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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역사의 빛, 광주 오월길 1

문화재방송 2014. 5. 20. 00:22


 

광주 오월로부터 32년. 시간이 바람처럼 훌쩍 지나갔다. 과거와 현재가 몸을 섞는 자리에서 광주의 오월은 꽃처럼 피어난다. 걸으면서 80년 오월을 몸에 새긴다. 길을 밟으며 공간을 재해석하고 다시금 살려낸다. ‘오월길’을 걷는 행위는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의 한 축을 경험하는 일이다. 또 역사적 기억을 되살려 아픔을 치유하고 '대동세상'의 희망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오월길'은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이 품었던 민주화를 향한 열망에서 시작되었다. 그 길을 걸으며 32년 전 죽음을 뻔히 알면서도 항쟁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갔던 그들과 교감해 본다.

 


- 망월동 구묘역
오늘을 제대로 살 힘을 얻는 자리

 

오월길의 시작은 망월동일 수밖에 없다. 망월동은 죽음이면서 또한 새 삶이다. 거기 누워있는 죽음들을 보고 나면 역설적으로 살 힘이 생긴다. ‘제대로’ 살아나갈 힘이다. 그들의 죽음은 우리의 삶이었다.
망월동은 달처럼 가득 차 있으면서 비어 있다. 그 땅의 지명이 '망월'(望月)인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땅 이름의 의미와 현재적 상징이 절묘하게 일치한다. 어둠의 이미지인 달은 죽음 위에 서 있다. 그러나 달은 죽음 너머의 삶과도 연결된다.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80년 오월의 거리에 섰던 시민군들, 지금은 세상의 달이 됐다.
망월동 구묘역엔 그 날의 죽음들이 없다. 모두 신묘역 '국립 5·18민주묘지'로 옮겨가고 망월동은 몸이 야위었다. 칠흑 같은 밤, 거기 가면 현존하는 오월을 만날 수 있다. 숨막힐 듯 달빛이 무덤들을 비추기 시작한다. 달빛 속에서 무덤들의 색은 낮의 그것과 확연하게 달라진다. 서늘한 빛의 파편들이 무덤 위에서 부서질 때 영혼들의 무게가 광주를 껴안는다.


 

- 신묘역 국립 5·18민주묘지
죽은 자의 전언

 


 

신묘역에는 광주 오월을 상징하고 기념하는 각종 조형물들이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조형물도 무덤 앞의 비에새겨진 문구들이 주는 감동과 아픔을 넘어서지 못한다. 비문들은 시간을 넘어서는 주문이다. 아름답게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의 고뇌가 비문들 속에 남아 있다. 읽다가 눈물을 훔치며 돌아서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
비문은 죽은 자의 전언이며, 살아남은 자의 행동철학이 다. 무덤과 무덤 사이를 걸으며 비문들을 읽는다.
‘아빠! 내가 태어난 지 3일 만에 돌아가셨지만 제 가슴 속엔 언제나 아빠가 살아계셔요. - 딸 소형’
어떤 무덤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아버님 고이 잠드소서! 두 살, 여섯 살이던 우리 형제가 이젠 성인이 되었습니다. 남은 일들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부디 편히 잠드소서.’이런 비문도 있다. ‘전두환이가 우리 대학생들 다 죽인다고 집을 나와 시민군에 가입해서 죽을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5월18일에 나가서 5월27일까지 용감히 싸웠음.’

 

 

- 옛 전남도청
‘묵념, 5분 27초’

 

광주시민들이 속속 집결해 민주광장의 역할을 했던 도청 앞 분수대. 역사의 현장이었던 옛 전남도청은 지금 비어있다. 곧 아시아문화전당으로 변모할 도청 앞에서 황지우의 시 ‘묵념, 5분 27초’를 떠올린다. 제목만 있고 내용은 없는 시의 형식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다. 생략되고 남은 여백들이 지시하는 지점에 광주의 내일이 있다.
80년 오월의 그 봄날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안다. 그해 5월27일, 도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아남은자의 슬픔이 무엇이었는지 안다. 그들은 왜 죽을 줄 뻔히 알면서 5월27일 거기 남았을까? 그 밤 도청에 남았던 나일성씨의 증언은 이렇다. “죽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도청을 지켜야 할 것 같았다. 먼저 죽은 시민들에 대한 마음의 빚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날 도청에 남았던 사람들은 분명 알고있었다. 죽음으로 항거해서라도 지켜야할 것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그것을 알기에 시인은 입을 다물었고, 언제나 침묵이 더 깊고 무겁다.
광주는 분노의 기억을 문화의 이름으로 계승했다.
5·18전야제는 늘 광주 최대의 축제다. 늘 ‘지금 이곳’의 문제들을, 함께 공분해야 할 현안들을 던지고 연대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 광주기독병원
시민들의 나눔과 헌신

 

80년 오월 광주기독병원에서는 삶과 죽음들이 교차했다. 총상환자가 몰려들었고 의사와 간호사들은 사흘 밤낮으로 수술을 했다. 환자들이 곳곳에서 신음했고, 병원은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광주기독병원 직원들은 집에 갈 수조차 없었다. 간호사들은 4인1조 3교대였다. 모두 쉬지 않고 일주일을 내리 일했다.
처음에 도착한 환자들의 총상은 허벅지 아래 하체에 집중돼 있었다. 죽일 의도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총상 부위는 복부에서 흉부로 올라왔다.
문제는 혈액이었다. 80년 오월 광주기독병원에서는 매일 기적이 일어났다. 밀려드는 총상환자에 혈액이 금방 바닥났고, 직원들이 헌혈에 나섰다. 헌혈운동을 벌였고 가두방송으로 사람을 모았다. 헌혈을 하려는 시민들이 병원 정문 길거리까지 늘어섰다. 당시 춘태여상에 다니던 한 여학생도 헌혈을 하러 왔다. 그 여학생이 헌혈을 하고 떠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공수부대의 총에 맞고 시신으로 병원에 들어왔다. 모두가 울었다. 모두가 상주였다. 그 해 봄, 광주기독병원에서는 삶 속에 죽음이 있었고, 죽음 너머에 삶이 있었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