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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운영자 칼럼] 신념과 용기로 문화재를 지켜낸 사람들

문화재방송 2022. 3. 21. 00:17

전주 경기전의 조선왕조실록보전 기적비

임진왜란 발발… 시골선비들 조선왕조실록을 구하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아침 8시경. 왜선 7백여 척에 탄 조선침략 선봉군 제1진 1만 8,700명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됐다.왜군은 북상하면서 닥치는 대로 살인, 방화, 약탈을 저질렀다. 이 와중에 한양의 궁궐에 있는 춘추관, 충주, 성주에 보관하던『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불에 탔다. 유일하게 왜군이 들어가지 못한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아 있었다. 전주사고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고려사』, 『고려사절요』등 모두 1,344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또 전주사고 옆에 있는 경기전에는 조선왕조를 창건한 태조의 어진이 걸려 있었다.

 

그해 6월 왜군 제6진이 성주, 금산, 남원을 거쳐 전주로 진격하고 있었다. 왜놈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경기전 참봉 오희길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실록과 어진을 산속 깊숙한곳으로 옮기려면 말20여필과 많은 인부들이 필요한데……” 그의 머릿속에 이 지역사회에서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명망이 있었던 전라도 태인에 사는 유생 손홍록이 떠올랐다.

 

바로 달려가 간청했다. “나라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실록을 보관해야 하는데, 저 혼자서는 역부족입니다. 부디 뜻을 같이 하십시다” 손홍록은 흔쾌히 동의하고 학문을 같이 했던 고향친구 안의와 함께 하인 30여 명, 수십 마리의 말을 데리고 전주로 달려갔다. 이때 손홍록의 나이는 58세, 안의의 나이는 64세로 고령의 노인들이었다. 오희길은 실록을 숨길만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정읍 내장산의 은봉암이 적격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들 세 사람은 태조부터 명종 때까지 13대에 이르는 180년의 기록을 47개 상자에, 『 고려사』등 다른서책을 15개 상자에 담아 수십개의 수레에 싣고 전주를 떠났다. 은봉암에 도착한 것은 이레만인 1592년 6월 22일. 다음날에는 태조 어진과 제기들을 용굴암으로, 다음달 14일에는 실록을 더 깊숙한 곳인 비래암으로 옮겼다. 이들은 책들을 일일이 지게에 지고 한발 한발 내딛으며 산으로 올라갔다.

 

이들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영은사(현 내장사)의 희묵스님과 무사 김홍무, 이름 없는 사당패에 이르기까지 자발적으로 나선 100여 명과 함께 실록을 지켰다. 이렇게 실록과 어진을 조정에 인계할 때까지 보관했던 기간은 14개월에 달한다. 후일 안의가 쓴 『난중일기초』에는 안의와 손홍록이 함께 자리를 뜨지 않고 실록을 지킨 날이 53일, 안의가 혼자 지킨 날이 174일, 손홍록이 혼자 있는 날이 143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잿더미로 변한 월정사… 큰스님이 몸으로 지킨 상원사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의 강원도. 중공군에게 밀려 후퇴하던 국군 제1군단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작전지역 안에 있는 사찰을 포함한 모든 민간 시설물을 소각하라” 산속에 있는 민가나 절이 적의 은폐물이나 보급기지로 활용될 가능성을 없애려는 가혹한 조치였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오대산 입구에 있는 월정사의 스님과 신도들은 북한군이나 인민군이 주둔지로 사용할 수 없게 되면 국군이 태우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들은 일주일 동안 절 건물의 방구들을 파내고 모든 문짝을 뜯어냈다. 마침내 국군이 들이닥쳤다.

 

이들도 천년고찰을 제 손으로 태우려니 부담이 되지 않을수 없었다. 결국 민간인들을 시켜 잿더미로 만들었다. 월정사는 화강암으로 만든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만 남고 폐허로 변했다.

 

국군은 이어 오대산 중턱에 있는 상원사로 몰려갔다. 당시 오대산에는 주민들 대부분이 피난을 가고, 한국불교의 거목으로 우뚝 서게 되는 한암스님만 상원사에 남아 있었다.

 

상원사로 들어온 군인들은 법당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 한암스님은 “잠깐만 시간을 주게”라고 이르고는 방에 들어가 가사와 장삼을 입은 뒤 법당 안에있는 불상 앞에 정좌했다.

 

그리고는 “이제 불을 질러도 좋다”고 말했다. 이를 본 장교가 “스님, 이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밖으로 나오세요”라며 끌어내려고 했다. 한암스님은 단호하게 일갈했다. “그대가 장군의 부하라면 난 부처님의 제자야. 중이란 원래 죽으면 화장을 하는 법. 나는 여기서 힘 안 들이고 저절로 화장을 할 터이니 당신들은 명령대로 어서 불을 지르게” 스님의 기개에 압도당한 군인들은 결국 법당의 문짝만 뜯어내 불을 태운 뒤 떠났다.

 

상원사는 자장스님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인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을 보관하고 있었다.

 

“화엄사를 불에 태워라”,“문짝만 소각하라”

 

1951년 5월 지리산. 빨치산 주축부대인 남부군을 토벌하던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 차일혁은 고민에 빠졌다. 상부에서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연곡사 등 인근 사찰들은 모두 공비의 은신처를 없앤다는 이유로 불길에 휩싸였다.

