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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 유네스코 인류 문화유산 '한국의 역사마을' 안동 하회마을에 가다.

문화재방송 2022. 3. 10. 00:02

하회마을 입구의 안내 바위-목련이 수줍은듯

 

 

낙동강물이 마을을 휘감고 돌아 '물도리동'이라고 해요.(물河 돌아올回)

 

 

하회마을 방문했을 때는 막 벚꽃의 향연이 시작되었답니다.

 

고려말엽 가선대부 공조전서 류종혜공이 이 일대가 늪지대였음에도 풍수지리학상 최고의 명당으로 인정하는

'연화부수형-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상', '행주형-배가 짐을 가득 싣고 떠나는 형상'이어서 모든 재산을 털어

늪지대를 개간하기 시작했다고-풍천류씨 입향시조 기적비

하회마을의 상가들입니다.

안동소주가 독하기로 유명한데 정종과 같이 누룩 냄새가 나고 도수도 20도 이하짜리가 있어요.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규모가 제일 클 것이라는 세계탈박물관.

22개국 3,200여 점의 탈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요.

하회마을에 도착하면 오른 편으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입니다.

 

국보 제121호 하회탈입니다.

대개 탈은 놀이가 끝나면 태워 없애기 일수이나 이 하회탈은 마을의 신으로 600여년 동안 소중하게

보관해 온 탈이라고 해요.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곳에 전시된 탈은 복제품입니다.

 

 

 

 

당시 영국 여왕은 79세이신데 참 아름다우시지요?

 

 

영국여왕은 임진란 당시 영의정으로 국난극복에 헌신하신 서애 류성룡선생의 13세손

탤런트 류시원씨의 본가인 담원재에서 79살 생일상을 받으셨는데요

그 생일상을 그대로 복원해서 전시하고 있어요.

굳게 잠긴 류시원씨의 담원재

 

 

 

안동 하회마을은

연화부수-형 [蓮花浮水形연꽃이 물에 떠있는]. 행주-형[行舟形짐을 가득 싣고 떠나는 배]의 명당터로

대부분의 집 담장이 흙만으로 만든 판담 형식입니다.

돌로 담장을 만들면 무거워 배가 갈아 앉게 된다고,

또 우물은 절대 파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동안 마을을 돌아가는 낙동강 물을 퍼다 썼다고 해요.

우물을 파면 구멍이 뚫려 갈아 앉게 될 것이 걱정되어서라네요.

 

평범한 민가의 대문

높다란 솟을대문

민간인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대부 이상의 벼슬을 하지 않으면 이와같은

솟을대문을 만들 수 없었다고-

 

아담한 초가가 더욱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선 마음이 편안해요.

 

입향시조 류종헤공은 마을에 터를 잡자 마자 연꽃의 수술에 해당되고,

배의 돛에 해당되는 곳에 느티나무를 심었습니다.

즉, 명당 중의 명당 터에 나무부터 심은 거지요.

 

이곳에서는 신의 나무, 그래서 삼신당 신목으로 부릅니다.

예로부터 자식 없는 부녀자들이 기도하면 득남할 수 있다고

전해 오면서 누구나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 준다고 합니다.

 

느티나무 옆에는 소원을 적을 수 있는 종이와 펜이 놓여 있어

무수한 소원이 나무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이 나무 아래에서 동제를 지내고 달집태우기를

할 때 수많은 소원이 적힌 종이를 같이 태워 하늘로 보낸다고 합니다.

 

만송정 솔숲-천연기념물 제473호

우람한 소나무로 가득한 이 솔숲은

겸암 류운룡 선생(서애 류성룡 선생의 형님)이

젊은 시절에 조성했습니다.

선생은 풍수지리적으로 마을 서쪽 땅의 기운이

약해서 이를 보완하기 위헤 심은 비보림, 또는 방풍림이라고 합니다.

 

이 소나무는 400년 된 보호수입니다.

이 곳은 일제때 초등학교 자리인데

당시 이 운동장에 주민들이 모여

3.1독립만세운동을 벌인 뒤로

만세송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물론 학교는 페교되었지요.

              양진당-보물 제306호

 

 



하회마을에는 보물로 지정된 두 채의 한옥이 있습니다.
보물 제306호인 양진당은 입향시조인 류종혜공이 처음 지은 집으로 풍천류씨 대종택입니다.알기 쉽게 설명하면 영의정 류성룡 선생의 아버님과 형님이 사시던 집입니다. 입암고택이라고 한 것은 류성용 선생의 아버님이신 류중영공의 호가 입암이기 때문입니다.


