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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명승(名勝)기행<3>]무더위가 오기 전에 꼭 가 보고 싶은 한국의 절경...제31호에서 제40호까지

문화재방송 2020. 5. 11. 05:43


[‘瀟灑處士梁公之慮’]

 

(명승 제40호 담양 소쇄원 중) 

소쇄원 내에는 지대, 매대, 대봉대, 정대亭臺, 광대廣臺,처사대處士臺 등 여러 개의 대가 있다. 그러나 지대와 동대는 48영에는 시제만으로 이용되었고「소쇄원도」에는 매대만이 그려져 있다.

매대는 매화나무를 심어놓은 ‘대’로써 48영에서는 달맞이를 하던 곳으로 되어 있다. 12영에의하면 시제를 ‘매대요월梅臺邀月’이라 하여 매대에서 달을 맞이한다 하였다. 매대는 오곡문과제월당 사이에 축조된 4단의 계단 중에서 상부 2단의 계단으로된 화계花階로써 길이는 약20m이고 높이는 약 1m, 나비는 1.5m의 크기이다. 이곳에 매화나무를 심고 ‘매대’라불렀다. 지금은 말라 죽은 선측백나무 한 그루와 소쇄원 동호인회에서 42그루의 매화나무를심었으며,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측백나무를 새로 심어 가꾸고 있다. 산수유나무도 한 그루가있으나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때에 심은 듯하다.

원래 양산보의 사우는 명옥헌 뒤의 도장사道藏祠였는데, 대원군때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지고제월당에 신위를 모셨다.

 

 

 

 

명승 제31호문경 토끼 비리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산41 등

『문경 토끼비리』는 석현성 진남문에서 오정산과 영강으로 이어지는 산 경사면에 개설된 천도(遷道 : 하천변의 절벽을 파내고 건설한 길)로 영남대로 옛길 중 가장 험난한 길로 알려져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태조 왕건이 남쪽으로 진군 시 이곳에 이르러 길이 없어졌는데 마침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토천(兎遷)’이라 부른데서 유래한다고 전한다. ‘비리’란 ‘벼루’의 사투리로 강이나 바닷가의 위험한 낭떠러지를 말하며, 이곳 토끼비리는 문경 가은에서 내려오는 영강이 문경새재에서 내려오는 조령천과 합류하는 곳에서부터 산간 협곡을 S자 모양으로 파고 흐르면서 동쪽 산지를 침식하여 만든 벼랑에 형성된 길이다. 돌벼랑을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파서 만든 구불구불한 길이 6, 7리 나있는데 겨우 한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고 험하다. 토끼비리는 길에서 내려다보이는 영강과 절벽부, 맞은편 마을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망 경관을 형성하고 있으며, 옛길의 중간중간에 주막거리와 성황당, 2그루의 당나무 등이 남아 있어 다양한 옛길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토천

고모 산성

고모 산성

주막촌

성황당

  

명승 제32호  문경 새재

 

 

 

소재지: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산42-8번지 등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14년(1414년) 개통된 관도로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영남대로 중 가장 유명하며 조선시대 옛길을 대표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초점(草岾)’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된 길로 조선시대 영남도로에서 충청도(한강유역권)와 경상도(낙동강유역권)를 가르는 백두대간을 넘는 주도로의 역할을 했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관도(벼슬길)로 제1관문 주흘관(主屹關), 제2관문 조령관(鳥嶺關), 제3관문 조곡관(鳥谷關) 등 3개의 관문과 원(院)터 등 주요 관방시설과 정자와 주막 터, 성황당과 각종 비석 등이 옛길을 따라 잘 남아 있고, 경상도 선비들의 과거길로서 수많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 등 역사적, 민속적 가치가 큰 옛길이다. 또한 문경새재가 위치한 주흘산, 조령산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식생 경관과 옛길 주변의 계곡과 폭포, 수림터널 등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경관 가치가 뛰어나며, 문경시의 ‘옛길 걷기 체험“, ”과거길 재현“ 등 옛길과 관련한 다양한 체험 행사가 매년 개최되고 있어 현대인들이 조선시대 옛길 문화 및 선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훌륭한 옛길 자원이다1