 

차일혁은 이 명령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 “절을 태우는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이 걸린다” 전쟁 중이라지만 화엄사는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이고, 더구나 각황전은 그의 어머니의 기도처였다. 차일혁은 10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화엄사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각황전 문짝들을 모두 떼어와 대웅전 앞에 쌓아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절을 태우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이를 어길 순 없다. 문짝을 태우는 것으로 명령을 이행한 것 이다” 이로써 화엄사 전각들은 무사히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해인사를 폭격하라”, “해인사 주변에만 기관총을 갈겨라”

 

1951년 12월, 지리산 일대에는 한창 빨치산 토벌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영환 편대장이 지휘하는 한국 공군의 유일한 전투비행대인 제10 전투비행전대는 공비토벌작전에 항공지원을 맡고 있었다.

 

아침식사가 끝나자마자 우리 전투비행대에 출격명령이 내려졌다. 공비를 토벌하는 경찰부대로부터 긴급 지원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4대의 비행기가 사천비행장을 출발해 지리산으로 향했다.

 

비행기마다 각각 500파운드 폭탄 2개와 5인치 로케트탄 6개, 캘리버50 기관총 1,800발씩을 장비하고 있었다. 미군정찰기의 목표 제시용 연막탄이 해인사 마당에 떨어져 하얀 연막을 내고 있었다.

 

이때 김영환 편대장의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각기는내 뒤를 따르되 편대장지시없이 폭탄을 사용하지 말라. 기관총만으로 사찰 주변의 능선을 사격하라” 잠시후 정찰기에서 독촉훈령이 내려왔다. “해인사를 폭탄으로 공격하라! 도대체 편대장은 무엇을 하고 있나?” 편대장의2차 명령이 떨어졌다.

 

“각 기는 폭탄 공격을 하지 말라!” 4대의 비행기는 해인사를 지나쳐 뒷산 능선 너머에서 폭탄과 로케트탄을 빨치산들에게 퍼부었다. 천년고찰을 지키려는 김영환 편대장의 용기가 해인사를 살린 것이다.

 

“전쟁 중이라도 한 나라의 궁궐을 훼손할 수 없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수복작전이 진행되던 시기에 미 육군의 제임스해밀턴 딜 중위는 인민군이 주둔해 있는 덕수궁을 포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해밀턴 중위는 명령을 어기고 인민군이 모두 빠져나와 을지로를 지날 때 공격을 개시해 덕수궁을 점령했다. 전쟁이 끝난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서울시내에는 중요한 건물이 많이 있었다. 역사적 건물로 알려진, 한국의 지난날 왕의 궁전으로 사용된 고궁이 몇 곳 있는데, 그중 서남쪽에 있는 것이 ‘덕수궁’으로 알고 있었다.

 

이 지점을 포격하면 나는 틀림없이 수백 명에 달하는 적군의 병력과 그 장비를 순식간에 괴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고궁도 함께사라져 버릴 것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한 국가의 유물인데, 나의 ‘포격 개시’란 말 한마디로 불과 몇분 안에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그대로 처리하여 포격하는 것은 나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인연으로 제임스 해밀턴딜의 묘비에는 그의 이름과 함께‘KOREA’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본래 ‘나라의 운을 기리는 곳’이라는 의미의 경운궁이라 불렸던 덕수궁은 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 속에서도 한 미국 장교의 문화유산 보호 정신 덕분에 지금까지 이 자리에 남아 현재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시골유생들이 가산을 털어 나서지 않았다면, 큰스님이 상원사에 없었다면, 차일혁과 김영환 두 분이 상부의 명령을 따랐다면, 다른 나라의 문화유산까지도 소중히 여긴 해밀턴 딜이 아니었다면… 이들의 용기가 없었다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는 흔적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글. 임기상 (CBS 선임기자)

 

 

봄은 봄이로되 오미크론 확산과 꽃샘추위로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이구나

 

낙안(落雁) 왕소군(王君)

한나라의 왕소군은 재주와 용모를 갖춘 미인으로 한나라 원제가 흉노를 달래기 위해 그녀를 흉노 왕과 결혼하게 했습니다. 흉노로 가는 도중 한 무리의 기러기들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고 하여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기원 전 이백여 년 전, 장량과 한신의 도움으로 항우를 꺾고 제위에 오른 유방에게 두통거리가 있었다.

북쪽의 유목민족 흉노였다. 그들은 가을겆이가 한창일 때면 국경을 넘어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마침내 한 고조 유방은 32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흉노족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게릴라전법으로 치고 빠지는 흉노의 기마병을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평성의 백등산에 포위되어 고전하다 가까스로 후퇴했다.

 

한 고조는 어쩔 수 없이 흉노와 불평등조약을 맺었는데, 그 조약 중 하나가 '한나라 공주를 흉노의 왕에게 시집보낸다'는 것이였다.

 

그 뒤 정략적인 이유로 흉노왕에게 시집가는 공주를 화번공주(花番公主)라 했다. 한나라 왕은 후궁 중에서 화번공주를 고르거나 신하의 딸을 양녀로 삼아 흉노왕에게 보냈다.

 

기원 전 33년, 한 11대 왕인 원제시대의 일이다. 흉노의 왕인 호안야가 화번공주를 요구했다.

 

당시 원제에게는 수 천명의 후궁이 있었다. 원제는 그 후궁을 일일히 기억할 수 없어 화공으로 하여금 초상화를 그려 오도록 해 그 중 아름다운 여인을 골라 잠자리를 같이 하기 일수였다.

