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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조선시대 3대 시기(詩妓), 천재 여류 시인 운초 김부용(金芙蓉)의 시심(詩心)을 찾아

문화재방송 2015. 5. 4.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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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용월태 (花容月態)!

아름다운 달처럼 고요하고 고운 자태를 지닌 여인을 이르는 말로 한국의 전통적인

 여인의 모습을 닮아

화용월태를 지닌 부용화에 비유한 것이라고 전합니다.

 

학명: Hibiscus mutabilis
원산지: 중국
개화시기: 8월~9월

부용화 꽃말은 매혹. 정숙한 여인.섬세한 아름다움.
여인을 아름다움으로 상징됩니다
.

 

 

조선시대 3 시기(詩妓)중 한 사람인 운초 김부용(金芙蓉)묘가 40년 전인 1974년에 당시 명기열전을 집필하던

소설가 정비석 선생에 의해 처음 발견된 이후 지금껏 문화재로 지정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설가 정비석 선생은 19911019일 세상을 떠났고, 당시 고증했던 서상욱 노인도 1998년에

뒤 따라 저 세상으로 가 버렸습니다.

아마도 이들 두 분은 아직도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한 부용묘를 보고 이들 혼마저 눈물을 흘리고 계실 겁니다.


 

김부용(金芙蓉)과 부용화에 얽힌 시

 

희제(戱題)

  

芙蓉花發滿地紅 人道芙蓉勝妾容 부용화발만지홍 인도부용승첩용

朝日妾從堤上過 如何人不看芙蓉 조일첩종제상과 여하인불간부용

부용이 피어 연못 가득 붉으니

사람들 부용꽃이 나보다 더 예쁘다네
아침에 제방 따라 걸었더니

사람들은 부용꽃을 보지 않네 


 시에 보면 부용이 둘 나오는데 실제 부용화와 부용이란 이름의 여인(기생)이다.  

 

시의 속내를 들여다 보면 정자에서 연회할 때 연못의 부용꽃을 보고

부용꽃이 나보다 훨씬 이쁘다고 놀리지만,

 

내가 아침에 강둑을 산책하는데 강둑따라 핀 부용화는 안보고 나만 보면서

침 흘린다는 내용으로 이 정도 되면

 

 시를 지은 여인은 가히 원조 공주병이라고 해도 충분한 것 같다.
 

'사람들은 나보다 부용꽃을 예쁘다 하네'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로  

 

작자는 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1805~1854 추정)이다.

 

19세에 50세나 차이가 나는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1755~1845)의 소실(小室)이 되었다.

 

황진이, 이매창과 함께 조선 3대 시기(詩妓)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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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용 묘 문화재 지정돼야 한다] 운초의 시심 현대에 되살려야

부용 한시(漢詩) 김지용 부녀 번역 연구
고 광덕사 주지 林聖福 씨 금 출연 출간

김완주 기자  |  dailycc@dailycc.net

 

승인 2014.04.25  1면 | 지면보기

 

 

 

 

불교에서는 연꽃의 다른 이름이 부용(芙蓉)이다. 부용은 아마도 영원히 연꽃 시인으로 살고 싶었는가 보다.

 

운초여사에 답하다

먹을 씨고 붓 머금이 이는 흥을 못 막더니

성천 열두 난간 구비마다 시 지었네.

규방의 여자들은 시 쓸 생각 말란 판에

바느질은 엄성덤성 구부려져 못 이루었네.

 

당시 유명한 시인 자하(紫霞)-신위(申緯)(1769-1847)가 부용에게 보낸 시다. 부용과 친밀했던 시우는 이밖에 금원(錦園), 죽서(竹西), 남사(南社), 낙사(洛社)등 당대 이름 날린 시인들이 있다.

 

이별한 금원에게

높디높은 누대는 슬픈 노래 가리우니

원컨대 담뿍 취해 잊고서 지내리라

건너 수풀 익은매미 가을을 재촉하고

하늘가에 이은 풀빛 석양에 더욱 짙네

수심은 끝 없는데 잎 위에 구름 일고

이별 한을 주체 못해 술을 부어 달래노라

문득 깨달으니 이 인생 쉬 늙으니

슬프구나. 그대 가니 장차 어찌 하려는가

 

위 시는 부용이 시우 금원에게 준 시다.

