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kakaocdn.net/dn/bIwSXR/btruqGj6lQ2/e0qyfyG86x5MACCzNhQLH1/img.jpg)
![](https://blog.kakaocdn.net/dn/rxtXA/btruiSGBS00/ymLxODEpagy2ktHcj3wuo1/img.jpg)
우리는 매년 삼일절이 다가오면
선열의 희생과 그날의 함성을 잊지 말자며
독립운동가들께 추도의 메세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함성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우리가 이날을 ‘국경일’로 축하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b0RS0n/btrup8VhWt4/4kMMMfjLQ8BybbW2nEIOV0/img.jpg)
1920년, 삼일운동 1주년을 전후로
독립정신을 상기하는 전단들이 국내에 뿌려졌습니다
이들 전단에는 놀랍게도
삼일절을 ‘대한민국 건국기념일’로 부르며
이날을 ‘축하’할 것을 호소한 대목이 수없이 나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bDcrcc/btrulSrWY6z/XI2ZyvtzxcMkXzlWbejZ70/img.jpg)
아! 경사로다! 건국의 기념일이여!
반도강산 이천만 민족의 생명은
이날부터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 2년 2월 <혈성단>
기뻐하세 오늘 우리 대한민국 기원절
이천만 동포들이여 경축하세
우리들의 새 생명을 되찾은 날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경축하세
기원절경축가 1절 (기원절은 대한제국의 건국기념일을 부르던 명칭이었다)
![](https://blog.kakaocdn.net/dn/bXl6E9/btrup72969K/bFcH5ZWtdDHdooFriQsCc0/img.jpg)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독립운동가들은
삼일절을 건국의 명절로 축하하자고 한 것일가요?
그 이유는 삼일운동이 나라를 되찾자는 것을 넘어
국민이 주인인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세우는
건국운동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https://blog.kakaocdn.net/dn/bDTta8/btrueyg0nrU/OJCiddKnCDscFEU21ORUb0/img.jpg)
실제로 삼일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은
독립 후 세울 국가로 민주공화국을 상정했습니다
민주 정체(政體)로 할 생각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런 생각인 것으로 생각한다
33인 대표 손병희 선생, 독립 후 세울 국가에 대해 묻는 일본 예심판사의 앞에서
만세운동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황해 수안의 시위대는 “공화정치가 대세”라고 외쳤고
평북 선천에서는 새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겠다는
전단이 만세시위 현장에서 낭독되기도 했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NrhpP/btrukfgHGTB/25wmATHTUKAQkVc9wuaCAK/img.jpg)
민주공화국 수립을 꿈꾼 민족의 염원은
우리 민족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삼일절을 축하한 것은
새 나라를 세우고자 한 삼일운동의 정신이
민주주의 국가의 출발이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wjyWD/btrukg7FnpJ/bNfCcBOrGc3iAjkJPoiZL0/img.jpg)
그리고 해방 이후 제정된 제헌헌법은
임시정부의 헌법과 건국강령을 모태로 제정되었고
전문에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고 적어
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의 역사 인식을 계승했습니다
삼일절이 국가경축일(국경일)로 지정된 것은
삼일운동 정신을 건국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https://blog.kakaocdn.net/dn/czXzij/btrukfHFbj5/lc36JhIifPRMT32e05jl1K/img.jpg)
19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삼일절은
새 민주국가의 기원(起源)을 축하하는 최대 국경일로서
퍼레이드, 예술제, 불꽃놀이 등으로 크게 축하됐습니다
그러나 군사정부 이후 경축 문화가 소실되면서
축제와 같았던 삼일절 분위기도 역사 속에 잊히고
삼일절의 역사적 의미 또한 퇴색하게 됐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buRZMm/btrujJvT07E/S3J8oYkvUKg6aBNkMdFv9K/img.jpg)
대한 사람은 가는 곳마다 있는 곳마다
천 년 후 만 년 후까지 자자손손히
열성과 환희로써 지켜 축하할 3월 1일
1920년 3월 임시정부 <독립신문>
삼일절은 단순한 독립운동기념일도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슬픈 날도 아닙니다
새로운 국민의 나라, 대한민국의 잉태를 기념하는
자랑스럽고 기쁜 겨레의 명절입니다
![](https://blog.kakaocdn.net/dn/NuRbn/btruqFFvwer/DDjwCOKXc3EzuaAFj5JGV0/img.png)
3월 1일은 제 103주년 삼일절입니다. 1919년 3월 1일, 당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일제의 압박에 항거하기 위해 우리나라는 전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평화적 시위를 열었는데요. 이러한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정부는 1949년 이 날을 국경일로 정하였습니다. 오늘은 삼일절을 맞이하여 1919년 3월 1일 그날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데요. 이야기하기에 앞서, 3.1운동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1운동의 역사적 배경
![](https://blog.kakaocdn.net/dn/b0OaY6/btruexvDtfy/Zj5ZX7UsKFQMJA9JQnDVU1/img.jpg)
미국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 [출처: 위키피디아]
*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 (1918.01.08.)