 

원제는 화공이 그려 온 초상화 중 가장 추하게 생긴 여인을 골라 흉노왕에게 시집 보내기로 결심했다.

 

원제는 흉노왕에게 보내야 할 화번공주로 선정된 여인이 추한 여인이 아니고 글자그대로 천하일색의 미인이 나타나자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바로 이 미인이 서시, 초선, 양귀비와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으로 유명한 왕소군이다.

 

 

 

   

 

왕소군은 16살의 나이에 후궁으로 궁중에 들어 왔다. 원제의 후궁들은 초상화가 아름답게 그려져 왕의 선택을 받기 위해 화공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가난해 돈이 없는데다 미모에 자신을 가진 왕소군은 화공을 찾아가지 않았다.

괘씸하게 생각한 화공은 왕소군의 얼굴을 추하게 그렸다. 어떤 기록에는 보기 싫은 점을 얼굴에 넣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미인이 흉노왕과 함께 떠나가자, 원제는 화가 치밀어 올라 왕소군의 초상화를 그린 화공 모연수를 참형에 처했다.

 

중국의 북쪽 변방인 흉노까지 가는 길은 너무 황량했다. 민가는 물론 나무도 별로 없는 황무지를 가며 왕소군은 비파로 슬픈 마음을 달랬다.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이 소리를 듣고 날개짓을 못한채 땅에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부터 왕소군을 '낙안(落雁)미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 당시의 왕소군을 한탄하며 중국의 시성 이백(李白)은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다.

 

소군이 구슬안장 추어올려 / 昭君拂玉鞍(소군불옥안)
말에 오르니 붉은 뺨에는 눈물이 흐르네 / 上馬涕紅頰(상마체홍협)
오늘은 한나라 궁궐의 사람인데 / 今日漢宮人(금일한궁인)
내일 아침에는 오랑캐 땅의 첩이로구나 / 明朝胡地妾(명조호지첩)

 

흉노왕 호안야가 죽자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르며 왕소군의 미색에 홀려 아내로 삼았다는 기록도 있고, 아비와 아들의 아내가 된 것을 비관,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오랑캐족에게 강제로 시집간 천하일색의 왕소군은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쓸쓸하게 죽어갔다. 

 

 왕소군은 죽어 흉노의 땅에 묻혔는데, 겨울이 되어 흉노땅의 모든 풀이 시들어도 왕소군의 무덤 풀만은 사시사철 푸르렀다 하여 그 무덤을 청총(靑塚)이라고 한다.

 

중국 시인 동방규(東方虬)가 왕소군의 기구한 운명을 노래한 가사 중,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단어가 오늘날까지

전 세게적으로 회자되어 유명한 시인으로 부상했다.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도 없으니 /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저절로 옷의 띠가 느슨해지니 /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이는 허리 때문이 아니라네 /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서양인이 본 조선에 대한 기록들 | 역사문화 산책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의 저자인 영국의 여성 여행가 비숍. 남장한 모습이다.


‘장막 속의 조선’ 이해하거나 오해하거나

 

남들과 어우러 사는 세상에서 서로 알게 됨은 그 어우름의 전제다. 일찍이 조선시대에 서세동점의 거센 흐름을 타고 우리 곁에 다가온 서양인들은 의도야 어떻든 간에 우리와의 어우러진 삶을 위해 저들의 눈으로 우리를 보고, 저들의 사고로 우리를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 나름대로 보고 이해한 것을 적어놓은 기록들이 남아 있다. 그 중에는 우리의 좋은 것을 북돋아주고 모자람을 타일러주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거지나 왜곡 같은 것들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모두가 ‘자기 성찰’의 거울이 된다.

 

19세기 후반 닫힌 문 열리다

 

서양인들이 조선에 관해 쓴 최초의 글은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라 남해안의 웅천항(熊川港)에 들어와 포교를 시도하다가 되돌아간 스페인 선교사 세스뻬데스가 현지에서 보낸 네 통의 서간문이 실린 <선교사들의 이야기>(1601년)란 책이다.

 

그뒤 제주도에 표착해 13년간 억류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네덜란드의 하멜이 일명 <하멜 표류기>(1668년)란 견문기를 써내 조선을 서양에 알렸다.

 

그러나 조선이 서양을 엄격하게 경원한 것은 서양인들이 조선에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하멜 이후 한 세기 남짓한 동안 서양인들은 조선 근방에 얼씬도 하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중국이나 일본에 관해 쓴 책 속에서 가끔 어깨너머로나 바라본 조선에 관해 몇 토막씩 언급하곤 했다. 이러한 부분서가 19세기 중엽까지 250여년 동안 고작 여남은 책 나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닫혔던 문이 열리게 되자 ‘은자의 나라’ 조선에 대한 서양의 관심과 연구는 폭발적으로 급증하며, 이에 수반해 조선에 관한 서양 서적의 출간도 일시에 몇 배로 도약한다. 이 기간에 ,<하멜의 표류기>와 함께 조선 관련 3대 역작이라고 하는 달레의 <조선교회사 서론>(1874년)과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1882년)이 각각 출간된다.

