암사엔 무지개 닮은 다리, 송광사엔 ‘얼짱 사천왕상’이… 그들이 山寺로 간 까닭은...

문화재방송 2022. 2. 23. 00:02

 [아무튼, 주말] ‘아름다운 우리 절을 걷다’ 펴낸 탁현규와 떠나는 산사 여행

 

산사(山寺)에 가면 방향을 잃곤 했다. 어떤 절은 일주문으로 들어서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경내가 나오기도 했고, 경내에 발을 들여도 대웅전 앞마당까지만 ‘휘리릭’ 둘러보고 발걸음을 돌리기도 했다. 사천왕상 아래 서면 고압적인 각도에 괜스레 주눅이 들었고, 대웅전 불상 뒤 탱화는 다소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졌다. 그런데 우리 절을 마치 ‘불교 테마파크’처럼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이가 있다. 인문서 ‘아름다운 우리 절을 걷다’(지식서재)를 펴낸 전 간송미술문화재단 학예연구사이자 작가 탁현규(49)씨다. 우리 옛 미술을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스타 강사이자 재치 있는 작품 해설로 주목받기도 한 주인공. 그와 함께 만추(晩秋)의 산사를 걸었다. 절 공간의 의미와 탱화 감상법까지, 절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는 덤이다.

전남 순천 조계산 송광사의 '사천왕상'은 불교 미술 전문가인 탁현규씨가 전국 절의 사천왕상 중 으뜸으로 꼽는다. 탁씨는 "그중에서도 동방지국천왕이 '얼짱'"이라며 "송광사 사천왕상은 볼륨감이 뛰어나 입체적인 면이 돋보일 뿐 아니라 다소 해학적인 면도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북한산 명찰 ‘승가사’ 순례

“절은 전통 미술의 보고(寶庫)입니다. 전통 건축·조각·회화·공예 등을 모두 절 안에서 만날 수 있어요. 천년고찰까지는 아니어도 가까운 명산에 올라 명찰 한 곳만 제대로 둘러보기만 해도 어느 정도 절과 전통 미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탁씨가 추천한 곳은 서울 4대 명찰 중 구기동 북한산에 있는 승가사. ‘진흥왕순수비’가 있던 북한산 비봉에서 동쪽으로 1㎞쯤 떨어져 있는 산사다. 해발 450m 지점에 있는 데다 길이 험해 서울 시내 산사치곤 인적이 드문 편이다. 셔틀 차량 외 일반 차량으로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은 ‘덕분에’ 호젓하고 고즈넉한 운치가 남아 있다.

모든 절의 출발점은 ‘일주문’이다. 승가사 일주문 현판에는 북한산의 옛 이름인 삼각산을 따 ‘삼각산승가사’라 쓰여 있다. “절의 일주문에 들어서는 순간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일주문의 역할은 ‘여기서부터 경내이니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으시라’는 뜻입니다.” 탁씨가 설명했다.

‘亞(아)’자형 평면의 승가사 9층 석탑은 현대 사탑(寺塔)의 조형미가 돋보인다. 탁현규씨는 "이 탑도 100년, 200년 뒤면 보물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했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바위산의 산세를 그대로 살려 닦은 북한산 승가사.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승사가의 기원이 된 약사전이 나온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바위산의 비탈을 살려 닦은 승가사는 756년(경덕왕 15년) 수태(秀台)가 창건했다. 규모는 작았지만 창건 후 여러 왕의 기도처로 이름 날렸다. 6·25전쟁 당시 소실되었다가 1957년 비구니 도명이 중창(절 등을 여러 번 고쳐 새롭게 함)했다. 1972년부터 있었던 이 절의 주지 스님이었던 상윤 스님이 30년 동안 다시 일궜다는 절은 마치 바위산의 일부였던 듯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실존 인물이었던 승가대사를 기리는 절이라 하여 ‘승가사’라 불린다. 탁씨는 “승가사의 기원(起源)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며 대웅전 뒤편 ‘약사전(藥師殿)’으로 안내했다. “약사전은 병을 고쳐주는 약사불을 모시는 공간으로, 승가사에선 약사불 대신 석조승가대사좌상(보물 제1000호)이 있어요.” 커다란 암벽에 조그만 굴 형태의 승가사 약사전은 고려시대 땐 ‘승가굴’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동굴 안 석조승가대사좌상 뒤편에서 나는 약수는 세종의 비(妃)인 소헌왕후와 인연이 깊다. 암반 사이에서 솟아 나오는 이 물을 마시고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도 이 약수 한 모금 하기 위해 일부러 절에 오르는 이들이 많다. 약사전 옆으로는 108계단이 이어진다.