    
양진당의 특징은 기둥이 위는 좁으면서 가운데는 배가 부른, 이른바 배흘림기둥입니다.
이러한 건축기법은 로마에서 건너 온 방식으로 시각차에서 무척 안정감을 준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등 몇 군데에 불과하고 민간 가옥으로는 양진당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충효당-보물 제414호

 

서애 류성룡 선생은 평소 생활이 검소하기로 유명, 재상의 자리에

오르고도 청백리로 알려져 초가삼칸에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장손인 졸재 류원지 공이 유림들의 도움을 받아 집(충효당)을 지었습니다.

 

충효당이란 현판은 우의정을 지낸 미수 허목의 친필입니다. (명필로 유명)

 

충자를 자세히 보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용상, 즉 임금을 뜻하고, 효자는 늙을 노자에 아들 자,

즉 젊은 아들이 부모를 업고 있다는 뜻입니다

 

만지송입니다. 대부분의 소나무는 위에서 가지가 뻗어가지요.

만지송은 밑에서부터 가지가 여러 갈래로 자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충효당의 종부가 만가지의 가지처럼 자손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며 심었답니다.

 

충효당 내의 영모각입니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각종 유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건물을 재건축할 때의 비용은 고 육영수 여사께서 분담하셨고,

영모각이란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입니다.

 류성룡 종가 유물(柳成龍 宗家 遺物)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의 종손가에 전해오는 유물들로

첫째, 유성룡 선생이 직접 쓰던 것, 둘째, 선생의 어머니에 관한 곤문기, 그리고 선생에게 조정에서 내린 여러 문서들 등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김성일과 동문수학하였습니다.

명종 21년(1566)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예문관검열, 공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지요.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장군인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군비확충에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도학·문장·글씨 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안동의 병산서원 등에 모셔졌어요.

 

 

보물 제460호 류성룡 유품

  

 유물 가운데 선생이 쓰던 것으로는 갑주와 투구, 가죽으로 만든 신발인 혁화,

왕의 군사 명령서를 넣은 유서통, 갓끈, 관자 등입니다.

 

 

갑옷

투구


 

유서통 

 

갓끈

 

관자

 

관대

 

가죽신



玉淵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8호)
이 정사는 서애 선생이 노후에 한가로이 지내면서 학문을 하기 위해 세우려 하였으나 재력이 없어 짓지 못했다. 그러던 중 승려 탄홍(誕弘)이 스스로 10년이나 시주를 모아 선조19년(1586)에 완성한 우정의 산물로 선생의 덕망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알려주는 증거이다.
처음에는 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 했는데, 옥연(玉淵)은 정사 바로 앞에 흐르는 깊은 못의 색조가 마치 옥과 같이 맑고도 맑아서 서애 선생이 이름하였다. 선생은 이 집에서 임진왜란의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을 구상하고 저술하였다.

건물의 특징은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터가 넓고 평탄한 것과 사랑채와 별당채는 남향이며, 안채와 행랑채는 동향으로 지은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역사 마을’로 지정된 하회마을은 화산과 마주 보며 낙동강 물줄기가 마을을 휘몰아나가는 절경과 기와집과 초가집이 어우러진 옛 전통마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지금까지도 후손들이 생활하며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살아있는 전통마을’이다. 풍산류씨 입향조 류종혜가 터를 잡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유교적 전통을 잘 유지해 온 동성마을로 잘 알려져 있으며 특히 류운룡과 류성룡 형제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대대로 가학을 형성하고 그 후손들에 계승되며 이후 영남을 대표하는 유학자들이 대거 배출되기도 했다.
 
 
<부용대에서 내려다본 하회마을 전경>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고택 가운데 충효당은 조선시대 명재상으로 알려진 서애 류성룡의 종가이다. 간혹 충효당을 류성룡의 생가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류성룡이 임종을 앞두고 ‘자손들아 꼭 삼가라. 충효 이외에 힘쓸 일이 없다’라고 남긴 유훈을 후손들이 받들어 건물을 짓고 그 뜻을 계승해 온 집이라 할 수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84호 화경당(북촌댁)

 

 

석호 류도성 공이 1862년에 집을 지을 때는 99칸짜리였으나

불행히도 45칸은 소실되고 현재는 44칸만 남아 있습니다.

