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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3.1 독립 운동 103주년 특집] 삼일절은 슬픈 날? 나라의 기쁜 날!

문화재방송 2022. 2. 28. 01:16

 

우리는 매년 삼일절이 다가오면

선열의 희생과 그날의 함성을 잊지 말자며

독립운동가들께 추도의 메세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함성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우리가 이날을 ‘국경일’로 축하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1920년, 삼일운동 1주년을 전후로

독립정신을 상기하는 전단들이 국내에 뿌려졌습니다

이들 전단에는 놀랍게도

삼일절을 ‘대한민국 건국기념일’로 부르며

이날을 ‘축하’할 것을 호소한 대목이 수없이 나옵니다

아! 경사로다! 건국의 기념일이여!

반도강산 이천만 민족의 생명은

이날부터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 2년 2월 <혈성단>

기뻐하세 오늘 우리 대한민국 기원절

이천만 동포들이여 경축하세

우리들의 새 생명을 되찾은 날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경축하세

기원절경축가 1절 (기원절은 대한제국의 건국기념일을 부르던 명칭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독립운동가들은

삼일절을 건국의 명절로 축하하자고 한 것일가요?

그 이유는 삼일운동이 나라를 되찾자는 것을 넘어

국민이 주인인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세우는

건국운동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삼일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은

독립 후 세울 국가로 민주공화국을 상정했습니다

민주 정체(政體)로 할 생각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런 생각인 것으로 생각한다

33인 대표 손병희 선생, 독립 후 세울 국가에 대해 묻는 일본 예심판사의 앞에서

만세운동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황해 수안의 시위대는 “공화정치가 대세”라고 외쳤고

평북 선천에서는 새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겠다

전단이 만세시위 현장에서 낭독되기도 했습니다

민주공화국 수립을 꿈꾼 민족의 염원은

우리 민족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삼일절을 축하한 것은

새 나라를 세우고자 한 삼일운동의 정신이

민주주의 국가의 출발이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제정된 제헌헌법은

임시정부의 헌법과 건국강령을 모태로 제정되었고

전문에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고 적어

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의 역사 인식을 계승했습니다

삼일절이 국가경축일(국경일)로 지정된 것은

삼일운동 정신을 건국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삼일절은

새 민주국가의 기원(起源)을 축하하는 최대 국경일로서

퍼레이드, 예술제, 불꽃놀이 등으로 크게 축하됐습니다

그러나 군사정부 이후 경축 문화가 소실되면서

축제와 같았던 삼일절 분위기도 역사 속에 잊히고

삼일절의 역사적 의미 또한 퇴색하게 됐습니다

대한 사람은 가는 곳마다 있는 곳마다

천 년 후 만 년 후까지 자자손손히

열성과 환희로써 지켜 축하할 3월 1일

1920년 3월 임시정부 <독립신문>

삼일절은 단순한 독립운동기념일도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슬픈 날도 아닙니다

새로운 국민의 나라, 대한민국의 잉태를 기념하는

자랑스럽고 기쁜 겨레의 명절입니다

 3월 1일은 제 103주년 삼일절입니다. 1919년 3월 1일, 당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일제의 압박에 항거하기 위해 우리나라는 전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평화적 시위를 열었는데요. 이러한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정부는 1949년 이 날을 국경일로 정하였습니다. 오늘은 삼일절을 맞이하여 1919년 3월 1일 그날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데요. 이야기하기에 앞서, 3.1운동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1운동의 역사적 배경

미국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 [출처: 위키피디아]

*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 (1918.01.08.)

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제로 병탄된 뒤 한국의 의병·열사들은 일본의 부당한 침략에 항거하여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나선 가운데,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 T. W.)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었습니다. 윌슨이 제안한 민족자결주의는 각 민족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는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요. 한국의 민족지도자들은 이에 의거해 한국 민족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 [출처: 위키피디아]

* 고종황제 붕어(崩御) (1919.01.21.)

민족자결주의 발표 이래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어가던 때,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갑자기 붕어하였습니다. 덕수궁에서 기거하던 고종황제는 당시 68세로 건강한 편이었는데, 갑작스런 중병으로 붕어했다는 발표가 있자 국민들은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 때 마침 일제가 독살했다는 말이 퍼져 온 국민들은 망국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크게 동요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청년 독립단 [출처: 재일본한국YMCA]

* 재일유학생의 2.8독립선언 (1919.02.08.)

일본 도쿄에서 거행된 2.8독립선언은 이러한 분위기에 불을 당겨 3.1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청년독립단은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하였고, 이에 장내는 독립만세 소리와 환호성으로 가득 찼습니다. 하지만 일본 경찰에 의해 조선청년독립단 10명의 대표가 잡히게 되었고, 이에 유학생들은 전원이 귀국할 것을 결의하고 국내에 돌아와 3.1운동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3.1운동의 경과

3⋅1 운동 민족 대표자 모임(민족 기록화)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민족대표 33인의 독립 선언서 낭독

3월 1일 정오경부터 민족대표 일동은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가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한편 태화관 주인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가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나서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게 하였는데요. 이 통고를 받은 일본경찰대는 즉각 달려와 태화관을 포위하였습니다. 이 때 민족대표들은 독립을 선언하는 한용운의 간단한 식사를 들은 후,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의연하게 일본 경찰에게 연행되었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시민들의 모습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

이 무렵 탑골공원에서는 서울의 중등학교 이상의 남녀학생 4,000~5,000명이 몰려와 독립선언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본래 독립선언식은 탑골공원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학생들의 희생을 고려하여 민족대표는 태화관에서 모였던 것이었습니다. 오후 2시가 되어도 민족대표가 나타나지 않자,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한 청년이 자진하여 단상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의 낭독이 거의 끝날 무렵, 학생들은 모자를 하늘로 날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이들이 선언을 끝내고 탑골공원을 나서자 수만의 군중이 호응하며 함께 시위 행진을 전개하였고, 시위 대열이 대한문 앞에 이르렀을 때는 온 서울 시내가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들끓었습니다. 시위행렬은 대한문 앞에 이르러 고종황제의 빈전을 향해 삼례를 올렸습니다. 시위 행진은 각 동으로 퍼져 나갔으며, 해질 무렵부터는 교외로 번져나갔으나 단 한 건의 폭력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본 군대와 기마 경찰의 무력저지로 인해 평화적 시위를 하던 군중들은 강제 해산되고 주모자 130여 명이 체포, 구금되었습니다.