 

그후 조선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더욱 높아짐에 따라 한국 전반에 관한 각종 서적의 출간은 계속 상승 일로를 걷고 있다. 1920년대를 고비로 17세기 초부터 1940년대 말까지 약 350년 동안에 나온 한국 관련 서양 서적은 약 400종(전서와 부분서)으로 추산된다.

 

‘비옥한 땅’ 쓸 줄은 모르니…

 

서양인들이 남겨놓은 이 모든 기록 속에서 우리는 근대와 선진을 자처하던 그들이 조선을 과연 어떻게 보고 이해하였는가를 읽을 수가 있다. 각계각층 사람들이 각이한 수요와 인식을 반영해 정치·경제·문화·사회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나름대로의 이해를 토로했기 때문에 내용이 방대함은 물론, 시각이나 지적 수준도 천차만별이다.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서양인들의 조선에 관한 지식은 어이없을 정도로 일천했다. 조선을 네 차례나 방문하고 나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1897년)이란 책을 쓴 영국의 여류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비숍이 조선으로 떠날 때 사람들은 ‘코레아’가 적도나 지중해, 흑해의 어드메에 있다고들 했다.

 

그런가 하면 그 무렵 조선에는 꼬리가 3피트나 되는 닭, 우수한 모피와 종이, 아름다운 도자기, 인삼이라는 영약, 풍부한 해산물이 있다는 소문이 미국사람들 귀에 들어갔다. 또한 옷을 장식할 정도로 금이 흔하고, 묘에는 호화로운 부장품을 함께 묻는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모두가 서구인들의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비몽사몽간에 ‘안개 속의 땅’ 조선에 들어선 서양인들의 눈에는 조선이 그야말로 낯설고 신비로웠다.

조선주재 각국 외교관들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미국 전권공사인 앨런)

조선의 자연환경에 대한 서양인들의 이미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기후는 온화하고 토지는 비옥하여 농업에 유리하고, 유용한 수산자원이나 관광자원은 풍부하다. 그러나 제대로 개발하여 활용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그들의 일치한 평가다. “한국은 가난한 국가가 아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국민의 잠재된 에너지는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비숍의 지적이다.

 

당쟁·부패에 대한 신랄한 일침

 

모두가 서구의 근대정치에 훈육된 내방자들이라서 조선의 전근대적 정치행태에 대해서는 신랄한 일침을 놓는다. 가장 큰 병폐로는 지배층의 학정과 무능을 들고 있다.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 때 고종의 밀사로 파견된 바 있는 <대한제국멸망사>(1906년) 의 저자 헐버트는 지배층 내에서의 관직매매와 횡령 등 부패와 타락이야말로 한국인의 뛰어난 능력과 발전 잠재력의 발현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라고 못박는다.

 

영국의 대표적 일간지인 <타임즈>(1897.9.17.)도 조선의 “양반들은 개혁을 부패나 직권남용 같은 자신들의 공인된 권리의 상실”로, “자신들의 삶의 양식을 빼앗아가는 악”으로 간주한다고 논평한다.

 

100여년 전 서양인들의 벽안에 굴절 없이 반사된 조선 정치의 참상은 오늘의 우리에게 경종으로 들려온다. 나약한 조선의 지배층은 외세에 대한 대항도 너무나 소극적이고 허무맹랑했다.

 

서양인들은 배에서 바라본 조선의 해안풍경이 너무나도 황량해 도무지 올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그것은 왜구와 서양 오랑캐의 욕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해안을 황폐화시키고 섬에서 주민들을 철수시키는 이른바 공도(空島)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금이 서구인들이 탐내는 대상이라고 해서 금 채굴을 아예 법으로 금한 것도 그 일례다.

 

우리는 흔히 이른바 당쟁을 조선을 이그러지게 한 2대 병폐의 하나로 꼽으면서 마치 조선만의 것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은둔의 나라 한국>(1882년)의 저자 그리피스의 평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당쟁에 해악이 있다면, 그것은 원초적으로 정치라는 행태에서 빚어지는 것이지, 결코 조선의 정치에서만이 유별나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오히려 반역과 패륜이 난무하는 서구의 정치사에 비하면 조선의 당쟁은 그래도 나름의 도덕성과 게임 율이 있다고 판단한다. 조선인이나 조선조의 체질에서 당쟁은 불가피하다는 자해적 식민사관을 자성케 하는 대목이다.

 

조선인들의 성정(性情)이나 생활관습은 언제 어디서나 이방에서 온 서양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조선인들의 건전한 도덕과 따뜻한 인정은 서양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음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반도를 8녀간 12번이나 여행하고 <한영대사전>을 편찬해 우리나라 영어교육에 큰 족적을 남긴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 게일은 저서 <전환기의 조선>(1909년)에서 한국인은 정직해서 신뢰할 수 있고, 신용을 중시하며 문서가 아니라 구두로 한 약속도 철저히 지키는 등 서양인보다 더 휼륭하다는 호평을 내린다.

 

다블뤼는 저서 <조선사 입문을 위한 노트>(1860년)에서 조선인들의 상부상조 정신에 크게 감동하면서, 서구인들의 ‘근대적 이기주의에 대해 증오와 가증스러움’을 느낀다고 자괴의 심정을 털어놓는다.

 

그런가하면 두 번이나 조선을 찾은 영국의 화가 새비지-랜도어나 헐버트 같은 이들은 조선인들의 교육열과 언어습득 능력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을 뛰어넘는다면서, ‘말귀를 알아듣는 총명함’이나 ‘신속한 이해력과 추론력’에 대한 놀라움도 서슴지 않는다.