북한산 승가사의 '마애석가여래좌상'은 보개를 쓰고 있어서 오랜 세월에도 비교적 깨끗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계단 끝에 올라서면 탁 트인 전망과 함께 승가사의 백미로 꼽히는 승가사 마애석가여래좌상(보물 제215호)이 기다린다. 마애석가여래좌상은 고려 초 10세기경에 완성된 것으로 마왕을 항복시키는 석가모니불의 고유 손짓인 항마촉지인(왼손은 참선하듯 편히 펴고 오른손은 땅을 향해 내린 모양)을 하고, 머리 위엔 팔각 보개(덮개)를 쓰고 있다. 탁씨는 “마애석가여래좌상 얼굴이 오랜 세월에도 훼손이 덜 된 건 보개의 영향이 크다”고 했다. 약사전의 석조승가대사좌상, 108 계단과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비롯해 한 달 걸려 산으로 옮겨왔다는 범종, 현대 사탑(寺塔)의 건축미를 엿볼 수 있는 ‘亞(아)’자형 평면의 승가사 9층 석탑 그리고 대웅전 ‘목각 탱화(목각탱)’는 승가사 순례 시 놓치지 말아야 할 ‘빅 5’나 다름없다.

◇단원의 탱화, 겸재 그림 속 그 절

탁씨는 서강대 사학과 시절 ‘간송미술관’을 찾았다가 우리 미술에 빠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어머니가 누나 대입 시험 전, 절에 기도하러 가실 때 따라 다니다가 어깨너머로 탱화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이후 탱화를 공부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절을 찾아 다녔죠.” 절에서 만나는 불교 미술은 탁씨의 전문 분야다. “제대로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들으려면 성당에 가야 하듯, 제대로 탱화를 감상하려면 신발 벗고 대웅전으로 들어가야죠.”

승가사 대웅전에는 목각탱이 있다. 나무로 깎아 만든 탱화다. 목수 삼형제가 장장 8년 동안 절에 기거하며 은행나무 200그루로 완성했다고 한다. 입체감을 살려 조각한 뒤 금으로 칠해 넣은 기법이 특이하다. 목각탱을 감상하고 있으니 대웅전에 발을 들인 비구니 스님이 따스한 미소로 말했다. “절을 완성하는 데 참여한 목수 삼형제 중 아이 아빠가 있었다고 해요. 아이가 백일 때 절에 올라왔다가 모든 일을 끝내고 집에 가니 아이가 아빠를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답니다.” 스님의 말에 탁씨는 “그만큼 엄청난 불심으로 완성한 공간”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탁씨는 탱화 감상을 이어가고자 한다면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창건한 경기도 화성 화산 용주사도 가보라고 추천했다. 대웅보전의 후불탱(1790년)만 보고 와도 ‘성공적’이라고 했다. “용주사 후불탱은 석가모니불(영산탱), 약사불(약사불탱), 아미타불(아미타불탱) 모임 장면을 한 폭에 담은 김홍도 작품으로 당시엔 파격적인 서양화법을 가미해 섬세하고 생생하게 표현해 낸 역작입니다.”

승가사는 도보 이용 시 ‘승가사 입구’ 버스정류소 하차 후 ‘러시아대사관저’를 지나 승가공원지킴터로부터 1.2㎞ 등산 코스를 이용한다. 승가사까지는 40분~1시간 소요 된다. 걷기 힘든 이들을 위해 운행하는 승가사 셔틀 차량(편도 1000원)은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매 시 정각 5분 전에 구기동 ‘러시아대사관저’ 부근에서 출발한다. 용주사는 차량 이동이 가능하다.