 

술 따르고 글 써주는 그 사람 누구더냐

내 집안에 들어와서 시 벗 술 벗 되었다네

담백하게 술 든 모습 여염보다 더 짙고

시를 아는 그 지식은 내가 넉넉히 기댈만하네.(중략)

 

위시는 김이양 대감이 부용과 강동에서 인연을 맺었음을 말 해주는 대목의 시이다.

시인 문정희 씨에 따르면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시조 한시가 알려진 것이 남자 4000여수, 여자 90여수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이후 밝혀진 부용의 시는 한시로만 350수에 달해 질과 양 면에서 다같이 대단한 것이라고 평하고 있다.

 

역사 소설가 이재운 씨는 조선시대 당시(1800년쯤) 인구가 400만~500만명 정도밖에 안되는데 양반이 약 5%인 20만 명이고, 시기가 양반의 10%인 2만 명의 관기가 있었다고 했다.

 

황진이와 매창은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을뿐 아니라 황진이의 ‘청산리 벽계수’와 매창의 ‘이화우(梨花雨) 흩날릴제]라는 시조는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돼 있다. 그러나 부용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은 그동안 그녀의 한시가 번역되지 못해 읽기 어렵다는데 원인이 있었다.

 

부용의 한시(漢詩) 350수(247편)가 김지용(金智勇). 김미란(金美蘭)부녀에 의해 1996년에 ‘운초의 시와 문학세계’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되어 어렵기만 했던 그녀의 한시를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한시를 번역하고 딸은 부용시를 연구하면서 부녀 합작으로 만들어진 이 책은 부용시를 이해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게 했다.

 

번역을 맡은 아버지 김지용 씨는 일본 경도(京都)대학에서 문학 연수과정을 수료하고, 동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청주대학 국문과 교수, 연세대 문과대학 강사, 홍익대학 교육대학원 강사 등을 역임했고, 대표 저서로는 정다산(丁茶山)문학연구, 박지원(朴池源)의 문학사상, 한국여류한시 등이 있다.

 

부용의 한시를 연구하여 부용 시로 박사 학위를 받은 딸 김미란 씨는 연세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거쳐 동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수원대학에서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당시 이들 부녀가 책을 낼 수 있는 자금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성열 씨가 주선하여 전 광덕사 주지 고 임성복(林聖福) 씨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금을 내놔 이 자금을 가지고 어렵게 출판을 하게 됐었다.

 

출판된 책 500중 342부를 1999년에 천안문화원(원자 민병달)에 기증했었는데 이듬해 문화원이 해체되면서 귀중한 이 책이 모두 사라져 버려 아쉽기도 하다.

부용 추모 사업은 향토사가 김성렬 씨가 중심이 된 천안향토문화연구회가 1974년부터 1995년4월 까지 21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행사를 해 왔다. 1996년1월 추모제 사업이 천안문화원으로 이관되었으나 문화원이 해체되면서 1998년과 1999년에 천안향토연구소가 다시 추모제 행사를 했다. 2000년-2012년 까지 추모제 행사가 중단되었다가 작년 4월에 천안문협이 주관하여 추모제를 했다.

 

올해는 김성렬 씨가 200만원, 천안문협이 100만 원등 300만 원을 들여 부용묘 둘레석 공사를 끝마치고 오는 27일 천안문협 주관으로 추모제 행사를 하기 위해 준비가 한창이다.

천안/김완주기자 philla21@dailycc.net

 출처:충청일보

http://www.dailycc.net/news/articleView.html?idxno=177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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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소설가 정비석 선생에 의해 처음 발굴된 부용묘는 1975년 4월 11일 부용의 첫 번째 추모제를 가졌습니다.

향토사가 김성렬 씨가 중심이 된 천안향토연구소 회원들이 참석한 이 추모제에서 김성렬 씨는

부용의 명기열전 200부를 별도로 제작하여 참석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소설가 정비석 선생은 부용시에 대해서 현장에서 특강을 했습니다.

