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추운 겨울(THE COLDEST WINTER)’-장진호 전투, 흥남철수, 국제시장
2015.02.05 17:51:26
최상현 주필
미 해병 역사를 통해 미국 최고의 훈장인 의회명예훈장을 받은 사람은 294명뿐이다. 이 중 42명은 한국전 참전용사다. 그런데 그중에서 14명은 7명의 사후 추서자를 포함해 장진호 전투 참가자다. 이만하면 장진호 전투에 대한 미국 조야(朝野)의 평가를 알 만할 것이다.
전황이 급전직하로 기울자 11월 28일 밤늦게 서부전선 사령관 월튼 워커(Walton Walker)는 급하게 맥아더에 연락, 평양 양덕 원산을 잇는 횡단 125마일 좁은 지형에 호(ark) 형의 방어선을 새로 구축하자고 합의를 본다. 이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하자 그 역시 ‘원래 그렇게 그었어야 했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솥뚜껑을 보고도 자라라고 놀라 남쪽을 향해 달아나기만 하는 유엔군과 그 사령관, 지휘관들을 북쪽을 향해 다시 되돌려 세워 놓기에는 때가 이미 늦었다. 이렇게 되자 워싱턴의 관심은 유엔군이 한반도에서 더 버틸 수 있느냐 아니면 2차 대전 때 히틀러 군대에 쫓겨 프랑스 북부의 됭케르크(Dunkirk) 항을 버렸던 것처럼 한반도를 포기하고 철수해야 되느냐에 모아지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군은 그때 히틀러 군대의 추격과 압박 속에 됭케르크 항을 기적적으로 간신히 철수할 수 있었다.
12월 23일엔 월튼 워커 장군이, 그가 탄 지프가 전복돼 전사하는 불의의 사고가 발생했다. 그의 뒤는 당시 미 장성 중에서 최고의 신망을 모으던 매트 리지웨이(Matt Ridgway) 장군이 이어받았다. 그는 12월 26일 한국에 부임했다. 그는 한국에 오는 도중 도쿄에서 맥아더와 1시간 30분 동안 단독 회담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맥아더는 이렇게 말했다. “8군은 당신의 것이요. 당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대로 하시오.” 그는 또 만주 폭격을 비롯해 자신의 전쟁 지휘에 제약을 가하는 워싱턴을 향해 독백처럼 불만을 쏟아내면서 미국 조야의 분위기와는 다른 확전(擴戰) 의지를 드러냈다. 이런 말도 했다.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으로 중국 남부가 훤히 열려 있으므로 장개석 군대로 하여금 중공을 치게 해야 한다.” 그렇지만 리지웨이의 생각은 달랐다. ‘중공이 설사 50만명을 한반도 전쟁에 투입했다 해도 그 남부에는 여전히 50만명의 또 다른 예비 병력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리지웨이는 또 알고 있었다. 맥아더는 만주 폭격과 원폭 사용을 포함한 확전을 주장할지 몰라도 워싱턴의 민간 지도자들과 미 국민, 유럽의 참전국들의 생각은 확전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전쟁은 휴전을 이끌어내는 소모전(war of attrition)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리지웨이는 ‘전쟁에서의 일방적인 승리는 워싱턴에는 이미 그리 보였지만 중공에게도 다가갈 수 없는 목표라는 것을 그들에게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함으로써 깨닫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 자신의 앞으로의 할 일이라 마음먹고 있었다.
애당초 김일성이 도발해놓은 전쟁은 이렇게 비록 휴전으로 지향해 간다고는 볼 수 있을지언정 미국과 중공 간의 더 큰 전쟁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김일성은 중공의 펑더화이(彭德懷)에 그들 인민군의 지휘권을 빼앗겼으며 남한은 미군이 주연인 유엔군 안에서 조연에 불과했다. 전쟁은 이렇게 해서 우리 맘대로가 아니라, 전쟁을 하거나 말거나 멈추거나가 모두 그들 맘대로일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볼 때 맥아더의 확전론이나 워싱턴과 참전국의 염전(厭戰) 분위기 내지 휴전론 역시 그들 사정에 의한 것이지 본질은 우리 한국인을 위해 나오는 소리들은 아니었다. 우리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라 해서 우리가 우리 한국인에게 특별히 유리하고 좋은 주장을 선택하고 어떤 소망하는 결과를 창출할 권리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다만 그들 의지대로 결정해서 행동에 옮겼을 때 떨어지는 부산물을 휴전이든 통일이든 휴전이든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없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으며 누구를 위해 포성과 총성이 울렸는지를 따지는 것은 약소국민의 한과 슬픔, 자책을 건드리는 일일 뿐 어리석음을 벗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더라도 강력한 전쟁의지를 가진 맥아더가 자꾸만 고립돼 가면서 유약(柔弱)해지는 미국의 전쟁의지가 우리에게 안겨준 부산물은 휴전에 의한 국토분단이었다. 그나마 전쟁을 도발한 ‘악마’의 그 반대쪽이 아니라 자유 민주 시장질서의 반쪽인 남쪽에서 살게 된 것만도 그들에게 신세 진 것이라고 해야 한다. 전쟁을 맥아더에게 일임(一任)했더라면 결과가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는 것 역시 우리 맘대로 할 수 없었던 전쟁을 놓고 하는 부질없는 가정(assumption)이다.