 

* 3.1운동의 전국적인 확산

3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을 벌인 곳은 비단 서울만은 아니였습니다.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 이북지방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는데요. 이렇게 3월 1일에 점화된 독립만세운동의 불길은 날이 갈수록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등 전국 각지로 번져갔으며, 3월 21일에는 제주도에까지 파급되어 한국 역사상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출처: 천안시 유관순열사기념관]

*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1919.04.01.)

특히 독립운동사의 대표적인 만세운동으로 꼽히고 있는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은 유관순 열사의 활약으로 잘 알려져 있죠. 1902년에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난 유관순 열사는 1916년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하게 되고, 조국독립을 위한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강연회 등에 적극 참여하게 되는데요. 3.1만세운동에도 참여하여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인 천안으로 돌아가,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검거되어 투옥 중에도 옥중만세운동을 벌였고,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나섰던 독립운동가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다시 한 번 기억하는 삼일절이 되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합시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랜선 타고 울려 퍼지는 ‘삼일절 함성’

 
 

삼일절 103주년을 맞아 ‘메타버스 서대문, 1919 그날의 함성!’ 프로그램이 열린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사진) 주최의 행사로 메타버스와 줌(ZOOM) 등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해 진행된다.

메타버스 플랫폼 ‘모임’(MOIM)에서는 3·1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가 선보인다. 3월1일 오전 11시와 오후 2시부터 각 30여분 동안 운영한다. 시간별로 200명씩 모두 400명을 모집하며 참석자들은 소정의 기념품을 받는다. 메타버스로 참여하지 못하는 시민들을 위해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유튜브 채널’로 생중계한다.

사전 공연 ‘클래식으로 만나는 1919 그날의 함성’도 펼쳐진다. 시인 심훈의 ‘그날이 오면’을 주제로 제작된 미니드라마도 상영된다. 유관순 열사가 수감됐을 때 동료들과 함께 독립의 의지를 담아 불렀던 ‘8호 감방의 노래’도 감상할 수 있다.

23일부터는 메타버스 ‘제페토’ 플랫폼을 활용해 가상공간에 재현한 ‘서대문형무소 맵’이 공개됐다. 시민들은 자신의 캐릭터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둘러볼 수 있다. 실제 현장을 찾은 것처럼 옥사 내부에 들어가고 ‘이달의 독립운동가 전시’도 관람할 수 있다.

‘내 손으로 만드는 역사’ 프로그램은 화상회의로 진행된다. 애국지사 책 만들기, 태극기 액자 만들기, 독립운동가 어록 무드등 만들기 등이 26~27일, 3월5~6일 각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열린다. 회당 50명씩 총 400명이 참여할 수 있다. 전문 강사가 줌으로 실시간 소통하며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역사적 의미도 함께 소개한다.

3월1일엔 오프라인 행사도 열린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현장에서는 사진 인화 서비스가 진행된다. 방문객들은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캘리그래피로 표현된 독립운동가 어록과 함께 인화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 복장의 전문 연기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예약을 통해 시간당 400명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프로그램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사진 서대문구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3·1운동 전세계 알린 벽안의 기자…가옥 '딜쿠샤'와 돌아왔다

[중앙일보] 입력 2021.02.28 06:00

김현예 기자

 

#나이 22살의 청년은 아버지를 따라 배에 올랐다. 광산사업가인 아버지를 따라 도착한 곳은 조선. 1897년 서울에 살기 시작한 앨버트 테일러와 조선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14살이나 어린 아내 메리 테일러를 만난 건 그로부터 20년 뒤의 일이었다. 신혼살림은 서울 충정로7길 부근의 '작은 회색 집'에서 시작했다.

3·1운동과 앨버트 테일러

앨버트 테일러. 3·1운동과 독립선언서를 세계에 알렸다. 사진 서울시

#1919년 2월 28일. 미국 AP통신 임시 특파원으로 활동하던 앨버트는 고종의 국장(國葬) 취재를 마치고 세브란스 병원으로 향했다. 아내가 아들을 출산해 병원을 들른 그에 눈에 병원 침대 속 감춰진 종이뭉치가 들어왔다. 한국어를 할 줄 알았던 그는 단박에 '독립선언서'를 알아봤다. 황급히 기사를 쓴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동생에게 기사와 독립선언서를 전달했고, 같은 해 3월 13일 뉴욕타임스에 3·1운동이 보도된다.

벽안의 이방인이 해낸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해 4월 15일 당시 수원(지금의 화성시) 제암리에서 만세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이 주민을 집단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사건 다음 날 현장을 방문해 불타는 마을을 촬영하고, 생존 주민을 취재해 일본의 탄압을 세계에 알렸다.

3·1운동을 세계로 알린 사나이…'딜쿠샤'를 짓다

앨버트 테일러 가옥인 '딜쿠샤'의 옛모습. 사진 서울시

서울에 살던 앨버트는 한양 도성 성곽을 따라 산책하다 '은행나무골'로 불리던 곳에 땅을 사들어 집을 짓기 시작했다.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란 뜻의 '딜쿠샤'란 이름도 붙였다. 1924년 붉은 벽돌집이 완공됐지만 2년 뒤 낙뢰로 불에 탔다. 앨버트는 1930년 같은 자리에 다시 집을 지었다.

일제의 압박은 그에게도 이어졌다. 1941년 앨버트 가족은 일제에 의해 연금됐고, 이듬해 강제 추방됐다.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6년 뒤 캘리포니아에서 숨을 거뒀다. 아내 메리는 생전 한국을 그리워하던 앨버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유해와 함께 그해 한국을 방문했다. 앨버트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안장됐다.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딜쿠샤'

오는 3월 1일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딜쿠샤' 전시관. 온라인 사전예약으로만 관람이 가능하다. 사진 서울시

방치되다 국가 소유가 된 딜쿠샤는 이후 집 없는 서민들의 공동주택으로 쓰이기도 했다. 잊혀지던 딜쿠샤를 찾아낸 것은 2005년의 일이었다. 앨버트의 아들이 서일대 김익상 교수에게 어린 시절 살던 집을 찾아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1년 뒤인 2006년 아들 브루스 테일러는 66년 만에 서울을 찾아 딜쿠샤를 돌아봤다.

2015년 브루스 테일러마저 사망하자 이듬해 서울시는 원형복원에 들어갔다. 2018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딜쿠샤가 등록되면서 복원속도는 빨라졌다. 종로구 행촌동에 있는 딜쿠샤는 지하 1층~지상 2층의 건물로, 서울시는 지난해 12월 복원 공사를 마쳤다. 서울시는 이번 3·1절을 기해 '딜쿠샤'를 개방하기로 했다. 앨버트가 강제 추방된 지 약 80년 만이다.