화(和)는 어버이를 섬기고, 경(敬)은 임금을 섬기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6대에 걸쳐 3천석 부자임에도 딱 한 채가 초가집입니다.

화장실입니다.

우리 세대에서는 99% 만족을 느끼고 살지만 1%의 모자람이 있어야

후손들이 이를 채우기 위한 노력을 할 수있다는 교훈이라고 합니다.

 

화경당 뒤뜰에는 하회송이란 보호수가 있습니다.

소나무가 하회마을을 감고 흐르는 강물처럼 가지가 휘어져 올라가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호랑이가 우글 거리던 시절, 선조들의 유물 속에 호랑이는 없고, 유독 사자만 문화 유산으로 전해 올까요?

타고난 용맹성과 위엄으로 인해 백수(百獸)의 왕(王)으로 불리는 사자는 신성함과 절대적인 힘을 가진 상상의 동물로 여겼다. 또한 사자는 산예(狻猊), 백택(白澤) 등의 이름으로도 부르는데, 위엄이 있고 용맹스러워서 신물(神物)로 여겨왔다.

문헌에 나타난 사자에 관한 내용은 연암 박지원 (朴趾源, 1737 ~ 1805])이 [열하일기(熱河日記)] 철경록(輟耕錄)에 왕과 여러 대신들을 모아 잔치를 벌인 대취회(大聚會)에서 사자의 위용(威容)을 “사자는 몸이 짧고 작아서 흡사 가정에서 기르는 금빛 털을 지닌 삽살개처럼 생겼는데, 여러 짐승이 이를 보면 무서워 엎드리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한다. 기가 질리기 때문이다.” 라고 묘사하였다.

조선 후기 저명한 학자인 사옹(蒒翁) 홍성모(洪錫謨,1781-1857)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 ‘정초 세화로 계견사호(鷄犬獅虎)를 그려 붙였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창령 광룡사 북받침, 조선시대

불교에서 사자는 불법(佛法)과 진리를 수호하는 신비스런 동물로 인식되었으며, 기원전 3세기경 불교 발생국인 인도의 아쇼카왕 석주에 사자상이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사자의 두려움 없고 모든 동물을 능히 다스리는 용맹함 때문에 부처를 인중사자(人中獅子)라 비유하기도 하고, 최고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수호신으로 표현되며,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사자 위에 앉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 국보 제5호

불교의 수호신인 사자는 불교와 함께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불상의 대좌를 비롯해 불탑, 석등, 부도(浮屠) 등 불교와 관련된 다양한 석조물에 적극 활용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 당나라의 능묘제도가 도입되면서 사자가 무덤을 지키는 수호상으로 나타나며 탑의 장식품이나 불교 공예품, 그리고 기와나 생활용품 등에 폭넓게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사자형상으로 통일신라시대 능묘제도(陵墓制度)의 완성을 이룬 괘릉(掛陵)의 커다란 돌사자상이 있다. 이 사자상은 무섭고도 부드러운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춘양교·월정교터 등의 사자상도 왕릉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충북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 쌍사자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널따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돌사자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사자의 머리에는 두 개의 귀와 뿔이 있고 목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의 갈기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사자 두 마리 중 한 쪽은 입을 벌리고 있고, 다른 한 쪽은 입을 다물고 있는데, 입을 벌린 사자는 창조와 시작을 의미하고, 입을 다문 사자는 끝과 소멸을 나타내 시작과 끝을 잇는 반야의 지혜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외에도 구례 화암사 쌍사자 석등, 의성 만덕동 삼층석탑 기단, 불국사 다보탑 석사자상 등 상당 부분의 사자상이 남아 있다.

 

청자사자유개향로 (靑磁獅子鈕蓋香爐) 국보 제6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시대에는 사자의 형상을 본떠 만든 청자가 상당수 제작되었다. 사자 모양의 청자베개를 비롯하여, 뚜껑에 사자 형상을 붙인 청자주전자 등이 남아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국보 제60호로 등록되어 있는 중앙박물관 소장 청자사자유개향로(靑磁獅子鈕蓋香爐)이다.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경에 만들어진 청자향로로, 이 시기에는 비취색의 청자가 절정에 달하였다.