 

 

조령

실제 옛 과거길

조령(내려가는길, 우측이 옛 과거길) 

조령(옛길과 현재길 갈림길)

조령(제2관문)

 

명승 제33호  광한루 원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천거동 78번지 등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원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 세종 원년(1419)에 황희(黃喜)가 광통루(廣通樓)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었다.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鄭麟趾)가 광통루(廣通樓)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姮娥)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후 ‘광한루(廣寒樓)’라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1461년 남원부사(南原府使) 장의국(張義國)은 광한루(廣寒樓)를 보수하고,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하늘나라 은하수(銀河水)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다. 호수에는 지상의 낙원을 상징하는 연꽃을 심고,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은하수(銀河水)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칠월칠석날 단 한번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烏鵲橋)’를 연못 위에 설치하였다. 이 돌다리는 4개의 무지개 모양의 구멍이 있어 양쪽의 물이 통하게 되어 있으며, 한국 정원의 가장 대표적인 다리이다. 1582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鄭撤)은 광한루(廣通樓)를 크게 고쳐 짓고, 은하수 연못 가운데에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방장·영주섬을 만들어 봉래섬에는 백일홍(百日紅),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고, 영주섬에는 ‘영주각(瀛洲閣)’이란 정자를 세웠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왜구들의 방화로 모두 불타버렸다. 현재의 광한루(廣寒樓)는 1639년 남원부사 신감(申鑑)이 복원하였다. 1794년에는 영주각(瀛洲閣)이 복원되고 1964년에 방장섬에 방장정이 세워졌다. 이 광한루원(廣寒樓苑)은 소설 『춘향전(春香傳)』에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장소로도 유명하여, 1920년대에 경내에 춘향사를 건립하고 김은호(金殷鎬) 화백이 그린 춘향(春香)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에는 춘향제가 열린다. 

 

 

오작교
광한루 전면 연지
영주각
방장정(팔각정)
월매집 안채
월매집 아래채
완월정
완월정 내부
 
명승 제34호 보길도 윤선도 원림
재 지;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 200번지 등
조선 중기 문신이며, 시인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병자호란 때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제주도로 향하다, 보길도(甫吉島)의 자연경관에 감동하여 머물렀다고 한다. 보길도(甫吉島)는 그가 인조 15년(1631) 51세 때부터 13년간 글과 마음을 다듬으며,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와 같은 훌륭한 시가문학을 이루어 낸 곳이다. 또한 그가 섬 안의 바위와 산봉우리에 붙힌 이름은 아직도 남아있다. 낙서재(樂書齋) 건너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집을 세워 ‘곡수당(曲水堂 )’이라 하고, 그 건너 산중턱 위에 집을 지어 ‘동천석실(洞天石室)’이라 하였다. 계곡의 동북쪽에는 ‘세연정(洗然亭)’을 세워 책을 읽고 뱃놀이도 하며 자연을 벗삼아 지냈다. 보길도(甫吉島)에는 동양의 자연관과 성리학의 사상이 흐르고 있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통해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도록 한 윤선도(尹善道)의 뛰어난 안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물막이 석축
 

명승 제35호성락원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선잠로2길 47(성북동 2-22) 등

 

성락원(城樂園)은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沈相應)의 별장이었으나,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1877∼1955)이 35년간 별궁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물이 흐르는 경치에 따라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자연 지형으로 앞뜰, 안뜰, 바깥뜰로 나눌 수 있다. 앞뜰은 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쌍류동천(雙流洞天)과 안뜰 앞을 막아 아늑하게 감싸 만든 용두가산(龍頭假山)이 있다. 물줄기 속 암벽에 행서체로 새긴 ‘쌍류동천(雙流洞天)’이란 글은 성락원(城樂園)의 자맥을 보호하는 뜻도 있다고 한다. 또한 쌍류동천(雙流洞天) 주위와 용두가산(龍頭假山)에는 200∼300년 되는 엄나무를 비롯하여 느티나무, 소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다래나무, 말채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어 안뜰과 성락원(城樂園) 바깥을 가려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 안뜰은 영벽지(影碧池)와 폭포가 있으며 바깥뜰은 송석과 연못이 있는 지역이다. 서쪽 아래 지역에 늪이 있고, 북쪽에는 물길을 파서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늪의 서쪽 암벽에 ‘장빙가(檣氷家)’라고 새긴 글씨는 명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의 것이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을 맘껏 뽐내고 있는 성락원(城樂園)은 조선시대 서울 도성 안에 위치한 몇 안되는 별서정원(別墅庭園)의 하나로 가치가 크다.
성락원
송석정
영벽지 상류폭포
영벽지

