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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의로움을 실천한 옛 사람의 얼을 따라

문화재방송 2022. 4. 1. 00:04

 

 

 

-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이 뿜어내는 씩씩한 기운

 

 

 

합천 영암사지(靈岩寺址, 사적 제131호)는 황매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터다. 절터 앞에 서면 우선 모산재가 뿜어내는 기상에 압도당한다. 폐사지의 스산한 기운 따위는 없다. 대신에 씩씩함이 느껴진다.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과 삼층석탑(보물 제480호), 그리고 귀부(보물 제489호)는 절터에서 나온 건물 받침돌, 각종 기와조각들과 어우러져 있다.

쌍사자석등에 얽힌 마을 사람들의 충정은 유명하다. 1933년께 일본인이 반출하려던 것을 마을사람들이 막아 면사무소에 보관해 놓았다가 1959년 절터에 암자를 세우고 원래 자리로 옮겨왔다. 석등 화사석 네 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사천왕은 불법을 지키는 신이다.


그러니 이 석등을 지키려는 마을 사람들의 의로움이 예사로 여겨지지 않는다.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쌍사자 엉덩이의 토실토실하고 부드러운 실감은 만져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영암사가 언제 지어졌는지 일러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서울대학교도서관의 적연국사자광탑비(寂然國師慈光塔碑) 탁본에 고려 현종 5년(1014년)에 적연(932~1014)이 여기서 83세에 입적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워졌으리라 짐작이 된다. 건물터는 여느 절간과 다른 특징이 많다. 금당이 있는 축대의 가운데가 튀어나와 있고 그 좌우에 가파른 돌계단이 있는 점, 금당터 면석에 얼굴이 새겨져 있고 앞면과 좌우 세 면에 사자상 등의 동물상이 돋을새김돼 있는 점 등이 그렇다. 또 최근 이어진 발굴에서는 회랑까지 확인돼 이 절의 사세가 예전에는 아주 대단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영암사지 삼층석탑은 쌍사자석등의 남다름에 밀려 조금은 소박해 보인다.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잘 이어받았으나, 기둥 표현이 약하고 지붕돌 받침수가 줄어들어 있다. 위쪽 금당터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자리잡은 영암사지 귀부들은 아주 잘 생겼다. 전체 모습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이다. 새겨진 것들이 정교하면서도 강한 생동감이 느껴지는데 두 거북을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도 있다. 하나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어 씩씩해 보이고 다른 하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다소곳하다.

 

 


- 삼가장터
1919년 3월1일 그날의 의로운 만세

 

삼가장터는 여느 오일장터와 마찬가지로 규모가 예전만 못하다. 삼가는 한우가 유명한데 장날이 아니어도 한우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식당들이 들어서 있다. 삼가장터 한 모퉁이에는 삼가 3·1만세운동기념탑이 있다. 꼭대기에는 선열을 형상화한 모습이 양쪽으로 새겨져 있는데, 하늘을 나는 모습에서 힘찬 기상이 우러난다. 앞면에 새긴 그림은 아름답고 뒷면에 쓰인 글씨는 씩씩하다. 한쪽에는 100년 전 의병활동을 벌인 이들을 기리는 빗돌도 놓여 있다.


1919년 삼가 장날인 3월22일 두 차례 일어난 이 거사에는 삼가·쌍백·가회면 주민 등 참가자가 무려 3만여 명에 이르렀다. 삼가처럼 작은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만세를 불렀음은 쉽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일이다. 일제의 진압은 무자비해서 40명 남짓이 목숨을 잃었고 150명 정도가 크고작게 다쳤으며 50명 가량이 감옥으로 끌려갔다. 게다가 그에 앞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의병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이곳 지역민들은 떨쳐 일어났다. 이런 기개의 배경에는 같은 삼가 출신인 남명(南冥) 조식(1501~1572)의 영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역 사람들은 보고 있다.

삼가장터 둘레에는 삼가장터 3·1만세운동기념탑 외에 삼가 기양루(岐陽樓,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93호)와 삼가향교(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29호)가 있다. 기양루는 옛날 고을 수령들의 연회장으로 쓰였던 건물이라 한다. 동쪽에 남아 있는 동헌터와 관련지어 볼 때는 삼가현 관아의 문루로도 짐작되는데 합천에서 가장 오래된 누각이다.