조선주재 초대 미국 전권공사인 푸트의 부인이 궁중에서 나들이하는 모습

 

정직하지만 게으른 민족?

 

그런가하면 조선인들의 성정이나 관습에 배여있는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지적과 질타를 가하고 있다. 개중에는 터무니없는 왜곡이나 비하도 있다.

 

그들이 자주 제시하는 조선인들의 부정적 이미지는 나태와 무기력, 불결과 사치 따위다. 이것 말고도 까다로움이나 탐욕, 수다스러움, 폭식과 폭음, 느슨한 시간과 수량 개념을 흠으로 잡는 이들도 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친구로서 그의 한국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케난은 저서 <나태한 나라 한국>(1905년)에서 조선인을 나태하고 무기력하며, 몸도 옷도 불결하고 아둔하며, 매우 무식하고 선천적으로 게으른 민족이라고 악평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헐버트 같은 이는 케난 류의 악평은 식객노릇이나 하면서 서울거리를 배회하는 건달들에나 한한 말일 뿐, 그런 계층은 서구에도 얼마든지 있다고 통박한다. 당초 게으름을 조선인의 기질로 여겨오던 비숍은 러시아나 만주에 이주한 조선인들의 근면하고 번영하는 모습을 보고나서는 자신의 오판을 후회하면서 조선사람은 ‘밖에 나가면 더 잘 사는 민족’이라는 체험적 결론을 내린다.

 

쓰거나 달거나 새겨들어야

 

서구인들이 조선에 와서 가장 연민을 느낀 것은 여성들의 삶이다. 이런 삶을 가장 적나라고 세심하게 묘사한 사람은 같은 여성 신분인 비숍이다.

 

사회적 멸시와 남존여비에서 오는 비애와 절망, 힘든 노동, 병, 사랑 부족, 은둔 등이 그를 자극한 조선 여성상이다. 남자들의 방탕한 외도와 축첩을 놓고 조선사람들에게는 ‘집(하우스)은 있으나 가정(홈)은 없으며’, 조선의 딸들은 ‘아버지에 손에 처형되며 아내는 남편한테 살해당한다’는 끔직한 표현마저도 그는 마다하지 않는다.

 

조선에 대한 서양인들의 이해나 이미지는 서로가 이토록 다르다. 이러한 편차는 근원적으로 보면,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배주의적, 우월주의적 사고방식인 오리엔탈리즘의 인식지평에서든가, 아니면 남을 있는 그대로 발견하고 이해하려는 타자론(他者論)의 인식지평에서 조선을 바라보는 근본입장의 다름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더해 그들의 조선 체류기간이나 체험의 심도, 그리고 정보수집 대상과 경로의 차이도 그러한 편차를 낳게한 객관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서양인들이 본 조선을 떠올리노라면 비분강개하고 애상이나 회한에 젖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그것을 피하지 말고 되돌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공자가 말하듯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싶거든 어디서 왔는지 되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정수일 교수>

 

헐버트 박사 평양여행기 ‘말 위에서 본 조선’

  •  이형모 기자
  •  승인 2021.09.10 09:20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 옮김, 국제사회에 최초로 평양 소개한 소중한 기록 담아
‘말 위에서 본 조선’(2021, 참 좋은 친구) 표지

한국 문명화의 선구자이자 독립유공자인 호머 B. 헐버트 박사의 1890년 평양 여행기를 담은 책 ‘말 위에서 본 조선’(2021, 참 좋은 친구)을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회장 김동진)에서 8월 31일 발간했다.

이 책에는 1890년 평양을 다녀온 뒤 ,이듬해 1891년 일본의 영자신문 <재팬메일(The Japan Weekly Mail)>에 6월 6일부터 10월 24일까지 10회에 걸쳐 연재한 평양 여행기가 담겼다.

 

이 책은 헐버트 박사가 조선 내륙의 특성과 평양이라는 옛 도시를 역사, 문화, 지리 측면에서 국제사회에 최초로 소개한 책으로, 헐버트 박사는 조선 내륙을 여행하고자 하는 외국인들에게 안내 역할을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기고했다.

 

조선의 풍광, 역사, 문화를 역사적 배경과 함께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기술해 그 시절 많은 외국인들이 조선을 살짝 들여다보고 표면적 관찰만을 기술한 점과 크게 대비된다.

 

헐버트는 이 기고글을 통해 평양의 빼어난 자연경관과 경제적, 군사적 측면에서의 전략적 강점을 조명하는 한편, 조선의 무역 통계를 제시하며 한반도 서해안의 평양, 목포, 의주를 개방하는 논리를 설파하고 있다. 또한 평양 사람들의 특성을 파헤치고, 한민족을 북방계와 남방계로 나눠 각각의 얼굴 특성을 밝혀냈다.

옮긴이 김동진 회장은 “이 책을 통해 헐버트의 해박한 역사 지식과 자주적 역사관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북쪽에 거대한 부가 존재한다고 이미 131년 전에 설파한 헐버트의 혜안에 감동했다”고 전했다.