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제로 병탄된 뒤 한국의 의병·열사들은 일본의 부당한 침략에 항거하여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나선 가운데,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 T. W.)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었습니다. 윌슨이 제안한 민족자결주의는 각 민족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는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요. 한국의 민족지도자들은 이에 의거해 한국 민족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bWXiYX/btruqFS2CGF/GZ16HyCvYu8kj67G8eXdG1/img.jpg)
대한제국 고종 황제 [출처: 위키피디아]
* 고종황제 붕어(崩御) (1919.01.21.)
민족자결주의 발표 이래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어가던 때,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갑자기 붕어하였습니다. 덕수궁에서 기거하던 고종황제는 당시 68세로 건강한 편이었는데, 갑작스런 중병으로 붕어했다는 발표가 있자 국민들은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 때 마침 일제가 독살했다는 말이 퍼져 온 국민들은 망국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크게 동요하게 되었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ckrUiK/btrupJuBEk0/QgPW44SbfdJcmRrCWNDMp1/img.jpg)
조선 청년 독립단 [출처: 재일본한국YMCA]
* 재일유학생의 2.8독립선언 (1919.02.08.)
일본 도쿄에서 거행된 2.8독립선언은 이러한 분위기에 불을 당겨 3.1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청년독립단은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하였고, 이에 장내는 독립만세 소리와 환호성으로 가득 찼습니다. 하지만 일본 경찰에 의해 조선청년독립단 10명의 대표가 잡히게 되었고, 이에 유학생들은 전원이 귀국할 것을 결의하고 국내에 돌아와 3.1운동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3.1운동의 경과
![](https://blog.kakaocdn.net/dn/bc1Bnd/btrunOpF2Kf/Y3mE7yqlq0fQooWWqbKN2k/img.jpg)
3⋅1 운동 민족 대표자 모임(민족 기록화)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민족대표 33인의 독립 선언서 낭독
3월 1일 정오경부터 민족대표 일동은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가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한편 태화관 주인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가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나서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게 하였는데요. 이 통고를 받은 일본경찰대는 즉각 달려와 태화관을 포위하였습니다. 이 때 민족대표들은 독립을 선언하는 한용운의 간단한 식사를 들은 후,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의연하게 일본 경찰에게 연행되었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zk3TY/btruoLTB8sI/aK6NcQ0k6xKi46gwm0k6AK/img.jpg)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시민들의 모습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
이 무렵 탑골공원에서는 서울의 중등학교 이상의 남녀학생 4,000~5,000명이 몰려와 독립선언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본래 독립선언식은 탑골공원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학생들의 희생을 고려하여 민족대표는 태화관에서 모였던 것이었습니다. 오후 2시가 되어도 민족대표가 나타나지 않자,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한 청년이 자진하여 단상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의 낭독이 거의 끝날 무렵, 학생들은 모자를 하늘로 날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이들이 선언을 끝내고 탑골공원을 나서자 수만의 군중이 호응하며 함께 시위 행진을 전개하였고, 시위 대열이 대한문 앞에 이르렀을 때는 온 서울 시내가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들끓었습니다. 시위행렬은 대한문 앞에 이르러 고종황제의 빈전을 향해 삼례를 올렸습니다. 시위 행진은 각 동으로 퍼져 나갔으며, 해질 무렵부터는 교외로 번져나갔으나 단 한 건의 폭력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본 군대와 기마 경찰의 무력저지로 인해 평화적 시위를 하던 군중들은 강제 해산되고 주모자 130여 명이 체포, 구금되었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TK8y6/btruh7Rx47c/C2BHxzeWI3VaHyQY2to2wk/img.jpg)
* 3.1운동의 전국적인 확산
3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을 벌인 곳은 비단 서울만은 아니였습니다.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 이북지방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는데요. 이렇게 3월 1일에 점화된 독립만세운동의 불길은 날이 갈수록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등 전국 각지로 번져갔으며, 3월 21일에는 제주도에까지 파급되어 한국 역사상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IeCGP/btrujJo9cUd/g1RbOifXKkjTXbEJBRfkn0/img.jpg)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출처: 천안시 유관순열사기념관]
*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1919.04.01.)