 

생존시의 정비석 선생(김부용의 묘 앞에서)

소설가 정비석 선생과 천안 향토사가 김성렬 씨는 1987년부터 ‘고 서상욱씨의 확실한 고증’을 근거로

충남도에 문화재 지정 신청을 했으나 서상욱씨가 생존해 있을 무렵 문화재전문위원중

한 사람도 현지에 나와 만나 보려고 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이제는 서울 산주에 의해 파 헤처 져 이장 될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이 분묘는 개장 이전되므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010-7376-0000’-

천안시광덕면광덕리 산사골179-1번지 부용묘 바로 앞에 세워진 팻말에

한줌의 흙으로 돌아 간 부용의 혼도 분명 울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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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용은 왜 천안 광덕에 까지 와서 묻혔으며 김이양 대감은 어떻게 만났을까?

예조참판 강순황(姜順璜)이 자신의 스승인 평양감사 김이양(金履陽) 대감에게 소개 해 준 것으로 알랴집니다.

김 대감은 영조(英祖)31년(1755년)에 천안에서 태어나 헌종(憲宗)10년(1845년)에 90세로 사망한 문장가로

순조(純組)의 사돈이기도 합니다.

김 대감은 정조7년(1783년)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하였고 정조12년(1795)에

정시문과(庭試文科)의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1811년 이조참판, 1812년에 함경감사(咸鏡監司)로 재직하고 이후 평안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처음 부용을 만났답니다.

 

옥구술 천만 말을 유리 반에 쏟는 고야

알알이 동골 동골 신선의 환약 일래.

明珠一千斛 量琉璃盤

圓樣 水仙九轉丹

이 시는 부용의 시인데 김대감이 부용을 처음 만났을때 이시가 부용의 시가 맞느냐고 질문했다는 일화로 유명합니다.

‘물 방울을 환약 알에 비교한데 대한 감탄을 한 김 대감과 김부용은

 이미 시로서 일생을 같이 할 시우가 되었다’ 고 소설가 정비석 선생은 ‘명기열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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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초가 김이양을 만난 것은 운초의 생애에 중요한 전기가 됐으며, 기녀생활의 종지부를 찍은 것도

그렇지만 50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초월한 한 남자와의 사랑은 운초의 시 세계에도 큰 영향과 변화를 주었습니다.
1843년 2월 김이양은 사마회갑(司馬回甲 과거급제 후 60년이되는 해)에 조상들의 성묘를 위해고향인

천안 광덕사 경내에 있는 자신의 장원(莊園)에 부용과 함께 순행합니다.
김이양은 고향을 다녀온 이듬해인 1884년 10월에 감기로 향년 9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이양 대감의 묘는 광덕사 뒷산 자좌오향(子坐午向)에 위치하고 있으나 자손들이 돌보지 않아

수풀이 무성하고 문인석과 비문은 사라진지 오래며,

제단엔 누가 ‘김이양 봉조하’ 흰색 페인트로 써놓았습니다.
이에, 김성렬 실장은 “한 시대를 주름잡던 세도가의 묘역은 찾는 이 없이 잡초만 무성한데

한 여류시인인 김부용의 묘는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며

“권세보다는 문학이 더 긴 세월을 이어가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천안 광덕산 운초 묘역에서 열린 김부용 추모제에서 문학인들이 한화하는 장면.

 <천안시 제공>

 운초 김부용의 相思曲(상사곡) 


別 (별) =이별 합니다.

思 (사) =그립 습니다.


路遠 (로원) =길은 멀고

信遲 (신지) =믿음의 글월은 더디 옵니다.


念在彼 (념재피) =생각은 님께 있으나

身有玆 (신유자) =몸은 이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紗巾有漏 (사건유루) =비단수건은 눈물에 젖어건만

雁書無期 (안서무기) =가까이 모실날은 기약이  없습니다.


香閣鍾鳴夜 (향각종명야) =향각에서 종소리 들려오는 이밤

鍊亭月上時 (연정월상시) =연관정에 달이 떠오르는 이밤


依孤枕驚殘夢 (의고침경잔몽) =쓸쓸한 베게에 의지했다가 잔몽에 놀라깨여

望歸雲悲遠離 (망귀운비원리) =돌아오는 구름을 바라보니 멀리 떨어져 있음이 슬픔니다.


日待佳期愁屈之 (일대가기수굴지) =만날날 수심으로 날마다 손꼽아 기다리며 새벽이면 정다운 얼굴 펴들고

神開情受札泣之 (신개정수찰읍지) =턱을 개고 정을 받고저 우옵니다.


容貌憔悴把鏡下漏 (용모초췌파경하루) =용모는 초췌해저 거울을 대하니 눈물뿐

이고

歌聲鳴咽對人含悲 (가성명인대인함비) =목소리도 흐느끼니 사람 기다리기가 이다  지도 슬픔니다.


