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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4월 28일: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일]바다에서 45전 무패… 원래는 육군 출신

문화재방송 2022. 4. 26. 00:19

충무공 이순신 탄신 제477주년 행사 개최

 

- 현충사 중건 90주년 기념 전시(기념관)도 함께 개최 / 4.28. 오전 11시 현충사 -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소장 이성희)는 4월 28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제477회 탄신일을 맞이하여 충무공 이순신의 국난극복의 위업을 온 국민과 함께 기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 제477주년 기념다례」를 오는 28일 오전 11시 현충사(충청남도 아산시)에서 거행한다.


  이번 기념행사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이충무공 후손들만 공식 초청하여 김현모 문화재청장 주재 아래, 다례만 진행하는 행사로 축소하여 진행한다.


  다례(茶禮)는 초헌관(初獻官, 현충사관리소장)의 분향(焚香, 향을 피움)‧헌작(獻爵, 술잔을 올림)과 축관(祝官)의 축문낭독으로 구성되는 초헌례(初獻禮), 후손대표가 헌작하는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로 진행되며, 이어서 대통령 명의의 헌화(獻花)와 분향이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기념행사는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별도의 공식오찬과 궁도대회 등은 시행하지 않는다. 대신, 사회적 거리 유지가 가능한 야외공간을 활용하여 「충무공 진심 마음에 담다」라는 주제로 작은 전시회를 열어 국민과 함께 다양한 문화행사를 공유한다.


  충무공 고택과 참배로에서는 ▲‘서화로 보는 고택정담’(4.19.~5.1.) 서예전시, ▲‘아산의 혼 이순신을 새기다’ 서각전시(4.23.~5.15.), ▲‘충무공의 身心(一路同行): 신심, 일로동행’ 회화전시(5.3.~5.15) 등이 개최되어 관람객들이 이순신의 삶과 마음을 느껴볼 수 있다. 


  장애인이 탑승한 차량은 관람 편의를 위하여 28일 행사 당일에만 충무문까지 진입할 수 있는데, 원활한 행사 진행을 위해 행사 시작 10분 전(오전 10시 50분, 마스크 착용)까지로 제한되며, 장애인 하차 후에는 경내 밖에 마련된 장애인 전용 주차공간에 주차하도록 안내될 예정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현충사 중건을 위해 성금을 보낸 평범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현충사 중건 90주년 특별전 『국민이 지킨 이충무공』을 개최하여 당시 성금을 동봉한 편지 약 20편과 관련 문서들을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서 소개한다. 이를 통해 1932년 일제강점기, 온 겨레의 민족성금으로 지켜낸 이충무공 유적 보존운동의 진실한 가치를 되새기고 당시의 문화유산 보존운동의 사회적 확산을 소개할 예정이다.


  탄신일 다음날인 4월 29일부터 5월 1일까지는 오랫동안 코로나19로 지친 국민의  심신을 위로하고 일상을 회복하고자 아산시와 함께 협업으로 제5회 현충사 달빛야행 체험을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사전예약 없이 야간 관람시간(오후6~10시)에 국민 누구나 입장할 수 있어 현충사의 수려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현충사관리소는 이번 행사가 일상회복 전환의 작은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한다.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는 임진왜란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희생하면서 국난을 극복했던 충무공의 정신으로 코로나19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국민 모두의 축제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1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 제477주년 기념다례」>

 

이순신 탄생 477주년

 /그래픽=안병현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지 47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날은 충무공 탄생을 기리는 법정 기념일인데요. 우리나라 역사에서 특정 인물의 생일을 기념일로 정한 건 이순신 장군이 유일하답니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고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을 이끌며 전투마다 큰 승리를 거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어요. 그런데 이순신 장군이 어렸을 때 어떻게 자랐는지 알고 있나요? 이순신 장군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요?

서울 시내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어요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은 어디일까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현충사가 충남 아산에 있어 장군의 출생지를 아산으로 잘못 아는 사람이 많아요. 이순신 장군은 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 지하철 을지로3가역 근처에 장군의 생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지금도 그곳에 가면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라는 비석이 있지요. 바로 근처에 '충무로'가 있는데요. 이 지명도 충무공에서 따온 거예요.


'이순신 장군의 할아버지가 1519년 급진 개혁파가 제거된 기묘사화 때 역적으로 몰려 가세가 기울었고 가난하게 자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드라마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가 삯바느질하는 등 가난했다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장군의 할아버지 이백록은 기묘사화에 연루되긴 했지만, 이후에도 성균관 유생 대표로 살아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조선시대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기묘사화 이후 훨씬 지난 시점에 이백록의 기록이 등장합니다. 기묘사화 때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또 이순신 장군의 아버지 이정은 오래도록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지만, 이것도 재산이 적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해요. 이민웅 해군사관학교 교수는 "이순신은 명망 있는 사대부 가문에서 나름대로 유복하게 자라면서 조선 성리학에 기반을 둔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엘리트로 성장했다"고 말했어요.

늘 '붓을 던질 뜻'을 품었어요

이순신 장군은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을 이끄는 골목대장이었어요. "영특하고 남의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여러 아이와 함께 전쟁놀이를 했는데 아이들이 대장으로 떠받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요. 어릴 때부터 장군이 될 자질을 보여줬다는 것이죠. 어린 이순신은 어른들에게도 주눅이 들지 않고 당당했기 때문에 전쟁놀이를 할 때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진짜 전쟁터인 것처럼 피해 갔다고 합니다. 근처 참외밭 주인은 어린 이순신의 기개에 탄복해 지나갈 때마다 참외를 내줬다고 해요.

이순신 장군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은 '징비록'에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요. "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아하며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나, 그의 속에는 담기(겁이 없고 용감한 기운)가 있었다"고 썼어요.