특히 독립운동사의 대표적인 만세운동으로 꼽히고 있는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은 유관순 열사의 활약으로 잘 알려져 있죠. 1902년에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난 유관순 열사는 1916년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하게 되고, 조국독립을 위한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강연회 등에 적극 참여하게 되는데요. 3.1만세운동에도 참여하여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인 천안으로 돌아가,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검거되어 투옥 중에도 옥중만세운동을 벌였고,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나섰던 독립운동가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다시 한 번 기억하는 삼일절이 되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합시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랜선 타고 울려 퍼지는 ‘삼일절 함성’
![](https://blog.kakaocdn.net/dn/djp0by/btruh66bf9C/fZyP1gYcfPXAZR68nerjW0/img.jpg)
삼일절 103주년을 맞아 ‘메타버스 서대문, 1919 그날의 함성!’ 프로그램이 열린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사진) 주최의 행사로 메타버스와 줌(ZOOM) 등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해 진행된다.
메타버스 플랫폼 ‘모임’(MOIM)에서는 3·1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가 선보인다. 3월1일 오전 11시와 오후 2시부터 각 30여분 동안 운영한다. 시간별로 200명씩 모두 400명을 모집하며 참석자들은 소정의 기념품을 받는다. 메타버스로 참여하지 못하는 시민들을 위해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유튜브 채널’로 생중계한다.
사전 공연 ‘클래식으로 만나는 1919 그날의 함성’도 펼쳐진다. 시인 심훈의 ‘그날이 오면’을 주제로 제작된 미니드라마도 상영된다. 유관순 열사가 수감됐을 때 동료들과 함께 독립의 의지를 담아 불렀던 ‘8호 감방의 노래’도 감상할 수 있다.
23일부터는 메타버스 ‘제페토’ 플랫폼을 활용해 가상공간에 재현한 ‘서대문형무소 맵’이 공개됐다. 시민들은 자신의 캐릭터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둘러볼 수 있다. 실제 현장을 찾은 것처럼 옥사 내부에 들어가고 ‘이달의 독립운동가 전시’도 관람할 수 있다.
‘내 손으로 만드는 역사’ 프로그램은 화상회의로 진행된다. 애국지사 책 만들기, 태극기 액자 만들기, 독립운동가 어록 무드등 만들기 등이 26~27일, 3월5~6일 각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열린다. 회당 50명씩 총 400명이 참여할 수 있다. 전문 강사가 줌으로 실시간 소통하며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역사적 의미도 함께 소개한다.