딜쿠샤 전시관 돌아볼까

앨버트 부부가 사용하던 당시 유물들. 앨버트의 손녀인 제니퍼 테일러는 당시 사용하던 유물을 기증했다. 사진 서울시

1~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의 삶의 흔적이 담긴 1920년대를 복원했다. 2층 전시실엔 당시 언론활동을 비롯해 딜쿠샤의 건축 복원 과정을 볼 수 있게 해놨다. 3월 1일을 기해 공개되는 딜쿠샤 전시관은 매주 화~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된다. 입장은 무료지만 사전 예약을 해야만 둘러볼 수 있다. 하루 4차례 관람이 진행되며, 1회당 가능 인원은 20명이다.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을 통해서만 신청할 수 있다.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이자 유물 기증자인 제니퍼 테일러는 “이번 개관으로 한국의 독립투쟁에 동참한 서양인 독립유공자가 재조명받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서정협 서울시장 권한대행은 “서대문형무소, 경교장 등 딜쿠샤 전시관 인근 항일운동 관련 클러스터를 통해 독립을 위해 헌신한 모든 분을 기억하고 정신을 계승해나가겠다”고 밝혔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출처: 중앙일보] 3·1운동 전세계 알린 벽안의 기자…가옥 '딜쿠샤'와 돌아왔다

news.joins.com/article/24001676

 

3·1운동 전세계 알린 벽안의 기자…가옥 '딜쿠샤'와 돌아왔다

황급히 기사를 쓴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동생에게 기사와 독립선언서를 전달했고, 같은 해 3월 13일 뉴욕타임스에 3·1운동이 보도된다. 아내 메리는 생전 한국을 그리워하던 앨버트의 뜻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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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눈의 抗日운동가' 윌리엄 린튼의 3·1운동 증언 실은 美신문 첫 공개]

"어린이도, 노인도, 양반도, 종도… 손에 손에 태극기만 든 채 전국 곳곳의 거리로 "

 

윌리엄 린튼(왼쪽 사진) 선생이 1919년 5월 미국 애틀랜타 저널에 일제 치하 한국의 상황과 3·1운동의 실상을 알리며 국제사회의 지지를 호소한 기사(오른쪽). 제목은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한 애틀랜타인의 증언'이다. /한남대 제공

"3월 1일 전국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한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폭력이나 무질서는 없었다. 일본 정부가 이 봉기를 억누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참가자들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감옥은 한국인들로 차고 넘쳤다. 어린이도, 노인도, 양반도, 종도,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있었다. 수천 명의 항일운동가들이 총검에 짓밟혔으나 누구도 (폭력적) 저항을 하지 않았다."

1919년 5월 '푸른 눈의 항일운동가'로 불렸던 미국 선교사 윌리엄 린튼(한국 이름 인돈·1891~1960)의 3·1운동에 대한 증언을 보도한미국 애틀랜타의 지역 신문인 '애틀랜타 저널(The Atlanta Journal)' 기사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일제강점기 한국 현실과 3·1운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려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쓴 글이다. 린튼이 1956년 세운 한남대학교(구 대전대학)가 최근 교내 아카이브에서 이 기사를 발견했다.

린튼은 전북 군산의 3·1운동을 지도하는 등 한국 국권 회복과 교육 사업에 헌신했던 인물이다. 21세에 한국으로 건너온 그는 3·1운동 당시 28세였다. 1940년 일제에 의해 쫓겨났다가 광복 이후인 1946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성서학교를 운영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우리 정부는 2010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기사 제목은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한 애틀랜타인의 증언(Atlantian tells how Koreans are seeking liberty)'. 신문은 3·1운동을 '세계사(史)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봉기'라고 평가했다.

린튼은 이 신문에 "3·1운동은 한국이 최초로 일본의 압제하에서 자국의 무기력함에 대해 세계에 알리려고 노력한 첫 번째 시도"라며 "그것은 폭력 없는 저항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3월 1일, 인구 30만 명의 수도 서울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 행진했다. 폭력과 무질서는커녕, 일본 정부가 군중을 해산하려고 할 때 저항조차 없었다. 그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있었을 뿐이다. (중략) 잡혀온 한국인들로 감옥에 더 이상 자리가 없자, 군부는 기병대대를 보내 수백 명의 한국인들을 말발굽으로 짓밟았다. 하지만 여전히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일본은 더 강한 군사력을 투입했고, 수천 명의 항일운동가들은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고 총검에 쓰러져갔다."

그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간절히 호소했다. "한국의 운명은 동맹국가에 달려 있다"며 "파리평화회의는 30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한민족의 민족 정체성과 역사, 그리고 문화를 말살해온 일본 정부에 대항하는 한국 국민의 봉기에 응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린튼의 손자인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장은 "할아버지는 일평생 한국을 사랑했던 분"이라며 "이 기사는 한국인들이 자유독립을 위해 비폭력 평화주의라는 놀라운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출처: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2/28/2015022800210.html?news_Head1

만세운동 세계에 알린 석호필… 조국 독립 외친 ‘세브란스의 33인’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2부>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10) 스코필드와 세브란스

 

여인석 연세대 의대 의사학과 교수가 지난 4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서 3·1운동 당시 해부학 실습실에 독립선언서를 숨긴 장면을 담은 기록화를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1919년 3·1운동 당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세균학 교수였으며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린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최연소자였던 세브란스병원 제약주임 이갑성 남대문교회 집사(국민일보 2월 21일자 31면 참조)에게 거사 일정을 전해 듣고 서울시내 만세시위 현장을 직접 촬영해 세계에 알렸다. 그해 4월 일제가 경기도 화성 제암리와 수촌리에서 양민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학살하자 현장으로 달려가 참상을 촬영하고 관련 보고서를 남겨 일제의 잔학무도함을 고발했다. 소아마비 장애가 있는 몸으로 서양인 그 누구보다 거세게 일제에 항거한 의학자이자 선교사였던 프랭크 W 스코필드(석호필·1889~1970) 박사 이야기다.