향로의 몸체는 3개의 다리가 떠받치고 있는데, 전면에 구름무늬가 가늘게 새겨져 있다. 뚜껑은 대좌에 앉아있는 사자모양을 하고 있으며, 대좌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사자는 입을 벌린 채 한쪽 무릎을 구부린 상태에서 앞을 보고 있는 자세이며, 두 눈은 검은 점을 찍어서 표현했다. 유약의 색은 엷은 녹청색으로 광택이 은은하다. 몸체에서 피워진 향의 연기가 사자의 몸을 통과한 후 벌려진 입으로 내뿜도록 되어있는데, 아름답고 단정한 모습이 이 시기 청자향로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청자사자연적, 개인 소장

 

<청자사자연적>은 생김새가 해태와 유사하지만 역시 고려시대 사자형 상형(象形) 청자로, 이러한 상형연적의 파편들은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요지 등에서 채집된 바 있다. 사자는 엎드려 웅크린 채 입을 꼭 다물고 머리와 시선은 앞을 주시하고 있으며, 세부묘사는 과감히 생략하였으나 동물의 표정을 익살맞게 잘 표현하고 있다.

 

사자의 또 다른 모습, 백택과 산예

백택기,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백택(白澤)은 사자의 모양을 하고 8개의 눈과 6개의 뿔을 가진 상상의 동물로, 사람의 언어를 조작하고 삼라만상(森羅万象)에 통달해 재난을 피하게 해주는 영력을 가졌다. 『산해경』에 의하면 백택은 기린(麒麟)이나 봉황(鳳凰)처럼 덕이 높은 임금이 나타나기를 기원하며, 만물의 모든 뜻을 알아낸다는 상서로운 동물로 그 형상은 마치 사자와 같고 8개의 눈과 6개의 뿔을 가진 상상의 동물로 사람의 말을 잘 한다고 한다. 실존하는 동물이 아닌 상상의 동물이기 때문에 여느 상상의 동물처럼 표현하는 이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형태에 관계없이 덕으로 나라를 다스려 태평성대를 이루고자 하는 염원이 공통적으로 담겨있다.

이러한 백택은 조선시대에 문양으로 나타났는데 민가에서 함부로 쓸 수 있는 문양은 아니었다. 현존하는 유물 가운데 왕의 서자인 제군(諸君)의 흉배와 국가적 의례행렬에 쓰인 의장기 등에서 백택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실린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 가운데 ‘산예(狻猊)’ 란 시가 있다.

멀리 유사(流沙)를 건너 만리를 오느라
遠涉流沙萬里來
털옷은 다 해어지고 먼지를 뒤집어썼네.
毛衣破盡着塵埃
머리를 흔들고 꼬리를 휘두름에 어진 덕이 배었으니
搖頭掉尾馴仁德
굳센 그 기상 어찌 온갖 짐승 재주와 같을쏘냐!
雄氣寧同百獸才

이 시에 의하면 사자놀이가 서역(西域)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사자놀이는 인도에서 행해지던 동물의장무(動物擬裝舞)로 서역과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 널리 성행하였다. 남북국 시대에 당나라를 통해 신라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후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북청사자놀음 사자 탈 국가무형문화재 제15호

우리 민중 속의 놀이 사자, 산예는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놀이 가운데 ‘사자놀이’라 불리는 사자 춤에서 살펴볼 수 있다. 봉산(鳳山), 황주(黃州), 강령(康翎), 통영統營), 북청(北靑) 등에서 사자탈을 쓰고 추는 사자춤은, 대개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행해진다. 백수의 왕인 사자의 힘을 빌어 사귀를 몰아내고 경사로움으로 마을의 평안을 유지하고자 하는 소망이 이 춤에 담겨있다.

일반적으로 사자로 명칭이 알려져 있는 법주사의 쌍사자석등(국보 제 5호) 사자 머리에는 사슴뿔 형상인 2개의 뿔이 있어 사자라기보다는 백택으로 보아야 한다. 또 청자사자(국보 제 60호)는 구룡자(九龍子) 가운데 연기와 불을 좋아하는 산예라는 상상의 동물인데, 사자를 닮아 명칭이 사자이지만 본래 명칭은 산예라는 상상의 동물이다. 상상의 동물들은 대체로 산해경이나 삼재도회 등에서 나타나는데, 조선시대 후기 명, 청의 영향으로 명칭이나 역할 등이 변화되면서 해태, 사자 등이 혼동되었다.