영벽지 각자

영벽지 괴석

별채

 

명승 제36호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부암동 115번지 등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은 1800년대 도성에 인접하여 조성되었던 별서 관련 유적으로 주변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에 건물지(사랑채, 안채 등)와 연못 등이 남아있으며, 인근에 "백석동천(白石洞天)"·"월암(月巖)"등의 각자(刻字)바위가 위치하고 있다. 백악산(白岳山, 북악산) 뒷자락에 북한산을 정면으로 자연 경관이 수려한 백사골에 조성된 동천(洞天 :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의 하나로 주변에 흰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여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 불린다고 전하며,  ‘백석(白石)’이란 중국의 명산인  ‘백석산(白石山)’에서 비롯된 것으로  ‘백석산(白石山)’은  ‘백악산(白岳山, 북악산)’에서 착안된 것으로 풀이된다. 백석동천(白石洞天)은 남북을 중심으로 육각정자와 연못이 있고, 약 3.78m 정도의 높은 대지 위에 사랑채 부분과 안채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현재 사랑채와 정자 등은 건물터에 기초만 남아 있고, 담장과 석축 일부가 남아 있다. 백석동천(白石洞天)은 사랑채 등의 건물지와 연못, 각자바위 등이 잘 남아 있고 마을과의 거리감을 확보하고 있는 등 별서의 구성요소를 두루 갖춘 격조높은 조원(造園)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백석동천 각자
백석동천 유적(건물지)
사랑채
연못
월암 각자
육각정 기초
 
명승 제37호동해 무릉계곡
소 재 지; 강원 동해시 무릉로 584(삼화동 산 267) 등
『동해 무릉계곡(武陵溪谷)』은 동해시 두타산(頭陀山)과 청옥산(靑玉山)을 배경으로 호암소로부터 시작하여 용추폭포(龍湫瀑布)가 있는 곳까지의 약 4㎞에 달하는 계곡으로 수백명이 앉을 만큼 넓은 무릉반석(武陵盤石)과 호암소, 선녀탕, 장군바위, 쌍폭, 용추폭포 등 다양한 하천지형이 스펙트럼처럼 펼쳐져 ‘동해안 제일의 산수’라 할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경관의 백미를 보여주는 곳이다. 무릉계곡(武陵溪谷)은 고려시대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李承休)가 살면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하였고,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 김효원(金孝元)이 이름을 붙였다고 하며, 1,500여평의 무릉반석(武陵盤石)에는 조선 전기 4대 명필가의 한분인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의 석각과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을 비롯한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시가 새겨져 있는 등 무릉계곡(武陵溪谷)의 곳곳이 옛 선비들의 풍류공간이자 종교적 수행처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뛰어나다. 폭포 및 기암절벽들이 뚜렷한 절리 등 단열에 의해 형성되고 있으며, 특히 쌍폭은 두 방향의 절리들이 교차하여 만들어지고 용추는 동서 방향의 절리로 형성된 절벽에 따라 소가 형성되어 특이한 경관을 연출하는 등 무릉계곡(武陵溪谷)에 나타나는 단애 및 폭포 등이 전형적인 화강암 계곡의 침식 및 퇴적 지형을 나타내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명승지이다.
 