단풍 든 운길산에 안겨 북한강을 내려다보는 경기도 남양주 수종사. / 박근희 기자

서울과 가까운 경기도 남양주 수종사는 겸재 정선이 65세 무렵 서울 근교와 한강변의 명승 명소를 그린 ‘경교명승첩’의 그림 ‘독백탄’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곳이다. 탁씨는 “‘독백탄’은 마재(지금의 능내 부근)에서 바라본 두물머리 풍경인데 그림 속 운길산 한 쪽에 있는 작은 절이 수종사”라고 했다. 수종사의 운치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함이 없는 듯하다. 여전히 전망이 좋은 데다 일출과 운해가 낄 무렵 풍경이 수려해 사진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다. 여기저기 쌓인 돌탑만 봐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찾았는지 가늠된다.

 
경기도 남양주 수종사와 가까이 있는 '능내역 폐역'. 수종사와 함께 나들이 코스로 인기다. / 박근희 기자

11월 초 현재 수종사는 ‘단풍 맛집’으로 변신했다. ‘해탈문’으로 오르는 계단 위 나무들뿐 아니라 세조가 하사했다는 500여 년 수령 은행나무도 노랗게 물들었다. 이 은행나무와 수종사의 기원이 된 범종을 보기 위해 평일에도 많은 이들이 찾는다. ‘산신각’에 오르면 단풍 든 운길산의 품에 안긴 수종사 기와지붕과 그 너머 푸른 북한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근엔 ‘다산 정약용 유적지’ ‘능내역 폐역’ ‘물의 정원’ 등이 있어 나들이 코스를 짜기에도 좋다.

전남 순천 선암사 '승선교'는 전국 산사 '무지개다리' 중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2018년 선암사가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에 등재된 후 승선교는 선암사의 '포토존'이 됐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절경 만나는 ‘무지개다리’ 두 개

전남 순천 조계산의 두 절 선암사와 송광사도 가볼 만하다. 태고종의 선암사, 조계종의 송광사. 천년 세월 동안 이어온 두 산사는 ‘순례길’로 이어져있다. 등산이나 트레킹을 좋아한다면 시간을 넉넉히 잡고 두 곳을 오가며 순례할 수 있다. 걸어서 서너 시간, 차로는 20~30분 거리에 있다. 두 절 모두 ‘무지개다리’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에 두 곳의 무지개다리 인증샷이 경쟁하듯 올라온다. “절 초입에 있는 무지개다리는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요. 특히 조계산 동쪽 선암사의 무지개다리인 승선교(昇仙橋·보물 제400호)는 우리나라 절의 무지개다리 중 으뜸으로 꼽힙니다.”

승선교는 ‘선계로 오르는 다리’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 무너진 선암사를 중건할 때 놓인 다리다. 다리 나이로만 따지면 300년이 넘었다. 승선교를 지나면 ‘선계로 내려온다’는 뜻의 누각 ‘강선루(降仙樓)’가 나온다. 탁씨는 승선교 아래에서 계곡에 비친 강선루를 감상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산수와 인문의 만남이 아니냐”며 탄성을 내뱉었다. 강선루를 지나 선암사 일주문으로 향하는 내내 계곡 물소리가 이어진다. 탁씨는 “오리지널 노이즈 캔슬링(이어폰 등의 소음 차단 기능)”이라며 웃었다. 속세의 소음을 계곡 물 소리가 씻어준다는 뜻이란다.

선암사는 꾸민 듯 안 꾸민 듯 담박한 미를 간직한 산사다. 억지스럽게 개보수를 한 인공적인 ‘흉터’가 별로 없다. 높지 않은 조계산과 어우러져 안정감과 편안함이 느껴진다. 각황전 옆 수령 350~650년에 이르는 매화나무 ‘선암매’ 50여 그루가 만개하는 3월 말이 1년 중 가장 예쁘다고 하지만, 단풍 내린 가을도 그에 못지않다. 대웅전과 함께 ‘丁(정)’ 자형 건물인 원통각(圓通閣), 팔상전(八相殿) 등 절 여기저기 볼거리가 가득하다. 꽃살문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다는 원통각의 ‘모란 꽃살문’ 등 경내를 아기자기하게 수놓은 ‘디테일’을 발견하는 재미도 놓치지 말자.