삼가를 휘감으며 흐르는 양천 건너 교동마을에는 우람한 삼가향교가 언덕배기 높은 데 자리해 있다. 풍토를 교화한다는 유교 특유의 계몽주의가 담긴 현판 풍화루(風化樓)가 걸린 대문은 올려다보면 주눅이 들 정도로 기세가 대단하다. 안에 있는 명륜당 건물 축대는 보통과 달리 화강암이 아니고 지역에서 많이 나는 검고 푸른 퇴적암을 얇게 겹쳐 쌓아 눈길을 끈다.

 

 


- 남명 조식 선비길과 생가터
경(敬)과 의(義)로 집약된 선비정신

 

 

남명 조식 생가로 이어지는 '선비길'과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가 겹쳐 있는 두모마을에는 커다란 정자나무가 있고 그 아래 정자가 하나 놓여 있다. 여기를 일러 괴정(槐亭) 쉼터라 하는데 백의를 입은 이순신이 권율이 있는 합천 초계 율곡 도원수부로 가던 길에 들러 하룻밤을 묵으면서 다리쉼을 한 자리이다.

이순신이 종들에게 마을 사람들 쌀로 밥을 짓지 말라고 일렀는데도 종들이 이를 지키지 않자 엄히 다스리고 쌀을 갚아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남명 조식 선생 생가지(경상남도기념물 제148호)는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 있다. 남명은 30대 후반에 이미 '(경상)좌도에 퇴계 이황이 있다면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는 찬탄을 받았다고 한다.
남명의 사상은 경(敬)과 의(義)로 집약된다. 모든 사람과 세상 만물을 공손하게 대하고 세상살이에서 의로움을 실천하라는 선비정신이었다.


퇴계와 남명은 둘 다 벼슬살이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퇴계는 임금의 부름을 뿌리치지 못하고 벼슬을 했고 남명은 한번도 그 부름을 받아들이지 않아 처사(處士)로 남았다. 대신 그는 한편으로는 학문을 닦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자를 길렀다. 그가 길러낸 제자들이 없었다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는 더욱 큰 위기에 직면했을 터이다.

 

임진왜란 육전과 해전을 통틀어 첫 번째 승리를 기록한 의병장 곽재우도 남명의 문인이었고 합천을 지켰던 의병장 정인홍(1535~1623)도 남명의 제자였다. 곧게 살다 간 남명의 이런 영향은 시대를 뛰어넘어 근대로까지 이어졌다. 그가 태어난 고장 삼가에서 을미의병이 많이 나왔고 일제강점기 3·1만세운동에서도 삼가는 다른 데와는 크게 달랐다.

이어지는 뇌룡정(雷龍亭,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29호)은 1549년 남명이 지은 정자다. <장자>에 나오는 '연묵이뢰성 시거이용현(淵默而雷聲 尸居而龍見), 깊은 연못과 같이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레처럼 소리치고,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난다'에서 따왔다. 과연 제대로 된 선비라면 그래야 마땅하겠다. 정자 안으로 들어가면 같은 글귀가 양쪽에 나란히 붙어 있다.


뇌룡정 바로 옆 용암서원은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따르고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용암서원 앞에는 남명 흉상과 을묘사직소를 새긴 커다란 돌덩이가 나란히 놓여 있다. 단성소라고도 하는 이 상소문은 명종 임금이 1555년 내린 단성현감 자리를 받지 않고 오히려 임금을 호되게 나무란, 경(敬)과 의(義)에 입각한 꼿꼿함이 그대로 표현된 명문으로 이름높다. 생가는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사라졌다는데 한동안 방치되다 발굴을 거쳐 2012년 11월 현재 복원공사가 이뤄졌다.

 

 

 

 

- 의병장 곽재우 생가터와 충익사
임진왜란 당시 처음 의병 일으킨 홍의장군

 

 

의령 충익사(忠翼祠)는 임진왜란 당시 처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망우당(忘憂堂) 곽재우(1552~1617) 홍의장군과 17장령을 비롯해 무명 의병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남겨진 곽재우 유물(보물 제671호)은 잘 보존된 장검을 비롯해 말갖춤(마구), 포도 문양 벼루, 사자철인, 화초문백자팔각대접 등이다. 앞에 있는 의령 중동리 충의각(忠義閣,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522호)은 어느 한 곳도 쇠못을 치지 않은 우리나라 전통 목조건물이다. 옆에는 곽재우장군유적 정화기념비도 우뚝 솟아 있다.