 
 
 
 
 
무릉반석
삼화사와 두타산
쌍폭포
용추폭포
학소대
수직절리
 
명승 제38호 쌍계루
   
소재지:전남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산 115-1번지
『장성 백양사(白羊寺) 백학봉(白鶴峰)』은 장성군 백암산(白巖山)에 위치한 백양사(白羊寺)와 백학봉(白鶴峰) 일대로, 백양사(白羊寺) 대웅전과 쌍계루(雙溪樓)에서 바라보는 백학봉(白鶴峰)의 암벽 및 식생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예로부터 대한 8경의 하나로 꼽혀왔을 만큼 이름난 곳이다. 백양사(白羊寺)가 위치한 백암산(白巖山)은 내장산과 함께 단풍이 특히 유명하며, 천연기념물 제153호인 “백양사 비자나무 분포 북한지대”를 비롯하여 1,500여종의 다양하고 풍요로운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자연자원의 보고라 할 만하다. 백양사(白羊寺)는 백양사(白羊寺) 창건 역사를 전하는 정도전(鄭道傳)의 <정토사교루기(淨土寺橋縷記)>를 비롯하여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사암(思菴) 박순(朴純)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등 고려말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은 유명인사들이 이곳을 탐방하여 백학봉(白鶴峰)과 쌍계루(雙溪樓)의 풍광을 읊은 시와 기문을 남기는 등 예로부터 자연경관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명승지이다. 특히, 백양사(白羊寺) 대웅전 기와지붕과 어우러지는 백학봉(白鶴峰)과 쌍계루(雙溪樓) 앞 연못에 비치는 쌍계루(雙溪樓)와 백학봉(白鶴峰)의 자태는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 지금도 많은 사진작가들이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쌍계루와 백학봉
백양사 대웅전과 백학봉
쌍계루
백양사 대웅전
백양사
쌍계루
 
 
 
 
 
 
명승 제39호 남해 금산
소 재 지; 경남 남해군 이동면 상주리 산257-3번지 등

『남해 금산(錦山)』은 지리산맥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형성된 산으로 원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이곳에 보광사(普光寺)라는 사찰을 지은 뒤 산 이름이 보광산(普光山)으로 불리어 왔으나,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뒤 왕위에 등극하게 되자 보은을 위해 영구불멸의 비단을 두른다는 뜻의 비단 금(錦)자를 써 금산(錦山)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금산(錦山)은 영남에서는 합천의 가야산, 방장산(지리산)과 자웅을 겨루고 중국의 남악(南嶽)에 비견되기도 했으며, 바다 속의 신비한 명산이라 하여 ‘소금강산(小金剛山)’ 혹은 작은 ‘봉래산(蓬萊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금산(錦山)이 작은 봉래산(蓬萊山)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명산으로 칭송을 받게 된 것은 멀리 떨어진 남해의 섬 속에서 다시 아득한 섬과 바다를 눈 앞에 두고 우뚝하게 솟은 돌산이라는 점에서 유람객에게 속세를 떠난 신비감을 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금산(錦山)은 다도해에서 유일한 큰 체적의 화강암 산임에도 불구하고 토산 성격이 강해 남해안에서 가장 큰 규모의 낙엽수 군락을 이루고 있다. 가을이면 마치 오색 자수판을 보는 듯하며 대규모의 낙엽수림이 화강암의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뛰어난 자연경관을 자아낸다. 이 밖에도 신라 고승인 원효대사(元曉大師), 의상대사(義湘大師), 윤필거사(潤弼居士) 등이 이곳에서 수도를 하였다고 전해지고, 중국 진시황(秦始皇)의 불로초(不老草)를 구하기 위해 이곳을 왔다갔다는 서불(徐芾)의 이야기가 담긴 ‘서불과차암(徐芾過此岩)’과 춘·추분 때만 볼 수 있다는 노인성(老人星 또는 壽星,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별)과 관련된 전설 등 신비스런 전설이 많은 곳이며, 전국의 3대 기도도량인 보리암(菩提庵)이 위치하는 등 상징적인 의미가 많은 명승지이다.