전남 순천 선암사 원통각의 꽃살문. 오랜 시간동안 보편적인 아름다움으로 절 순례객들을 맞이한다. / 박근희 기자
전남 순천 송광사 '우화각'에서 본 '침계루'. 누각은 요즘 말로 절의 '뷰 맛집(전망 공간)'이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송광사는 1969년 조계총림(승려들의 참선수행·경전 교육기관)이 된 대도량이다. 규모가 커서 제대로 둘러보려면 하루가 모자란다. 무지개다리 위의 집인 ‘우화각’은 송광사의 절경을 대표하는 곳 중 하나다. 우화각을 지나면 절의 ‘검문소’ 역할을 하는 사천왕상이 맞는다. 탁씨는 “전국 절의 사천왕상 중 최고라 생각하는 사천왕상이 여기에 있다”며 가리켰다. 사천왕상 중 탁씨가 특히 좋아하는 것은 ‘동방지국천왕’. “호탕하면서도 자애로운 얼굴은 한국 조각 역사에서 단연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야 할 것입니다. 보기만해도 맑고 강한 기운을 얻기도 한답니다.”

가을빛으로 물들어가는 송광사의 늦은 오후. 다리를 건너면 송광사 '성보박물관'이 나온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산 속 보리밥집’ ‘20첩 산사정찬’, 절 근처 뜻밖의 미식 여행

산사 가면 생각나는 맛

20첩 정찬을 맛볼 수 있는 전남 순천 송광사 부근 '소소산식'.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산사를 순례하며 영혼을 달랬으니 시장기를 달랠 차례. 이왕이면 건강 맛집을 눈여겨본다. 경기도 남양주 수종사에서 10분 거리에 기와집순두부 조안본점은 30년 전통의 재래식 생두부 전문 식당. 국내산 콩을 고운 자루에 걸러내는 방식으로 두부를 빚는다. 부드럽고 고소한 맛의 순두부는 말캉말캉한 ‘푸딩’ 같다고 해서 ‘푸딩 두부’라는 별칭을 얻었다.

하얀 순두부백반(9000원)과 재래식 생두부(1만1000원), 두부김치(1만4000원), 군두부(1만4000원) 등은 바로 만든 두부의 고소한 풍미를 느낄 수 있는 대표 메뉴. 하얗고 밍밍한 맛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고춧가루 양념이 가미된 비지찌개 콩탕백반(9000원)이 먹을 만하다. 요즘 같은 나들이 철엔 평일 점심에도 대기가 기본. 두부를 빚고 나온 뜨끈뜨끈한 비지가 수시로 나오는데, 비지는 원하는 만큼 각자 셀프 포장해 가져갈 수 있다.

순천 선암사와 송광사 주차장 주변엔 사찰음식이나 토속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들이 있어 식사를 해결하기 편하다. 송광사 부근 소소산식(벌교식당)은 불심 깊은 주인이 정직하게 산사 음식을 만들어낸다. 산사만찬(1인 2만5000원)은 산사 음식을 그대로 재현한 메뉴로 구성된다. “일반인들에게는 간이 슴슴해 추천하지 않는다”는 게 주인 얘기다. 채식주의자라면 ‘도전’해 볼 만하다. 산사정찬(1인 1만7000원)은 한식 한상 차림에 가깝다. 산사정찬이라고는 하지만 보쌈이나 생선구이(조림) 등도 나온다. 꼬막 철인 11월부터는 꼬막비빔밥을 찾는 단골들이 발길한다.

선암사와 송광사가 있는 조계산엔 보리밥집이 유명하다. 선암사 승선교에서도 꼬박 1~2시간을 걸어가야 맛볼 수 있는 송광면 장안리 조계산 보리밥집 원조집은 선암사와 송광사 사이 굴목이재 부근에 있는 산중식당이다. 거리로 따지면 선암사에서는 2.8㎞, 송광사에서는 3.3㎞ 정도다. 동그란 양은쟁반에 보리밥(7000원)과 함께 10여 가지 나물반찬이 나온다. 야채파전(7000원), 도토리묵(7000원)도 맛있다. 등산객이나 순천 시민에게는 오래된 맛집이지만 ‘고행을 감수하고라도 먹겠다’는 의지의 ‘등린이(등산+어린이·등산 초보)’들 발길이 잦아 최근 다시 알려지고 있다.