스코필드 박사가 잠들어 있는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한강과 동작대교를 굽어보는 애국지사묘역 96번이 그의 무덤이다.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힌 외국인은 단 3명이다. 그중 2명은 6·25전쟁 당시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화교로 동양인이다. 서양인으로는 스코필드 박사가 유일하다. 그의 묘비엔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 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소년 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맡아주세요”란 유언이 새겨져 있다


도와주던 소년 가운데 한 사람이 정운찬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다. 정 총재는 지난 4일 서울대 수의대에서 열린 추모기념식에 참석해 “박사가 내주신 학비로 중·고교를 다녔다”면서 “박사는 위대한 독립운동가일 뿐만 아니라 한없이 자상하고 따듯한 은인”이라고 말했다.

정 총재는 앞서 연세대 의학사연구소가 엮은 ‘세브란스인의 스승, 스코필드’란 책에 기고한 글에서 “박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나에게 친아버지나 다름없었다”면서 “영어 성경 공부를 비롯해 삶에서 배워야 할 것의 대부분을 그에게서 배웠다”고 회고했다. 특히 “약자에겐 비둘기 같은 자애로움으로, 강자에게는 호랑이 같은 엄격함으로 대하라는 가르침이 생각난다”고 전했다.

 

세브란스의전 시절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

 


석호필(石虎弼)이란 한국 이름은 스코필드 박사가 스스로 지었다. 한국과 한국인을 위한 바위와 같은 우직함(石), 불의를 참지 않는 용맹함(虎), 그리고 따듯한 배려와 도움(弼)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강대국들로부터 고립돼 고난을 겪은 한국인을 사랑했던 근면한 영국계 캐나다 이주민이었다. 목회자였던 선친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 싶어 한 기독교인이었으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한국에 자원한 선교사였다.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간절히 추구하다 일제에 의해 20년에 쫓겨나지만, 해방 후인 58년 국빈 자격으로 돌아와 서울대 수의대에서 후학을 가르치다 70년 별세했다. 생전인 68년 독립훈장 독립장이 수여됐다.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운동으로 훈장 포장 표창 등을 받은 세브란스 구성원은 총 33인이다. 세브란스의 민족대표 33인으로 부를 만하다. 교수 학생 간호사 직원 등 전체 직군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했다. 여인석 연세대 의대 의사(醫史)학과 교수는 “54년 독립장을 받은 세브란스의전 설립자 올리브 에비슨 선교사를 포함해 다양한 직군의 의료기관 종사자들이 한마음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된 데는 세브란스 학생들의 역할이 컸다. 세브란스병원 지붕 바로 아래의 옥탑방인 해부학 실습실에서 독립선언서와 유인물이 비밀리에 제작·보관됐다. 경남 김해 출신 배동석은 김해 마산 함안 등의 3·1운동을 주도해 학생 가운데에선 드물게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21년 숨졌다.

송영록은 개성 만세운동을 조직했고, 김병수는 고향 군산으로 독립선언서를 전달해 전북 최초 만세시위를 촉발했다. 충남 공주의 양재순, 경북 안동의 이주섭, 평양의 곽권웅, 평북 선천의 고병간이 세브란스 출신으로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세브란스 간호사들은 19년 3월 5일 당시 병원이 있던 남대문 정거장 앞 만세시위에서 일경의 총칼로 다수의 부상자가 생겨나자 붕대를 들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정숙 노순경 박덕혜 이도신 김효순 박옥신 윤진수 이성완 이아주 장윤희 체계복 등이 체포됐다. 이들 대부분은 이후 김마리아 선생(국민일보 3월 14일자 31면 참조)이 주도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참여해 독립운동가 옥바라지와 독립자금 모금 등을 도왔다.

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세브란스 졸업생들이 활동한다. 세브란스병원의학교 1회 졸업생이자 김구의 손위 동서였던 신창희는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을 도우며 임시정부 군의와 대한적십자회 상의원으로 활동했다. 역시 1회 졸업생인 주현측은 임시정부 재무부 참사를 역임했다. 그는 18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후배 신현창과 함께 삼일의원을 개원해 병원 수익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했다.

여 교수는 “세브란스는 선교사들이 시작했지만, 이후에는 한국 사람이 주체가 돼 한국 사람들을 돌봤기에 한국인의 주체적 활동을 막는 일제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72082&code=23111668&cp=du

 

만세운동 세계에 알린 석호필… 조국 독립 외친 ‘세브란스의 33인’

1919년 3·1운동 당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세균학 교수였으며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린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최연소자였던 세브란스병원 제약주임 이갑성

news.kmib.co.kr

3.1절 마다 떠 오르는 "34번째 민족대표 석호필 박사"

 

[데일리안 김선영 기자]문화와 정보의 홍수로 글로벌화된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매년 한 번씩 나라에 대한 경외감과 주권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기념일이 있다. 바로 삼일절이다.

매년 돌아오는 3월 1일은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의 단결을 굳게 하며, 국민의 애국심을 함양하기 위해 제정된 기념일로 우리나라 4대 국경일의 하나이다.

 

그러나 세대가 바뀌고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날이 갈수록 국경일의 의미가 희미해지고 있는 안타까움을 직면하게 된다. 비단 3.1절 뿐만아니라 8.15 광복절과 한글의 날 등 국민들 의식속에 국경일은 단지 달력속의 빨간날짜이자 하루종일 게으름을 떨수 있는 날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다시금 태극기 사랑하기 같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여러가지 프로그램과 운동이 시기적절하게 펼쳐지고 있는데 숨어있는 애국자의 재조명과 같은 것도 유익한 사회운동이라고 생각된다.

올해로 88주년을 맞이한 3.1절을 앞두고 네티즌들이 한창 열광해 하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석호필'이라는 애칭을 가진 배우 마이클 스코필드가 출연하는 '프리즌 브레이크'라는 드라마로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은 형을 구하기 위해 일부러 감옥에 가서 탈출극을 벌이는 동생의 이야기이다.

그가 이처럼 열광적인 인기를 누리는 까닭은 극의 재미는 물론이거니와 과거 '맥가이버'라는 캐릭터 뺨치게 머리가 좋아서 감옥을 신출귀몰하게 탈출하는 내용만이 아니라 '석호필'이라는 애칭이 한몫 톡톡히 하고있다.

◇ 생전의 석호필 박사의 모습

석호필이란'스코필드'라는 영문 이름을 한국식으로 읽은 데서 유래한 것인데 실은 근래에 화제가 되고 있는 스코필드 박사(Frank W. Schofield, 1888~1970.4.12)의 한국 이름이기도 하다.

그는 기미년 3월 1일 대한민국의 민족운동이자 힘없는 백성들이 나라를 강점하고 있던 일제에게 무력으로 대항했던그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한사람의 독립투사였고 민족의 대표였다.

