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촬영. 편집:문화재사랑
한국의 전통을 이어오는 오광대놀이는 서민생활의 애환과 아픔을 놀이공간에서 위트와 해학을 몸짓으로 풀어헤치는 민중의 놀이로 내려왔다. 오광대는 낙동강 서쪽지역의 탈춤을 가리키는 말로, 초계 밤마리 마을 장터에서 놀던 광대패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오광대'란 다섯 광대 또는 다섯 마당으로 이루어진 놀이라는 뜻에서 비롯됐다고 하기도 하고, 오행설에서 유래된 오[五]에서 온 것이라고도 한다. 전에는 정월 대보름을 중심으로 행해졌으나 현재는 봄, 가을에 오락적인 놀이로 공연되고 있다.
오광대 놀이는 낙동강 서남지역을 중심으로 공연되던 탈춤이다
탈춤을 중심으로 공연돼 양반들의 사치와 부패를 풍자한 장면이 많다
고성오광대는 1910년경에 남촌파(南村派)
서민들이 통영오광대를 보고 오광대놀이를 시작했고, 그 뒤에 창원오광대의 영향을 받으면서 오늘날과 같은 탈놀이로 성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놀이는
문둥이춤·오광대춤·중춤·비비춤·제밀주춤의 5마당으로 구성된다.
문둥이·말뚝이·원양반·청제양반·적제양반·백제양반·흑제양반·홍백양반·종가도령·비비·비비양반·중·각시·영감·할미·제밀주·마당쇠 등 총 19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고성오광대 놀이의 내용은 민중의 삶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며 양반과 파계승에 대한 풍자, 그리고 처와 첩의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그 가운데 말뚝이의 양반에 대한 조롱이 매우 신랄하지만 파계승에 대한 풍자는 아직 이 지역에 불교신앙이 남아 있어서인지 약한 편이다.
고성오광대는 다른 지방의 오광대에 비해 놀이의 앞뒤에 오방신장춤, 사자춤 같은 귀신 쫓는 의식춤이 없고, 극채색(極彩色)을 많이 쓰며 오락성이 강한 놀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고성오광대의 탈은 예전에는 종이로 만든 탈이 특색이었으나, 근래에는 오동나무로 만든 나무탈을 사용하기도 하고 종이탈, 바가지탈을 쓰기도 한다.
주된 춤사위는 덧뵈기(탈놀이)춤인데 배역에 따라 인물의 성격이 춤으로 잘 표현되어 있고, 반주음악으로는 꽹과리, 징, 장구, 북 등 타악기가 주로 사용된다. 고성오광대는 서민생활의 애환을 담고 있는 전통놀이마당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5마당 중에서 두 번째 마당인 오광대놀이에서는
양반의 잘못과 허세를 풍자하는 부분이 절정을 이룬다. 이 마당에서는 말뚝이와 원양반이 번갈아 원 안에서 배김새를 하고 원양반 그리고 말뚝이가
개인무를 추며 말뚝이와 원양반이 재담을 나누며 놀다가 나중에 비비가 등장해 양반들을 몰아내는
과장이다.
이 마당의 내용은 봉건사회에 있어 양반들의 권세로 일반 평민들을 멸시하며 천대하고 괴롭히는 그 시대의 아픔을 말뚝이라는 비도덕적인 그들의 추악상을 낱낱이 꼬집어 내어 신랄하게 비판하고 조롱하는 대목은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카타르시스적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탈춤을 추는 장면
양반들의 치부를 풍자하는 장면
고성오광대놀이 보유자...이윤순, 이윤석 씨
무형문화재 고성오광대 보유자는 故 이윤순(90) 옹과
이윤석 씨로 이 옹은 오광대 역사의 산 증인 이시며 71년 고성오광대에서 장구부분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는 7~8세 때부터 동네 굿판이나
매구판 이 벌어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맨 먼저 달려가 어깨춤으로 장단을 맞추고 늦도록 풍물패를 쫓아다녔다.
이 옹은 장구를 비롯하여 많은 예능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시조 학교인 명인부를 나온 선생의 시조는 진주 개천예술제 등 각종 예술제에서 시조부문 대상을 휩쓸기도 했다. 지금도 공연 시에 흥에 도취된
그 모습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기인의 예능을 선보인다. 그는 늙었으니 모든 부분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시고 명예보유자로 있다.
고성오광대 대표인 이윤석 씨는 경남 고성군 마암면 명송마을에서 벼농사와 토마토를 재배하는 소박한 농부다. 춤추는 시간외 '농부'로서 농사일은 열 손가락 모자랄 정도로 일복을 타고났다. 그는 75년 군 제대 후 오광대에 입문해 고 조용배 씨에게 승무와 문둥북춤을, 고 허종복 씨로부터 말뚝이춤, 허판세 씨에게 원양반, 이금수 씨에게 꽹과리를 전수 받는 등, 고성오광대 5마당을 전수받았다.
국가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명예예능보유자 청암(淸巖) 이윤순옹 별세
우리나라 탈춤계의 큰 어른인 국가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명예예능보유자 청암(淸巖) 이윤순옹이 향년93세 노환으로 창원 정다운 요양병원에서 지난 3일 오전 5시30분에 타계했다.
이윤순 선생은 1918년 5월 23일 고성군 하일면 오방리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수학했고 7-8세 때부터 동네굿판이나 매구판, 오광대 춤판이 벌어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맨 먼저 달려가 어깨춤으로 장단을 맞추고, 늦도록 오광대패를 쫓아다녔다.
당시 전주 이씨 양반가문 자제로서 광대패를 따라다닌다는 것은 체통이 서지 않는 일이라 모친으로부터 야단도 많이 맞았다고 한다. 하지만 타고난 신명으로 1960년 고성오광대 보존회 입회하였고 1971년 10월 고성오광대 악사 장고 예능보유자 지정받으며 고성오광대 음악을 체계화 하며 일평생 탈춤 판에서 장고를 연주하시며 신명을 불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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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전은 왕실 가족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쓰인 경우도 있었고,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와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의 혼전으로 사용되었다.
이곳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고 명하고 서인으로 폐한 곳이기도 하다. 그 후 뒤주는 홍화문 남쪽에 있는 선인문 안뜰로 옮겨졌고, 사도세자는 8일 동안 굶주림과 더위에 신음하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 사도세자의 비극: 1762년 윤5월 13일 문정전 앞뜰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집권 세력 이였던 노론은 어릴적부터 노론을 싫어했던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영조에게 온갖 모략을 고했다. 노론 세력 이였던 세자의 처가와 누이 화완옹주 등이 이에 합세하였고, 생모 영빈이씨가 이날 영조에게 유언비어를 고하여 결국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기에 이른다. 문정전 앞뜰에 놓인 커다란 뒤주에 갇혀 한여름 더위와 허기로 8일 동안 신음하던 세자는 28세의 짧은 생을 비참하게 마감했다. 영조는 세자의 죽음 후 그를 애도한다는 의미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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