 

원문보기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1/11/06/36TTZPW2WVAUFPCCUYLBNEGEWI/

 

 

문인들의 고고한 인품을 상징하는 나무, 매화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이었던 유숙(劉淑, 1827-1873)은 중인(中人) 출신으로 대대로 역관(譯官), 무관(武官) 벼슬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숙 이전에 그의 집안에서 도화서 화원을 지낸 인물은 없었다. 유숙은 그림 솜씨가 뛰어나 화원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자(字)는 선영(善永) 또는 야군(野君)이며, 그의 호(號)는 혜산(蕙山)이다. 초상화를 잘 그렸던 유숙은 1851년과 1861년 두 차례에 걸쳐 철종(哲宗)의 어진(御眞) 제작에 참여하였다. 아울러 그는 1872년에 고종의 어진 제작에 수종화사(隨從畵師)로 일하였다.

 

한편 유숙은 19세기를 대표하는 여항문인(閭巷文人)들의 시사(詩社)였던 벽오사(碧梧社)의 일원이었다. 벽오사는 1847년 봄에 유최진(柳最鎭, 1791-1869)을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며 1870년대까지 존속하였다. 유숙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오로화첩(五老畵帖)》(1861)에 들어 있는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를 그린 것으로 볼 때 젊은 시절에 벽오사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매화는 겨울에 꽃을 피워 문인들의 고고한 인품을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졌다. 그 결과 매화도는 조선시대에 자주 그려졌다. 19세기에는 매화도(梅花圖) 병풍이 유행하였다. 유숙은 매화 병풍 그림의 대가였다. 그와 함께 조희룡(趙熙龍, 1789- 1866), 장승업(張承業, 1843-1897) 등이 주로 매화도 병풍을 제작했다. 19세기 이전에는 주로 먹으로만 매화를 그린 묵매도(墨梅圖)가 자주 그려졌다. 그러나 19세기에는 먹과 채색이 사용된 큰 크기의 병풍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18세기 후반에 매화를 분재(盆栽)하는 것은 한양에 사는 부호(富豪)들의 취미 생활 중 일부였다. 매화는 값비싼 나무였다. 매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풍조는 19세기에 들어 상층 양반뿐 아니라 중인 계층에게까지 확산되었다.

 

19세기에 유행한 매화 관련 그림은 이러한 양반과 중인들의 매화에 대한 심취 현상과 관련된다. 조희룡은 매화를 사랑하여 자신이 그린 매화 병풍을 방안에 둘러치고 자신의 거처를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고 불렀으며 매화시를 지었다고 한다. 조희룡의 이러한 지독한 매화 사랑은 당시에 유행했던 매화벽(梅花癖)의 구체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유숙은 이러한 매화벽 현상에 대응하여 다수의 매화도 병풍을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가 그린 매화도 중 남아있는 작품은 보물 유숙 필 《매화도》가 유일하다.

 

매화 가지들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담다

유숙 필 《매화도》의 화면 오른쪽 아래에는 괴석(怪石)이 보인다. 그 위로 백매(白梅) 두 그루와 홍매(紅梅) 한 그루가 서 있다. 화면의 오른쪽으로부터 백매, 홍매, 백매가 나타나 있다. 두 번째 백매의 굵은 가지는 화면의 왼쪽 상단으로 뻗어 나가 있다. 이 매화의 가는 가지는 화면의 왼쪽 아래를 향하고 있다. 홍매의 굵은 가지는 화면의 상단으로 뻗어 올라갔다가 아래로 방향을 틀고 있다. 홍매의 또 다른 굵은 가지는 왼쪽 아래를 향하다가 갑자기 위로 솟구쳐 오르고 있다. 홍매에 핀 매화꽃은 분홍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백매의 매화꽃 중 일부를 묘사하는데 흰색 안료인 호분(胡粉)이 사용되었다. 괴석과 매화의 몸통 및 가지에는 녹색 태점(苔點)이 찍혀있다. 바위와 나무에 난 이끼를 표현하기 위해 찍는 작은 점을 태점이라고 한다. 유숙은 장대한 화면에 마치 율동을 하듯이 이리저리 자유롭게 뻗어 나간 매화 가지들의 움직임을 먹과 채색을 사용해 묘사하였다. 매화 가지들의 움직임은 매우 자연스럽다.