3월1일엔 오프라인 행사도 열린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현장에서는 사진 인화 서비스가 진행된다. 방문객들은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캘리그래피로 표현된 독립운동가 어록과 함께 인화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 복장의 전문 연기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예약을 통해 시간당 400명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프로그램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사진 서대문구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3·1운동 전세계 알린 벽안의 기자…가옥 '딜쿠샤'와 돌아왔다
[중앙일보] 입력 2021.02.28 06:00
#나이 22살의 청년은 아버지를 따라 배에 올랐다. 광산사업가인 아버지를 따라 도착한 곳은 조선. 1897년 서울에 살기 시작한 앨버트 테일러와 조선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14살이나 어린 아내 메리 테일러를 만난 건 그로부터 20년 뒤의 일이었다. 신혼살림은 서울 충정로7길 부근의 '작은 회색 집'에서 시작했다.
3·1운동과 앨버트 테일러
앨버트 테일러. 3·1운동과 독립선언서를 세계에 알렸다. 사진 서울시
#1919년 2월 28일. 미국 AP통신 임시 특파원으로 활동하던 앨버트는 고종의 국장(國葬) 취재를 마치고 세브란스 병원으로 향했다. 아내가 아들을 출산해 병원을 들른 그에 눈에 병원 침대 속 감춰진 종이뭉치가 들어왔다. 한국어를 할 줄 알았던 그는 단박에 '독립선언서'를 알아봤다. 황급히 기사를 쓴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동생에게 기사와 독립선언서를 전달했고, 같은 해 3월 13일 뉴욕타임스에 3·1운동이 보도된다.
벽안의 이방인이 해낸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해 4월 15일 당시 수원(지금의 화성시) 제암리에서 만세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이 주민을 집단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사건 다음 날 현장을 방문해 불타는 마을을 촬영하고, 생존 주민을 취재해 일본의 탄압을 세계에 알렸다.
3·1운동을 세계로 알린 사나이…'딜쿠샤'를 짓다
앨버트 테일러 가옥인 '딜쿠샤'의 옛모습. 사진 서울시
서울에 살던 앨버트는 한양 도성 성곽을 따라 산책하다 '은행나무골'로 불리던 곳에 땅을 사들어 집을 짓기 시작했다.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란 뜻의 '딜쿠샤'란 이름도 붙였다. 1924년 붉은 벽돌집이 완공됐지만 2년 뒤 낙뢰로 불에 탔다. 앨버트는 1930년 같은 자리에 다시 집을 지었다.
일제의 압박은 그에게도 이어졌다. 1941년 앨버트 가족은 일제에 의해 연금됐고, 이듬해 강제 추방됐다.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6년 뒤 캘리포니아에서 숨을 거뒀다. 아내 메리는 생전 한국을 그리워하던 앨버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유해와 함께 그해 한국을 방문했다. 앨버트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안장됐다.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딜쿠샤'
오는 3월 1일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딜쿠샤' 전시관. 온라인 사전예약으로만 관람이 가능하다. 사진 서울시
방치되다 국가 소유가 된 딜쿠샤는 이후 집 없는 서민들의 공동주택으로 쓰이기도 했다. 잊혀지던 딜쿠샤를 찾아낸 것은 2005년의 일이었다. 앨버트의 아들이 서일대 김익상 교수에게 어린 시절 살던 집을 찾아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1년 뒤인 2006년 아들 브루스 테일러는 66년 만에 서울을 찾아 딜쿠샤를 돌아봤다.
2015년 브루스 테일러마저 사망하자 이듬해 서울시는 원형복원에 들어갔다. 2018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딜쿠샤가 등록되면서 복원속도는 빨라졌다. 종로구 행촌동에 있는 딜쿠샤는 지하 1층~지상 2층의 건물로, 서울시는 지난해 12월 복원 공사를 마쳤다. 서울시는 이번 3·1절을 기해 '딜쿠샤'를 개방하기로 했다. 앨버트가 강제 추방된 지 약 80년 만이다.