 

 

글:윤열수가회민화박물관장 (www.gahoemuseum.org )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동대학교 미술사학과를 비롯하여 여러 대학에서 강의활동을 하였고, 현재 가회민화박물관 관장이며,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에밀레박물관, 서울특별시 박물관협의회 회장, 한국민화학회 회장, 문화재위원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저서로는 [민화이야기](디자인하우스, 1995), [龍, 불멸의 신화](대원사, 2), [KOREAN ART BOOK 민화 Ⅰ,Ⅱ](예경, 2000), [꿈꾸는 우리 민화](보림, 2005), [신화 속 상상동물 열전](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10) 등이 있다. 현재 월간 문화재(한국문화재보호재단 발행) 고정 필자이다.
 
자료 제공:한국문화재보호재단 (http://www.chf.or.kr/) 

마을 수호신, 장승을 찾아서

 

나무나 돌을 조각해 마을 입구에 세우는 장승. 예로부터 마을 수호신으로 자리한 민간신앙의 한 형태다. 장승 재료는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경기나 충청 등 북방지역엔 주로 목장승, 호남과 영남 등 남방지역엔 돌장승이 많다.
재밌는 건 대전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충청권에 해당하는데 의외로 돌장승이 많다. 비룡동 줄골 돌장승, 법동 석장승, 읍내동 뒷골 돌장승 등 돌장승이라고 이름 붙인 것만 10여기, 유사 선돌까지 합치면 20기가 훌쩍 넘는다. 심지어 전라북도 남원시와 함께 돌장승 대표 도시로 꼽히기도 한다.
대전에 돌장승이 많은 건 여러 가지로 해석해볼 수 있다. 대전 주변에 산이 많다는 것도한 이유다. 대전은 계족산, 식장산, 보문산 등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실제 돌장승이 있는 마을 어르신에게 물으면 절반은 “주변 산에서 가져온 돌로 장승을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돌장승도 산 주변, 특히 계족산 중심으로 집중 분포한다.
이에 반해 공주는 다른 충청권과 마찬가지로 목장승이 유명하다. 장승제가 무형문화재로 등록돼 있는 공주 탄천 장승은 말할 것도 없고, 장승제로 유명한 공주 백교리 장승도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는 목장승이었다.
이처럼 장승은 저마다 특색이 다르다. 마을마다 추구하는 가치관, 종교나 문화, 주변 여건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거꾸로 그 마을 장승을 살펴보면 마을의 문화를 파악해볼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여러 장승을 둘러보고, 장승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보는 것, 장승 여행의 포인트다.


 

- 법동 석장승
아들과 딸이 함께 하는 가족 장승

 

법동 석장승(대전광역시 민속문화재 제1호)은 대전광역시 대덕구 법동사거리에서 법2동으로 가는 초입에 있다. 길을 사이에 두고 남장승(높이 약 160cm)과 여장승(높이 약 130cm)이 마주 보는 형상이다. 두 기 모두 자연석으로 눈, 코, 입과 가슴께 각각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을 새겨놨다.
남장승과 여장승, 형태는 비슷하나 이 두 기 사이엔 차이가 좀 있다. 남장승은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특히 코가 크고 뭉툭하다. 이에 반해 여장승은 이목구비가 흐릿하다. 같은 시기에 만들었기 때문에 마모 정도가 비슷하다고 가정하면, 아마도 각각의 성(性)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또 하나 외형적 특징은 남장승, 여장승 옆에 각각 있는 선돌이다. 대전 지역의 다른 장승에선 찾아볼 수 없는 형태로, 이것이 법동 석장승을 ‘가족 장승’이라 할 수 있는 이유다. 선돌은 그 높이에서 남장승, 여장승보다 각각 50cm 가량 작은데,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조수’ 또는 ‘아기 장승’이라 부른다. 이 아기 장승 덕분에 멀리서 보면 엄마와 딸, 아빠와 아들이 나란히 서서 마주보는 듯한, 가족 분위기가 연출된다.
이 법동 석장승은 약 300년 전에 만든 것으로 추측한다. 그때는 나무 장승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나무가 썩자 그 당시 법천골에 살던 송민노라는 부자가 자비로 지금의 돌장승을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구전으로만 전해져 정확한 사실 여부를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구체적인 이름까지 명시하며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영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300년의 세월. 법동 석장승이 그 긴 시간을 한 자리에 있었을까? 아니다. 두어 차례 옮겼다. 현 대전 동부경찰서와 한마음아파트 자리가 예전엔 ‘법천골’이라는 마을이었다. 법동 석장승은 바로 그 법천골 출신이다. 그러다 1989년, 법동지구에 택지개발을 시작하며 법천골 주민과 함께 장승도 고향을 떠나야 했다.
법동 석장승을 관리하고 장승제를 주관하는 ‘법동 동우회’ 김학제 회장은 그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했다.(법동 동우회는 당시 법천골을 떠나야 했던 주민들이 관계라도 유지하자며 만든 친목 단체다.)
“그 당시 법천골에 100여 가구가 살았는데, 재개발한대서 다 떠날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주민 대부분이 지금 법2동 시장통 있는 주택가에 자리잡았어. 돌장승도 그때 자리를 옮겨 대덕구청 뜰에 5년 가량 보관했다가 재개발 끝나면서 현재 자리로 온 거지. 남장승, 여장승이 마주 보던 모습이나 방향은 똑같고, 자리만 옮긴 겨.”
대전에서 유일한 가족장승.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 비룡동 줄골 돌장승
태양 따라 음양이 균형을 이루나니