 

제7폭과 제8폭에는 유숙이 쓴 15행(行)의 제시(題詩)가 적혀 있다. 그런데 이 제시는 유숙이 지은 것이 아니다. 유숙은 명나라의 문인인 예경(倪敬, 1416-?)의 「제고어사소장매화도(題顧御史所藏梅花圖)」를 옮겨 적은 것이다. 「제고어사소장매화도 (題顧御史所藏梅花圖)」는 고어사(顧御史)가 소장하고 있던 매화도를 예경이 보고 고향에 핀 매화를 그리워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숙은 1868년 동짓달 상순 겨울비가 오던 어느날 찻주전자에서 나온 짙은 차 향기를 맡으며 이 병풍 그림을 길상실(吉祥室)에서 그렸다고 관지(款識)에 적었다.




글. 장진성(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꽃에서 시작된 밀랍이 다시 꽃으로…아름답다 ‘윤회매’ 

 

 

밀랍으로 만든 매화 ‘윤회매’
조선시대 이덕무 선생 창제
김창덕 작가 혼신 다해 재현
양림동에 문화관 열고 대중과 소통

봄에 피어야 할 매화가 겨울의 한복판이던 1월에 피어있다면 가짜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다시 꽃을 피웠으니 진짜 매화나 매한가지다.

“‘윤회매(輪廻梅)’는 밀랍으로 만든 매화입니다. 벌집을 한자로 밀랍(蜜蠟)이라고 해요. 꿀벌들이 꿀을 채우려면 벌집이 필요하잖아요. 꽃에서 성분을 추출해서 침을 섞어 입으로 벌집을 만드는 거죠. 꿀이 채워지고 나면 사람들이 벌집만 남기고 꿀을 사용해요. 남은 벌집으로 꽃을 만들었으니, 꽃에서 시작한 밀랍이 다시 꽃으로 가는 이치가 ‘돌고 도는 윤회’와 같다고 해서 ‘윤회매’가 된 것입니다.”

 
눈 앞에 피어있는 매화는 다음 김창덕 작가가 손으로 피워낸 ‘윤회매’다. 윤회매는 조선 정조때 실학자였던 청장관 이덕무(1741~1793) 선생이 창제한 것으로, ‘윤회매’라는 단어도, 밀랍으로 매화를 표현한 것도 이덕무 선생이다.

“겨울을 난 다음 봄의 전령사로 처음 꽃을 피우는 게 매화에요. 실제 매화가 피어서 지는 게 한 달을 못가거든요. 피고 지는 그 아쉬움 때문에 두고두고 찻 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만드신 거죠. 선생은 실제로 차인(茶人)이기도 하셨습니다. 차를 즐겨하시는 분들은 찻잔에 띄운 매화꽃을 보며 향도 맡고 마시기도 해서 좋아했다고 해요.”

가난한 선비였던 이덕무 선생은 책 외에는 친구가 없을 정도로 책을 좋아했다. 정조대왕이 왕실 도서관이자 학문기관인 규장각을 창설하면서 능력있는 서자(庶子)들을 대거 등용했는데 이덕무 선생도 서른아홉의 나이에 늦게 벼슬에 오를 수 있었다.

 
“이덕무 선생이 세상을 뜨고 3년 후 정조대왕이 ‘청장관 전서’를 내게 합니다. 청장관 전서는 이덕무가 생전에 쓴 글을 정조의 명을 받고 이덕무의 아들이 모은 문집입니다. 임금이 신하 책을 문집으로 내게 한 건 드문 일이었는데, 그만큼 아꼈다는 거지요.”

 
◇‘청장관 전서’ 읽으며 윤회매 재현= 다음 작가는 차(茶) 문헌을 보다가 윤회매를 알게 됐다. 궁중채화장 황수로가 쓴 ‘윤회매 십전’을 읽으면서 1998년 처음으로 윤회매를 제작했다. 윤회매 십전은 ‘청장관 전서’ 10번째 책에 나온 것으로, 이덕무가 직접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적으며 윤회매를 만드는 10가지 과정을 상세히 남겼다.