독립선언서를 선포한 민족대표 33인에 석호필박사가 새롭게 재조명 되면서 '33인이 아닌 34인'이라는 역사의 증명과 함께 3.1절에 방영될 다큐멘터리도 준비된 것으로 알고 있다.

1919년 3·1운동의 '34번째 독립운동가'로 꼽히는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세균학 전문 의료선교사를 자원, 한국 땅을 밟았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 및 위생학을 가르치면서 이상재 이갑성 오세창 등 독립 운동가들과 교류, 3·1운동에 적극 참가했다. 그는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고 있는 민중과 일제의 만행을 사진으로 찍어 해외에 알렸다.

유관순 등이 갇혀 있던 서대문형무소를 직접 방문하기도 한 그는 이듬해 3·1운동 목격담인 '끌 수 없는 불꽃'을 해외에서 출판하려다 출국 직전 암살당할 뻔했다.

그는 카메라와 펜으로 무장하고 한국의 독립과 일제 강점기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1920년 조선총독부 당국에 의해 강제출국을 당할 때도 총독에게 청하여 옥고를 겪고 있는 이상재·이갑성·오세창 등 독립지사를 일일이 면회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강제 추방된 그는 캐나다로 돌아간 뒤 한국 상황을 알리며 1955년까지 토론토 병원에서 일했다. 해방후 다시 한국을 찾은 그는 1969년 한국에 영구 귀국, 서울대 수의대에서 강의하면서 사비를 털어 장학금으로 쾌척하는 등 후학을 위해 많은 헌신을 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최초로 묻힌 유일한 외국인이다. 그는 고아들을 돌보고 독재 정권에도 항거했으며 1970년 지갑과 여권만을 유품으로 남긴 채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정부는 그에게 대한민국 문화훈장(1960)과 건국훈장 독립장(1968)을 추서했다.

◇ 외국인으로서 유일하게 국립묘지에 안장된 석호필박사 ⓒ 연합뉴스

석호필이라는 이름을 검색하면 온통 마이클 스코필드의 정보만 인터넷을 점유하고 있지만 똑같은 이름의 석호필이 3.1절을 맞이해 재조명되면서 서구화 개인화 되는 21세기의 대한민국 국민 가슴에 시누대처럼 시퍼런 애국심이 돋아나길 바란다.

3.1절 이날 만큼은 태극기에 경건한 마음을 담아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과 의지로 지켜온 대한민국을 생각하며 잠시 순국선열들을 위해 작은 기도라도 올려보자./ 김선영 기자

3.1운동의 성지 제암교회와 석호필 박사
석호필 박사가 촬영한 제암리 현장

일본의 잔학성은 독일 나찌보다 더 했다.
1919년 4월 15일, 제암교회를 잊지말고 기억하자!

이 날은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 일본 군대와 경찰들에 의해 제암리 주민들이 총칼에 찔려
잔인하게 학살당하고 불태워진 사건이 발생했던 날이다. 그 역사적인 곳은 바로 
제암리 예배당, 제암교회다!

입구에 태극기와 프랑카드가 게양되어 있어 3.1절 분위기가 난다.
제암교회의 입구 맨 앞쪽 중앙 쯤 되는 위치에 '3.1운동 순국 기념탑'에는 다음과 같이 일제의 잔학상이 기록되어 있다.

기념탐 그 오른편으로 20년 전에는 보이지 않던 조형물이 보였다.
카메라를 손에 든 석호필 박사(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의 동상이다. 옆에는 자전거가 한 대 조형물로서 함께하고 있다.
석호필 박사의 동상(전경)

석호필 박사의 동상 옆으로 부가적인 해설이 담겨있는 부조가 있었다.
해당 부조에 담겨있는 내용들을 소개한다.
부조를 바라다 보았을 때 맨 왼쪽으로 부터 오른쪽으로 차례대로 사진을 촬영했다.


내용에는 석 박사의 약력과 업적이 한글과 영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3.1운동과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는 내용이다.
다음으로는 석 박사가 조사했다는 제암리 대학살의 전말에 대한 보고서 내용이다.
석판화라고나 할까? 그림으로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제암교회/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길 50)
 
 






우리 민족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아직도 미완의 과제를 안고 있다.


독일 나찌의 전범들을 재판했듯이 일본 천황 및 잔학행위를 한 전범들을 제대로 재판했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매국노들과 일본의 앞잡이들, 하수인들에 대한 명확한 재판이 있었어야 한다.
1945년 5월 8일 항복한 독일의 경우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세계 평화를 깨뜨리고 특정 민족을 잔인하게 대학살한 아돌프 히틀러에 대하여 1945년 11월 20일 부터 열린 국제군사재판소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형법 제250조 전체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함으로써 그나마 독일의 역사를 바로잡기에 그 기초를 다졌다. 현재까지도 도피 중인 전범들을 공소시효없이 추적하여 단죄 중이다
그 결과 일본과는 달리 국제사회에 대한 반성을 천명하였고, 진정한 명예를 되찾고 선진국 대열에서 떳떳하게 활동한다
지금도 독일의 총리들은 국제사회에 대하여 자신들의 역사적 잘못을 인정하고 명확하게 사과를 표하고 있다
반면에 일본이라는 나라와 그 지도자들은 102년이 지난 지금도 정반대다.

원문보기
blog.naver.com/skywello/220946285645

 

[역사 속 숨은 영웅] 한국 독립을 위해 뛴 푸른 눈의 사업가, 조지 쇼

 

구성 및 제작= 뉴스큐레이션팀 오현영

 
 
조지 루이스 쇼(이하 '조지 쇼' 또는 '쇼')는 아일랜드계와 일본계의 혼혈 영국인 기업가였다.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조선인의 망명 계획과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로로 1963년에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외국인 독립운동가이다.
조지 쇼, 키워드로 보는 이야기