 

 

대전광역시 동구 비룡동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대청호 방면으로 약 500m 가면 양 길가에 있는 장승. 바로 비룡돌 줄골 돌장승이다. 줄골 돌장승이 처음 만들어진 건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이다.
“나도 우리 아버지한테 전해들은 얘기긴 한데…. 약 250년 전 우리 6대조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선조들이 무덤 앞에 상석(床石) 만든다고 저 앞에 야산에서 돌을 가져왔댜. 그래서 상석 만들고 남은 돌을 어쩔까 하다가 선조들이 직접 돌장승을 만들었다는 거지. 일부에서는 줄골 장승이 200년 됐다고 하는디, 우리 집 족보를 확인해보니까 250년이 맞어.”
줄골마을에서 조상 대대로 살고 있다는 박달순 할아버지는 줄골 돌장승이 얼마나 예쁜지 꼼꼼히 설명해줬다. “보고 왔어? 다시 가서 봐봐. 찬찬히 봐야 더 예뻐.”
줄골 돌장승은 일단 그 외형이 남다르다. 특히 천하대장군(높이 약 180cm)이 볼만하다. 눈썹, 눈, 코, 입에서 풍기는 섬세한 표정이라든가, 턱수염을 표현한 하관 모양새가 살아있다. 뿐만 아니라 천하대장군은 문관(文官)형 장승인데, 이를 상징하는 관모와 도포자락의 꼼꼼한 표현방식도 훌륭하다. 여기에 더해 앞, 뒤, 양옆, 네 면을 모두 입체적으로 조각해 보는 방향에 따라 색다른 멋도 느껴진다.
이에 비하자면 지하대장군(높이 약 160cm)은 다소 아쉽다. 일단 천하대장군과 달리 앞면만 조각한 평면적인 모양새다. 그나마 앞면도 얼굴과 가슴팍에 새긴 글자를 제외하면 별다른 게 없어 다소 밋밋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표정만큼은 천하대장군 못지않게 생생하다. 특히 얼굴 윤곽부터, 눈썹과 입 등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한 모양새를 하고 있어 전형적인 동양 미인의 멋을 뽐낸다.
예술적 감성이 한껏 깃든 조각 형태나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마모가 적어 그 모습을 올곧이 간직한 보존 상태 등 외형적 특성이 대전 대표 장승으로 줄골 돌장승을 꼽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줄골 돌장승엔 동양적 정서도 담겨 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 이 두 장승 사이엔 음양의 기운이 신비하게 흐른다. 일단 천하대장군은 치켜 올라간 눈썹만큼이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근엄하고 딱딱하다. 이에 반해 지하대장군은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다. 음양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또한 두 장승이 서 있는 방향에서도 음양의 교류가 느껴진다. 천하대장군은 서쪽을 향하고, 지하대장군은 동쪽을 향해 서 있다. 아침나절 천하대장군 뒤에서 떠오른 태양은 지하대장군 품에 안기며 저문다. 마치 천하대장군의 양기가 지하대장군에게 전해지는 듯하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동양적 정서가 짙게 묻어나는 대목이다.
주변 경관도 이런 분위기를 거든다. 천하대장군은 단단한 시멘트 담벼락 밑에 있다. 근엄한 분위기는 이로 인해 한층 고조된다. 지하대장군 주변엔 배롱나무를 비롯해 각양각색 꽃과 나무가 풍성하다. 부드럽고 온화한 지하대장군 이미지를 한껏 여성스럽게 거들어준다. 오래 볼수록 깊이가 느껴지는 것이 있다. 줄골 돌장승이 딱 그렇다. 여유가 있다면 찬찬히 들여다보길 권한다.


