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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드라마 '정도전'으로 각광 받는 왕실 사찰 사적 제128호 '회암사지'

문화재방송 2014. 5. 7. 18:52

삼가 세월호 희생자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이성계 말년에 머문 회암사 아시나요

[중앙일보] 입력 2014.04.09 00:10 / 수정 2014.04.09 00:49

조선 최대 규모 왕실사찰
승려 3000명 수행 하던 곳
불상 등 유물 200여 점 출토
내년까지 역사공원 꾸미기로

 

양주시 천보산 기슭 회암사지에서 문화재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경기도 양주시 천보산 기슭에는 조선시대까지 회암사가 있었다. 축구장 19개 정도의 크기(13만6676㎡)에 건물만 262칸인 조선 최대 규모 사찰이었다. 당시 승려 3000명이 수행했다.

조선 건국 초 국가에서 운영했으나 선조 때 절은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터(사적 제128호)만 남아 있다. 회암사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 무학대사와 함께 머무른 곳이다.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도 이곳에서 불도를 닦았다고 한다.

 회암사 터가 요즘 주목받고 있다. 절터에서 출토됐으나 미국 보스턴박물관에 있는 문화재 환수 운동이 본격화하고 있어서다. 또 최근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을 다룬 TV드라마가 방영되고 그의 책이 잇따라 출판된 것도 계기가 됐다.

 8일 오후 회암사 터에는 관광객 50여 명이 찾았다. 절터 한복판에서 문화해설사에게 설명을 들었다. 해설사는 절의 역사, 절터에 남아 있는 문화재 등에 대해 설명했다. 이곳에는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회암사지 부도(보물 제388호), 회암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같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3.2m 높이의 당간지주(幢竿支柱), 주춧돌, 석축 등도 있다.
 
 해설사 김경애(57·여)씨는 “지난해 이맘때에 비해 관광객이 평일에도 배 정도 증가했다”며 “정도전 관련 드라마 등의 영향으로 이성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게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회암사 터에는 이날 하루 200여 명이 찾았다.

 절터에서는 지난 10여 년간 문화재 200여 점이 출토됐다. 조선 태조의 연호가 새겨진 기와 막새, 효령대군의 기와 불사 유물, 조선 왕실 전용 도자기, 불상, 불화 등이다.

 국보급으로 꼽히는 라마탑형(티베트 지역 불탑) 사리구(舍利具·사리보관함)는 미국 보스턴미술관에 있다. 사리구는 13세기 회암사 부도에 안장됐으나 일제강점기인 1939년 일본인이 도굴해 밀반출했다. 이를 보스턴 미술관이 사들인 것이다.

 시민단체와 불교계는 사리구 환수 운동을 하고 있다. 문화재 환수운동을 주도하는 조계종 혜문 스님은 “정계·문화계·재미동포 등이 보스턴박물관과 사리구 반환 문제를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 시민단체는 양주시 등과 사리구 환수 운동을 해나가기로 했다.

 출토된 유물 대부분은 회암사 절터 입구에 있는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박물관은 양주시가 2012년 7월 127억원을 들여 지었다. 지상 2층(연면적 3561㎡) 규모다. 박물관은 다음 달부터 10월까지 ‘500년 전 왕실사찰로 떠나는 시간여행’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연등 제작과 화엄사지 투어 등이 준비돼 있다. 양주시는 회암사터 주변에 내년까지 잔디광장, 쉼터 등을 조성해 관광객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기로 했다.

 


박물관 김종임 학예사는 “절터에는 아직도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돼 발굴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회암사 주지 혜승 스님은 “회암사가 제 모습을 찾으려면 대웅전 등 옛 모습을 복원하고 절터를 지나는 고압 송전선로도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익진 기자

 

출처:중앙일보

기사원문보기: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4393627&cloc=olink|article|default

 

 

보물 제387호 선각왕사비(모조비)


비신의 원래 받침돌. 많이 훼손되여 원래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보물 제 388호 무학대사홍융탑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에 따르면 1397년 태조는 무학대사의 부도(고승의 사리를 안치한 탑)를 회암사 북쪽에 만들도록 명했고, 1405년 무학대사가 금강산 금장암에서 입적하자 태종은 무학대사의 영골을 회암사에 마련된 부도에 안치했다. 

보물 제389호 무학대사홍융탑 앞 쌍사자석등

무학대사홍융탑 앞에 있는 무학대사비에는 '무학의 비는 태종 10년(1410)에 임금께서 문신 변계량에게 명해

글을 짓게 하고 공부(孔俯)가 써서 두 왕사의 탑 아래에 세웠는데…'라고 기록돼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지공선사의 부도 및 석등,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5호 부도비

 회암사를 재 창건 했다는 지공선사는 인도의 승려로 고려에 2년여 머물렀다   

 지공선사는 인도로 돌아가 열반에 들었는데 당시의 사리를  일부 가저와  

 회암사터에 부도와 석등을 세웠다(고려 공민왕21년<1372>)

2012년 5월에 개관한 '회암사지(檜巖寺址)박물관'

화암사지 정비구역내 3천561㎡에 지하 1층, 지상 2층, 전체면적 1천645㎡ 규모로 건립됐다.

 


 

 

 

아래 불화는 1565년 (명종20)에 문정왕후가 아들 명종의 쾌유와 세자의 탄생을 

빌기 위해 제작하여 회암사에 봉안 했습니다.석가,미륵,아미타,약사여래의 화상을 각기 금화와

채색화로 50점씩 총 400점을 봉안 했으나 현재는 세계에 6점(우리나라,미국 각 1점 일본 4점)만이 남아 있다.

 

 

 

 

 

풍경처럼 추녀끝에 달아 놓았던 청동금탁. 직경이 30cm 정도인데 149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2000년 6월 출토. 이 금탁에는 ‘王師妙嚴尊者, 朝鮮國王, 王顯妃, 世子. 洪武 二七年’ [왕사묘엄존자(무학대사),

조선국왕(이성계), 왕현비, 세자. 홍무27년(태조 3년)] 등의 글이 새겨져 있다.

 

건물 지붕에 있었던 토수와 용두. 부숴저 있던 것을 퍼즐 마추듯 마춰 놓은것.

 

태상왕이 되였던 이성계가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는데 당시의 행차를 재현한 모형. 

 

현재 조선의 궁과 약간 다른 잡상.

 

이 잡상은 중국에서 들여 온 듯-

아름다운 고려와 조선의 자기 파편들.

 

청기와도 출토, 왕이 머물렀던 곳이니 왕궁 버금가게 지었으리라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