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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역사의 빛, 광주 오월길 2

문화재방송 2014. 5. 22. 04:39

- 광주공원
시민군, 광주 사수를 위해 무장하다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 정각 도청 건물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것을 신호로 요란한 총성이 터져 나왔다.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집단발포를 시작했다. 전일빌딩과 상무관, 도청, 수협 전남도지부 건물 옥상에서 저격병들이 시위대열의 선두를 겨냥해 총을 난사했다. 순식간에 50명 이상이 숨지고, 500명 이상이 총상을 입었다.
광주 근교 외곽지역에서 카빈 소총이 보급되고, 시민들도 무장을 했다. 5월21일 오후 3시 무렵 광주공원 계단 앞에 LMG 기관총이 설치됐다. 4000여 자루의 카빈총도 쌓였다. 오후 5시쯤 공원 광장에서 목숨을 걸고 광주를 지켜낼 특공대가 편성됐다. 처자식이 있는 사람과 독자는 빼고 젊은 사람들 중심으로 조직했다. 모두 60명을 뽑았고 6개조로 부대 편성을 마쳤다.
무장한 특공대는 광주공원에 있는 시민회관을 본부로 삼았다. 넓은 광주공원은 전투교육장이됐다. 특공대 본부는 24일 항쟁지도부가 있는 도청으로 통합될 때까지 시내 순찰과 치안관련 업무에 집중했다. 5월27일 계엄군의 시내 진압작전 때 광주공원을 공격했던 부대는 7공수여단이다. 새벽 1시 계엄군의 공격이 시작됐고, 특공대는 계엄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리고 그날 새벽 5시40분, 수많은 특공대들의 죽음과 함께 광주공원은 진압됐다.

 


- 상무대 영창
박제된 기억 너머 진실이

 

이제 상무대 영창은 세상에 없다. 다만 기억을 위해 새로 조직된 상무대 영창이 있을 뿐이다. 시민군들은 그곳에 끌려와 무수한 매질을 당했고, 인간의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금남로와 도청에서 쓰러진 주검들은 곧장 망월동으로 실려 갔고, 살아남은 자는 상무대 영창에서 짐승의 시간을보냈다.
상무대 영창에는 박제된 기억이 있다. 당연히 기억해야 할 것을 광주는 지켜내지 못했다. 지금의 상무대 영창은 실존의 현장이 아닌 ‘복제품’이다. 원래 상무대 법정·영창은 지금 위치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상무지구 개발이 한창이던 1999년 5월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자유공원’으로 이름붙여졌다. 본래 터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인위적 도시계획이 진본을 밀어내면서 당시의 현장은 실종됐다. 영창과 군사법정, 헌병대식당 등의 건물은 당시를 재현했다.
상무대 영창에 가면 ‘기억투쟁’의 의미가 가슴에 맺힌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되기 마련이고, 기억하는 행위는 항상 가장 소극적이면서 가장 적극적인 투쟁이다. 말끔하게 새로 지어진 영창 앞에서 광주는 80년 오월을 기억해야 할 다음 세대들에게 많이 미안하다. 그 미안함을 가슴에 새기는 것 또한 ‘오월길’을 걸어 상무대 영창에 닿아야 하는 이유다.

 


- 전남대 정문
오월의 시작, 저항의 발화

 


 

‘오월길’의 끝은 전남대 정문이다. 끝은 시작과 통하고, 거기서 80년 오월이 시작됐다. 80년 5월 18일 계엄군과 학생들의 최초 충돌이 있었던 전남대 정문. ‘5·18민중항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1980년 5월18일 오전, 전남대 정문을 사이에 두고 계엄군과 학생들이 대치했다. 순간 갑자기 정문이 열리며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계엄군은 학생들을 곤봉으로 때리고 군홧발로 차면서 진압했다. 학생들은 피를 흘리며 계엄군에게 끌려갔다.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학생들은 구호를 외쳤다. “금남로로 가자!” 역사는 그렇게 전남대에서 금남로로 흘렀다.
1999년 전남대 정문에는 5·18 사적지 1호 표지석과 함께 5·18 소공원이 조성됐다. 소공원은 5·18 민중항쟁의 시발부터 승화까지를 표현한 조형공간으로 구성됐다. 학생들과 계엄군과의 첫 충돌을 설명하는 표지석, 당시 학생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건넜던 정문 앞 다리를 형상화한 조그만 다리, 대동정신을 형상화한 ‘대동의 광장’, 5·18민중항쟁 때 희생된 넋을 추념하기 위한 ‘추모의 벽’이 세워져 있다. 전남대 정문은 오월항쟁뿐 아니라, 오월항쟁 이후 벌어졌던 수많은 저항의 역사를 담고 있다.

 

 

 

생명의 밥 나눔의 밥, 오월 ‘주먹밥’

 

해마다 5·18 전야제가 열리는 날이면 금남로에 모여든 이들은 주먹밥을 나눠 먹는다.
80년 오월 금남로에서 주먹밥은 생명이었고, 나눔이었다. 그 아름다운 사랑이 매년 오월이 오면 금남로를 다시 데운다. 80년 오월 금남로에서는‘네 것’과 ‘내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아낌없이 제 것을 내놓았고, 주먹밥을 나눴다. 대동세상이었다.
금남로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고, 시민군이 결성됐을때, 양동시장엔 커다란 가마솥이 걸렸다. 시민군들이 배고파서 고생하고 있다는 말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양동시장 노점상인들은 머리를 맞댔다. 뭔가 하고 싶었다. 160여 노점 상인들이 푼돈을 모아 80kg짜리 쌀가마를 샀다. 천변 방앗간에 가마솥을 걸고 주먹밥을 만들었다. 그렇게 양동시장은 오월항쟁의 ‘후방보급기지’가 됐다.
당시 양동시장에서 주먹밥을 만들었던 김선자씨는 이렇게 회고한다. “시민군들은 목숨 걸고 싸우는데, 우리도 뭔가 하고 싶더라고. 그래서 밥을 지었지.”
80년 오월 광주는 저항과 나눔과 자치의 공동체였다. 80년 오월의 아름다운 상징 중 하나가 ‘주먹밥’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5·18기념재단이 펴내고 있는 계간지의 이름도 ‘주먹밥’이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