서른두 살 때 '취준생'을 벗어났어요

이순신 장군은 어렸을 때는 두 형과 함께 문과 과거 시험을 준비했어요. 유교의 주요 경전인 '주역'과 중국의 역사책 '통감강목'을 통달할 정도로 글공부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장군이 되는 꿈을 꾸고 있었어요.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기록한 '이충무공전서'에는 '항상 붓을 던질 뜻을 품곤 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순신은 스무 살 무렵 상주 방씨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장인인 방진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었는데 사위의 자질을 알아보고 이순신이 문과에서 무과로 바꾸게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28세 때 처음 무과에 응시했는데 떨어지고 말았어요.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거든요. 이순신은 32세 때 마침내 무과에 합격해요. 성적은 합격자 29명 중 12등이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32세라는 늦은 나이까지 '취준생(취업준비생)' 생활을 한 건데요. 당시 합격자 평균 나이가 34세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때 기준으로는 늦은 편이 아니었답니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 수군을 이끌고 바다에서 대승을 거둔 것으로 유명한데요. 젊은 시절 이순신은 함경도, 충청도, 북방 국경 지대 등 육군 무관으로 근무했어요. 전국 곳곳에서 쌓은 실전 경험이 훗날 임진왜란에서 빛을 발했답니다.


[일본과 싸워 한 번도 지지 않았어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상대로 '23전 23승'을 거뒀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45전 40승 5무승부'였다고 말하기도 해요. 어떻게 된 걸까요? 이순신 연구가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23전이라는 것은 큰 전투 위주로 집계한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는 40여 차례 해전 중 40번을 승리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어요. 무승부는 일본군이 맞서 싸우지 않아 승패가 가려지지 않은 것이라고 해요. 어떻게 보더라도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에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대표적인 전투로는 첫 승리를 거둔 옥포해전, 거북선이 처음 출전했던 사천해전,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한산도대첩, 일본군의 한양 북상을 막은 명량해전,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 등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전쟁이 멈추길 염원했다 조선 삼도수군의 본영 ‘통영’

호국의 성지 통영에 가다

 

통영의 본디 이름은 ‘가배량수’였다. 통영으로 불린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 통영이라는 지명은 임진왜란 당시 통영 한산도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에서 유래했다. 통제영은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수군을 총괄하는 조선 수군의 총사령부로서 오늘날 해군본부 격이다. 초대 통제사는 전라좌수 이순신 장군이다.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원균이 칠전량에서 대패한 후 한산도 통제영도 불타 없어지는 비운을 겪었다. 현 위치에 있는 통제영은 전란이 끝난 이후 1603년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두룡포라는 작은 포구에 터를 닦고 1604년 옮겨 지은 것이다. 통제영 객사인 국보 세병관은 그 이듬해인 1605년에 지었다. 한때 ‘충무’라는 지명도 이순신 장군의 시호 ‘충무공’에서 따온 것을 보면 통영은 호국의 성지임이 분명하다.

 

세병관으로 향하는 길목에 호위무사처럼 깃발이 자리를 지킨다. 외삼문 ‘망일루’는 세병관의 첫 관문이자 정문이다. 망일루는 해를 조망하는 누각인데 해는 임금을 가리킨다. 누각에서 하루 두 번 종을 쳐 시간을 알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통영의 해상관문인 강구안과 동피랑, 서피랑이 한눈에 담길 뿐이다. 망일루를 지나면 내삼문인 ‘지과문’에 이른다. 문 앞에 서서 편액에 적힌 글자를 한 글자씩 꼼꼼히 따져본다. 멈출 ‘지(止)’, 전쟁 ‘과(戈)’, 즉 전쟁을 멈추는 문이다. 국란을 겪은 뒤였으니 전쟁이 멈추길 간절히 바랐을 터. 그런데 두 글자를 합치면 굳셀 무(武)가 아닌가. 평화는 굳센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음을 일깨우는 동시에 용맹한 조선 수군의 기개가 느껴진다.


 

문을 통과하자 시선이 향한 곳은 세병관이다. 세병관은 정면 9칸, 측면 6칸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웅장하다. 세병관은 서울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현존하는 조선시대 건축물 가운데 바닥면적이 넓은 건물 중 하나다. 4면에 벽이 없어 개방감이 탁월한 데다 아름드리 기둥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어 매우 간결한 동시에 조선 수군의 본영다운 강직함과 통제영의 기상이 잘 드러난다. 세병이란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으로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왔다.

 

즉, 이 땅에 평화가 깃들길 바라는 열망이 이 건물에 투사된 것이리라. 편액의 글씨는 137대 통제사 서유대가 썼고, 글자의 크기가 2m에 가까우며, 편액의 총 무게는 1톤에 육박한다. 세병관 내부는 우물마루에 천장은 연등 장식으로 꾸몄다. 마루 중앙에는 임금에게 장계를 올리고 어명을 받는 ‘전패단’이 있다. 여기서 통제사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를 행했다. 한낱 작은 포구에 불과했던 곳에 삼도 수군의 핵심 군사시설인 통제영이 설치되자 전국에서 수많은 물산과 장인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군영을 유지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이고 군수품 생산과 나아가 조정에 보내는 물품까지 조달했다.

 

이 같은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이 ‘12공방’인데, 다른 지역의 공방에 비해 통영 12공방의 규모가 가장 컸다고 한다. 12공방은 단순히 공방의 수가 12개라는 뜻이 아니다. 온갖 장인이 모인 수많은 공방이라는 수사적 의미로 공방이 다양하게 많다는 뜻이다. 12공방에서 만든 공예품은 당시 상류층에서 웃돈을 주고 살 만큼 최상급으로 알려졌다. 12공방이 해체된 이후에도 장인들은 꾸준히 기술을 전수하며 맥을 이어갔다. 그 덕택에 지금도 통영 장인이 만든 갓, 소반, 부채, 나전 등은 최고의 명품으로 손꼽힌다.