딜쿠샤 전시관 돌아볼까
앨버트 부부가 사용하던 당시 유물들. 앨버트의 손녀인 제니퍼 테일러는 당시 사용하던 유물을 기증했다. 사진 서울시
1~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의 삶의 흔적이 담긴 1920년대를 복원했다. 2층 전시실엔 당시 언론활동을 비롯해 딜쿠샤의 건축 복원 과정을 볼 수 있게 해놨다. 3월 1일을 기해 공개되는 딜쿠샤 전시관은 매주 화~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된다. 입장은 무료지만 사전 예약을 해야만 둘러볼 수 있다. 하루 4차례 관람이 진행되며, 1회당 가능 인원은 20명이다.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을 통해서만 신청할 수 있다.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이자 유물 기증자인 제니퍼 테일러는 “이번 개관으로 한국의 독립투쟁에 동참한 서양인 독립유공자가 재조명받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서정협 서울시장 권한대행은 “서대문형무소, 경교장 등 딜쿠샤 전시관 인근 항일운동 관련 클러스터를 통해 독립을 위해 헌신한 모든 분을 기억하고 정신을 계승해나가겠다”고 밝혔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출처: 중앙일보] 3·1운동 전세계 알린 벽안의 기자…가옥 '딜쿠샤'와 돌아왔다
news.joins.com/article/24001676
3·1운동 전세계 알린 벽안의 기자…가옥 '딜쿠샤'와 돌아왔다
황급히 기사를 쓴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동생에게 기사와 독립선언서를 전달했고, 같은 해 3월 13일 뉴욕타임스에 3·1운동이 보도된다. 아내 메리는 생전 한국을 그리워하던 앨버트의 뜻을 기
news.joins.com
['푸른 눈의 抗日운동가' 윌리엄 린튼의 3·1운동 증언 실은 美신문 첫 공개]
"어린이도, 노인도, 양반도, 종도… 손에 손에 태극기만 든 채 전국 곳곳의 거리로 "
윌리엄 린튼(왼쪽 사진) 선생이 1919년 5월 미국 애틀랜타 저널에 일제 치하 한국의 상황과 3·1운동의 실상을 알리며 국제사회의 지지를 호소한 기사(오른쪽). 제목은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한 애틀랜타인의 증언'이다. /한남대 제공
"3월 1일 전국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한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폭력이나 무질서는 없었다. 일본 정부가 이 봉기를 억누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참가자들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감옥은 한국인들로 차고 넘쳤다. 어린이도, 노인도, 양반도, 종도,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있었다. 수천 명의 항일운동가들이 총검에 짓밟혔으나 누구도 (폭력적) 저항을 하지 않았다."
1919년 5월 '푸른 눈의 항일운동가'로 불렸던 미국 선교사 윌리엄 린튼(한국 이름 인돈·1891~1960)의 3·1운동에 대한 증언을 보도한미국 애틀랜타의 지역 신문인 '애틀랜타 저널(The Atlanta Journal)' 기사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일제강점기 한국 현실과 3·1운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려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쓴 글이다. 린튼이 1956년 세운 한남대학교(구 대전대학)가 최근 교내 아카이브에서 이 기사를 발견했다.
린튼은 전북 군산의 3·1운동을 지도하는 등 한국 국권 회복과 교육 사업에 헌신했던 인물이다. 21세에 한국으로 건너온 그는 3·1운동 당시 28세였다. 1940년 일제에 의해 쫓겨났다가 광복 이후인 1946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성서학교를 운영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우리 정부는 2010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기사 제목은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한 애틀랜타인의 증언(Atlantian tells how Koreans are seeking liberty)'. 신문은 3·1운동을 '세계사(史)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봉기'라고 평가했다.
린튼은 이 신문에 "3·1운동은 한국이 최초로 일본의 압제하에서 자국의 무기력함에 대해 세계에 알리려고 노력한 첫 번째 시도"라며 "그것은 폭력 없는 저항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3월 1일, 인구 30만 명의 수도 서울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 행진했다. 폭력과 무질서는커녕, 일본 정부가 군중을 해산하려고 할 때 저항조차 없었다. 그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있었을 뿐이다. (중략) 잡혀온 한국인들로 감옥에 더 이상 자리가 없자, 군부는 기병대대를 보내 수백 명의 한국인들을 말발굽으로 짓밟았다. 하지만 여전히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일본은 더 강한 군사력을 투입했고, 수천 명의 항일운동가들은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고 총검에 쓰러져갔다."