책을 보고 재현한 윤회매는 매화 그 자체다. 밀랍과 노루털, 나뭇가지, 색소 등 천연재료들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굳어있는 밀랍은 75℃의 열을 가해 녹인 다음 ‘매화골’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잎을 만든다. 꽃술은 노루털을 사용하고 옻칠을 해서 황을 묻힌다. 매화잎과 꽃술, 꽃받침 등은 밀랍땜질로 나뭇가지에 붙이면 완성된다.

홍매화는 분말로 된 붉은매화로, 푸른빛의 매화는 분말로 된 쪽빛을 구해와 색을 표현했다. 나뭇가지 역시 본래의 매화가지를 이용한다. 작가가 직접 나뭇가지를 구하러 다니는데 ‘매화님에게 빌리러 가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옛 분들은 매화를 전지하지 않으면 어리석다고 했고, 벚꽃은 전지를 해주면 어리석다고 했어요. 벚꽃은 나무 수형 구조가 타고나므로 전지해주면 거기서부터 썩어들어가는 거죠. 매화가지는 수형을 해주지 않으면 멋이 없어요. 매화나무가 휘어서 멋있게 보이는 건 부러졌거나 전지를 해주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거에요.”

매화가지는 가을에 전지해야 단단하다. 겨울에 얼어죽지 않으려고 안에서 수맥을 차단하는데 이때 전지하는게 좋다. 채취해 온 나뭇가지는 한달 정도 건조를 시킨 다음 100℃로 끓인 밀랍에 담근다. 나뭇가지 안에 밀랍이 스며들어야 좀이 생기지 않는단다. 가지 작업을 제외하고라도 꽃잎을 만드는 데만 사흘이 꼬박 걸린다.

다음 작가는 매화 필 무렵이면 ‘도망’을 잘 다닌다. 매화를 보러 떠나는 거다. 그의 주머니에는 항상 ‘루뻬’(확대경)가 들어있다. 매화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꽃술도 자세히 보는데 45~47개까지 세어본 적이 있다.

그동안 항아리에 꽂은 윤회매를 표현해 오던 작가는 최근 평면화 시켰다. 일명 ‘윤회도자화’다. 항아리에 꽂아두면 오픈돼 있어서 먼지가 앉기도 하고 망가질 우려가 높다. 여름철에는 그나마 괜찮지만 날씨가 추워지면 유리처럼 바스라지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꽃이 상하지 않고 보호될까 고민하다가 평면으로 옮긴 거에요. 여기에 우리 도자기를 접목한 거죠. 말차 마시는 다완, 꽃 꽂는 화병 등 차와 어울리는 우리 도자기와 접목을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도자기 작업은 꽃 만들 때 보다 시간이 더 소요된다. 돌가루를 이용하는데, 말리는 과정만 15일이 걸린다. 여러번 덧대서 다시 바르고 난 후 사포질 하고, 그림 그리고, 옻칠(아홉 번)을 하거나 보이차를 진하게 우려서 색을 표현하기도 한다. 윤회매를 재현하는 일도 만만치 않지만 창작자 입장에서 새로운 걸 시도하는 작업도 설렘으로 다가온다.

◇윤회매 문화관 열고 대중 곁으로= 많은 이들에게 청장관 이덕무 선생의 사상과 성품, 삶을 알리고, 더불어 윤회매를 알리고 싶었던 다음 작가는 광주시 남구 양림동에 윤회매 문화관을 열었다. ‘찻집’이라는 문패도 함께 달았다.

“이곳에 오시면 차(茶)와 음악이 있습니다. 거기에 또 윤회매가 놓여있는 거죠. 저는 윤회매를 통해 이덕무 선생의 삶을 알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차도 하나의 물에서 나온 같은 맛이잖아요. 하지만 이걸 판단하는 건 각자에게 맡기는 거에요. 향이 어떻고 맛이 어떻고 느끼는 건 다 다를 수 있어요. 하지만 근본은 하나인 거에요. 전체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전체인 것. 이덕무 선생은 그걸 윤회매를 통해 인문학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는 14일부터 3월 17일까지 광주 은암미술관에서는 다음 작가의 ‘윤회도자화, 찻잔에 잠기다’ 전이 열린다. 윤회매 작품 30여 점이 관람객들과 만날 예정이다. 전시 기간동안 매주 토요일 오후 2~3시 차와 함께하는 ‘작가와의 대화’ 시간이 마련되며 2월 29일에는 관람객들 앞에서 윤회매 꽃피우는 모습을 보여줄 계획도 갖고 있다.