 

몸을 낮추게 되는 곳, 충렬사

 

통제영에서 600m 거리에 사적인 통영 충렬사가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선조의 명령에 따라 제7대 통제사 이운용이 세운 사당이다. 현종 대에 남해 충렬사와 함께 사액을 받았다. 이후 삼도수군통제사는 통제영이 해체될 때까지 오랜 세월 봄가을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충무공 탄신제를 비롯해 제향을 하고 있다. 충렬사 경내에는 고목이 꽤 많다. 그중 시도기념물인 통영 충렬사 동백나무가 먼저 반긴다. 수령이 400년 정도로 추정된다고 하니 충렬사의 역사와 함께한 셈이다. 동백나무를 지나면 가파른 계단 위에 외삼문 강한루가 올려다보인다.

 

강한루 좌우로 비각 여섯 채가 나란히 잇대 있다. 비각 안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통영 충렬묘비를 비롯해 모두 11기의 비가 들어 있다. 이어 내삼문을 지나면 이순신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 나온다. 내삼문 문설주를 떠받들고 있는 신방석에는 해태가 새겨져 있다. 이빨을 드러낸 모습이 익살스럽다. 내삼문 양쪽 협문은 중문보다 한 뼘 정도 더 낮다. 몸을 낮추고 몸가짐을 삼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사당에는 《명조팔사품도(明朝八賜品圖)》와 장군의 영정, 위패 등이 놓여 있다. 보물 통영 충렬사 팔사품 일괄은 명 황제 신종이 이순신 장군에게 보냈다는 8가지 보물이다. 유물전시관에 전시 중이다.


 

한산도대첩, 그 현장을 조망하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옥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 등지에서 승전고를 울렸다. 그 가운데 으뜸은 학익진을 펼쳐 왜군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버린 한산도대첩이다. 그 현장을 발아래 두고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미륵산에 자리한 한산대첩 전망대다. 한려수도조망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수월하게 미륵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상부 승강장에서 나무데크 길을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전망대에 닿는다. 전망대에서 마주한 풍광은 매우 평온하다. 43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래서일까. 한려수도를 한가득 채우고 있는 섬의 빼어난 자연경관이 더 몸서리치도록 아름답게 보인다.

 

1시 방향에 넓게 펼쳐진 한산도를 중심으로 왼쪽에 죽도, 화도, 방화도가 편안하게 누운 듯 자리하고, 오른쪽에는 용초도, 비진도가 아득하다. 내친김에 미륵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따라 이동한 마지막 여행지는 이순신 공원이다. 여느 공원처럼 산과 바다를 함께 느끼며 쉬엄쉬엄 걸을 수 있어 산책코스로 제격이다. 주차장에서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큰 칼을 움켜쥐고 바다를 향해 지시하듯 손을 들고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마주한다. 때마침 수평선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저문다. 어디선가 이순신 장군의 엄중한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학익진을 펼쳐라!”



 

[뉴스 속의 한국사] 세계 7대 명품 군함 '거북선'… 서양에 처음 소개

 

조지 클레이턴 포크

 /그래픽=김하경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공포에 떨게 한 전함이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입니다. 이 '한국의 거북선'은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어요. 미국해군연구소(USNI)는 2016년 세계 해군 역사상 '7대 명품 군함' 중 하나로 거북선을 꼽으며 "속도가 빠르고 기동성이 좋았다" "뱃머리에 장착된 용머리 모양의 연기 분출 장치는 (적군에 대한) 강력한 심리적 무기"라고 했습니다.

거북선을 서양에 처음 소개

'한국 배 거북선'을 서양에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미국 정부가 1880년대 조선에 무관으로 파견한 조지 클레이턴 포크(Foulk·1856~1893)입니다. 포크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배우 이병헌이 맡았던 '유진 초이'라는 인물의 모델로 알려진 사람이지요. 포크는 조선에서 근무하는 동안 거북선에 대한 보고서를 썼는데요. 이 내용이 1894년과 1897년 시카고트리뷴, 선 등 미국 신문에 보도되면서 거북선의 존재가 서양 사람들에게 알려졌답니다. 당시 신문은 "귀갑(거북 등딱지)과 철제 갈고리로 무장해 일본 선박을 전복시키거나 구멍을 뚫어 침몰시켰다"며 거북선을 소개했다고 해요.

주(駐)조선 임시대리공사 맡았던 해군 무관

포크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나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아시아 분함대에서 복무했습니다. 1883년 9월 조선 사절단이 우호, 친선 목적으로 미국을 최초로 방문했는데요. 답례로 외국을 방문했다는 뜻으로 보빙사라고 불러요. 포크는 이들의 통역 장교였습니다.

포크는 이후 보빙사 민영익의 요청으로 조선 주재 미 공사관 해군 무관으로 임명돼 트렌턴호를 타고 1884년 5월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조선에 파견된 초창기의 미국 무관으로, 한·미 외교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답니다. 1885년부터 2년 동안 미국 공사관의 임시대리공사를 맡아 조선 정계의 자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미 해군에 보낸 보고서엔 거북선 그림이 실려 있는데 이것이 미국 언론에 보도됐던 것이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포크가 상세한 조선 여행기를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1884년 11월 1일 한양을 출발한 포크는 조선 양반들처럼 가마를 타고 44일 동안 공주, 전주, 나주, 부산, 충주를 거치는 1448㎞의 여행을 했습니다. 노트 두 권 380쪽에 걸쳐 당시 조선의 실상이 생생하게 기록됐죠. 이 파란 눈의 이방인은 어디서나 폭발적인 관심의 대상이 돼 "화장실도 가기 힘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조선은 보기 드문 흥미로운 땅"

19세기 서양인이 보기에 조선은 무척 낙후돼 있었습니다. 마당에 싸리나무로 둥그렇게 둘러친 화장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더러웠고, 공공도로는 너무 좁고 험해 소가 끄는 수레도 지나가기 어려웠습니다. 그나마 바퀴 달린 교통수단은 드물었고 대부분 지게를 지고 걸어다니며 짐을 운반했습니다.