 

 

충익사의 정원은 아주 아름답게 잘 가꿔져 있다. 키가 8.5m에 가슴높이둘레가 3m에 이르는 모과나무(경상남도기념물 제83호)도 있다. 지금은 여기 서 있지만 원래는 수성마을을 지키던 당산나무였다. 줄기가 근육처럼 울퉁불퉁하게 골이 패여 있는데, 오래된 모과나무에서 볼 수 있는 긴 세월을 견디어낸 연륜이겠다.

의령 유곡면 세간리 곽재우 생가터 앞은 늦은 가을이면 온통 노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다. 어린 시절 장군이 놀면서 호연지기를 기르고 학문을 연마했다는 600년 된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2호)가 두눈 가득 들어온다.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로, 해마다 음력 정월 초열흘에 은행나무에 금줄을 치고 '목신제(木神祭)'를 지내면서 풍년과 안녕을 빌었는데 제사 비용은 이 나무에서 나오는 은행을 팔아 마련했다니 나무의 크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은행나무 바로 옆에 곽재우 장군 생가가 있다. 여기서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마을 입구에 있는 현고수(懸鼓樹,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97호)는 북을 매단 나무라는 뜻으로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모으고 훈련을 할 때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니 현고수 앞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이 처음 일어난 역사적인 장소다. 의령군이 해마다 열고 있는 의병제전 행사를 위한 성화는 여기에서 불씨를 받아 출발한다.

1592년 4월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는 9일 뒤인 4월22일 의병을 일으켰다. 불패신화를 이룩한 바다의 이순신에 버금가는 승리를 그 해 5월과 6월 의령에 있는 강줄기에서 유격전과 심리전으로 일궈냈다. 관군이 아닌 의병이라 활과 창, 농기구가 무기의 전부였을 텐데도 왜군에 맞서 승전함으로써 조선 민관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한편 의령 부림면 입산마을에는 백산 안희제(1885∼1943) 선생의 생가(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93호)가 있다. 안채와 사랑채 두 채로 돼 있는데 사랑채는 초가지붕을 이었다. 권위와 꾸밈이 없어 소박한 모습이다.


백산 안희제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해 정신적·경제적자강(自强)과 교육과 민족기업 발전에 힘쓴 독립운동가다. 일제 자본에 맞서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운영했다. 


만주에 건너가 '발해 농장'을 경영하고 학교를 운영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몸을 다쳐 귀국한 1942년 일제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보석으로 풀려나왔지만 이듬해 숨지고 말았다.

 

 

 

 

- 보덕각·망우정
의롭고도 외로운 길을 걸었던 뜻

 

 

쌍절각(雙節閣)은 임진왜란 때 경남 합천 초계 마진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숨진 손인갑(1544~1592) 장군과 아들 손약해의 넋을 기리기 위해 1609년 의령군 봉수면 신현리에 세운 것인데 1943년 지정면 성산리로 옮겼다. 보덕각(報德閣, 문화재자료 제66호) 역시 곽재우 장군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739년 임진왜란 의병의 첫 전투지이자 승전지인 이곳에 세웠다.

당시 영의정 번암(樊巖) 채제공(1720∼1799)이 비문을 썼다. 합천에서 의령으로 이어지는 여정에서는 '앎에서 끝내지 말고 몸소 실천하라'고 강조했던 남명의 정신이 그의 제자 곽재우로 실현된 자취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보덕각이 있는 기강(岐江, 거름강) 나루는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자리다. 곽재우는 1592년 5월4일과 6일 갈대밭에 군사를 숨겨두고 강물 아래에는 나무 말뚝을 박아둔 채로 왜군들이 배를타고 오기를 기다려 꼼짝 못하게 한 다음 화살을 쏘아 무찔렀다. 6월 정암진에서 이뤄진 두 번째 승전은 강을 잘 건널 수 있도록 왜군이 꽂아놓았던 표지를 뻘밭 쪽으로 옮겨놓음으로써 승전의 기초를 닦았다.


마지막 걸음은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망우정이다. 망우정은 곽재우가 말년을 보낸 곳이다. 그이는 전라도 영암으로 귀양 갔다가 돌아온 다음 1602년부터 망우정에 머물렀다. 선조와 광해군의 요구로 잠깐잠깐 벼슬살이를 한 때는 빼고 한결같이 여기 머물렀다. 왜 그랬을까? 아마 제대로 죽기 위해서라고 짐작하는 이들이 많다. 전공이 높은 사람인데도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등 세상이 어지러우니 벼슬을 하면 오히려 명줄만 줄인다고 봤을 것이다.

