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瀟灑處士梁公之慮’]
(명승 제40호 담양 소쇄원 중)
소쇄원 내에는 지대, 매대, 대봉대, 정대亭臺, 광대廣臺,처사대處士臺 등 여러 개의 대가 있다. 그러나 지대와 동대는 48영에는 시제만으로 이용되었고「소쇄원도」에는 매대만이 그려져 있다.
매대는 매화나무를 심어놓은 ‘대’로써 48영에서는 달맞이를 하던 곳으로 되어 있다. 12영에의하면 시제를 ‘매대요월梅臺邀月’이라 하여 매대에서 달을 맞이한다 하였다. 매대는 오곡문과제월당 사이에 축조된 4단의 계단 중에서 상부 2단의 계단으로된 화계花階로써 길이는 약20m이고 높이는 약 1m, 나비는 1.5m의 크기이다. 이곳에 매화나무를 심고 ‘매대’라불렀다. 지금은 말라 죽은 선측백나무 한 그루와 소쇄원 동호인회에서 42그루의 매화나무를심었으며,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측백나무를 새로 심어 가꾸고 있다. 산수유나무도 한 그루가있으나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때에 심은 듯하다.
원래 양산보의 사우는 명옥헌 뒤의 도장사道藏祠였는데, 대원군때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지고제월당에 신위를 모셨다.
명승 제31호문경 토끼 비리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산41 등
『문경 토끼비리』는 석현성 진남문에서 오정산과 영강으로 이어지는 산 경사면에 개설된 천도(遷道 : 하천변의 절벽을 파내고 건설한 길)로 영남대로 옛길 중 가장 험난한 길로 알려져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태조 왕건이 남쪽으로 진군 시 이곳에 이르러 길이 없어졌는데 마침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토천(兎遷)’이라 부른데서 유래한다고 전한다. ‘비리’란 ‘벼루’의 사투리로 강이나 바닷가의 위험한 낭떠러지를 말하며, 이곳 토끼비리는 문경 가은에서 내려오는 영강이 문경새재에서 내려오는 조령천과 합류하는 곳에서부터 산간 협곡을 S자 모양으로 파고 흐르면서 동쪽 산지를 침식하여 만든 벼랑에 형성된 길이다. 돌벼랑을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파서 만든 구불구불한 길이 6, 7리 나있는데 겨우 한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고 험하다. 토끼비리는 길에서 내려다보이는 영강과 절벽부, 맞은편 마을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망 경관을 형성하고 있으며, 옛길의 중간중간에 주막거리와 성황당, 2그루의 당나무 등이 남아 있어 다양한 옛길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토천
고모 산성
고모 산성
주막촌
성황당
명승 제32호 문경 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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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
실제 옛 과거길
조령(내려가는길, 우측이 옛 과거길)
조령(옛길과 현재길 갈림길)
조령(제2관문)
명승 제33호 광한루 원
소 재 지; |
전북 남원시 천거동 78번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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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 200번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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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서울 성북구 선잠로2길 47(성북동 2-2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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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벽지 각자
영벽지 괴석
별채
명승 제36호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부암동 115번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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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강원 동해시 무릉로 584(삼화동 산 267)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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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경남 남해군 이동면 상주리 산257-3번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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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금산(錦山)』은 지리산맥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형성된 산으로 원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이곳에 보광사(普光寺)라는 사찰을 지은 뒤 산 이름이 보광산(普光山)으로 불리어 왔으나,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뒤 왕위에 등극하게 되자 보은을 위해 영구불멸의 비단을 두른다는 뜻의 비단 금(錦)자를 써 금산(錦山)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금산(錦山)은 영남에서는 합천의 가야산, 방장산(지리산)과 자웅을 겨루고 중국의 남악(南嶽)에 비견되기도 했으며, 바다 속의 신비한 명산이라 하여 ‘소금강산(小金剛山)’ 혹은 작은 ‘봉래산(蓬萊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금산(錦山)이 작은 봉래산(蓬萊山)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명산으로 칭송을 받게 된 것은 멀리 떨어진 남해의 섬 속에서 다시 아득한 섬과 바다를 눈 앞에 두고 우뚝하게 솟은 돌산이라는 점에서 유람객에게 속세를 떠난 신비감을 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금산(錦山)은 다도해에서 유일한 큰 체적의 화강암 산임에도 불구하고 토산 성격이 강해 남해안에서 가장 큰 규모의 낙엽수 군락을 이루고 있다. 가을이면 마치 오색 자수판을 보는 듯하며 대규모의 낙엽수림이 화강암의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뛰어난 자연경관을 자아낸다. 이 밖에도 신라 고승인 원효대사(元曉大師), 의상대사(義湘大師), 윤필거사(潤弼居士) 등이 이곳에서 수도를 하였다고 전해지고, 중국 진시황(秦始皇)의 불로초(不老草)를 구하기 위해 이곳을 왔다갔다는 서불(徐芾)의 이야기가 담긴 ‘서불과차암(徐芾過此岩)’과 춘·추분 때만 볼 수 있다는 노인성(老人星 또는 壽星,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별)과 관련된 전설 등 신비스런 전설이 많은 곳이며, 전국의 3대 기도도량인 보리암(菩提庵)이 위치하는 등 상징적인 의미가 많은 명승지이다.
