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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보물 제568호 윤봉길 의사의 유서를 읽으며 되돌아 본 상하이 의거

문화재방송 2014. 4. 27. 12:17

 

삼가 세월호 피해자의 명복을 빕니다.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8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윤봉길 의사님,

온 국민이 눈물에 젖어 있는 대한민국을 굽어 살펴 주옵소서 ! 

 

 



 

실제 크기로 보시려면 클릭해 주세요
         <이상 윤봉길 의사의 유서-보물 제568호>

 

                                                             <선서문>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청년제군에게>

피 끊는 청년제군들은 아는가 모르는가.

무궁화 삼천리 내 강산에

왜놈이 왜 와서 왜 광분하는가.

피 끊는 청년제군들은 모르는가.

되놈이 되와서 되가는데

왜놈은 와서 왜 아니가나.

피 끊는 청년제군들은 잠자는가.

동천에 여명은 밝아지려 하는데

조용한 아침이나 광풍이 일어날 듯

피 끊는 청년 제군들아 준비하세.

군복 입고 총 메고 칼 들면서

군악 나팔에 발맞추어 행진하세.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아들에게 남긴 유서)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없음을 슬퍼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살고 싶은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나만 나혼자만 잘먹고 잘살다 죽을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와 내가족의 미래보다 조국을 선택했습니다.
 백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들 계십시오."

- 윤봉길 의사 유서 中 -

 


 



 

<홍커우공원의 단상> 

 윤봉길 의사는 역사적 의거일인 1932년 4월 29일 일찍 교포 김해산(金海山)의 집에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김구(金九) 단장과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그는 식사가 끝난 후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 1개와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 1개를 김구 단장으로부터 받아
하나는 어깨에 메고 하나는 손에 들었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는 자기가 찬 새 시계와 김구 선생이 찬 헌 시계를 바꾸어 갖고,
사용하고 남은 의거 준비금을 김구 단장에게 돌려주었다.

그 후 그는 김구 단장의 전송을 받으며 택시를 타고 홍커우공원으로 갔다.
차에서 내려 수통으로 위장된 것은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으로 걸고, 도시락으로 위장된 것은
오른손에 들고 홍커우공원 정문을 들어서면서 중국인 문지기에게 일본인이라고 응대하며
통과하였다.
오전 7시 50분경 공원 안으로 들어가 미리 정해 두었던 지점에 이르러 폭탄을 투척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홍커우공원 안에는 상해거주 일본인이 1만 명, 상해 침략 일본군이 1만 명,
그밖에 각국 사절, 각계 초청자 등을 합하면 2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그들은 중앙의 높은 식단을 중심으로 하여 그 전면에 일본관민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고,
그 앞에는 일본 학생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열병행사에도 참가할 일본 육해군의 군대가 정예무장을 하고 도열해 있었다.
식단 뒷면에는 기마 헌병이 단 밑으로 단상을 호위할 뿐 아니라, 그 뒤 수 미터의 간격을 두고
경비병력이 이중 삼중으로 삼엄하게 경계하고 그 뒤에 일반 군중이 회집해 있었다.

높고 넓은 단상 위에는 도륙 표적물인 일제 침략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과 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이 중앙에 자리 잡았고, 
 그 좌우로 일제 제 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주중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 민단간부 토모노(友野盛) 등
 7명의 상해사변의 원흉들이 천주(天誅)를 기다리며 착석해 있었다.

윤봉길 의사는 미리 작정했던 후편 오른쪽 군중 속으로 들어가 투척 장소와 시간을 맞추어
의거의 최후 준비를 하였다.
오전 11시 20분경 그들 축하식의 제 1차 순서인 관병식(觀兵式)을 끝내고 이어 제 2차 순서인

축하식순(祝賀式順)으로 들어가 일본국가가 제창되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드디어 역사적인 11시 50분경,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으로 된 자살용 폭탄을 땅에 내려놓고
어깨에 걸메고 있던 수통 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가죽끈이 붙은 그대로 오른손에 쥐고 왼손으로
안전핀을 빼면서 앞사람을 헤치고 2미터 가량 전진하여 17미터 내외 떨어진 중앙 단상 위로
힘껏 투척하였다.
그 폭탄이 그대로 노무라(野村吉三郞)와 시게미쓰(重光葵) 면전에 명중하면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으로 변하였다.