銀刀斷弱腸非難死 (은도단약장비난사) =은장도로 애간장을 끊어 죽는 일은 어렵  지 안으나

珠履送遠眸更多疑 (주리송원모경다의) =비단신 끌며 먼하늘 바라보니


朝遠望暮遠望郎何無信 (조원망모원망낭하무신) =아침에도 멀리 바라보고 저녁에  도 멀리 바라보니 낭군은 어찌 그리 신의가 없으십니까? 

昨不來今不來妾獨見詐 (자불래금불래첩독견사) =어제도 안이 오시고 오늘도 안오  시니 첩만 홀로 속고있는 것은 아닌가요.


沮江成平陸後鞭馬過否 (저강성평육후편마가부) =대동강이 평지가 된 뒤에나 말를  몰고 오시렵니까?

長林變大海初乘船欲渡之 (장림변대해초승선욕도지) =장림이 바다로 변한뒤 노를  저어 배를 타고 오시렵니까?


見時小別時多世情無人可測 (견시소별시다세정무인가측) =이별은 많고 정은 적으 니 세상사를 누가 알수 있으며

好緣短惡緣長天意有誰能知 (호연단악연장천의융수능지) =악연은 길고 호연은 짧  으니 하늘의 뜻을 누가 알수 있겠습니까?


一片香雲楚臺夜神女之夢在某 (일편향운초대야신녀지몽재모) =운무산에 행적이 끊  기니 선녀의 꿈을 어느 여자와 즐기 시나요.

數聲良甥奈樓月弄玉之情촉誰 (수성양생나루월농옥지정촉수) =월하봉대에 피리소  리 끊기었으니 농옥의 정을 어떤여자와 나누고 계십니까?

欲忘難忙强登浮碧樓可惜紅顔老 (욕망난망강등부벽루가석홍안노) =잊고자 해도 잊  기가 어려워 억지로 부벽루에 오르니 안탑갑게도 홍안만 늙어가고

不思自思作何牧丹峯每歎綠髮衰 (불사자사작의모란봉매탄록발쇠) =생각하지 말자해도 절로 생각나 몸을 모란봉에 의지하니 슬프도다. 검은머리 자꾸 쇠해가고


獨守空房下漏佳弱寧有變 (독수공반하루어유산행) =홀로 빈방에 누우니 눈물이 비  오듯 하나 삼생의 가약이야 어찌 변할수 있으며

孤處香閨頭雖欲雪百年貞心自不移 (고처향규두수욕설백년정심자불이) =혼자 잠자  리에 누었으나 검은머리 파뿌리 된들 백년 정심이야 어찌 바꿀수 있으랴.


罷春夢開竹窓迎花柳少年總是無情客 (파춘몽개죽창영화유소년총시무정객  =낮잠을 깨여 창을열고 화류소년을 맞아들여 즐기기도 했으나 모두 정없는 나그네 뿐이고

推玉枕藍香衣送歌無子莫非可憎兒 (추옹침랑향의송가무자막비가증아) =베게를 밀  고 향내나는 옷으로 춤을 춰봤으나 모두가 가증한 사내 뿐입니다.


千里待人難待人難甚矣君子薄情豈如是 (천리대인난대인난심의군자박정개여시) =천 리에 사람 기다리기 어렵고 사람 기다리기 이토록 어려우니 군자의 박정은 어찌  이다지도 심하십니까?

三時出門望出門望悲哉賤妾苦懷果何其 (시출문망출문망비재천망고회과하기) =삼시에 문을 나가 멀리 바라보니 문을 나가 바라보기 애처로운 천첩의 심정은 과연 어떠 하겠습니까?


惟願寬仁大丈夫決意渡江舊綠燭下欣相對 (유원관인대장부결의도강구록촉하흔상대)

=오직 바라옵건데 관인하신 대장부 께서는 강을건너 오셔서 구연의 촛불아래 혼 연이 대해 주시고

勿使軟弱兒女子含漏歸泉哀魂月中泣相隨 (물사연약아녀자함루귀천애혼월중읍상수)

=연약한 아녀자가 슬품을 머금고 황천객이 되여 외로운 혼이 달 가운데서 울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상 인터넷에서 모셔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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