곽재우는 또 의병을 일으키느라 재산을 써버리고 패랭이를 만들어 팔았다고도 한다. 말년에는 곡기를 끊고 신선처럼 살았다는데 그로서는 최선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남명 문하에서 동문수학하고 마찬가지로 의병도 일으켰던 합천의 정인홍은 광해군 조정에도 남아 영의정까지 지냈으나 결국 제 명에 죽지 못했다. 망우정은 강가 언덕배기에 숨은 듯 앉아 있다. 망우정에 서면 활처럼 휘어진 강폭을 따라 굽이치는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뒤에는 1789년 세운 충익공 망우 곽재우 유허비(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3호)와 1991년에 세운 또 다른 유허비가 나란히 서 있다.

 

蛇足:임진왜란 당시 이몽학과 한현의 반란사건으로 곽제우와 김덕령 두 의병장이 역적으로 몰려, 곽 의병장은 누명을 벗었으나, 김 의병장은 모진 고문으로 감옥에서 절명하고 말았다.(광주에 김덕령 의병장을 기리는 충장사가 있다)

 충장공 김덕령 의병장이 절명하며 읊은 시 '춘산곡'  

 

춘산에 불이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

이 모에 내 없은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여행쪽지 - 모산재 영암사지(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1659) 영암사지를 더 특별하게 보이게 하는 건 뒤에서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황매산 모산재다. 황매산은 1108m 높이이며, 모산재는 767m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 남명 조식 선비길(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 외토리 어귀 500년 묵은 느티나무에서 시작된 길이다. 생가터를 비롯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뇌룡정, 선생의 덕을 기리고 위패를 모신 용암서원 등을 만날 수 있다. / 충익사(경남 의령군 의령읍 중동리 467-2) 문의 055-573-2629 / 보덕각·쌍절각(경남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 망우정(경남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투쟁 정신과 역사의 이면 엿볼 수 있는 장수의 깃발

 

수자기는 깃발 한가운데 장수를 뜻하는 ‘수(帥)’자가 적혀있는 깃발로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에 꽂는 깃발이다. 현재 강화역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수자기는 가로, 세로 4m가 넘는 대형 깃발로 현존하는 유일한 장수기이다.

 

이는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진무영 중군에 임명된 어재연 장군이 광성보를 본진으로 하여 미군과 전투할 때 사용했던 깃발이다. 그 당시 미군의 근대적 군사력에 밀려 광성보는 함락당하고 말았고 수자기는 이때 전리품이 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2007년, 떠난 지 136년 만에 우리나라로 다시 돌아왔다.

 

수자기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나라를 위해 열악한 무기로, 무기가 없으면 흙을 뿌리면서라도 싸웠던 조선병사들의 용기와 투쟁 정신을 상징한다. 그와 동시에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흐름에 어두웠던 우리 역사를 담은 귀한 자료이다.

 

근대 시기 역사의 아픔이었던 신미양요의 흔적

 

한반도의 관문이자 한강을 통해 수도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강화는 그 지정학적 위치상 19세기 후반, 새로운 문명세력과 충돌이 빈번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사건 등이 모두 강화를 배경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그중 신미양요는 1871년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에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이다.

 

1871년 5월 16일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5척의 아시아 함대는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출발했다. 3일 후 충청도 해미 앞바다에 도착한 미군은 한동안 강화해협 주변에서 지형과 수로를 탐측하였다.

 

그 당시 조선은 병인양요 후 서양 세력에 대한 경계가 더욱 높아졌을 때로 조선 정부는 콜로라도호로 관리를 파견하는 등 대화를 시도하였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6월 1일 탐측대는 강화 손돌목에 도착하였고 허가없이 진입하는 이들을 막기 위해 조선군 수비대는 집중 포격을 가하였다.

 

다음날 조선 정부는 어재연을 급파하여 미군을 저지하기 위한 대비를 하였다. 손돌목에서 가한 포격에 잠시 퇴각하였던 미군은 초지진과 덕진진을 차례로 점령한 뒤 6월 11일 광성보로 진격하여 전면전을 전개하였다.