결국 상해침략의 원흉인 총사령관 육군대장 시라카와(白川義則)는 전신에 24개처의 탄편을 맞아
신음하다 5월 24일 사망하고, 해군총사령관인 제3함대 사령관인 해군중장 노무라(野村吉三郞)는
실명하였으며 제9사단장 육군중장 우에다(植田謙吉)는 다리를 절단하였다. 그리고 주중공사 시
게미쓰(重光葵)는 다리가 부러져 절뚝발이가 되었고
거류민단장이며 상해사변의 민간 원흉인 카와바다(河端貞次)는 창자가 끊어져 즉사하였다.
이밖에도 단상에 있던 주중 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와 민단간부 토모노(友野盛)도 각기 부상하여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의탄을 맞았다.

윤봉길 의사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땅에 잠시 내려놓았던 자폭용 도시락 폭탄을 들어올려 안전핀을
뽑으려는 순간, 부근 경비를 맡았던 일제군경의 제지를 받았고 군중과 그들로부터 즉석에서
포위당해 집중구타당하는 바람에 혼도하고 말았다.
 

윤봉길의사의 폭탄 투척 직후 대혼란에 빠진 현장을 촬영한 기록필름 장면.

아래는 윤의사의 폭탄투척에 당한 당시 일본수뇌부의 피해상황

특히 시라카와는 상해사변에서 일본군을 지휘해 일본의 승리를 이끈 인물.

의거 현장에서 윤봉길 의사를 포박한 일제 군경은 윤봉길 의사를 전시 군법회의 대상자로
상해(上海) 일본군 사령부 수금소(囚禁所)에 감금하고 혹독한 고문과 냉혹한 심문을 통해 의거
전말과 그 배후를 추궁하였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는 한인애국단 김구 단장이 그 해 5월 10일 ‘홍구공원작탄진상’이란
성명서를 통해 그 진상을 세상에 공포할 때까지 일체 배후와 사건 경위를 함구하였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는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때 윤봉길 의사는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고 떳떳이 주장했다.

사형이 확정된 후 윤봉길 의사의 유서가 나돌자 헌병대에서 다시 윤봉길 의사를 호출했다. 그
 자리에서 윤봉길 의사는 자신이 쓴 유서를 확인해 주며 “현재는 우리나라가 힘이 약하지만

세계 대세에 의해 반드시 우리는 독립한다. 일본은 지금 열강이지만 시든 나뭇잎같이 항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윤봉길의사는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15분 헌병의 호위 아래 형장에 도착했다.
도착할 당시 윤의사는 체포될 때 왼손에 들고 있던 중절모자를 눌러 쓰고 그때의 양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윤봉길 의사 처형직전 모습      © 편집부
이런 차림새는 신문기자 등 사람들의 눈에 띠지 않게 하려는 특별조치였다.
 
형장은 이시카와현(石川縣) 이시카와군 아자 미고우시(三小牛) 지역내 가나자와 육군 작업장의 서북쪽 골짜기로, 이곳에는 깎아 세운 듯한 언덕이 약 7m의 높이로 솟아 있어 사격에 적합한 장소였다.
 
일제는 같은 날 새벽 그 언덕 3m앞 지점에 십자가 모양의 형틀을 설치하는 등 형장설비를 끝냈다.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로부터 ‘사형집행은 절대 비밀로 시행하라’는 명령(육밀 제489호)을 받은 제9사단장은 형장으로 가는 길가 요소요소에 헌병을 배치하고 형장은 보병소대가 그 주변을 에워싸고 철통 경계를 했다.
 
특히 형장에는 소수의 집행관계자만 입장이 허가되고 그 누구도 접근을 금지했다.
군의관 세가와 요시오(瀨川吉雄)로부터 윤의사의 심신(心身)에 이상이 없음을 보고 받은
검찰관 네모토 소타로(根本莊太朗)는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언도된 사형을 집행한다고 통고하며 유언을 물었다.
 
 
이에 윤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사형은 이미 각오한 것이니 지금에 임하여 아무 것도
해야 할 말이 없다’고 일본어로 명료히 말했다. 간수들은 윤의사를 형틀 앞 가마니 위에
꿇어앉힌 다음 양손을 형틀에 두 마디씩 묶고 헝겊으로 눈을 가렸다.
 
사수 2명이 전방 10m 앞에서 엎드려쏴 자세로 검찰관의 사격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윤의사는 갑자기 무언가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우리말로 읊조렸기 때문에 집행자들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마도 의거 2일전 두 아들에게 남긴 자필유서(국가보물 제568호)의 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육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데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 ’ 탕! 7시 27분 정사수가 쏜 1발이 양 눈썹 사이에
명중했고 7시 40분 군의관이 절명을 확인했다.
 
