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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중계...국가무형문화재 제8호 '강강술래']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속이기 위한 의병전술?

문화재방송 2018. 3. 14. 00:56

 

 한국 특유의 춤



                               국가무형문화재 제8호. 주로 해남·완도·무안·진도 등

                     전라남도 해안일대에서 성행되어왔다.

                     노래와 무용과 놀이가 혼합부녀자들의 놀이로

                     주로 추석날밤에 행하여지며 정월대보름날밤에 하기도 한다.

                      명칭은 ‘강강수월래’ 또는 한자로 ‘强羌水越來(강강수월래)’

                      로 표기하는 일도 있으나 ‘강강술래’가 일반적이다.

 

 

□ 전승현황

지정일 : 1966. 2. 15(국가무형문화재 제8호)

ㅇ 전승자

- 보유단체 : 강강술래보존회(박용순, 박양애, 김종심, 박종숙, 차영순)

- 전수교육조교 : 박부덕, 김국자, 정순엽, 이인자, 김복자

 

ㅇ 전승지역

전통적인 전승지역은 한반도의 서남부 지역으로,

1966년 국가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한 이래

전라남도 해남군 및 진도군 일원에서 전통적인 전승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는 전통 예술 공연을 통해 국내외에 많이 소개되고 있다.

ㅇ 다른명칭 : 강강수월래, 광광술래, 광광광수월래, 오광광광수월래  

 

   

  

□ 주요내용

전통적으로 강강술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세시절기인 설, 대보름, 단오, 백중, 추석, 9월 중구 밤에

연행되었으며 특히 팔월 추석날 밤에 대대적인 강강술래 판이 벌여졌다.

 

강강술래는 노래(song), 무용(dance), 음악(music)이 삼위일체의 형태로 이루어진 원시종합예술로서

한국 특유의 ballad dance이다.

춤을 추는 여성들 중에서 노래 잘하는 한 사람이 선소리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뒷소리를 받는 선후창의 형태로 노래되며,

노랫소리에 맞춰 많은 여성들이 손에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민요(folklore)와 민속무용(folkdance)이 일체화되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북이나 장구 등 한국의 전통적인 농악기로 반주를 하여

민속음악(folk music)이 흥을 더한다.

 

강강술래는 초저녁에 달이 뜰 때 시작하여 달이 서산에 기울 때까지

계속 놀아질 정도로 흥겹고 또한 역동적이다.

선소리를 하는 사람의 노랫가락의 빠르기에 따라 긴강강술래, 중강강술래, 잦은강강술래로 구분되는데,

이러한 노래의 빠르기에 따라 손을 잡고 뛰는 여성들의 발놀림도 빠르기가 달라진다.

또한 이러한 세 가지는 형태는 같으면서 다만 빠르기를 달리하는 것에 반해서

‘남생이놀이’, ‘고사리꺾기’, ‘청어엮기’, ‘기와밟기’, ‘덕석말기’, ‘쥔쥐새끼놀이’, ‘대문놀이’, ‘가마등밟기’,

‘수건찾기’, ‘봉사놀이’ 등 다양하며 부대적인 놀이들이 중간 중간에 놀아지기도 한다.

또한 밤을 새워가며 가사를 바꾸어 부르는 노랫말은 여성들의 삶의 애환이 담겨있는 민중의 시로서

 매우 문학성이 풍부한 구비문학이기도 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진도 망금산에 토성을 쌓고 갯마을 부녀자들을 남장시켜 산봉우리에서 손과 손을 마주 잡고 둥글게 돌면서 큰소리로 강강술래를 부르게 하여 의병전술로 이용했다는 유래가 있는 우리 고유의 민속놀이이다



출처: http://biche.tistory.com/29 [2010 부천무형문화엑스포 공식블로그]



블로그 대문 보물 제 1764호 낙선재(樂善齋) 

 


낙선재는 창덕궁 내전의 동쪽 끝,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담장 곁에 있는 건물이다. 낙

선재를 지은 임금은 헌종이다. 헌종은 조선 27왕 가운데 존재감이 비교적 박약한 인물

가운데 한 분이었다. 성품이 온화하여 전형적인 허수아비 임금이었던 것이다.

헌종은 즉위하지 못하고 요절한 효명세자의 아들이었는데, 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각중에

세손에 책봉되었다가 여덟 살에 보위에 올랐다. 즉위하자마자 순조의 왕비였던 대왕대비

김씨가 섭정을 시작하면서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풍양조씨로 훗날

대비 자격으로 흥선대원군의 차남을 보위(고종)에 올린다.


고종은 슬하에 순종‧영친왕‧의친왕 등 세 아들과 고명딸 덕혜옹주를 두었는데, 순종을

제외하곤 모두 왜국에 인질로 잡혀가 왜인과 정략결혼을 했다. 비운의 왕족들이었다. 그

것은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여러 형제들을 살해할 때부터 따라다닌 숙명이었다.

이들은 해방이 된 뒤에도 쉬 귀국하지 못했다. 자신의 권위가 손상되지나 않을까 우려한

이승만이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야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귀국하여 의친왕을 제외하고는 모두 낙선재에서 회한의 말년을 보내다가

눈을 감았다. 순종이 승하한 뒤 순종의 계비도 이승만의 박해를 견디며 낙선재에서 눈을 감았다.


이방자 여사는 전혀 색다른 비운의 왕족이었다. 그녀는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라는 이름을

 가진 왜국의 왕녀로서, 1920년 한때 대한제국의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과 정략결혼을

하면서 이방자라는 한국 이름을 얻었다. 영친왕은 왜국의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나와 여러 보직을 차례로 거치며 육군중장까지 진급했다. 이방자 여사는 해방 후에도 한

동안 왜국에서 유랑생활을 하다가 1963년 영친왕과 함께 귀국했다.

그녀는 조국인 왜국에서도 남편의 나라인 한국에서도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여사는 생활이 곤궁한 가운데서도 그림‧글씨‧도예‧칠보 등을 제작‧판매하여 장애인

복지시설에 기증하는 등 1989년 낙선재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봉사활동을 계속했다.

나름 국모의 역할을 수행하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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