금산 암각바위

 

명승 제40호 담양 소쇄원

 
   
소 재 지;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 등

소쇄원(瀟灑園)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둔생활을 하던 조선시대 선비의 별서원(別墅園)이다. 양산보(梁山甫)의 호가 소쇄옹(瀟灑翁)이었기에 원(園)의 이름을 소쇄원(瀟灑園)이라 한 것이다. 소쇄원의 조성연대는 1520년부터 1557년까지 양산보(梁山甫)의 은둔생활(隱遁生活) 기간 중에 조성된 것이다. 이 원(園)의 조성사상을 보면 주자(朱子)가 중국(中國) 숭안현(崇安縣) 무이산(武夷山)계곡의 경승지인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현실(現實)을 도피하여 은둔하는 행동양식이 깔려있다. 원(園)의 구성을 보면 흘러내리는 계류가 암반을 타고 오곡(五曲)으로 흐르다가 폭포로 떨어져 작은 조담(槽潭)을 이루는 3천여평의 공간에 조성되어 있다. 계류를 중심(中心)으로 양쪽 언덕 임간(林澗)에 터를 잡아 광풍각(光風閣), 제월당(齊月堂), 초정(草亭), 화계(花階), 연지(蓮池), 석천(石泉) 등이 배치되고 물레방아와 석가산도 있었다. 그리고 계류 위에는 외나무다리와 죽교(竹橋)가 설치되고 원(園)의 구역은 아름다운 토석담으로 구획 지워져 있다. 담벽에는「애양단(愛陽壇)」, 「오곡문(五曲門)」「소쇄처사양공지허(瀟灑處士梁公之虛)」의 글씨가 석판(石板)과 목판(木板)에 새겨져 박혀 있어 운치를 더한다. 원의 입구는 울창한 죽림(竹林)으로 외부(外部)와 막혀 있으며 원내(園內)의 식생(植生)은 죽(竹) 매(梅) 송(松) 행(杏) 괴(槐) 도(桃) 벽오동(碧梧桐) 유(柳) 자미(紫薇) 단풍(丹楓) 사계화(四季花) 치자(梔子) 국(菊) 부용(芙蓉) 순채 파초(芭蕉)를 심었던 것이다. 이러한 식생이 조선선비들이 좋아하였던 화목(花木)들이다. 지금도 넓은 소나무와 느티나무 목백일홍(자미, 紫薇))의 원림(園林)이 계류와 정자들과 어울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연지(蓮池)는 방형(方形)들인데 하나는 2.5m의 정방형이며 하나는 세로 5.5m, 가로 4m의 장방형이다. 이들 연못에는 계류의 물을 나무 홈대로 연결하여 넣었던 것이다. 이 소쇄원(瀟灑園)에는 김인후(金麟厚)가 1548년(명종(明宗) 3)에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의 48영(詠) 시(詩)가 남아 있다. 그리고 고경명(高敬命) 이 1574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광주목사(光州牧使) 임훈(林薰)과 함께 광주 무등산(無等山)을 유락(遊樂)하면서 4월 23일 소쇄원(瀟灑園)에 들려서 보았던 계원(溪園)의 사실적 묘사가 「유서석록(遊瑞石錄)」에 남아있다. 또 소쇄원(瀟灑園)의 배치를 목판(木板)으로 새긴「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있다. 이 목판은 가로가 35cm, 세로가 25cm로 양각으로 판각되었는데 1775년 4월 하순「숭정기원후 삼을해년청화 하완간(崇禎紀元後 三乙亥年淸和 下浣刊)」에 제작했다는 판각기가 새겨있어 소쇄원(瀟灑園)의 원형(原形)을 상고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목판에는 위쪽에 김인후(金麟厚)의 소쇄원 48제영(瀟灑園 48題詠)이 새겨있고 오른쪽 외곽에는「창암촌 고암동 소쇄원 제월당 광풍각 오곡문 애양단 대봉대 옹정봉 황금정 유 우암선생필(蒼巖村 鼓巖洞 瀟灑園 齊月堂 光風閣 五曲門 愛陽壇 待鳳臺 瓮井峰 黃金亭 有 尤菴先生筆)이라 새겨있다. 우암(尤菴)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호이다. 이 소쇄원도(瀟灑園圖)에는 건물의 명칭 식물의 명칭 지당(池塘) 계류의 조담(槽潭)이나 바위 다리 물레방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입구 담벽에는 원래 김인후(金麟厚)의 소쇄원(瀟灑園) 48영(詠) 수제(手題)가 편액으로 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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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각

 

오곡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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