포크는 힘든 여행 중에도 조선의 독특한 문화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였어요. 그는 "이 땅은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인류가 오랜 세월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보기 드물게 흥미로운 땅"이라고 했어요. 그는 "거대한 크기의 불교 유적 등을 보면서 세상 누구보다 즐거움을 느꼈던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해요. 해인사를 방문했을 땐 팔만대장경의 위용에 감탄하기도 했죠.

대동여지도 들고 조선을 여행

그는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들고 조선을 여행했죠. 여행 일정을 짤 때 대동여지도를 보고 전체 거리와 여행 대상 지역을 정했다고 해요. 대동여지도가 아주 정확하다고 감탄하기도 했답니다.

포크는 임시대리공사 일이 끝난 뒤 1887년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드라마 속 유진 초이가 조선 여성과 사랑에 빠진 것과는 달리 실제로 그는 일본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37세가 되던 1893년 산책 중 심장 질환으로 사망했다고 해요. 포크가 남긴 자료는 그의 부친에 의해 미국지리학회에 매각됐고, 이후 밀워키대학에 기증돼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어요. 조선 군인들은 퇴각을 요구했고 셔먼호가 이를 무시하자 불태워버렸습니다. 이 사건으로 1871년 미국 군함이 강화도를 공격한 신미양요가 발생했어요. 두 나라가 공식 외교를 맺은 것은 1876년 조선이 외국에 문호를 개방한 지 6년 뒤인 1882년입니다. 서양과 맺은 최초의 조약인데요. 미국을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죠.

미국은 이 조약에서 '조선은 자주독립국'임을 강조했어요. 조약문엔 '조선이 제3국으로부터 부당한 침략을 받을 경우 미국은 즉각 이에 개입해 안보를 보장한다'고 명시돼 있었지만, 훗날 일본의 침략 상황에서 아쉽게도 이 조약은 지켜지지 않았어요.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최원국 기자
 
 충무공 이순신 전사 이후 조정

충무공 이순신 장군 전사 이후 조정

 
임진왜란 당시부터 현 시대까지 이순신 장군의 전사에 대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위장전사(僞裝戰死)로 보는 견해는 당시부터 있었다. 그것은 선조의 무능함과 전공을 세운 신하들에 대한 질투심이 근본바탕을 하고 있다. 무능한 왕 대신 나라를 구한 장군들에 대한 선조의 질투는 대단했다. 위장전사에 대한 글을 알아보자.


장군의 죽음은 이미 작정된 것


"세상이 말하기를 이순신의 공로가 클수록 살아남기 어려움을 스스로 알았으며, 드디어 싸움에서 자기의 몸을 버렸다고 하였다. 장군의 죽음은 이미 작정한 것이었다고들 한다. 당시에 그가 처한 환경과 처지를 보면 , 이런 말에 가깝다. 오 슬프구나 ! "


이 글은 조선 숙종 때의 영의정 최석만이 자신의 문집에 수록한 기록이다. 최석만은 병자호란 때 홀로 청나라와의 화의를 주장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한 명신 최명길의 손자(후에 최석정으로 개명함)로서, 임진왜란 이후 조정대신들 사이에 있었던 권력투쟁의 실상을 한탄하는 영의정 '이여(李畬)‘ 라는 대신의 논평기록을 옮기면서,


"당시의 조정 상황으로 보아 이순신이 스스로 죽기를 원하여 엄동설한의 전투 지휘 중임에도 불구하고 투구와 갑옷을 벗고 왜구들의 조총탄환을 가슴으로 기다린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안타까워하면서, 이같이 인재를 억울하게 희생시키는 사건을 유발시키는 정치의 타락이 민족역사에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가를 직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왜란이 끝난 후 조정의 논공행상으로 야기된 당쟁으로 인해 김덕령 장군을 비롯한 수많은 의병대장들이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려 희생당한 사실만 보아 이순신 장군의 전사가 위장이라는 가설이 있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 왜적이 철수하는 마지막 해전 노량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나서 마지막 순간에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배웠다.


당시 임금 선조는 장군의 전사 장계를 받고 <선무일등공신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우의정으로 추증하면서 다음과 같은 제문을 지어 죄없는 장군에게 두 번씩이나 중벌을 내린 자신의 어리석음을 진심인지 모르지만 후회했다.


나는 그대를 버렸건만, 그대는 나를 버리지 않았으니, 이승과 저승 사이에 맺힌 원한이 얼마나 슬프겠는가!”