 

김동진 회장은 지난 8월 31일 오전 11시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거행된 ‘호머 헐버트 박사 서거 72주기 추모식’ 자리에서 이 책을 박사의 묘소에 헌정하며 “헐버트의 평양 여행기를 통해 남북이 하루빨리 하나 되고, 헐버트의 한민족 탐구 열정과 자주적 역사철학, 그리고 그가 분석한 평양 사람들의 특성과 한민족의 기원이 알려지며, 조선의 풍광과 한민족의 인종적 우월성을 통해 우리 국민이 민족적 자긍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이 책을 출간했다”고 책을 펴낸 이유를 전했다.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주에서 태어난 헐버트 박사는 1886년 23세의 나이로 대한제국 왕립 영어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내한해 영어를 가르치는 한편, 외교 자문을 맡아 고종황제를 보좌했다.

 

1905년 을사늑약 후 고종황제의 밀서를 휴대하고 미국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해 을사늑약의 무효와 한국의 자주 독립을 주장하고자 했다.

 

이듬해 ‘한국평론’을 통해 일본의 야심과 야만적 탄압을 폭로하는 등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 앞장섰다. 1906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사건 이후 1907년 7월 일본 정부는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헐버트 박사를 강제 추방했다.

헐버트 박사가 1907년 미국 스프링필드로 돌아간 후 1945년까지 한국 독립을 위한 활동은 끊임없이 계속됐다. 그리고 40여년 만인 1949년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고자 7월 29일 그리운 한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미국 해군선박을 타고 긴 항해를 한 탓에 노령에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일주일만인 1949년 8월 5일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의 차례는 <재팬메일(The Japan Weekly Mail)>에 연재한 순서대로 나눠졌으며 다음과 같다.

1. 조랑말을 타고 돈의문, 영은문을 지나자 북한산의 아름다운 자태가 눈에 들어와

- 1891년 6월 6일

2. 조선에서 가장 멋진 임진강을 만나, 숙박료는 안 받고 음식상 숫자로만 돈을 받아

- 1891년 7월 4일

3. 송도(개성) 외곽에 도착하니 헛간이 열을 지어 있는 것처럼 인삼밭이 다가와

- 1891년 7월 18일

4. 비를 맞고 조선식 화로에 몸을 말려, 조선 풍광의 특징은 웅장함(grandeur)

- 1891년 7월 25일

5. ‘조선’은 ‘Chosen’이 아닌 ‘Chosun’으로 써야 하며, ‘朝鮮’은 ‘조용한 아침(Morning Calm)’이 아닌 ‘아침 햇살(Morning Radiance)’을 의미

- 1891년 8월 1일

6. 봉산(鳳山) 고을에 도착하니 주막 주인이 호랑이 주의보를 내려

- 1891년 8월 15일

7. 평양은 매우 전략적 도시일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해

- 1891년 8월 29일

8. 평양 사람들은 강직하며, 용감하며,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특별함을 지녔다.

- 1891년 9월 12일

9. 바빌론(Babylon)만큼이나 유서 깊은 도시 평양의 흔적에서 오늘날 아메리카(America) 평원에 새롭게 조성된 신도시가 보여 주는 정연함이 연상돼

- 1891년 10월 10일

10. 한반도 서쪽에서 평양을 먼저 개방하고, 곧바로 참으로 아름다운 목포(木浦), 압록강 어귀의 의주(義 州)를 개방하여 조선 경제를 일으켜야

- 1891년 10월 24일-

원문보기

https://mail.daum.net/#MINE/a0000000003kxiS

[뉴스 속의 한국사] 펜 든 기자로, 총 든 시인으로… 日帝 항거해 17번 투옥됐죠

입력 : 2022.02.03 03:30

이육사

 이육사가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하면서 쓴 1932년 1월 14일 자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 기사예요. ‘육사생’이란 필명을 썼어요.

경북 안동의 이육사문학관은 최근 이육사(1904~1944) 시인이 남긴 유일한 서명을 그가 별세한 지 78년 만에 확인했다고 밝혔어요. 이육사가 소장했던 한 책의 속표지에 쓰인 서명이 누구의 것인지 해독할 수 없었는데, 좌우를 뒤집어 봤더니 이육사의 다른 이름인 이활(李活)이란 글자가 보였다는 것이죠.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이었고 '이활'이란 이름도 썼어요. '육사'는 그의 호(號·본명 외에 허물없이 쓰기 위해 지은 이름)였죠. 그는 왜 이런 이름을 지어 썼던 것일까요?

호의 뜻, '죽이고 싶도록 치욕스러운 역사'

'오! 먼 길에 지친 말/ 채찍에 지친 말이여!/.../ 새해에 소리칠 흰 말이여!' 1930년 1월 3일 자 조선일보에는 '말[馬]'이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이 실렸어요. 당시 26세였던 이육사의 첫 작품이었습니다. 시에 등장한 '말'은 바로 일제 식민 통치에 신음하던 조선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었죠.


이육사는 시인이자 투사였고, 독립운동가이자 신문기자로서 불꽃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안동의 양반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고, 신학문을 동경해 도쿄와 베이징에서 유학 생활을 했습니다. 일찌감치 독립운동에 투신해 일제에 의해 17차례나 투옥되는 등 그의 경력 대부분은 항일 운동으로 채워져 있죠.

스물한 살 때인 1925년. 그는 형 이원기, 동생 이원유와 함께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의열단은 무장 독립운동을 펼치던 곳이었습니다. 그가 의열단에 가입한 배경에 대해선 '친가의 엄격한 유교적 가풍에 더해 의병 활동에 참여했던 외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분석이 있습니다.