'얼굴 없는 테러리스트' vs.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수호자'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지켜준 든든한 수호자, 일제에 의해 '얼굴없는 테러리스트'라 불렸던 조지 쇼는 1880년 중국 푸젠성 푸저우(福州·복주)에서 태어났다. 조지 쇼의 아버지은 아일랜드계 영국인이었다. 동방에서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는 중국에 정착했고, 조지 쇼 역시 아버지의 기질을 물려받아 장사를 시작했다. 20대 초반 그가 사업을 시작한 곳은 중국이 아닌 조선이었다.
1900년경 평안도 지역에 있는 '은산금광' 회계로 조선을 방문한 조지 쇼는 은산금광의 채산성이 떨어지자 7년 뒤 중국 만주 안둥(安東·안동, 지금의 단둥)현으로 자리를 옮겨 선박업과 무역업을 하는 '이륭양행(怡隆洋行)'이라는 회사를 세웠다.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지던 1919년, 그는 회사 건물 2층을 임시정부 비밀 정보국으로 내어준다. 더불어 백범 김구, 동농 김가진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탈출을 돕는 한편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폭탄, 비밀 정보 등의 전달에 앞장서 우리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전설적인 인물'로 여겨졌다.
1919년, 아일랜드와 조선
외국인이었던 그는 왜 조선의 항일운동을 도왔던 것일까? 여기에는 자신의 조국, 아일랜드의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조지 쇼는 영국 국적을 갖고 있었으나, 그의 고향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에이레(Eire · 아일랜드의 옛 이름)였다.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켈트족이 정주한 아일랜드에 12세기 후반 앵글로색슨족이 세운 잉글랜드가 쳐들어왔다. 영국의 귀족과 영주들의 침입으로 아일랜드는 영국의 속국이 되었다.
아일랜드인들은 오랜 전통과 관습을 무시당하고 가혹한 차별을 받으며, 영국의 폭압적인 지배에 저항했다. 700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아온 아일랜드는 1919년부터 2년 6개월에 걸쳐 독립전쟁을 벌였다. 1922년 아일랜드 독립전쟁 결과, 북부 신교 지역인 6개 주는 영국령 북아일랜드로 존속되고, 남부의 26개 주만 북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독립하게 된다. 영국으로부터 식민지 지배를 당하고 독립한 일, 그리고 동족상잔의 내전을 겪은 아일랜드의 비극적인 역사는 한반도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비극의 아일랜드 식민지史… 英착취로 200만명 굶어죽어]
1919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와 연락을 긴밀히 하기 위해 교통부 산하에 교통국을 설치하고, 국내로 드나드는 요충지인 단동에 교통국 지부를 개설했다. 이 교통지부가 바로 조지 쇼가 운영했던 이륭양행 건물 2층에 있었다.
임시정부의 교통지부는 1922년까지 국내와 만주지역 독립단체들 간 교신, 임시정부 자금 조달, 정보 수집, 무기와 지령 국내 반입, 독립운동가 물색 등의 비밀 임무를 수행했다. 중국과 국내를 연계하는 임시정부 교통국의 중간 거점 역할이었다. 조지 쇼는 교통지부를 지원하면서 국내에서 모집한 군자금을 상해로 수송할 때 통신원에게 그 액수에 해당하는 이륭양행 명의의 수표를 발행해 주었다. 통신원은 그 수표를 쇼가 거래하는 상해 회풍은행에서 현금과 교환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이 때문에 쇼는 줄곧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다.
실패하기는 했지만, 1919년 11월에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망명 계획도 이륭양행을 통해 진행되었다. 대동단* 총재로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펼쳤던 동농 김가진도 임시정부에 가담하기 위해 상해로 갈 때 조지 쇼의 배를 타고 망명할 수 있었고, 의열단의 김원봉이 거사를 위해 무기를 국내로 밀반입할 때도 조지 쇼가 적극 도왔다. 외국인이었던 그가 운영하던 회사와 선박은 치외법권 지역이었기 때문에 일본 경찰의 권한이 미치지 않아 가능했던 일이다.
조지 쇼는 의열단*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당시 의열단이 폭탄테러를 목적으로 200여 개의 폭탄을 국내로 반입할 때에도 조지 쇼가 도움을 주었다. 미국 작가 님 웨일즈(Nym Wales)가 독립운동가 김산의 일대기를 쓴 책 '아리랑'을 보면 김산이 당시 이 일과 관련해 쇼에 대해 회고하는 구절이 있다.
"의열단은 비밀리에 200여 개의 폭탄을 한국에 들여보냈다. 폭탄은 안둥에 있는 영국계 회사 앞으로 보내는 의류품 화물상자에 넣어 이 회사 소유의 기선에 실어 상해에서 보냈다. 안둥 회사의 지배인은 아일랜드인 테러리스트였는데, 우리 한국인들은 그를 '샤오'라고 불렀다. 그는 일본인을 거의 영국인 만큼이나 싫어하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상해로 가서 '죽음의 화물' 선적을 감독하였다. 그는 돈 한 푼 받지 않고 오로지 동정심에 한국을 도와주었다. 한국인 테러리스트들은 몇 년 동안 그의 배로 돌아다녔으며, 위험할 때는 그의 집에 숨었다"
* 대동단: 1920년 2월 전협·최익환 등이 서울에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 을 비밀히 발간하는 한편, 전 법부대신 김가진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구한국의 왕족 의친왕을 국외로 탈출케 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지도자로 추대함으로써 외교적 효과를 얻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김가진은 먼저 상해로 출발하고 의친왕은 상복으로 가장, 만주의 안둥까지 갔다가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대동단 사건).

* 의열단: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吉林省)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지역에 조직된 많은 독립운동단체가 미온적이고 온건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보고, 이에 대한 반성으로서 과격하고 급진적인 폭력투쟁을 목적으로 하였다.
벼르고 벼르던 일제에 결국 체포됐지만…
계속되는 일본의 추격으로 의열단이 어려움에 빠지자 쇼는 검거되지 않은 의열단 단원을 태워 톈진과 상해로 탈출하도록 도왔다. 일제는 이륭양행을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의 기지로 판단하고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았다. 1920년 7월에는 급기야 신의주행 열차를 타고 가던 쇼를 체포하기에 이른다. 여권을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였지만, 철저히 계획된 체포였다.
 