이순신 장군의 전사에 대한 의구심을 유발하는 것은, 선조 31(AD 1598) 11 19일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였으며, 왜적들은 철군명령을 받아 이미 대부분의 함대가 빠져나간 상태였다. 이때 이순신 같은 명장이 적군이 후퇴하는지 철군하는지를 구별하지 못했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 충무공이 전사했다고 하는 동짓달 열아흐렛날은 바다바람에 살을 에이는 엄동설한이었으며, 아무리 전투가 치열했다 하더라도 갑옷을 벗고 투구까지 벗어버릴 상황은 아니었다. 더구나 충무공이 손수 기록한 <난중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장군은 잠을 잘 때에도 북을 베고 자면서 언제라도 지휘를 할 수 있는 태세를 풀어본 적이 없으며, 잠자리에서도 융복(전투복)을 벗어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유독 이날만은 투구를 벗고 갑옷을 벗어 던진 채 가슴으로 조총탄환을 맞이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평소에 이순신 장군은 척후를 계속 파견하여 적의 동태와 여론을 수집하고 대국적인 견지에서의 전투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는데 게으르지 않은 현명한 지휘관이었다. 그런 점에서 수군의 폐지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당시 조정의 돌아가는 형편을 장군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무엇보다도 주의할 점은, 전투중인 함대 사령관 주변에 아들과 조카 이완만 있었으며 통제사의 죽음을 목격한 병사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또 전투 중이어서 전사를 숨겼다 하더라도, 장례를 바로 치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록에 의하면 두 달하고도 스무 날 만에 가묘(假墓)를 썼다가 열다섯 해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아산으로 이장을 했다.


이 점을 두고 후일의 학자들 가운데서는 전사일로부터 80일이 지나서 장사지냈다는 것은 전사를 위장한 후 전사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임시의 묘를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통 성리학을 국가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당시의 상례(喪禮)로 보아 열다섯 해만에 이장을 하였다는 것은 더욱 납득할 수 없을 만큼 비정상적인 장례절차였다.


이런 기록들은, 결국 이순신 장군은 왜란이 끝난 후 당쟁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닥쳐 올 화()를 예견하고 전사를 가장, 최소한 열다섯 해를 초야에 숨어서 살았다는 등 다양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장군의 당시 심정을 헤아리고 정치상황의 희생양이 되어 두 번씩이나 사형에 처해질 뻔 했으면서도 그때마다 백의종군으로 종사하면서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험로를 외롭게 걸어간 장군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믿는 마음에서, 당시 기록들의 의문점을 제기해 보는 것도 올바른 역사를 가지는 방법이며 진실규명을 하는 것이 옳다.


왜적의 전투력을 사실상 무력하게 만든 최대의 전공을 세웠으면서(임지왜란 후 선조는 공신을 책정할 때 1등공신에는 원균을, 2등공신에는 이순신을 고집했다가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마지못해 1등공신으로 칭호를 변경해서 내린다)도 왜적과 내통(왜군이 첩자를 보내 울산성을 공격한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을 때 선조는 이순신에게 출동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이순신은 거짓정보임을 알아차리고 출동하지 않자 한양으로 압송당함)했다는 올가미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기까지 한 이순신장군의 한(), 그가 비록 지금은 민족의 성웅이라고 불리고 있어도 아직 해원(解寃)이 되지는 않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그 어떤 제문보다도 충무공의 죽음을 가장 옳게 평가한 글은 숙종(肅宗) 대왕의 현충사 제문입니다.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옛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 분에게서 처음 보네!"




한편 정조는 충무공을 다시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비문까지 내려 혼령을 위로했습니다. 역대의 임금들과는 달리 실학에 관심을 갖고 사대부 정치의 근본적인 개혁을 통해 국력을 신장시키려고 고민했던 정조는 충무공 이순신의 전사가 단순히 치열한 전투 중에 일어난 불상사가 아님을 파악했던 흔적이 실록에 기록된 정조의 언행에 보인다.
 



정조가 충무공을 흠모하여 직접 써내려간 "어제신도비"




尙忠旌武之碑 / 을 숭상하고 를 기리는 비


유명수군도독 조선국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덕풍부원군  정헌대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신도비명 및 서문


살아서는 수레와 옷을 하사하여 신하를 사랑하며 잔치를 베풀어 공로를 치하하며 음악을 연주하여 공적을 덮어주었고 죽은 뒤에는 오정(五鼎)을 차려 제사지내며 대대로 녹을 주어 후손을 길러주며 깃발에 명()을 그려서 그 빛나고 훌륭한 절의를 상하에 밝게 하고 산천(山川)에 비기게 하며 음직(陰職)을 맡아 백성들에게 아름다운 복을 도와주도록 했던 것이 옛날 선왕(先王)들이 공신을 대우하는 것이었는데 주나라 이후로 그 법이 점점 없어졌다.


그러나 비석에 명을 하는 것은 깃발에 명을 하던 옛 뜻을 아직도 전하고 있으니 그 특별한 것은 임금이 명()을 하는 일이다. 왕조의 전수(篆首)를 지덕원로(至德元老)라 하였고 서달(徐達;명나라의 건국공신)의 전수를 충지무자(忠志無疵; 충성스러운 뜻은 흠잡을데가 없음)라고 하였지만 몇천년을 내려오며 몇사람이나 되겠는가?


* ()하다: 남의 공적을 축송(祝頌)하는 글, 고인의 일생을 적은 글을 새겨 넣은 것을 총칭하는 개념


아아! 우리 조선의 충무공 이순신 같은 경우는 그 공적이 명법(銘法)에 해당되어 내가 명()을 하고자 하니 혹시라도 부끄러운 말이 되지 않을 것인가? 충무공의 자는 여해(汝諧)요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태어날때 어머니 변씨가 꿈을 꾸니 시아버지가 어린애가 태어나면 반드시 귀할것이니 순신(舜臣)으로 이름을 지으라고 하였다.


아버지 정()은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점을 쳤는데 점괘가 길하게 나왔다. 나이 50세에 큰 도끼를 짚고(군대를 통솔) 명장이 되었으니 충무공은 이미 이러한 기이함을 지녔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기개가 뛰어나고 또 뜻이 컸으며 자라서는 활솜씨가 뛰어났다. 만력(萬歷) 병자년(선조9, 1576) 무과에 합격하고 처음에는 변방에서 근무하였는데 여러번 뛰어난 공을 세우니 나라 사람들이 장수의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문충공(文忠公) 유성룡이 강력하게 추천하여 마침내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발탁되었다. 이때 왜적들은 우리나라를 공격하겠다고 소리를 치니 전쟁의 조짐은 이미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충무공은 깊히 걱정하며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시키고 병장기를 가다듬으며 공격과 수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별도로 전선을 만들었는데 엎드린 거북의 형상으로 만들어 거북선이라 이르니 수전을 연습하는 사람들이 몽충(蒙衝)에다 비유하였다.