1927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때 이육사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는데, 당시 수인(옥에 갇힌 사람) 번호가 '264'였다고 해요. '육사'라는 호는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는 여기에 '戮史(육사)'라는 한자를 붙였습니다. '육'은 죽일 육(戮) 자입니다. 나라 잃은 민족의 역사가 치욕스러워 죽이고 싶었다는 것이죠. 그 뜻이 너무 거칠다는 집안 어른의 권고로 나중엔 뭍 육(陸)을 쓴 '陸史(육사)'로 바꿨다고 합니다.

조선일보 입사해 기자로 활동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이육사의 다음 행보는 신문기자였습니다. 조선일보에 입사해 대구지국을 경영하고 기자로도 근무하면서 '육사생'이란 필명으로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 '신진 작가 장혁주 군 방문기' 등의 기사를 썼죠. 1934년에는 조선일보 본사 소속으로 대구 특파원에 임명됐습니다. 신문사를 나온 뒤에도 1940년 일제가 조선일보를 폐간할 때까지 꾸준히 지면에 글을 발표했습니다.


시 '절정'에서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라고 했던 것처럼, 1932년 4월 이육사는 항일 운동을 위해 만주를 거쳐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의열단 수장인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들어갔던 겁니다. 폭탄 제조법과 투척법, 피신과 변장, 무기 운반 등을 배웠고 권총 사격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총을 든 시인'이었던 것이죠.

시인 신석초(1909~1975)는 이육사가 "유리처럼 맑고 깨끗한 얼굴, 상냥하고 친밀감을 주는 눈과 조용한 말씨"를 가졌다고 회고합니다. 이 때문인지 그가 당시 무장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고 합니다. 1933년 귀국한 그는 1934년 일제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는데, 이때 촬영한 사진이 붙은 형무소 신상 카드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백마 타고 올 초인'을 기다리며

이육사가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해 본격적인 시를 짓기 시작한 것은 1937년입니다. '청포도' '절정' '광야' 같은 유명한 시가 이 무렵 발표됐죠. 이육사에게는 시를 쓰는 것 역시 저항의 일부였습니다. 극한의 상황에 있으면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의지가 그의 시 곳곳에 잘 드러나 있죠. 역사학자인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이육사의 시에 대해 "조국에 닥친 피의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사무친 진정성에서 나온 혁명 문학"이라고 평가합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하는 시 '청포도'는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라 읊습니다. 청포(푸른 도포)를 입은 손님이란 조국 광복과 평화를 상징한다고 여겨지는데, 청포는 당시 중국에서 비천한 사람들이 입던 옷이자 망명한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일상복이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시 '절정'은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는 마지막 구절로 유명하죠. '강철 무지개'란 칼 같은 기세로 일제 침략자들을 찌르는 행동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육사 시 중에서 가장 웅장한 스케일이 돋보이는 '광야'는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고 노래합니다. 나라를 빼앗긴 극한 상황이 오래 지속되더라도, 끝내 잃어버리지 않을 민족의 정신을 부르짖는 것 같습니다.

이육사는 1943년 중국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잠시 귀국했다가 또다시 체포돼 베이징으로 압송됐고, 1944년 1월 16일 감옥에서 순국(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침)했습니다. 그는 한 수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가을에도 아예 유언을 쓰려고는 하지 않소.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뿐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우리나라의 저항 시인]

우리나라의 근대 문인 중 일제 침략에 맞선 '저항 시인'으로 꼽히는 사람들은 이육사 외에도 한용운(1879~1944), 이상화(1901~1943), 심훈(1901~1936), 윤동주(1917~1945) 등이 있습니다.


'님의 침묵'을 쓴 한용운은 명망 높은 독립운동가였습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를 맡았죠.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이상화도 숱한 체포와 고문을 겪었습니다. 시 '그날이 오면'과 소설 '상록수'를 썼던 심훈 역시 3·1 운동에 참여해 투옥된 저항 작가였죠. '서시' '별 헤는 밤'의 윤동주는 일본 유학 중 항일 운동에 참여했다가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돼 옥사했는데, 일제가 저지른 생체 실험의 희생자였다는 의혹도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이들은 조국 광복 직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상화는 1943년 4월, 이육사는 1944년 1월, 한용운은 1944년 6월, 윤동주는 1945년 2월 별세했어요.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그들이 그렇게도 꿈꾸던 광복(1945년 8월 15일)을 볼 수 있었을 것이기에 안타까움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육사의 모습. /위키피디아
 의열단 활동으로 1934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을 당시의 신상 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이육사가 쓴 유고시 ‘편복(박쥐)’의 친필 원고. /새문사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조유미 기자
 

https://newsteacher.chosun.com/site/data/html_dir/2022/02/03/2022020300052.html

청일전쟁 당시 조선군은 왜 서로 총구를 겨눠야했을까?

중앙군은 일본군과, 지방군은 청군과 연합해서 서로 교전
줏대없고 전략없는 지도자의 '박쥐외교'가 만든 참극




개항 이후 고종의 중앙 친위대로 양성됐던 별기군 모습. 임오군란 이후 다시 기존 5군영체제로 돌아갔다가 갑오개혁 이후 또다시 만들어지기를 반복했다.(사진=우리역사넷)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보통 한국의 식민지화에 단초가 됐다는 전쟁으로 평가받는 청일전쟁. 이 전쟁과 관련해 국사교과서를 보다보면 한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청일전쟁 직전까지 동학군을 토벌했다는 조선의 '관군'은 대체 뭘했는지 여부다. 외국군이 진주해 자기네 땅에서 전쟁을 벌였다면 분명 이를 막든, 누군가와 연합해서 싸우든 교전내용이 나와야 정상이지만 조선군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국사책에서 당최 나오질 않는다.
 