사형집행은 보복적 차원에서 윤의사의 의거로 죽은 상해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白川) 대장의 사망시간에 맞춰 실행했다. 일제는 무릎을 꿇어앉힌 채
처형함으로써 기개를 꺾으려 했지만 윤의사는 미소 띤 얼굴로 ‘무슨 말을 더하겠느냐’ 며
최후까지 의연했다.
 
형장에서 집행과정을 기록한 녹사(錄事) 다치무라 규베(立村久兵衛)는 ‘범인은 말이 명료하고
미소를 짓는 등 담력이 극히 굳세고 침착했다’고 윤의사의 태도를 ‘사형집행시말서’에
기술하여 육군대신에게 보고했다.
 
일본군은 사체를 가나자와시 노다산(野田山) 공동묘지 서쪽 쓰레기하치장의 모퉁이에
평평하게 극비리 암매장하고, 해방 후 재일동포들이 유해를 발굴할 때까지 약 13년간
사체를 짓밟고 다니는 반인륜적 만행을 저질렀다. 

 
1946년 유해를 봉환하여 7월 7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모셨다. 윤의사의 육신은
비록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짧은 일생을 마감했지만 숭고한 애국혼은 천추에 빛날 것이고,
혈육으론 종(淙)과 담(談) 두 형제를 두었으나 민족정기의 후계자는 만대에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윤봉길 의사는 상해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32. 12.19  아침 7시40분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셨다.

     <총탄이 이마를 관통했다>


 

     전후 장개석총통이 대만으로 윤의사의 동생과 아들을 초청해 국빈대접을 했다.

    

     의거후 장개석총통이 중국군 100만 대군이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한명이 해냈다는 말로

    

     윤의사의 의거를 극찬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홍구공원에 있는 윤봉길의사 기념관.

 

   윤의사 의거후 일본이 저 자리에 죽은 시라카와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었는데

 

   전후 중국인들이 그 비를 없애버렸고, 이 자리에 윤의사 의거 기념관이 세워졌다.

 

   한국측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상해시 자체예산으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하는 보물 제 368호의 일부>

 

 

 


 

일기 보물568-8호

소 재 지; 충남 예산군  (충의사)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의사가 남긴 유품들 가운데 일기이다. 이 일기는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직접 묵으로 쓴

것으로, 각 11행이며 27매 1책으로 되어있다
.

 


월진회 창립 취지서 보물568-9호

소 재 지; 충남 예산군  (충의사)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의사가 남긴 유품들 가운데 하나로, 윤봉길(尹奉吉)의사가 월진회를 창립하면서 직접

묵으로 쓴 문서이다. 이 문서는 10행 19자 12매이다.

 

농민독본 보물568-10호

소 재 지;

충남 예산군  (충의사)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의사가 남긴 유품들 가운데 하나로, 어린아이들에게 글을 깨우치고자 펴낸 아동문맹퇴치

(兒童文盲退治)와 농민계몽서(農民啓蒙書)이다. 교과서 제1권 8과, 제2권 7과로 되어있으며, 2권 모두

프린트한 것이다.

 

형틀대 보물568-11호

소 재 지; 충남 예산군  (충의사)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의사가 남긴 유품들 가운데 하나인 형틀대이다. 이 형틀대는 1932년 12월 29일 일본

대판 위수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할 때 윤봉길의사를 묶어 세웠던 것이다.

 

편지 보물568-12호

소 재 지;

충남 예산군  (충의사)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의사가 남긴 유품들 가운데 편지(便紙)이다. 이 편지들은 총 4통으로 되어 있으며,

충의사에 보관되어 있다.

 


월진회 통장 보물568-13호

소 재 지;

서울 관악구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의사가 남긴 유품들 가운데 월진회 통장(月進會通帳)이다.
 


<백범 김구 선생(왼쪽)이 윤봉길 의사 사후인 1946년 4월 26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윤봉길 의사 생가를
 
    방문했을 때의 모습. 왼쪽부터 백범 선생, 윤 의사의 부친인 윤황, 모친인 김원상, 부인인 배용순,

아들인 윤종 씨.>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



1946년 3월4일 일본 가나자와시 노다산 육군묘지 부근에서 윤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는 장면.


1946년 3월9일 발굴단이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갖고 일본 가나자와역을 출발하기 직전의 장면.


1946년 6월16일 임시 특별열차 ‘해방자호’를 통해 서울역에 도착한 윤 의사 유.해를
동생 윤남의 선생이 들고가는 장면. 바로 뒤에서 따르는 사람은 백범 김구

<각종 자료는 인터넷 검색창에서 모셔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