임진년(선조25, 1592)에 왜적이 대거 침입하여 부산과 동래를 함락하고 길을 나누어 서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충무공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옥포로 가서 적선 20여척을 공격하여 불태우고 경상수군절도사 원균과 노량에서 만나 양쪽에서 적을 공격하고 다시 사천에 이르러 10여척을 불태우고 당포로 진군하여 적선 20여척과 마주쳤는데 그 우두머리를 죽이고 적군을 섬멸하였다.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억기와 당항포에서 합세하여 적의 우두머리가 탄 3층의 누선(樓船)을 격파하고는 적을 유인하여 한산도에 이르자 크고 작은 적함 70여척을 또 격파하였다. 북으로 추격하여 안골포에 이르러 또 40여척의 적선을 불태우니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쳤으며 적군들은 두려워 하였다. 승리의 보고가 될때마다 곧 품계를 더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이르렀다


 계사년(선조26, 1593)에 조정에서 처음으로 삼도수군통제사를 두면서 공에게 본직을 가지고 겸임하도록 명하였고 공은 진()을 한산도로 옮겼다. 이에 원균은 지휘받는 것을 수치로 여겨 자주 유언비어를 언관(言官)에게 퍼뜨려 충무공은 적을 보고도 지체한다고 탄핵을 받아 투옥되었고 원균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몇달이 지나자 우리 군대가 패배를 당하고 원균은 도망치다가 죽으니 조정은 다시 충무공을 통제사로 삼았다.


충무공은 수십기를 거느리고 순천부에 달려 들어가 10여척의 병선을 얻고 도망간 병졸을 다시 모아 난도(蘭島)에서 적을 쳐부수고 또 적을 벽파정 아래로 끌어들여 30여척을 격파하고 적장 마다시(馬多時)의 목을 베니 적은 버티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도망쳤다.


무술년(선조31, 1598)에 명나라 장수 진린은 광병(廣兵), 유정은 천병(川兵), 등자룡은 절직병(浙直兵)을 거느리고 연이어 도착하였다. 충무공은 고금도를 점거하고 진린과 함께 진을 치고 있었는데 진린은 충무공의 재략과 기량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탄복하여 군중의 모든 기밀에 대해 자문을 받아서 결정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우리 선조(宣祖)에게 말하기를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가 있고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현황제(顯皇帝)에게도 아뢰어 충무공에게 도독의 인수(印綬)를 내리게 하였다. 얼마 후 일본의 관백(토요토미 히데요시)이 죽자 행장(고니시 유키나카)이 철병을 하고자 하여 곤양과 사천에 주둔한 적들과 약속하여 날짜를 정하여 노량에 함께 진격하기로 하였다.


충무공이 명나라 장수들과 함께 전함을 정비하여 함께 적을 소탕할 계획을 세우고 곧 배위에 올라 축원하기를 "오늘은 진정 죽음을 각오할 것이니 하늘이여! 저로 하여금 이 적들을 섬멸하도록 허락하소서!"라고 하였다. 빌기를 마치자 하괴성(河魁星)이 떨어지니 군대 전체가 불길하게 여겼다.


그날 밤 새벽2시 무렵 적을 맞아 격렬한 전투가 벌여져 적선 2백여 척을 불태우고 계속하여 추격했는데 남해에 이르자 적들이 명나라 군대를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충무공은 포탄과 화살을 무릅쓰고 직접 선두에 나가서 포위망으로 돌진하다가 전투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에 유탄에 맞아 죽고 말았으니 태어난 을사년(1545)으로부터 나이가 54세였다.


이듬해에 아들 회()등이 아산으로 반장하였다. 갑진년(선조37, 1604)에 공신을 책봉하며 호를 내렸으니 의정부 좌의정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을 증직하고 시호를 충무로 했으며 전투를 치른 유적지에 사당을 세워서 지금까지 제사가 그치지 않고 있으니 그것으로 그 공로를 충분히 보답했다고 하겠는가?


슬프도다! 우리나라에 인재가 배출된 것이 목릉(穆陵, 선조) 시절이 최고였다고 이르고 중국에서 용맹하다고 뽑혀 도우러 온 장수들도 모두 한때의 인물들이었지만 물고기와 새우가 튀어오르고 바닷물이 난리를 치게 되면 90리쯤 퇴각하여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지 않는 자가 없었다.
* 선조시대를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부른다. 선조시대에는 이황, 기대승, 이이, 성혼, 이산해, 정철, 류성룡 등 뛰어난 젊은 사림들이 정계에 진출하는 것을 선조의 묘호인 목릉을 차용하여 목릉성세라고 부른다.
 
그런데도 8년 동안을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지키면 반드시 보전하여 나라의 형세가 그의 강하고 약함을 따랐고 적의 예봉은 그에 의해 좌절되어 온 국토에 굴을 판 교활한 이리떼들로 하여금 그 뜻을 펴지 못하게 하여서 우리 열조(烈祖)의 중흥의 공로에 기틀을 만든 것은 오직 충무공 한사람의 힘에 힘입은 것이니 충무공에게 특별히 명()을 하지 않고 그래 그 누구에게 명()을 할 것인가


 또 내가 들으니 증민시(烝民詩; 시경 대아의 편명)의 번후(樊侯; 주나라 선왕의 신하인 중산보)의 공적을 기술한 것인데 선왕(宣王)의 아름다움이 그 안에 있으니 신하가 성공을 할수 있는 것은 임금이 현명해서 인 것이다. 임금의 명을 받아 능히 그 일을 마쳐 공을 세우되 그 공을 임금의 아름다움에 실어서 후세에 전하는 것이 옛날의 도였다.