 

죽기를 각오한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고 싸웠지만 미군의 강력한 화력 앞에 광성보는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광성보를 점령한 미군은 수자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했다고 한다.

 

미국 측 기록에 따르면 미군은 3명의 전사자와 1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조선군은 어재연, 어재순 형제를 비롯한 243명의 전사가 발생하는 큰 희생이 있었다. 그 당시 미군이 본국에 전한 기록 곳곳에서 도망가지 않고 필사적으로 싸운 조선군의 용기와 애국심에 경의를 표한 것을 볼 수 있다.

 

미 국무부에서는 이러한 전투가 통상조약체결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결국 7월 3일 조선 해역에서 철수하면서 신미양요가 끝났다.


 

오랜 기다림 끝에 귀환한 수자기

 

미군은 신미양요를 치르면서 광성보 진영에 걸었던 수자기를 포함한 여러 벌의 깃발과 대포 등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전리품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수자기는 이후 애나폴리스에 위치한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왔다.

 

2007년 초 문화재청은 수자기 반환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3월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 앞으로 의견을 타진하였지만 원칙적으로 반환은 불가하다는 답변을 얻었다. 하지만 연구 목적의 조사는 괜찮다고 하여 조사단이 파견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같은 해 6월,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10년간의 장기대여를 결정하면서 수자기는 2007년 10월 19일 한국에 도착했다.

 

이후 수자기는 2008년 4월 고궁박물관에서 특별 전시된 후 인천시립박물관을 거쳐 2010년 10월 강화역사박물관이 개관하면서 139년 만에 원래 수자기가 있었던 고향인 강화로 돌아왔다. 강화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모든 유물은 박물관이 여섯 자리 고유 식별 번호를 부여한다. 하지만 수자기는 강화역사박물관이 개관했을 때부터 보관 관리해 온 유물임에도 여섯 자리 고유 소장번호가 없다. 이는 수자기가 대여 유물로 관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자기는 대여 형식으로 한국에 돌아왔기 때문에 돌아 온 이후에도 2년마다 대여 연장을 해야 했고 최장 10년이라던 종전의 계약기간 만료 즈음에는 재계약 문제로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현재는 강화역사박물관과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이 재계약을 체결하여 2022년 10월까지 수자기가 한국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대여 형식으로 국내에 들어온 많은 환수문화재가 지닌 문제로 다양한 부분에서 적극적인 협의를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할 부분이다. 신미양요 150주년을 맞은 올해, 신미양요가 일어난 6월에 맞추어 강화역사박물관에서는 수자기를 한 달간 특별 전시한다. 150년 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고 치열하게 싸운 우리 선조들의 불굴의 정신을 상징하는 수자기를 실제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글. 신미란(강화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사찰 전역이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505호)로 지정된 구례 화엄사의 향기

 


사적 제505호 구례 화엄사 전경(사진출처:화엄사 홈페이지)

임진왜란(1592~1598)때는 호남의 관문 구례 석주관에서 승병 300여 명을 조직하여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이 앙갚음으로 왜장 가등청정은 화엄사를 전소시키기에 이릅니다.

화엄사는 국보와 보물 등 우리 민족의 얼이 깃든 문화재가 많기로 유명하지만 호국의 현장으로도 이름이 높습니다.

 

“화엄사 창건설화”(자료출처:문화재청)

백제의 한 마을에 살던 노인은 어느 날 산에서 심상치 않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노인이 마을사람들과 함께 안개가 피어오르는 곳에 가보니 그곳에는 조그만 움막이 있었고, 장엄한 독경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고 해요. 이윽고 그 움막에서 천축국(인도)의 승려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저는 천축국(인도)에서 불법을 펴고자 인연국토에 왔습니다. 제가 이곳에 올 때에는 ‘연’이라는 짐승을 타고 왔는데, 연은 바다를 헤엄치고 하늘을 나는 짐승으로 제가 교화하여 제자로 삼았으며, 방금 독경한 것은 ‘대방광불화엄경’입니다”라고 말하였다는군요.

마을사람들은 그때부터 그가 연을 타고 다니므로 ‘연기대사’라고 부르며 그에게 법문을 청해듣고 깊은 신심(信心)을 얻게 되었습니다.

연기대사는 자신의 움막이 있던 자리에 절을 짓고 ‘화엄사’라 이름하였다고 전설처럼 전해 오고 있습니다.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544)에 인도스님인 연기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절입니다.