 

- 읍내동 뒷골 장승
유교문화를 녹이다

 

그 옛날부터 대전광역시 대덕구 읍내동 회덕동주민센터(조선 시대 회덕현 관아(官衙)가 있던 곳)와 계족산 사이에 마을이 하나 있었다. “회덕현 관아 뒤에 있는 골짜기 마을”이라 해서 뒷골 혹은 후곡(後硲)이라 불렀다. 이 뒷골 마을에 읍내동 뒷골 장승이 들어선 건 대략 100년 전이다.
“지금은 이사갔는디 이 동네에 백조근이라는 사람이 살았었다고. 그 사람 할아버지가 엄청난 부자였어. 논밭 합쳐 2000평 이상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까…. 지금도 주민센터 뒤쪽으로 주차장이며 논밭이 다 백조근 그 양반 땅이여. 그 백조근의 할아버지가 장승을 세웠다고 하더라고.”
김수웅 뒷골 노인회장과 경로당 어르신들 증언으로 미뤄보아 백조근 씨의 할아버지는 뒷골 마을 유지였던 듯하다. 마을 내부에서 장승을 세우자는 얘기가 나왔을 때, 마을 유지로서 앞장서 장승을 세우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그렇게 자리한 읍내동 뒷골 장승은 할아버지 장승(약 160cm)과 할머니 장승(약 80cm)의 키 차이가 다른 데보다 유독 크다. 이유가 뭘까? 이 이유는 주변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일단 뒷골 마을은 회덕 향교 대성전(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과 가까이 있다. 향교는 공자를 모시고 유교를 숭배하는 조선 시대 교육기관이다. 유교를 논하자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유교가 조선 시대 남성우월주의를 불러왔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향교뿐만이 아니다. 이 마을 초입엔 회덕현 관아(대덕구청 홍보문화과 확인 결과, 그 당시 회덕현 관아엔 현감 포함 관직자 200여 명이 상주했다고 한다)가 있었다. 이를 통해 그 당시 뒷골 마을이 이 일대를 대표하는 행정·문화의 중심지였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뒷골 마을 초입에 있는 높다란 홍살문도 눈여겨볼 만하다. 홍살문은 주로 향교, 궁전, 관아 등의 건물 앞에 세우는 문으로 유교 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놀라운 건 이 홍살문을 불과 1년 전 친환경 조성사업 목적으로 만들었고, 이에 관해 주민들도 반발 없이 응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할아버지 장승과 할머니 장승 키 차이가 심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주변 여러 상황으로 인한 유교 문화의 일상화, 이에 따른 남성중심 사고, 그러한 결과가 읍내동 뒷골 장승 모습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마을 문화를 통해 돌장승 모습을 해석해보는 것, 장승 여행의 또 다른 재미다.

 


- 공주 백교리 장승
기자 신앙 반영한 선돌 형태

 

 

공주 백교리 장승은 충남 공주시 유구읍 백교리 마을 입구에 있다. 입구로 들어갈 때, 왼쪽에 보이는 게 여장승, 오른쪽이 남장승으로 서로 마주보는 형태다. 남장승엔 북방흑제대장군지위(北方黑帝大將軍之位), 여장승엔 남방적제대장군지위(南方赤帝大將軍之位)라고 적혀 있다. 남장승, 여장승은 모두 선돌형으로 이렇다 할 특징은 없다. 다만, 남장승은 길고 뾰족한 형태인데 반해, 여장승은 둥글고 넙데데한 형태다. 기록에는 없으나, 기자신앙의 한 형태로 각각 남근, 여근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추측한다.
“장승이 언제 생겼는지는 잘 모르지. 목장승부터 따지면 몇 백 년 됐겄지.”
고추밭에서 고추 따던 윤선중 할아버지는 옛날부터 있었기 때문에 자세한 건 모른다고 한다. 공주향토문화백과에 따르면 오래전부터 목장승을 깎아 제사를 모시다가 약 40여 년 전부터 매년 새로 깎는 수고를 덜고자 나무장승 대신 돌장승을 모셨다고 한다.
장승과 함께 있는 솟대는 여전히 매년 새로 깎는다고 한다. 솟대는 새끼줄로 장승에 고정되어 있다. 솟대 끝에는 오리를 상징하는 조각이 올려져 있다.
“정월대보름 전날 저녁에 장승제 준비해서 15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제 지내거든. 그때 동네목수가 소나무 가져다가 솟대 깎아서 세우고 그러지.”
백교리 장승제는 먼저 정월 초 제주와 축관을 선정한다고 했다. 이후 마을 풍물패가 마을을 돌며 주민에게 돈을 걷는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제물을 마련한 후 제를 지낸다. 제는 잔을 붓고,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치른다. 제사 후에는 제물을 음복한다.
광활한 논밭에 벼와 고추가 익어가던 어느 날. 장승과 함께 백교리 마을은 풍요로워 보였다.