지금 이 명()도 그러한 시()의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니 내 어찌 이 명()을 그만둘수 있겠는가? 이에 의정부 영의정을 추가로 증직하고 시호에 따라 비석의 위에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라고 전액하고 또 서()를 쓰고 명()을 써서 사씨(史氏)에게 고한다.


옛날 사훈씨(司勳氏; 공로에 따라 등급을 정하여 토지를 상으로 주는 일을 맡는 관리)가 사책에 명한 것을 상고하니 훈(), (), (), (), (), ()이라 하였다. 충무공같은 사람은 일에서나 전쟁에서나 임금에게나 나라에 대해서나 누가 그렇지 않다고 하겠는가?


한 번 싸워 한산섬이 평정되고
두 번 싸워 벽파진이 편안해지고
세 번 싸워 노량에 왜적이 없어졌으니
이것이 또한 다()가 아니겠는가?
모사는 혀를 놀리고
용맹한 신하(무신)는 목을 움츠릴 때
천자의 명으로 너희 속국의 외로운 군대라 했으니
이것이 또한 훈()이 아니겠는가?
천자의 군대는 중국으로 돌아가고
백성들은 그 자리에서 안정되었으며
이 나라 억만년 대계를 다시 회복시켰으니
이것이 또한 공()이 아니겠는가?
아아!
홍살문이 마을에 있고
비석이 묘소에 있는데
끝내는 비석의 머리에 전액을 하는 은총까지 받았도다!
강한(江漢)이 그 영령을 빛내어
해와 달처럼 빛나리라!


황명(명나라) 숭정(명나라 毅宗 연호1629) 기원후 세번째 갑인년(정조18, 1794) 10월초 4일에 이 비()를 세우다.






수많은 기초 사료 뽑아 번역 출판인 박기봉씨 ‘충무공 전서’내 
충 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 임금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깜짝 놀라며 슬퍼했을까? ‘선조실록’은 이순신이 전사한 지 닷새 뒤인 11월 24일 밤, 이 정보를 명나라 군대 쪽에서 입수한 승정원이 급히 왕에게 보고했다고 기록한다. 소식을 들은 왕은 “오늘은 밤이 깊었다”며 “내일 승정원이 알아서 하라”고만 한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어딘가 귀찮아하는 기색까지 보인다. 
며칠 뒤 명나라 장수 형개(邢?)가 왕 앞에서 이순신의 죽음을 애석해 할 때도 선조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의 은덕이 고맙다’며 세 번 머리를 조아리더니 명나라 등자룡(鄧子龍)의 죽음만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조정에서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해 이순신이 재능을 한껏 펴보지 못했다”며 애통해 한 사람은 임금이 아니라 실록을 기록한 사관(史官)이었다.

‘난중일기’뿐 아니라 여러 사료(史料)들을 대조해 보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상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출판인 박기봉(朴琪鳳)씨가 최근 편역한 2400여 쪽 분량의 ‘충무공이순신 전서’(전4권·비봉출판사)는 수많은 1차 문헌들 중 이순신과 관련된 기초 자료를 뽑아 번역한 뒤 연대기 형식으로 편집한 책이다. 



1597년 7월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전멸하다시피 궤멸된 수군으로, 고작 13척의 패잔선(敗殘船)으로 적군 대함대 133척을 격퇴시켜 서해로 북상하려는 왜적(倭敵)을 저지한 명량해전(鳴梁海戰). 전쟁의 물길을 돌려 자신의 왕위를 포함하여 왕실의 안전은 물론 국가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한 위대한 승전(勝戰)을 두고 선조는
 
"이순신은 사소한 적을 잡은데 불과하다. 그는 자신의 직분을 수행한 것일 뿐 큰 전공(戰功)을 세운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또 선조는 이듬해 4월에는 "이순신에게 벼슬을 올려주지 않으면서 상을 주는 방법을 강구해보라."는 괴상한 소리도 늘어놓았다.
 
반면 비변사에서 "원균은 수군의 주장(主將)으로서 수군을 전멸당하게 했으므로 그 죄는 모두 원균에게 있습니다. 그 부하들에게도 죄가 있으면 벌을 주고, 공이 있으면 상을 주어 군기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자 이런 말로 원균을 두둔했다.
"원균 한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지 말라. 이산해와 윤두수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균이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참패를 당해 수군 전력을 모두 잃은 책임은 원균을 천거한 이산해(李山海)와 윤두수(尹斗壽)에게 있으므로, 임금인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으니 원균에게 모든 책임을 돌려서도 안 된다는 해괴한 강변이었다.

선조(宣祖)가 그렇게 감싸고 돌면서 원균의 패전(敗戰) 책임을 묻지 않자 사초(史草)를 담당하는 사관(史官)조차 "머리가 터질 것 같고 뼈가 녹아버리는 것 같다."면서 이렇게 선조의 어처구니없는 처사를 비판했다.

 
조선시대 인물중 가장 용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조선왕조 타도를 기치로 봉기한 이몽학(李夢鶴)과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김덕령이 가담했다’는 이몽학의 일방적 선전 외에는 아무 증거가 없었다. 그러나 김덕령에 대한 예단을 지닌 선조는 “김덕령은 사람을 죽인 것이 많은데 그 죄로도 죽어야 한다”면서 직접 친국했다.
 