그렇다면 그때 조선군은 대체 뭘하고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한가지가 아니다. 중앙에서 파견된 장위영(壯衛營) 군대는 일본군과 연합해 청군과 싸웠고, 당시 평양감사가 이끌던 평양의 지방주둔군인 위수병(偉戌兵)들은 청군과 연합해 일본군과 싸웠다. 전라도 지역의 지방군들은 동학군과 연합해 일본군을 친다며 북상했고 이들을 공격한 것은 일본군과 연합한 조선 관군이었다. 이처럼 청일전쟁에서 조선군은 조선군끼리 총구를 겨누고 전투를 벌였다.

이런 한심하기 짝이없는 행태가 나왔던 이유는 당시 국왕 고종과 그의 정치적 파트너였던 명성황후, 그리고 집권 민씨 척족이 최악의 외교를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보통 청일전쟁이라 하면 단순히 일제의 야욕이 발단이 된 것처럼 알려져있지만, 실제 발단이 된 것은 국왕 고종의 잘못된 '파병요청'이었다.


청일전쟁 당시 보초를 서고 있는 조선군과 청군포로들 모습. 사진 뒤쪽에 조선인들과 일본군 모습도 보인다. 청군 포로 중에는 조선 지방군들도 섞여있었다.(사진=위키피디아)

1894년 2월, 동학 농민군이 봉기해 북상하기 시작했고, 조정에서 파견한 토벌군도 패퇴하기 시작하자 다급하진 고종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코자 했다. 그러나 대신들이 모두 반대했다. 1885년, 청나라와 일본이 체결한 톈진조약에 의거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할 경우 일본도 파병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조선이 양국의 전쟁터가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왕실인 전주 이씨 가문의 발호지인 전주가 동학군에 함락된 이후 고종은 청나라에 파병할 것을 줄기차게 주장했으며, 결국 왕명에 따라 청나라에 파병이 요청됐다. 청군은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 정부에 파병을 알렸고,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물포에 병력을 상륙시키고 경복궁을 불시에 습격해 점령, 고종의 신변을 확보한 뒤 조선에 내정개혁안 5개조와 함께 친일내각을 세워버렸다.

경복궁 함락 과정도 기막혔다. 원래 일본군은 당시 조선군의 무장상태에 상당히 긴장한 상황이었고 경복궁 습격 날 동원된 병력도 100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도성 밖에 병사들이 일본군의 대궐 침범소식에 입성해 교전을 펼쳤으며 당시 신무기였던 기관총 등 각종 중화기로 무장한 조선군은 상당히 선전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고종의 신변을 확보하자 고종은 조선군에 무기를 버리라고 명을 내렸고, 이에따라 조선군은 교전을 멈추고 일본군에 항복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모습. 기관총도 없었고 빈약한 무라타 소총으로 무장한 상태였으며 식량과 탄약보급도 떨어진 상태였지만 기강면에서 앞서있어 주로 도적떼로 구성됐던 청군을 물리친다.(사진=위키피디아)

이렇게 스스로 화를 불러들인 고종과 민씨 정권의 이후 행태는 더욱 가관이었다. 중앙군은 일본군과 함께 연합해 청군과 싸우도록 명을 내리고 지방군에는 또한 밀명을 내려 청군과 연합해 한양으로 진격, 궁궐에서 일본군을 쫓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결국 조선군은 단합해서 외세를 물리치지 못하고 최고지도자의 어리석은 결정에 따라 외세에 철저히 이용되고 만 것이다.

청나라 군대도 일본군보다 무장력이 훨씬 우수했고 보급도 탄탄한 편이었지만 군대 기강이 엉망이었고, 병사들 대부분이 도적출신이라 정규전에 익숙치 못했다. 결국 평양에 주둔하던 청군 1만3000여명과 조선군은 비슷한 숫자의 일본군을 만나 하루만에 대패한다. 당시 일본군은 탄약부족과 식량부족에 시달리며 만약 조선과 청나라 연합군이 하루만 더 평양성을 사수했다면 알아서 자멸할 위기에 처해있었지만 결국 군대 기강의 차이가 승패를 갈랐다.


러일전쟁 전 당시 러시아에서 한반도 상황을 풍자한 엽서 모습(사진=위키피디아)

이러한 청일전쟁의 경과에도 고종과 조선조정은 착실한 내정개혁과 국력양성보다는 또다른 박쥐외교를 통해 이이제이만을 노린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는 것을 보고 러시아에 접근, 친러정책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명성황후는 을미사변으로 제거당한다. 이에 고종은 다시 아관파천을 통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주했으며 러시아의 힘을 빌려 친일내각을 박살내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개화파 지식인들을 숙청한다.

결국 식민지화로 가는 망국의 길목에서, 일제의 야욕 못지 않게 국왕인 고종과 민씨 척족들의 정치, 외교적 행태는 크게 한몫했던 셈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당시 고종과 민씨 척족이 보여줬던 최악의 정치, 외교적 행보는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문화재방송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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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