 

- 공주 탄천 장승
신랑 마을 남장승, 신부 마을 여장승

 

 

충남 공주시 탄천면 송학리에 가면 ‘소라실’이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은 가운데를 관통하는 길을 따라 동편 신랑 마을과 서편 신부 마을로 나뉜다.
이 소라실 마을 앞에는 야트막한 산이 하나 있는데, 풍수상 항상 화기를 내뿜고 있어 예로부터 화재가 빈번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재앙을 막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장승을 세웠다고 한다. 이때 세운 장승이 바로 동편 신랑 마을의 남장승과 서편 신부 마을의 여장승이다. 각 장승은 동방천원축귀대장군(東方天元逐鬼大將軍), 서방지원축귀대장군(西方地元逐鬼大將軍)이라 부르는데, 모두 목장승으로 2년에 한 번 새로 깎는다.
소라실 마을은 사실 장승 자체보단 장승제로 유명하다. ‘공주 탄천 장승제(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8호)’라는 이름으로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에 지내는데, 신랑 마을 남장승과 신부 마을 여장승을 합궁시키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오전에 일단 깃대제를 지내.”
마을에서 만난 점필복 할머니는 공주 탄천 장승제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오전에 지내는 깃대제는 서편 신부 마을에서 시작한단다. 신부 마을 주민이 농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치며 신랑 마을로 가는데, 이때 신랑 마을 농기가 신부 마을 농기를 마중 나온다.
“그러는 사이 아침에 소나무를 베어오고, 동편 마을, 서편 마을 구분 없이 다 같이 마을회관에서 준비한 점심을 먹지.”
식사가 끝나면 마을 공터에서 준비한 소나무로 목장승을 만든다. 목장승은 동네 주민이 직접 깎는다. 날이 어두워지면 본격적인 혼례식을 거행한다. 혼례식은 표주박에 술을 따라놓고 신부 장승이 네 번 절하게 시키고, 신랑 장승은 두 번 절하게 시킨다.
혼례식이 끝난 뒤, 동편과 서편 마을 주민은 자신들의 장승을 모시고 돌아와 각각 장승제를 지낸다. 이후 각 마을 주민은 각자의 마을로 돌아오며 횃불놀이를 한다. 장수 횃불을 선두로 졸병 횃불이 따라오는 방식인데, 마을에 돌아와서는 제를 지내고 남은 술과 음식을 나눠 먹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2017년 한미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는 트럼프 대통령 부인 멜라니아 여사에게 청와대 소정원에 자리한 ‘불로문(不老門)’ 을 소개했다. “이 문을 지나가면 영원히 늙지 않는다”라는 불로문의 의미를 이야기하자 멜라니아 여사는 “그렇다면 꼭 지나가야겠다”라며 웃음꽃으로 화답했다.

 

불로문은 창덕궁 애련지 권역에 있는 돌로 된 문이다. 끊어진 데 없이 넓은 돌판 한 장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이 문을 지나는 사람이 다치고 상하는 일 없이 오래 살라는 기원을 담은 것 같다. 『궁궐지』 기록에 따르면 숙종이 1692년 연못 가운데 ‘애련정’을 지었는데 그 동쪽에 ‘불로(不老)’라는 이름의 돌문이 있고 그 문 밖에 ‘불로지(不老池)’라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이 연못은 남아있지 않다. 불로문 기둥에는 경첩의 흔적이 있어서 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오늘날에도 불로문을 모방한 조형물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로문의 구체적인 의미와 연구는 찾아 보기 어렵지만, 무병장수를 염원하는 마음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글. 양설희 실무관(궁능유적본부 궁능서비스기획과) 사진. 궁능유적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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