1950년 12월 중하순 흥남 항은 흡사 2차 대전 때 탈출 인파로 아수라장을 이루던 프랑스 북부 됭케르크 항이었다. 흥남 주변에 둘러쳐진 3중 방어선은 소나기처럼 퍼붓는 함포의 탄막(彈幕)과 새까맣게 몰려드는 항모발진 전폭기들의 쉼 없는 폭격으로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도베르만(Doberman) 사냥개와 같은 사나운 근성을 가진 미 해병 1사단의 분전으로 뒤를 쫓던 중공군 9병단이 ‘불구’가 되어 그들의 추격은 더더욱 더디어졌다. 그 틈을 타 12월 15일 장진호를 빠져나온 미 해병 1사단이 맨 먼저 철수선을 탔다. 17일에는 국군수도 사단, 21일 미 7사단, 24일 마지막 철수선으로 미 제3사단 병력이 ‘한국의 됭케르크’ 흥남을 떠났다. 국군 3사단은 별도로 10일 청진을 출발, 부산을 거쳐 벌써 홍천 전선에 다시 투입돼 있었다. 그런데 피난민이 문제였다. 마지막 피난민 철수선은 23일 레너드 라루(Leonard P. LaRue) 선장의 매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 호였다. 이 배엔 피난민을 안 태우기로 했었지만 알몬드 미 10군단장의 고문 현봉학 박사의 간청으로 라루 선장의 마음을 움직여 미군 장비를 내리고 무려 1만 4000명을 태웠었다. 이 기록은 기네스북에 올랐다. 이 배로 탈출한 한 피난민의 굴곡진 인생 스토리가 많은 사람을 울린 윤제균 감독의 한국영화 ‘국제시장’이다. 출처:뉴스천지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275999
피난민들이 흥남부두로 몰려 오고 있다
피난민들을 수송하기 위해 수많은 군수물자를 하역 야적하고 있다(군수품은 부두 철수시 폭파시켜 사용불능케 했다)
장진호전투에서 전사한 유엔군들의 영결장면이다(이들은 고국으로 가지 못했을것이다)
운 좋게 배에 승선한 피난민들(그들의 미래는 암담했다)
운 좋게 배에 승선한 피난민들
전선에서 용케 살아남은 유엔군들이 승선하기 위해 부두로 집결하고 있다
피난민 철수를 위해 하역 야적한 군수물자와 부두시설을 폭파하고 있다
자유를 갈망하며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는 피난민의 인파
두사람의 피난민이 필사적으로 그물사다리를 오르고 있다(오르다가 떨어져 죽은사람들이 많았다)
VA에 장진호 전투 기념비 건립 가시화 올 여름 VA 콴티코 기지 인근 부지 구입 중공군 인해전술 맞서 미군 2836명 전사 영화 ‘국제시장’ 흥행으로 동포사회도 관심
[워싱턴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5/02/03 05:10
|
| 피란민 10만 명을 구한 흥남철수를 가능하게 한 장진호 전투 기념비 건립이 가시화되고 있다.
한국 전쟁 당시 해병대 소속으로 장진호 전투에 참전해 중공군과 싸운 스티븐 옴스테드(Steven G. Olmstead·사진) 예비역 중장 등 한국전참전 노병들이 버지니아 콴티코 해병대 기지 인근 공원에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옴스테드 장군은 2일 전화인터뷰를 통해 “올해 여름쯤에는 기념비 건립 부지를 구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등 매우 협조적”이라며 “정확하게 어느 정도 금액을 투자했는지 말하기는 조금 곤란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미국에서 장진호 전투 기념비가 건립된 곳이 몇 군데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대부분은 묘비 수준의 크기”라며 “버지니아에 건립되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기 때문에 의미는 더욱 크다”고 설명했다.
한편 한국 국회는 지난해 11월 3억 원 규모의 장진호 전투 기념비 예산안을 폐기했었다. 한국 5억 원, 미국 1억 원 등 총 6억 원을 들여 짓기로 한 기념비 건립이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의 반대로 백지화된 것이다. 미국에 이미 3개의 장진호 전투 기념비가 있다는 게 예산 삭감의 이유였다. 하지만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등의 반발로 기존 예산의 절반인 1억 5000만 원만 승인받았다.
미국에 있는 3개의 장진호 기념비는 모두 미국인들이 자비를 모아 만들어진 기념비다. 한국에서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장진호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기 위해 애국단체총협의회(상임의장 이상훈)가 1억 원 목표의 국민 성금 모금 행사를 진행 중이다. 영화 ‘국제시장’의 흥행이 한 몫을 했다. 국제시장의 배경인 흥남 철수를 있게 한 전투가 장진호 전투이기 때문이다. 장진호 전투는 12만 명의 중공군을 1만여 명의 미 해병 1사단이 막아내며 철수를 가능케 한 전투다. 장진호 전투로 미군 2836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중 절반가량은 동사했다. 당시 중공군 전사자는 2만 5000명, 부상 1만 2500명으로 사실상 무력화됐다. 흥남 철수로 민간인 10만 명이 탈출했다.
워싱턴·볼티모어 한인사회에서도 ‘국제시장’의 흥행을 계기로 장진호 기념비 건립을 후원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한인단체와 향군단체 관계자는 “다른 지역도 아니고 미국에서 세번째로 큰 한인사회 인근에 장진호 전투기념비 설립이 추진되고 있어 반갑다”라며 “올해는 해방 7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인데 대한민국 독립에 도움을 준 미군에 감사하는 의미로 장진호 전투기념비 설립을 돕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영남 기자
| 출처:미주 중앙일보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31497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