그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간절히 호소했다. "한국의 운명은 동맹국가에 달려 있다"며 "파리평화회의는 30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한민족의 민족 정체성과 역사, 그리고 문화를 말살해온 일본 정부에 대항하는 한국 국민의 봉기에 응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린튼의 손자인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장은 "할아버지는 일평생 한국을 사랑했던 분"이라며 "이 기사는 한국인들이 자유독립을 위해 비폭력 평화주의라는 놀라운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출처: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2/28/2015022800210.html?news_Head1
만세운동 세계에 알린 석호필… 조국 독립 외친 ‘세브란스의 33인’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2부>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10) 스코필드와 세브란스
여인석 연세대 의대 의사학과 교수가 지난 4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서 3·1운동 당시 해부학 실습실에 독립선언서를 숨긴 장면을 담은 기록화를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1919년 3·1운동 당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세균학 교수였으며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린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최연소자였던 세브란스병원 제약주임 이갑성 남대문교회 집사(국민일보 2월 21일자 31면 참조)에게 거사 일정을 전해 듣고 서울시내 만세시위 현장을 직접 촬영해 세계에 알렸다. 그해 4월 일제가 경기도 화성 제암리와 수촌리에서 양민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학살하자 현장으로 달려가 참상을 촬영하고 관련 보고서를 남겨 일제의 잔학무도함을 고발했다. 소아마비 장애가 있는 몸으로 서양인 그 누구보다 거세게 일제에 항거한 의학자이자 선교사였던 프랭크 W 스코필드(석호필·1889~1970) 박사 이야기다.
스코필드 박사가 잠들어 있는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한강과 동작대교를 굽어보는 애국지사묘역 96번이 그의 무덤이다.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힌 외국인은 단 3명이다. 그중 2명은 6·25전쟁 당시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화교로 동양인이다. 서양인으로는 스코필드 박사가 유일하다. 그의 묘비엔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 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소년 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맡아주세요”란 유언이 새겨져 있다
도와주던 소년 가운데 한 사람이 정운찬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다. 정 총재는 지난 4일 서울대 수의대에서 열린 추모기념식에 참석해 “박사가 내주신 학비로 중·고교를 다녔다”면서 “박사는 위대한 독립운동가일 뿐만 아니라 한없이 자상하고 따듯한 은인”이라고 말했다.
정 총재는 앞서 연세대 의학사연구소가 엮은 ‘세브란스인의 스승, 스코필드’란 책에 기고한 글에서 “박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나에게 친아버지나 다름없었다”면서 “영어 성경 공부를 비롯해 삶에서 배워야 할 것의 대부분을 그에게서 배웠다”고 회고했다. 특히 “약자에겐 비둘기 같은 자애로움으로, 강자에게는 호랑이 같은 엄격함으로 대하라는 가르침이 생각난다”고 전했다.
세브란스의전 시절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
석호필(石虎弼)이란 한국 이름은 스코필드 박사가 스스로 지었다. 한국과 한국인을 위한 바위와 같은 우직함(石), 불의를 참지 않는 용맹함(虎), 그리고 따듯한 배려와 도움(弼)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강대국들로부터 고립돼 고난을 겪은 한국인을 사랑했던 근면한 영국계 캐나다 이주민이었다. 목회자였던 선친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 싶어 한 기독교인이었으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한국에 자원한 선교사였다.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간절히 추구하다 일제에 의해 20년에 쫓겨나지만, 해방 후인 58년 국빈 자격으로 돌아와 서울대 수의대에서 후학을 가르치다 70년 별세했다. 생전인 68년 독립훈장 독립장이 수여됐다.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운동으로 훈장 포장 표창 등을 받은 세브란스 구성원은 총 33인이다. 세브란스의 민족대표 33인으로 부를 만하다. 교수 학생 간호사 직원 등 전체 직군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했다. 여인석 연세대 의대 의사(醫史)학과 교수는 “54년 독립장을 받은 세브란스의전 설립자 올리브 에비슨 선교사를 포함해 다양한 직군의 의료기관 종사자들이 한마음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된 데는 세브란스 학생들의 역할이 컸다. 세브란스병원 지붕 바로 아래의 옥탑방인 해부학 실습실에서 독립선언서와 유인물이 비밀리에 제작·보관됐다. 경남 김해 출신 배동석은 김해 마산 함안 등의 3·1운동을 주도해 학생 가운데에선 드물게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21년 숨졌다.