금산 암각바위
명승 제40호 담양 소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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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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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瀟灑園)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둔생활을 하던 조선시대 선비의 별서원(別墅園)이다. 양산보(梁山甫)의 호가 소쇄옹(瀟灑翁)이었기에 원(園)의 이름을 소쇄원(瀟灑園)이라 한 것이다. 소쇄원의 조성연대는 1520년부터 1557년까지 양산보(梁山甫)의 은둔생활(隱遁生活) 기간 중에 조성된 것이다. 이 원(園)의 조성사상을 보면 주자(朱子)가 중국(中國) 숭안현(崇安縣) 무이산(武夷山)계곡의 경승지인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현실(現實)을 도피하여 은둔하는 행동양식이 깔려있다. 원(園)의 구성을 보면 흘러내리는 계류가 암반을 타고 오곡(五曲)으로 흐르다가 폭포로 떨어져 작은 조담(槽潭)을 이루는 3천여평의 공간에 조성되어 있다. 계류를 중심(中心)으로 양쪽 언덕 임간(林澗)에 터를 잡아 광풍각(光風閣), 제월당(齊月堂), 초정(草亭), 화계(花階), 연지(蓮池), 석천(石泉) 등이 배치되고 물레방아와 석가산도 있었다. 그리고 계류 위에는 외나무다리와 죽교(竹橋)가 설치되고 원(園)의 구역은 아름다운 토석담으로 구획 지워져 있다. 담벽에는「애양단(愛陽壇)」, 「오곡문(五曲門)」「소쇄처사양공지허(瀟灑處士梁公之虛)」의 글씨가 석판(石板)과 목판(木板)에 새겨져 박혀 있어 운치를 더한다. 원의 입구는 울창한 죽림(竹林)으로 외부(外部)와 막혀 있으며 원내(園內)의 식생(植生)은 죽(竹) 매(梅) 송(松) 행(杏) 괴(槐) 도(桃) 벽오동(碧梧桐) 유(柳) 자미(紫薇) 단풍(丹楓) 사계화(四季花) 치자(梔子) 국(菊) 부용(芙蓉) 순채 파초(芭蕉)를 심었던 것이다. 이러한 식생이 조선선비들이 좋아하였던 화목(花木)들이다. 지금도 넓은 소나무와 느티나무 목백일홍(자미, 紫薇))의 원림(園林)이 계류와 정자들과 어울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연지(蓮池)는 방형(方形)들인데 하나는 2.5m의 정방형이며 하나는 세로 5.5m, 가로 4m의 장방형이다. 이들 연못에는 계류의 물을 나무 홈대로 연결하여 넣었던 것이다. 이 소쇄원(瀟灑園)에는 김인후(金麟厚)가 1548년(명종(明宗) 3)에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의 48영(詠) 시(詩)가 남아 있다. 그리고 고경명(高敬命) 이 1574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광주목사(光州牧使) 임훈(林薰)과 함께 광주 무등산(無等山)을 유락(遊樂)하면서 4월 23일 소쇄원(瀟灑園)에 들려서 보았던 계원(溪園)의 사실적 묘사가 「유서석록(遊瑞石錄)」에 남아있다. 또 소쇄원(瀟灑園)의 배치를 목판(木板)으로 새긴「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있다. 이 목판은 가로가 35cm, 세로가 25cm로 양각으로 판각되었는데 1775년 4월 하순「숭정기원후 삼을해년청화 하완간(崇禎紀元後 三乙亥年淸和 下浣刊)」에 제작했다는 판각기가 새겨있어 소쇄원(瀟灑園)의 원형(原形)을 상고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목판에는 위쪽에 김인후(金麟厚)의 소쇄원 48제영(瀟灑園 48題詠)이 새겨있고 오른쪽 외곽에는「창암촌 고암동 소쇄원 제월당 광풍각 오곡문 애양단 대봉대 옹정봉 황금정 유 우암선생필(蒼巖村 鼓巖洞 瀟灑園 齊月堂 光風閣 五曲門 愛陽壇 待鳳臺 瓮井峰 黃金亭 有 尤菴先生筆)이라 새겨있다. 우암(尤菴)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호이다. 이 소쇄원도(瀟灑園圖)에는 건물의 명칭 식물의 명칭 지당(池塘) 계류의 조담(槽潭)이나 바위 다리 물레방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입구 담벽에는 원래 김인후(金麟厚)의 소쇄원(瀟灑園) 48영(詠) 수제(手題)가 편액으로 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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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각
오곡문
▶선조들의 숨결 어린 문화재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www.문화재방송.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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