지난해 완성한 청장관 전서 필사본도 전시회를 통해 처음 공개한다. 6개월에 걸쳐 한글과 한자본으로 각각 필사하고 절첩식으로 이어붙였다. 펼치면 한자본은 10m30㎝, 한글본은 22m76㎝나 된다.

/이보람 기자 boram@kwangju.co.kr

/사진=나명주 기자 mjna@·김창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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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wangju.co.kr/read.php3?aid=1581346800688979295

 

문화재청, 천연기념물 매화 개화소식 안내

- 순천 선암사‧장성 백양사‧구례 화엄사 매화 3월 말 만개 -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국민이 자연유산과 함께 코로나19에 지친 심신을 달랠 수 있도록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전국 매화나무의 개화소식을 알렸다.


  매서운 겨울추위를 뚫고 꽃을 피우는 매화는 역경을 견디고 지조를 지키는 고매한 인격을 닮아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 시·서·화로도 사랑받았다. 월암 이광려의 꽃향기를 읊은 매화시와 중국 청나라 화가 나빙이 박제가에게 우정의 뜻으로 전한 매화그림, 김창흡이 지은 5,000여수의 매화시가 전해져 당시 매화유행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나빙(羅聘) : 중국 청나라의 화가(1733~1799)로 양주팔괴(양주지방의 대표적 여덟명의 화가) 중 한
              사람이며 인물, 산수, 매화 등을 활발한 화법으로 잘 그림


  2007년 문화재청은 오랜 세월 우리 생활‧문화와 함께해온 한국의 4대 매화(순천 선암사 선암매, 장성 백양사 고불매, 구례 화엄사 매화, 강릉 오죽헌 율곡매)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다. 이들 매화는 지역별로 다소 차이는 있으나 오는 3월 말까지 매화의 꽃망울과 만개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천연기념물 구례 화엄사 매화와 순천 선암사 선암매는 3월 20일경에 개화 예정이고 장성 백양사 고불매는 그보다 사나흘 뒤인 3월 25일경에 활짝 핀 꽃을 보게 될 전망이다. 특히, 화엄사는 매화 사진 공모전인 ‘제2회 홍매화·들매화 사진 대회’(3.10.~27.)를 열어 관람객들이 방역수칙을 준수하는 가운데 참여할 수 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전화(☎061-783-7600, 화엄사)로 문의하면 된다.


  다만, 노거수인 강릉 오죽헌 율곡매는 2017년 닥친 급작스런 기온상승에 피해를 입어 연내 개화 소식을 듣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외에도 3월말에 괴산 송덕리와 영동의 미선나무 꽃이 피고 4월 초순경에는 구례 화엄사 올벚나무 꽃이, 4월 말에는 내장산 굴거리나무 꽃이 피는 등 천연기념물 식물의 개화소식도 있다.


  문화재청은 적극행정의 하나로 기후변화에 취약한 매화 등 천연기념물 식물을 건강하게 돌보기 위해 상시관리 이외에도 천연기념물이 자리한 지역의 공동체가 자율적으로 노거수의 생육상태를 수시로 점검하여 선제적으로 관리 될 수 있도록 전문가 현장 상담과 관리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자연유산 지역공동체 활동을 지원할 계획이다.
 

  문화재청은 세상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홀로 단아한 꽃을 피워내 봄을 알리는 천연기념물 매화가 자연유산을 즐기고자 하는 국민에게 위로와 휴식을 주길 바란다. 앞으로도 매화를 비롯한 천연기념물 식물이 제철을 따라 꽃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보존관리에 최선을 다할 것이며, 자연유산이 일상 속에서 치유와 휴식의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을 통해 체험‧향유 기회를 국민에게 제공할 계획이다.

 

 

[문화재방송 캠페인]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