송영록은 개성 만세운동을 조직했고, 김병수는 고향 군산으로 독립선언서를 전달해 전북 최초 만세시위를 촉발했다. 충남 공주의 양재순, 경북 안동의 이주섭, 평양의 곽권웅, 평북 선천의 고병간이 세브란스 출신으로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세브란스 간호사들은 19년 3월 5일 당시 병원이 있던 남대문 정거장 앞 만세시위에서 일경의 총칼로 다수의 부상자가 생겨나자 붕대를 들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정숙 노순경 박덕혜 이도신 김효순 박옥신 윤진수 이성완 이아주 장윤희 체계복 등이 체포됐다. 이들 대부분은 이후 김마리아 선생(국민일보 3월 14일자 31면 참조)이 주도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참여해 독립운동가 옥바라지와 독립자금 모금 등을 도왔다.
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세브란스 졸업생들이 활동한다. 세브란스병원의학교 1회 졸업생이자 김구의 손위 동서였던 신창희는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을 도우며 임시정부 군의와 대한적십자회 상의원으로 활동했다. 역시 1회 졸업생인 주현측은 임시정부 재무부 참사를 역임했다. 그는 18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후배 신현창과 함께 삼일의원을 개원해 병원 수익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했다.
여 교수는 “세브란스는 선교사들이 시작했지만, 이후에는 한국 사람이 주체가 돼 한국 사람들을 돌봤기에 한국인의 주체적 활동을 막는 일제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72082&code=23111668&cp=du
만세운동 세계에 알린 석호필… 조국 독립 외친 ‘세브란스의 33인’
1919년 3·1운동 당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세균학 교수였으며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린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최연소자였던 세브란스병원 제약주임 이갑성
news.kmib.co.kr
3.1절 마다 떠 오르는 "34번째 민족대표 석호필 박사"
[데일리안 김선영 기자]문화와 정보의 홍수로 글로벌화된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매년 한 번씩 나라에 대한 경외감과 주권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기념일이 있다. 바로 삼일절이다.
매년 돌아오는 3월 1일은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의 단결을 굳게 하며, 국민의 애국심을 함양하기 위해 제정된 기념일로 우리나라 4대 국경일의 하나이다.
![]() |
그러나 세대가 바뀌고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날이 갈수록 국경일의 의미가 희미해지고 있는 안타까움을 직면하게 된다. 비단 3.1절 뿐만아니라 8.15 광복절과 한글의 날 등 국민들 의식속에 국경일은 단지 달력속의 빨간날짜이자 하루종일 게으름을 떨수 있는 날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다시금 태극기 사랑하기 같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여러가지 프로그램과 운동이 시기적절하게 펼쳐지고 있는데 숨어있는 애국자의 재조명과 같은 것도 유익한 사회운동이라고 생각된다.
올해로 88주년을 맞이한 3.1절을 앞두고 네티즌들이 한창 열광해 하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석호필'이라는 애칭을 가진 배우 마이클 스코필드가 출연하는 '프리즌 브레이크'라는 드라마로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은 형을 구하기 위해 일부러 감옥에 가서 탈출극을 벌이는 동생의 이야기이다.
그가 이처럼 열광적인 인기를 누리는 까닭은 극의 재미는 물론이거니와 과거 '맥가이버'라는 캐릭터 뺨치게 머리가 좋아서 감옥을 신출귀몰하게 탈출하는 내용만이 아니라 '석호필'이라는 애칭이 한몫 톡톡히 하고있다.