쇼의 구속을 놓고 조선총독부 내에서도 찬반 격론이 일자 당시 사이토 총독은 "일본인, 조선인, 외국인이라도 나쁜 놈은 나쁜 놈이다"라며 구속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쇼의 구속사실이 알려지자 중국에 있는 서방인들이 격분했다. 또 런던타임스 등 서구 언론을 통해 쇼 사건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국제사회에 반일감정이 촉발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일제 법원은 쇼를 수감한 지 4개월 만인 1920년 11월 19일 보석으로 석방했다.
안둥으로 돌아가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그는 환영 만찬에서 "일제의 체포와 구속에 결코 위축되지 않고 앞으로도 정의를 위해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1921년 1월 그가 상해를 방문했을 때 한국 임시정부는 대규모 환영 집회를 열어주었다. 쇼는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희생한 것이 자랑스럽고 기쁘다"라고 말했다. 그는 임시정부가 수여한 공로 훈장(금색공로장)을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다.
"지금 세계의 대세를 보라…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조지 쇼
그러나 이후, 이륭양행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쇼는 한국 독립운동 지원을 중단하지 않았다. 일제에 쫓기는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었고, 의열단 단원들이 국내 거사를 추진할 때도 이륭양행 선박을 동원해 지원했다. 의열단의 안둥현 거점이 바로 이륭양행 건물 안에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륭양행의 선박을 이용해 폭탄과 탄약 등의 무기를 운송하였다. 쇼는 독립운동단체에 국내 진입용 모젤권총을 구입해주기도 했다.
일제는 쇼를 탄압하기 위해 그의 일본인 처남을 동원해 이륭양행 인수를 기도하고 쇼의 압록강 항로권을 무력화하기 위해 경쟁사를 지원하기도 했으나 쇼는 영국총영사관 등을 이용해 굴하지 않고 싸워나갔다.
그러나 결국, 쇼는 안둥에 있던 이륭양행을 매각해 1938년 푸저우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륭양행이 사라진 후 임시정부 연락망은 큰 타격을 받았다. 안둥을 거점으로 한 독립운동의 지원활동 역시 막을 내렸다. 쇼가 상해를 떠난 뒤의 소식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석유판매 등의 사업을 벌이다, 푸젠성에서 여생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뿐이다. 1943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무덤도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를 극도로 싫어하며 평생을 항일운동에 바쳤던 조지 쇼는 놀랍게도 일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도, 부인도 모두 일본인이었고 며느리까지 일본인이었다. 후대에 와서 조지 쇼의 아내는 일본인 여성 사이토 후미였고, 중국인으로 알려져 있었던 조지 쇼의 어머니가 사무라이 집안 출신의 일본인임이 밝혀졌다. 또한 쇼의 아들 역시 일본 여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결혼증명서를 통해 밝혀졌다. 그의 아내 사이토 후미도 후에 남편을 도와 항일운동과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인의 피가 섞인 쇼가 '친일'은 커녕 '반일'인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이유는 사업과정에서 생긴 반일 의식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안둥에서 약 5만 평에 이르는 광대한 토지의 영구임차권을 얻어 제재공장을 운영하고 기선회사를 만들어 운송업·무역업을 하면서 큰 돈을 벌었다. 이에 일본인들은 쇼를 시기하면서 그를 축출하기 위한 공작을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쇼는 영국의 극동정책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상해 상공회의소의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당시 중국에 있던 영국 상인들은 일제의 방해로 갖가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대체로 반일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쇼 역시 1914년경 상해에서 일본상품배척운동의 선봉에 설 정도로 반일적이었다고 한다.
(참고=여시동 '인간적인 책', 역사채널e '역사e: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3)
조지 쇼, 한국 독립을 위해 희생한 삶

조지 쇼, 후대의 이야기
50년 만에 수여된 '건국훈장 독립장'


한국의 독립을 위해 누구보다 애썼지만 조지 쇼의 이름은 그저 몇 사람들의 기억에 있을 뿐이었다. 이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가 세간의 이목을 끈 것은 1963년 한국 정부가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유족을 찾으면서부터였다.
그후 50년 만에 쇼의 후손이 호주에 살고 있음이 밝혀졌고, 한국 정부는 조지 쇼의 손녀 마조리 허칭스와 증손녀 레이첼 사시를 국외 거주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행사에 초대했다. 마침내 2012년 8월, 조지 쇼의 이름이 적힌 훈장은 추서된 지 반세기만에 후손의 품으로 돌아가게 됐다.
쇼가 세상을 떠난 지 72년이 지나고 대한민국 광복 70주년인 2015년, 8월 12일에 쇼의 외증손녀 레이첼 사시와 외고손녀 조지아 사시가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두 사람은 국립대전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을 참배하고, 청와대 오찬에도 참석했다. 레이첼은 "감격스러울 따름이다. 한국 독립에 힘을 보탠 선조가 대단히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출처: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6/03/2016060300951.html
 

독립운동가 변론한 일본 변호사… 대한민국 건국훈장 받았어요

후세 다쓰지

곽한영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입력 2021.02.17 03:36 | 수정 2021.02.17 03:36
 
 
 

 
지금부터 100여 년 전인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발표했어요. 일본 수도 한가운데서 벌어진 일이라 일본 정부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관련자를 모두 체포해 재판정에 세웠어요. 이 법정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의 변호사는 “조선 독립은 정당한 요구이며 오히려 그들을 탄압하는 것 자체가 위법이다”라고 외쳤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습니다. 인권 변호사 ‘후세 다쓰지’였죠.

1880년 미야기현에서 태어난 후세 다쓰지는 일본 명문 대학인 메이지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불과 스물세 살에 법조인이 됐어요. 일본 최고 엘리트가 된 그는 약한 사람들 돕기를 평생 목표로 삼았어요. 특히 조선인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는데요. 후세 다쓰지는 법관이 되고 나서 ‘조선 독립운동에 대하여 경의를 표함’이라는 논문을 썼다가 경찰 조사까지 받는 고초를 겪었어요.

조선인 유학생 변호를 자청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어요. 1923년 9월 1일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 일대를 덮친 진도 7.9의 ‘관동 대지진’으로 일본은 사망자 14만명, 이재민 340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봤어요.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 당국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방화를 하고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불안을 무마하려 했어요. 일본인들은 죽창과 낫을 들고 다니면서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조선인이 약 6000명에 달했어요. 후세 다쓰지는 뜻있는 변호사들을 모아 ‘자유 법조단’을 구성했어요. 조선인들이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도록 보호하는 한편, 학살에 관련된 군경의 책임을 묻는 소송을 벌였습니다. 또한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 엄청난 비극에 사죄하는 마음을 담은 편지를 ‘조선일보’에 보내기도 했어요.
 
후세 다쓰지는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쓴 조선인 박열과 동료들을 무료로 변론했어요. 1926년에는 아예 조선을 방문해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억울하게 땅을 빼앗긴 농민들을 위한 토지 반환 소송도 제기했습니다. 그가 애쓴 대부분의 재판은 당시 우리나라를 차지하고 있던 일본 제국의 벽에 막혀 아쉽게 패소했지만 독립운동가, 농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고 함께 싸워주는 변호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았어요. 그래서 후세 다쓰지를 ‘우리의 변호사’라고 불렀다고 해요.

