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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4월28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일]노량해전에서 전사하신 11월 19일도 '순국 추념일'로 제정돼야

문화재방송 2020. 4. 23. 05:50

사적 제232호 관음포 충무공 전몰 유허  



 

 

 

 

이순신 순국공원 종합안내도,


소재지; 경남 남해군 남해대로 3829  |  문의전화; 055) 860-3786 / 864-8023

 


 

남해대교에서 섬의 한가운데를 향해 4km들어오면 사적 제232호 관음포 이충무공전몰유허가 자리잡고 있다.

일명 '이락사'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전사한 이순신장군의 유해가 맨처음 육지에 오른곳이다.

 이락사 앞 뜰에는 충무공 순국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유언비가 역사를 증명하듯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아있다.

 

 

 

<이 충무공 유언비-"지금 싸움이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

 

이곳에는 전국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사철 푸른 육송이 404년전의 그 날을 되살려내고 있었다. 많게는 10개에서

적게는 4개의 가지가 땅에서 바로 가지를 벌린채 4,50미터의 오솔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충무공이 순국한지 234년이 지난 1832년, 이순신의 8대손인 통제사 이항권()이 충무공의

진충보국()의 뜻을 기리는 유허비(높이 187cm, 폭 75.5cm, 두께 22cm)를 세웠다.

 

1973년 6월 사적 제232호로 지정되어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라고 부르게 되었다.

 

 

 

 

 

불교의 성지 의미가 있는 觀音浦는 '이락포(李落浦)'로도 불림

관음포(觀音浦)】 경남 남해군의 북쪽 고현면 차면리 바닷가에 있는 포구. 일명 이락포()로 불리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현 북쪽 21리에 신우 때에 원수 정지가 수군을 거느리고 여기에서 왜적을 섬멸하였다. 왜적이 우리에게 패전하게 된 것은 이 전역()에서 처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현에서 북으로 21리에 있다."라고 수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고현면 포상리()에 기재되어 있다. 『동여도』에 처음 수록되며 『1872년지방지도』에도 관음포가 나타난다. 고현면 차면리 소재 이순신장군이 전사한 곳으로 사당과 전시관이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읍치의 북쪽에 녹두산()의 동쪽에 진·포 지명으로 묘사되어 있다.

관음포라는 지명이 언제부터 붙여졌는지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말 우왕 때 해도원수 정지장군이 관음포에서 왜선 17척을 격침한 대첩을 '남해관음포대첩'이라고 적고 있다. 지명유래는 불성지()의 의미가 담겨 있는 관음의 포구였기에 관음포라는 지명이 붙여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지명, 2011. 12., 국토지리정보원>

 

 

 

 

참배로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리충무공전적비',

<북한도 아닌데 왜 리충무공으로 썼을까?>

 

<이락사 입구>

 

이충무공 유허비와 비각

 

 

 대성운해
조국을 향한 애타는 마음이 소나무에도 투영된 것일까? '이락사' 현판이 걸린 문을 들어서면 바로 '대성운해'라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필 현판이 걸린 비각이 있다. ''라. '큰별이 바다에 잠겼다'는 뜻이다. 비각에서 첨망대까지 연결된 솔밭길은 500m에 이른다. 길의 좌우에는 솔가지 사이로 보이는 바다가 정취를 더한다. 

 

 

대성운해 비각,

 

 

이락사에서 500m 떨어진 산 정상에 세워진 첨망대,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곳을 볼 수 있는 곳에 1991년 건립한 정자

 

 

첨망대에서 바라 보이는 남해

 

 

 

이락사 입구의 소나무는 모두 뿌리에서 가지를 늘리고 있어 신비감을 준다

 

이상 사진 출처:https://mail.daum.net/#MINE/a0000000003kvV0

 

 

 

 

 

이순신 장군 전사후 84일만에 장례..16년후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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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가는 길이 순국 412년만인 지난해 12월 16일 오후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앞 바다에서 재현행사를 가진 뒤 뱃길로 전남 완도군을 향해 운구되고 있는 모습(자료사진)

홍순승 장학관 "당대 역사.정치적 평가따라 성역화"

(아산=연합뉴스) 정태진 기자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역은 당대의 역사적.정치적 평가에 따라 옮겨지고 성역화되는 과정을 밟았습니다"

충남의 한 교육공무원이 이 충무공의 장례과정 및 묘역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같이 주장, 눈길을 끌었다.

홍순승 충남도교육청 장학관은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가 펴낸 이순신연구논총에서 "이 충무공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후 남해 고금도에 안치되었다가 고향인 아산으로 운구돼 다음 해 2월 11일 금성산에 안장됐다"고 말했다.

완도군에서재현된 상여행렬의 모습(자료사진)

이처럼 84일만에 장례가 치러진 것은 사후 선조로부터 우의정 벼슬을 받아 당상관에 오르면서 당시 법도(三月而葬)에 따라 3개월 후에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며 첫 묘자리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 이여송의 참모로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귀화한 두사충(杜師忠)이 잡았다.

두사충은 박상의와 함께 조선 풍수지리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인물로 당시 조선사회에 풍수지리가 널리 퍼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 충무공은 사후 새롭게 평가받아 1604년 좌의정에 오르며 선무공신 칭호를 받자 후손들은 첫 장례가 전란 직후 예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치러졌다고 조정에 이장을 상소, 첫 장례가 이뤄진지 16년후인 1614년 일등공신에 걸맞은 크기와 이장절차를 거쳐 지금의 묘역인 어라산으로 옮겨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정조(1793년)대에 이르러서는 영의정으로 또다시 오르면서 묘역에는 상석 및 향로석, 장명등을 비롯한 다양한 석물이 설치되고 정조가 친히 지은 글로 어제 신도비가 세워지면서 격이 한껏 높아졌다"고 덧붙였다.

특히 "근대에 이르러 이 충무공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더욱 활발해져 1908년 단재 신채호 선생에 의해 '성웅(聖雄)' 칭호가 붙여진데 이어 제3공화국 시절 역사상 최고조의 평가에 오르며 묘역에는 나지막한 담(곡장)이 처지고 홍살문이 세워지는 등 왕가의 무덤(園) 수준에 이르게 된다"고 지적했다.

충청남도아산시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의 묘(자료사진)


홍순승 장학관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자료로 초장과 이장의 정확한 내용을 규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며 "이장과 확장 등 모두가 당 시대의 이 충무공에 대한 평가 실상이 그대로 반영돼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jtj@yna.co.kr

출처: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5014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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