신라 문무왕 17년(677)에는 의상대사가

 장육전을 짓고 그 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을 둘렀으며,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법당과 석등을 조성하였습니다.

그 후 신라와 고려, 조선시대를 통해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답니다.

대부분의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하지만, 화엄사는 각황전이 중심을 이루어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공양하고 있지요.

 

사찰 안에는 국보 제67호인 ‘화엄사각황전’을 비롯하여 국보 4점, 보물 8점 천연기념물등의

중요문화재가 있어 역사적으로 가치가 큰 전통사찰입니다.

 

 

화엄사 대웅전의 세 부처

 

지리산 노고단을 오르는 길에 위치한 화엄사는 이름 그대로 화엄의 으뜸이요, 천년을 훌쩍 넘긴 오랜 역사를 지닌 사찰로 위엄과 정통성을 자랑한다. ‘화엄(華嚴)’은 잡화엄식(雜華嚴飾)을 줄인말로 ‘갖가지 꽃으로 장엄한다’라는 뜻이 담겼다. 불교에서의 화엄은 부처님 말씀이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넓고 커서 모든 중생과 사물을 아우르고 있기에 마치 온갖 꽃으로 가득 장식한 것과 같다고 하며, ‘너와 나’ 일체의 모든 만물이 하나로 융화되는 것을 의미 한다.

 

화엄사는 경전 속 화엄 세계를 구현한 가람(伽藍)으로 수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그중 화엄을 표현한 상징적인 문화재 두 가지만을 꼽는다면 각황전(본래 이름 장륙전)의 네 벽을 둘렀던 ‘화엄석경(華嚴石經)’이 그 첫 번 째요. 다른 하나는 대웅전에 모신 세 부처,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을 들 수 있다.

 

화엄사 대웅전은 임진왜란으로 가람이 전소된 후 1636년 중심 법당으로 지어졌으며 남아 있는 화엄사 건축 중 가장 오래된 집이다. 지붕 아래 걸린 현판에는 ‘대웅전(大雄殿)’이라 쓰여 있고, 내부 불단에는 법신(法身) 비로자나 불, 보신(報身) 노사나불, 화신(化身) 석가모니불이 한 세트를 이루는 ‘삼신불(三身佛)’이 앉아있다. 3m에 가까운 초 대형 삼신불상은 나무로 만든 후 금옷을 입혔는데 중앙의 비로자나불상은 손가락을 가슴 앞에 모아 지권인(智拳印) 을 취했으며, 노사나불상은 양손을 어깨 높이로 올려 벌린 채 보관을 쓴 보살 형태이고, 석가모니불상은 깨달음의 순간을 표현한 항마촉지인의 손 모양으로 조형되었다.

 

이러한 세 불상의 조합은 국보가 된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국내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삼신불(비로 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로 구성된 유일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한 불상을 조성하면서 기록한 발원문(發願文)이 발견돼 불상의 이름을 더욱 정확히 명시하고 있어 불교 조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가치로 볼 때 국보로서 손색없는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대웅전 불상 조성에 얽힌 인물

 

반가사유상이나 석굴암의 부처 등 고대 불상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심취해 있는 사람이라면 조선 후기 불상과 조우 할 때 간혹 평면적이고 덩어리진 조각의 모습에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순간 불상의 얼굴을 좀더 가까이 올려 다보라. 조선 후기 불상의 얼굴에는 불상을 만든 승려의 개성이 숨어 있어 그 차이를 찾아보는 재미가 더해진다. 화엄사 대웅전의 세 불상도 발원문 묵서의 ‘시주질’을 통해 승려 장인의 이름이 밝혀져 더욱 흥미를 끈다. 이 기록은 화엄사 대웅전 불상의 서사를 완성시키면서 국보가 된 두 번째 이유로 꼽힌다.

 

2020년 노사나불상 내부에서는 20장의 책 형태로 엮은 방대한 분량의 「시주질(施主秩, 시주자 명단)」이 발견되었다. 이 묵서에는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이 1635년 조성돼 대웅전에 봉안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관련된 수많은 인물을 나열하고 있다. 그 가운데 화엄사 중건을 지휘했던 벽암 각성(覺性)이 등장해 더욱 이목을 끌었다.