![]() |
◇ 생전의 석호필 박사의 모습 |
석호필이란'스코필드'라는 영문 이름을 한국식으로 읽은 데서 유래한 것인데 실은 근래에 화제가 되고 있는 스코필드 박사(Frank W. Schofield, 1888~1970.4.12)의 한국 이름이기도 하다.
그는 기미년 3월 1일 대한민국의 민족운동이자 힘없는 백성들이 나라를 강점하고 있던 일제에게 무력으로 대항했던그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한사람의 독립투사였고 민족의 대표였다.
독립선언서를 선포한 민족대표 33인에 석호필박사가 새롭게 재조명 되면서 '33인이 아닌 34인'이라는 역사의 증명과 함께 3.1절에 방영될 다큐멘터리도 준비된 것으로 알고 있다.
1919년 3·1운동의 '34번째 독립운동가'로 꼽히는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세균학 전문 의료선교사를 자원, 한국 땅을 밟았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 및 위생학을 가르치면서 이상재 이갑성 오세창 등 독립 운동가들과 교류, 3·1운동에 적극 참가했다. 그는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고 있는 민중과 일제의 만행을 사진으로 찍어 해외에 알렸다.
유관순 등이 갇혀 있던 서대문형무소를 직접 방문하기도 한 그는 이듬해 3·1운동 목격담인 '끌 수 없는 불꽃'을 해외에서 출판하려다 출국 직전 암살당할 뻔했다.
그는 카메라와 펜으로 무장하고 한국의 독립과 일제 강점기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1920년 조선총독부 당국에 의해 강제출국을 당할 때도 총독에게 청하여 옥고를 겪고 있는 이상재·이갑성·오세창 등 독립지사를 일일이 면회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강제 추방된 그는 캐나다로 돌아간 뒤 한국 상황을 알리며 1955년까지 토론토 병원에서 일했다. 해방후 다시 한국을 찾은 그는 1969년 한국에 영구 귀국, 서울대 수의대에서 강의하면서 사비를 털어 장학금으로 쾌척하는 등 후학을 위해 많은 헌신을 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최초로 묻힌 유일한 외국인이다. 그는 고아들을 돌보고 독재 정권에도 항거했으며 1970년 지갑과 여권만을 유품으로 남긴 채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정부는 그에게 대한민국 문화훈장(1960)과 건국훈장 독립장(1968)을 추서했다.
![]() |
◇ 외국인으로서 유일하게 국립묘지에 안장된 석호필박사 ⓒ 연합뉴스 |
석호필이라는 이름을 검색하면 온통 마이클 스코필드의 정보만 인터넷을 점유하고 있지만 똑같은 이름의 석호필이 3.1절을 맞이해 재조명되면서 서구화 개인화 되는 21세기의 대한민국 국민 가슴에 시누대처럼 시퍼런 애국심이 돋아나길 바란다.
3.1절 이날 만큼은 태극기에 경건한 마음을 담아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과 의지로 지켜온 대한민국을 생각하며 잠시 순국선열들을 위해 작은 기도라도 올려보자./ 김선영 기자
3.1운동의 성지 제암교회와 석호필 박사
일본의 잔학성은 독일 나찌보다 더 했다. |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문화유산 답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운영자 칼럼] 신념과 용기로 문화재를 지켜낸 사람들 (1) | 2022.03.21 |
---|---|
[문화유산 답사기] 유네스코 인류 문화유산 '한국의 역사마을' 안동 하회마을에 가다. (0) | 2022.03.10 |
[문화유산 답사기]선암사엔 무지개 닮은 다리, 송광사엔 ‘얼짱 사천왕상’이… 그들이 山寺로 간 까닭은... (0) | 2022.02.23 |
[문화유산 답사기]천주교 박해로 흑산도까지 귀양 온 정약용의 형 정약전,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 어류 생태보고서 '자산어보' 남기고 이곳에서 숨지다. (0) | 2022.02.13 |
[문화유산 답사기]돌아오지못한 1500년 전 부부총 금동관…왜 한일협정서 빠졌나 (0) | 2022.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