후세 다쓰지는 일본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어요. 그는 세 번이나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끝에 변호사 면허를 완전히 취소당했어요.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변호사 면허를 되찾을 수 있었죠. 해방 후에도 그는 재일 조선인 선거권 운동을 지원했고, 당시 건국을 준비하고 있던 대한민국을 위해 헌법 작성에 필요한 자료를 모아 전달했어요. 그의 노력에 감사하는 뜻으로 2004년 10월 대한민국 정부는 후세 다쓰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줬습니다. 일본인으로는 최초였어요.





제암리 학살 사건에서 희생된 홍원식. 부인 김씨

제암리서 울려 퍼진 만세소리… 목숨 건 항일투쟁
올해 4월15일은 제암리 학살사건이 일어난 지 102년째 되는 날이었다. 3ㆍ1운동 당시 일본 군인과 경찰은 평화적인 만세 시위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제암리, 고주리, 수촌리 일대에서 벌어진 집단 학살은 상상조차 어려운 참혹한 현장이었다. 일제의 식민지배는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각종 충격적인 사건들은 양심적인 세계인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그럼에도 잘못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일본이다. 이는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며, 우리는 용서와 화해는 하되 역사적 사실을 잊지는 말아야 한다.

 

충청남도와 경기도 서해안 일대에서 의병장이 되다

홍원식(洪元植)은 1877년 10월13일 경기도 남양군 공향면 제암동 넘말(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 아버지 홍순화(洪淳華), 어머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한 후 대한제국 시위대 군인이 돼 서소문 병영에서 근무했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사건을 구실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보류인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해산군인들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목숨을 건 ‘서울시가전’을 전개했다.

수세에 몰린 홍원식은 해산군인을 이끌고 근거지를 옮겼다. 그가 지휘하는 소난지도 의병진은 면천성을 공격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난지도를 중심으로 활빈당의 일종인 수적(水賊)의 근거지는 바로 이곳이었다. 이들은 배를 이용해 충청남도와 경기도 서해안 일대를 오가며 맹렬하게 싸웠다. 피해 소식에 수원지역 의병진은 10여 척 배를 나누어 타고 들어와 밀고자를 색출하는 연합작전을 일궈냈다. 수적의 의병진 영입은 전투력 향상과 더불어 신분적인 갈등을 극복할 수 있었다. 반면 일제 토벌대의 보복은 참혹했다. 선원이나 부상당한 의병까지 살육하는 학살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일제의 화력 집중으로 의병항쟁은 불리한 상황에 직면했다. 의병진을 해산한 후 1914년 3월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홍원식은 기독교 권사가 돼 학교를 세우는 등 항일의식을 일깨웠다. 제암리 교회의 안종후와 천도교인 김성렬 등과 함께 구국동지회도 조직하는 등 지도자로서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화성에 폭발하듯 울려퍼진 만세운동

수원 읍내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은 3월 중순 화성지역으로 파급됐다. 평화적인 만세운동이 지역사회에 확산하면서 점차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환되는 분위기였다. 3월28일 송산면 만세시위에 해산을 종용하던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는 총을 발포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시위군중은 “일본순사를 죽이라”고 외쳤다. 기세에 억압당한 노구치는 도망치다가 돌과 곤봉 세례를 받고 즉사했다.

3월31일 정오경에 발안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하는 투석전으로 이어졌다. 일본군 수비대는 칼을 무자비하게 휘둘러 이정근은 현장에서 사망하는 등 부상자가 속출했다. 흥분한 시위군중은 일본인 가옥이나 학교 등을 방화ㆍ파괴했다. 다음날 발안 인근의 마을 주민들은 산 위에서 봉화를 올렸다.

수촌리 이장 백낙렬, 수촌 제암리 교회 김교철 전도사, 석포리 이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은 4월3일 만세운동을 추동했다. 우정면과 장안면 주민 2천여 명은 각각 면사무소를 부수고 화수리경찰관주재소를 불태웠다. 이를 저지하는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川端豊太郞)를 처단하는 등 극도로 긴장됐다.

비참한 희생양이 된 부인 김씨

일본는 4월2일에 가장 격렬한 시위가 일어난 수원과 안성 지역에 대해 제1회 검거반을 구성했다. 4월5일에 편성된 검거반은 같은 달 14일까지 25개 마을에서 204명 검거와 290여 가옥을 방화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 사상자도 발생했다.

발안 장터와 고주리 만세운동에 대한 보복은 집단학살로 이어졌다. 4월13일 육군 보병 제20사단 79연대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지휘하는 11명이 발안에 도착했다. 4월15일 오후 2시경에 아리타는 부하를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한국인 순사보와 정미소 주인 사사카(佐佐坂)의 안내로 제암리를 향해 떠났다. 아리타는 주민 중 15세 이상 남자들은 제암리 교회 안에 모이게 했다. 주민들이 모여들자 수비대는 교회 출입구와 창문을 봉쇄하는 일제히 사격한 후 후 불을 질렀다.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온 강태성의 아내 김씨(당시 19세)는 군인에게 살해당했다. 홍원식 부인 김씨도 군인들의 총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저들은 인근 고주리로 가서 시위의 주모자인 천도교 김흥렬 일가 6명을 학살했다. 학살 증거를 없애려고 현장을 불태우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스코필드(한국이름 석호필) 의료선교사는 소아마비로 팔과 다리가 성치 않았으나 자전거를 이끌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처참한 현장을 사진으로 남겼다. ‘제암리의 대학살(The Massacre of Chai-Amm-Ni)’ 보고서는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상해 가제트(The Shanghai Gazette)’의 1919년 5월27일자에 게재됐다. 그는 시신을 수습해 공동묘지 입구에 안장함으로 주민들에게 커다란 위안을 안겨줬다.

애틋한 인생역정이 복원되기를 바라며

 
정부는 1968년 홍원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 부인 김씨에게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당시 학살된 부인들은 흔한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 이들에 대한 실체를 하루빨리 밝혀야 하는 과제는 우리에게 남긴 몫이다.

1971년 제암리 학살사건을 다룬 영화 ‘두렁바위’가 촬영됐다. 1982년 9월에 유해 발굴 사업을 진행한 뒤 이듬해 7월에는 제암리 3ㆍ1운동 순국기념관과 기념탑이 건립됐다. 순국한 분들과 함께 애틋한 부부의 인생항로가 복원되기를 기대한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사진=화성시 제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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