 

각성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맡아 남한산성 축조시 승군의 총 책임자였던 인물로 화엄사 외에도 법주사, 해인사, 쌍계사, 완주 송광사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찰의 중건 불사에 깊이 관여했다. 그의 화려한 행적은 조선 후기 불교미술의 중흥기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화엄사 중창주로서 대웅전 불상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해 주었다.

 

한편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조성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로는 부처의 형상을 만들며 수행했던 승려 장인을 간과할 수 없다. 바로 당대 유명했던 청헌(淸軒), 응원 (應元), 인균(印均)을 비롯한 이들의 제자들이다. 이들 승려 장인은 모두 18명으로 각자 공력을 보태어 네모진 얼굴에 건장한 체구는 물론이고 간결한 옷주름, 근엄한 표정을 갖춘 당대 최고의 불상을 조성했다. 얼굴과 옷주름을 자세히 보면 노사나불이 다른 불상에 비해 부드러운 조형미를 자아내고, 서로 조화를 이루어 간결하면서도 꾸밈없는 조선후기 불상의 명작인 화엄사 대웅전 불상을 탄생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한마음, 한뜻으로 불상 조성에 참여한 1,320여 명의 시주자도 빼놓을 수 없다. 그중에는 선조의 아들인 의창군 이광(李珖), 사위 동양위 신익성(申翊聖) 등 왕실 인물이 등장하며 왕실 궁인들의 후원과 참여는 당시 불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수많은 인물의 마음과 공덕이 하나로 모여 만들어진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은 기록을 통한 명료한 내력, 장중한 위엄을 내재한 예술성 등이 종합되어 조선 후기 불상 가운데 유일한 국보의 품격을 갖추었다.

 

4월, 연둣빛 잎사귀와 갖가지 꽃의 향연이 펼쳐지는 지리산의 봄날을 향유하며 화엄사 대웅전을 방문해 보자. 근엄한 표정으로 매력적이고 독자적인 조선의 미,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을 만나 대립과 경쟁을 멈추고 조화로운 화엄의 세상을 함께 꿈꾸길 바란다.




글, 사진. 김광희(대구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문화재감정위원)

 

 

 

벽암국일도대선사비

 

벽암스님(1575-1660)은 임진왜란때 소실된 화엄사를 중창하신 분입니다. 10세때 출가하여 86세

때 입적하셨다고 합니다.

 

전남 유형문화재 제50호 해탈문 

 

기둥을 일렬로 세워 지은 출입문이라 하여 일주문 또는 해탈문이라 합니다.  절의 경계에 담을 쌓고

마치 대문과 같은 모양으로 서 있습니다다.

템플스테이수련원 간판이 보이시죠?

올 해는 12월 7일부터 8일까지 열린다고 해요.

 

 

 

화엄사는 특히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는 일주문을 지나 약 30˚꺽어서 북동쪽으로 들어가면 금강

역사, 문수, 보현의 상을 안치한 천왕문에 다다르는데 이 문은 금강문과는 서쪽 방향으로 빗겨

놓은 것이 독특한 특징입니다

 

 

 

 

 

 

금강문을 지나 왼편의 천왕문

 

 

6·25 당시 화엄사 지킨 故 차일혁 경무관 공덕비 제막

화엄사, 소실 막아낸 숭고한 뜻 기려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화엄사를 초토화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은 당시 한 경찰관의 항변이었다.

8월21일 오후 구례 화엄사 경내. 고(故) 차일혁 경무관(1920∼1958)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지난 1998년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인 월주스님과 호남 교구본사 주지 스님들이 화엄사에 공적비를 세운지 15년만이다.


전북 김제 출신인 그는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광복 후 귀국해 일본 고등계 형사
사이가 쓰보이를 저격하는 등 일제 잔당을 청산했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남한의 유일한 발전소인
전북 정읍 칠보발전소 탈환과 지리산을 장악한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사살 사건은 유명한 일화로
회자되고 있다.

