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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의병의날 특집]왜병이 두려워 하던 의병장 김덕령 장군, 분하다, 조정 권신이 때려 죽여

문화재방송 2014. 6. 15. 00:03

 

김덕령 장군 초상화(전쟁기념관 소장).


1567년(선조 즉위) 광주(光州)에서 태어난 김덕령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인 김덕홍과 함께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서 의병을 일으켰지만 전주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1593년 다시 의병을 일으켜 그 세력을 크게 떨치자 군왕 선조는 형조좌랑의 직함과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이어 1594년에는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는 칭호와 함께 군기를
수여 받았으며 이어서 선조로부터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기도 했다.

 

곽재우 의병장과 막연한 사이로 알려지는데 작전을 함께하기도 했으며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596년에는 도제찰사 윤근수 종이 탈영하자 김덕령은 종의 아비를 잡아들였고
윤근수가 눈감아 줄 것을 청탁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매를 때려 숨지게 하여 윤근수에게
체포되었지만 왕명으로 곧 풀려나게 된다.

 


 

외삼문

내삼문

충장사

임진왜란 때 한현의 부하로 들어간 왕족의 출신인 이몽학은 그와 함께 반란 계획을
꾸민 다음 의병을 모은다는 명목으로 비밀결사를 구성하여 장정들을 모집하였다.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의 난'이라 불리는 반란을 일으키자 김덕령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의병을 모집한뒤 충청도로 상경하지만 그의 부하 김경창, 임억명 등이 이몽학의
목을 베어 항복게되자 반란은 진압되어 귀대하게 되었다.

 

이어 이몽학의 목을 벤 김경창과 임억명 등은 조정으로부터 종 2품에 해당되는 당상관급인
가선대부의 직위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 반군의 졸개를 문초하던중 최(최담령), 홍(홍계남), 김(김덕령)이 적힌 패가 나와
고문에 견디다 못하고 명망 있는 장수들의 이름을 무고하자 김덕령의 막하에서 종군한 것을
불만으로 여겼던 신경행이 김덕령을 체포하였고 선조가 친히 국문을 열었다.

국문과정에서 류성룡은 김덕령의 치죄를 신중히 따져가며 하도록 청했으나 윤근수의 친형
판중추부사 윤두수(류성용의 정적)는
엄벌을 주장하니 수백 번의 형장 심문으로 마침내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질 정도로
혹독한 고문 끝에 김덕령은 장독을 견디지 못하고 순절하게 되었다.
장군의 나이 약관 29세였으니 너무 안타깝다.

 

죄가 없음을 국문장에서 끝까지 호소하였으나 군왕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죽음을
직감했던 김덕령은 '춘산에 불이 나니'라는 시조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호소하였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 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이는 김덕령 뿐만이 아니었다.

 

직계가 아닌 반계로 왕위에 오른 조선 최초의 임금이었던 군왕 선조는 권력을 쥔 누군가가
정통성의 문제를 제기하면 왕위는 곧바로 위태로워지게 되는 것이다.

 

당시 이순신의 연승과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있던 여러 장수들 대표적인 의병장 곽재우
등도 모함을 받았었다.

 

왕권을 위협할 수도 있는 혁혁한 전공과  거대한 성과를 보여준 자라면 지위여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경계해야할 인물이었던 것이다.


1661년(현종 2)에 억울함이 밝혀져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에는 병조참의에 추증,
1681년(숙종 7)에 병조판서로 증직, 1788년(정조 12)에 의정부좌참찬에 증직되고
부조특명(不逝特命)이 내려졌으며 1678년(숙종 4)에는 광주의 벽진서원에 제향하고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으며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김덕령의 후손 즉 광산 김씨 문중들은 1965년 문중들의 무덤이 모여있던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로 묘를 이장하게 되었다.

 

1661년(현종 2)에 억울함이 밝혀져 관작이 복구되고 신원이 되었지만 역적죄가 있던 터라
문중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묻혔기 때문이었다.

 

이장하던 중에 김덕령의 관을 열어보니 400여년이 지났지만 살이 썩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를 본 여러 사람들은 한이 서린 것이라 하였다.

 

사진으로 익호장군(翼虎將軍)의 모습을 남기로 했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이라
남기진 못하고 김덕령이 입고 있던 옷과 철릭은 그대로 보존되어 광주 무등산 자락에
1974년에 복원한 충장사(忠壯祠)에 전시하였다.

 

광주광역시는 익호장군(翼虎將軍) 김덕령의 충절을 기리고자 경제활동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손꼽히는 일대를 익호장군(翼虎將軍) 시호인 충장공(忠莊公)을 따서 충장(忠莊)로라
명명하였고 현재는 자유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곳이자 광주시민의 자긍심으로 바뀌었으며,
31향토보병 충장(忠莊)사단도 김덕령의 얼을 이어받아 지방을 사수한다는 기치로
충장(忠莊)부대라 명명하였다.


자료 출처: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전남 광주시 무등산 충장사에 위치한 김덕령 잔군 묘소.



시신을 모셨던 당초의 내관과 외곽

 

 

충장공 유사

 

 

 

김덕령 장군 친필

 

 

  자료 출처:여민락 

 

김덕령 장군의 후손인 김만식 등이 고종 27년(1890년)에 창건했는데 1950년 6·25동란으로
소실된 것을 1955년 중건했다. 이쪽 시가문화권 건물 중에서 가장 나중
만들어진 정자.

  취가정이란 이름은 선조 때의 시인 석주(石洲) 권필(1569∼1612)의 꿈에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 장군이 나타나  
            
 한 맺힌 취시가(醉時歌)를 불렀다는설화에서 연유한다.

                          

                 
           “술 취해서 부른 노래 / 듣는 이 아무도 없구나 / 꽃과 달에 취하면 무엇하리

 / 공훈을 세운들 무엇하리”로 시작되는 취시가에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장군의 서글픈 심경이 담겨있다.
              
                                     

 

 

 

충장사 위치: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1023
관리사무소:062-266-6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