그는 고문으로 정강이뼈가 부러졌지만 스스로 변론하는데 말씨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신에게는 만 번 죽어 마땅한 죄가 있습니다. 모친께서 돌아가셨을 때 삼 년 상을 치르지 않고 칼을 집고 분연히 일어나 왜군과 여러 해 동안 싸웠지만 작은 공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충성도 못하고 불효만 했으니 만 번 죽어도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제가 모집한 용사들이 지금 감옥에 있는 데 그들에게는 아무 죄가 없으니 죽이지 마시고 쓰도록 하십시오.”


김덕령의 그 말을 전해들은 선조는 노하여, “저놈이 형벌을 가벼이 여겨 오히려 태연하니 참으로 역적이다. 쳐 죽여라!”고 명령했다.


김덕령은 선조 29년(1596) 8월 6차에 걸친 혹독한 형장(刑杖)을 당하고 2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김덕령의 죽음은 조선 군대 전체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의병장 곽재우와 김덕령의 동생 김덕보는 산속으로 은둔을 하게 되었고. 기타 다른 의병장들도 이래저래 핑계대며 의병을 해산 시키고 이후 호남과 영남에선 의병의 의자도 꺼내지 않게 되었다.
 
『선 조수정실록』은 ‘소문을 들은 남도(南道)의 군민(軍民)들이 원통하게 여겼다’며 “이때부터 남쪽 사민(士民)들은 김덕령의 일을 경계하여 용력(勇力)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 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29년 8월 1일)고 적고 있다.


5000 의병을 거느렸던 김덕령의 죽음이 물의를 일으키자 선조는 “들으니 그의 군사는 원래 수십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했다. 
 
선조는 비정상적인 성격의 주인공이었다. 자신이 적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이었다는 사실에 콤플렉스도 있었다. 의심과 시기심이 많고 독선적이었다. 심지어는 아들인 광해군에 의해 왕좌에서 밀려날까봐 의심하다 못해 죽이려고까지 했던 참으로 엽기적인 임금이었다.
 
조선의 장수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진 이순신, 거기에 백성들에게 인기까지 높았던 이순신을 자신의 왕좌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 이는 일종의 피해망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선조는 김덕령처럼 이순신도 죽여 없애려고 했을것이다.
 
선조가 이순신을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는 사실은 선조실록(宣祖實錄)을 살펴보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선조가 이순신을 미워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이순신이 실각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요시라의 반간계 때문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밀명을 받은 요시라의 공작에 김응서와 권율이 놀아나고, 조정도 넘어갔다. 이에 따라 1597년 1월 23일부터 조정에서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2월 4일 사헌부의 주청에 따라 이순신의 체포가 결정됐던 것이다. 아니, 사헌부의 주청이라기 보다는 사실은 선조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이렇게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해 일본군 수뇌부의 음모에 발맞추어 이순신을 실각시키고 조선 수군의 전멸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선조는 훗날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자 제문(祭文)에 이런 구절을 써 넣었다.


'나는 그대를 버렸건만 그대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충무(忠武)라는 무관(武官) 최고의 시호도 순국한지 45년 후인 1643년(인조 21년)에 받게 되었다.
 
 
출처 = 기사 "이순신 장군 전사소식, 귀찮아한 선조" + 광주일보 +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http://jshop.kjclub.com/kr/exchange/local/read.php?fid=208&idx=1&number=149&thread=1000000&tname=exc_board_14&uid=208 에서 발췌









今臣戰船尙有十二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 이순신 -

 

1597년 명량대첩 직전, 

수군을 폐한다는 선조의 교지에 대한 답으로 올린 장계

 

당시 조선수군 함대의 수는 13척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으로 온갖 고문을 받으시던 그 무렵

원균은 칠천량해전에서 조선함대 70여척을 수장시킴

불혹이 넘은 무장에게 고문이란 고문은 다 명령한 선조

원균이 칠천량해전 패전 후 죽으니까 

다시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

이순신 장군은 이런 상황에도 교지를 받들고 바다로 다시 나아가심..

재임명 후, 순천부사 권준과 함께 전라도 일대를 돌며 

다 무너진 수군을 재정비

그리고 나서 이긴 전투가 명량대첩...

 

전남 여수에는 거북선을 만들던 조선소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의 부하 나대용이라는 사람이 장군의 명령을 받아, 태종 때 만들어진 책에 소개된 거북선을 참고하여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거북선은 왜 만들었을까요? 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대포를 쏘아 적의 배를 침몰시키는 작전 때문이었습니다. 일본군에 가까이 접근하면 조총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기도 했고, 오랜 내전으로 칼싸움에 능한 일본군들이 우리 배로 넘어오면 당해낼 수 없었기에 적의 대장선을 공격할 돌격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돌격선이라는 쓰임에 맞게 거북선은 우리 수군의 주력 전함인 판옥선의 위에 바늘이 달린 철갑 덮개를 씌운 특이한 모습이었습니다.
바늘이 달린 철갑 덮개로 조총의 공격도 막고 일본군이 배 위로 건너올 위험 없이 대장선까지 돌격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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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이 만들어진 곳옛날부터 ‘선소 마을’이라고 불린 전라남도 여수에 있는 선소 유적지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조선 기술을 가진 나대용과 함께 거북선을 만들었던 곳입니다. 선소 마을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소가 있었으며, 조선 성종 때의 고지도에는 선소로도 기록되었습니다.
유적으로는 배의 수리와 정박을 목적으로 세운 군사 시설인 굴강을 비롯하여 거북선이 정박할 때 배를 매어두던 계선주, 군사들의 칼과 창을 만들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풀뭇간, 군사들의 칼과 창을 갈고 닦은 세검정등의 터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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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정주영 회장은 거북선을 만들던 선조들의 덕으로 영국으로부터 거액의 융자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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