 

구례 화엄사가는 길 = 완주∼순천 간 고속도로 개통으로 전남 구례까지 가는 길이 짧아졌습니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익산갈림목에서 익산∼포항 간 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완주갈림목에서 다시 완주∼순천 간 고속도로로 갈아탑니다. 구례 읍내 쪽으로 가려면 구례화엄사 나들목으로 나가면 되고,  서울톨게이트를 기준으로 구례까지는 3시간 30분 남짓이면 당도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청·한국문화재재단, 실감누리관(realistic.k-heritage.tv) 개관 


  문화재청(청장 김현모)과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최영창)은 국내 최초의 웹 기반 실감형 문화유산콘텐츠 온라인 체험관인 ‘실감누리관’을 오는 31일 개관했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이 공동제작한 실감누리관(realistic.k-heritage.tv)은 다양한 유형의 실감콘텐츠를 한 곳에서 즐길 수 있는 종합형 온라인 체험관이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VR·AR), 3면 영상 등 다양한 기술로 구현해 낸 유․무형․자연유산, 실감콘텐츠를 취향대로 선택하여 체험할 수 있다.
  *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 / AR(Augmented Reality): 증강현실 /
   3면 영상: 관람자를 ‘ㄷ’ 모양으로 둘러싸는 와이드 스크린 전용 고해상 영상


  또한, 증강현실 콘텐츠를 관람하기 위해서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내려받거나 별도 기기를 마련해야 했던 기존의 다른 체험형 프로그램과 달리, 문화유산 실감누리관은 ‘웹 XR(웹 엑스알, eXtended Reality) 기술’을 도입해 누구나 손쉽게 모바일 누리집 접속만으로 증강현실을 즐길 수 있다. 최소사양 이상을 갖춘 모바일과 컴퓨터 피시(PC)로 접속하면 되고, 마우스 휠과 키보드, 모바일 터치 기능 등을 통해 360도 가상공간을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다.
  * XR 기술: eXtended Reality의 줄임말로 AR, VR 등을 아우르는 확장현실 기술
  * 모바일: 갤럭시 S8 / 아이폰11 이상, PC: Windows7 및 intel i3 3세대 이상


  특히, 인천국제공항 내 미디어 체험으로 화제를 모았던 ‘경복궁 영제교 천록’ 증강현실 2종을 ‘3차원(3D) 에셋 프로그램에 움직이는 형태로 탑재하여 천록이 마치 눈앞에 있는 듯한 생동감을 재현하였다. 이외에도, 볼륨메트릭과 최신 증강현실 기술로 만들어진 문화유산 3차원 입체 모델링 자료 74종도 실감누리관에서 만날 수 있다.
* 경복궁 영제교 천록(天鹿): 몸은 비늘로 덮여있고 외뿔이 달렸으며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를 지니는 상상의 동물
* 노란 천록 바로가기
https://realistic.k-heritage.tv/onirix/index.html?url=https://realistic.hscdn.com/contents/ar/Cheonlock_Yellow_Ani.glb 
* 파란천록 바로가기
https://realistic.k-heritage.tv/onirix/index.html?url=https://realistic.hscdn.com/contents/ar/Cheonlock_AddAni.glb
* 3D 에셋 : 실감콘텐츠 제작 시 필요한 3D 객체를 이르는 말로 모델링, 스캐닝, 볼륨메트릭 데이터 등을 포함
* 볼륨메트릭: 3D 촬영에 있어 평면 이미지 동영상뿐만 아니라 형체로도 영상 촬영이 가능한 것


  이용을 원하는 분들은 실감누리관(realistic.k-heritage.tv)으로 직접 접속하거나, 한국문화재재단(www.chf.or.kr)과 문화유산채널(www.k-heritage.tv) 누리집을 통해서 접속할 수 있다. 참고로,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제외한 크롬, 파이어폭스, 사파리 등의 브라우저로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실감누리관을 개관하는 3월 31일부터 4월 8일까지 9일간 방문 인증 행사도 진행해 ’이벤트‘를 통해 추첨으로 음료 상품권을 증정한다.

  문화재청은 코로나19로 바깥 활동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문화현장에서 느꼈던 감동을 국민이 온라인으로 느낄 수 있도록 실감누리관을 더욱 확대해 나갈 것이다. 또한, 국민 누구나 문화유산을 쉽게 누릴 수 있도록 메타버스, 가상공간 등 현재 개발된 신기술을 통하여 문화유산과의 지속가능한 접점을 계속해서 제공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실감누리관 실행 화면 일부 - 유형유산 편>

 

[단독판매][4월] 2022년 상반기 경복궁 야간관람

상품에 적용된 프로모션단독판매추천공연
기간2022.04.01 ~ 2022.05.29
장소경복궁 위치보기
장르전시/행사
관람시간19:00~21:30(20:30 입장마감)
관람연령전체관람가
가격
  • 일반 :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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