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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동학농민혁명운동'법정 기념일 5월 11일은 동학군이 황토현에서 관군을 격파한 최초의 승전일

문화재방송 2022. 5. 11. 00:02

 

조병갑은 1890년대(고종 30년) 전남 고부군수를 지내면서 농민들로부터 무리한 세미를 거두고, 백성들에게 무고한 죄명을 씌워 2만 냥이 넘는 돈을 수탈하는가 하면 부친의 頌德碑閣(송덕비각)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1,000여 냥의 비각세를 강제로 징수하였다. 또한 시급하지도 않은 저수지(만석보)를 축조한다고 농민들을 강제동원하고, 수세(水稅) 700여 섬을 착복하는 등 온갖 탐학을 자행했다.

격노한 군민들은 군수의 虐政(학정)에 항의했으나, 조병갑은 오히려 수탈을 가중함으로써 1894년 마침내 전봉준이가 인근농민을 규합해 고부관아 등을 습격했으니 조병갑의 학정은 동학농민반란(조선왕조입장에서 보면)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다. 조병갑탄압에 분노한 농민반란이 어찌나 크게 확산되고 격렬했는지  조정에서 파견한 관군이 이를 진압하지 못하고 연전, 연패하자 중앙에서는 급기야 이들을 진압할 군대를 청나라에 요청했고,  일본은 조선에 진출한 자국상인들을 반란군들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여 한반도에 일본군이 주둔케 한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蛇足>노무현 정부시절 조병갑의 증손녀 조기숙은 청와대 홍보수석으로 막강한 지위 확보 (박사모 레지스탕스에서 인용)

                                                            사발통문

1.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목을 베어 높이 매다는 것)할 것

2.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3. 군수에게 아부하여 인민을 갈취한 탐관오리를 쳐 징계할 것

4.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진격할 것

 

이 사발통문은 1968년 12월 전북 정읍시 고부면 송준섭씨의 집 마루 밑에 70여년동안 묻혀 있던 족보속에서 발견되었다.

고부민란이 일어나기 전인 1893 11월에 작성된 이 문서를 보면 갑오동학혁명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 내용은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간부 20여명이 죽산마을 송두호의 집에 모여 작성한 것이다.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전북 고부에서 고부 민란을 시작으로 발발한 농민 운동은 규모가 커져 4월 5일(음력 2월 30일전북 고창군 무장에서는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등 남접계 지도자들이 40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정읍군 태인 주산리에서 태인접주 최경선이 이끄는 300명의 농민군과 말목장터에 집결한 수백 명의 농민군들까지 합세해 고부 관아를 점령했다.

후에 금주부안고창 등 여러 곳에서 농민군이 집결하고 5월 5일(음력 4월 1일태인과 5월 8일(음력 4월 4일부안 관아를 점령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라감사 김문현, 영관 이경호 등이 영내 잡색군 등 총 1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정읍 황토현으로 진격했다.

감영군 700명과 향군 600명 등 1300명의 관군이 태인을 지나 백산으로 가고 있었는데 4월 6일 태인 인근 화호 나루 일대에서 첫 접전이 이루어졌다.

농민군은 패주하는 척하였고 관군은 농민군을 추격했다. 농민군은 정읍 황토현에 진을 치고 관군도 황토현 부근에 진을 쳤다.

농민군은 잠복하다 3면에서 관군을 포퓌,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 날이 양력으로 5월 11일이다.

홍계훈의 중앙군이 전주에 입성하자, 농민군은 전주성 공략을 뒤로 미룬 채 정읍, 무장, 영광, 함평으로 이동하면서 세력을 확대한다. 그리고 4월 23일, 농민군을 추격하던 중앙군과 맞닥뜨린 곳이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였다.

                                                 전남 장성 항룡 전스비,죽창을 상징한다

장성에 도착한 농민군은 월평촌 삼봉에 진을 쳤다. 그리고 이틀 후인 23일, 이학승의 중앙군 선봉대가 장성에 도착한다. 황토현 전투 이후 전봉준은 중앙군과의 일대 접전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략적 장소인 어떤 곳에서 중앙군에게 일대 타격을 입힌 후 전주를 점령하여 중앙군의 기세를 꺾는 작전을 쓴다. 그 전략적 장소가 전주로 통하는 지름길인 장성 황룡이었다.

먼저 도착한 농민군은 삼봉을 중심으로 주요 거점에 농민군을 배치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서양의 기관총과 소총의 탄환을 막기 위해 수십 개의 대형 장태도 만들었다. 주력은 이틀 전 도착했지만, 전봉준은 별동대를 장성에 먼저 파견하여 농민군 배치를 위한 지형정찰, 장태 제작 등 치밀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장성 농민군이 합세하여 준비했음은 물론이다.

중앙군 선봉장 이학승은 삼봉과 마주하고 있는 황룡강 근처에 진을 치고, 농민군을 회유하는 서신을 보낸다. 그런데 이학승은 답신이 오기도 전에 월평 장터(지금의 황룡 장터)에서 점심을 먹고 있던 농민군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전봉준 공초에는 이때 농민군 40~50여 명이 사망했다고 나온다.

동학군의 재래식 신무기 장태, 장태뒤에 숨어 장태를 밀고 나가면 적탄을 피할 수 있다

선제공격을 당해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농민군은 곧바로 삼봉에 올라 전투태세를 갖춘다. 관군의 수가 수백 명 뿐이었고, 지원부대가 없는 것을 확인한 전봉준은 곧바로 공격 명령을 내린다. 장성 황룡강의 지형을 환하게 익혀 둔 1만여 명의 농민군들은 장태를 굴리고 함성을 지르며 관군을 공격한다. 관군의 쏟아지는 기관총과 소총의 탄환은 농민군의 신무기 장태가 무력화시킨다. 기관총과 소총 사격에도 물러나지 않고 장태를 굴리며 진격해 오자, 인해전술에 당황한 관군은 퇴각명령을 내린다.

중앙군이 영광 쪽으로 퇴각하면서 마지막 접전이 이루어진 장소가 지금 동학농민군승전기념탑이 서 있는 신호리 뒷산 까치골 능선이다. 이곳 까치골에서 농민군은 선봉장 이학승을 비롯 5명을 죽인다. 농민군이 중앙군을 이긴 것이다. 대포 2문과, 소총 100여 정, 수많은 탄환은 농민군이 얻은 전리품이었다.

장성 황룡 전투에서 중앙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사기충천하여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로 진격한다. 갈재를 넘는 농민군의 발걸음이 신바람을 낸 이유다.

                                                  동학군 지도자 전봉준 장군 동상

동학농민군승전기념탑은 농민군의 주 무기였던 죽창(竹槍)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탑신의 높이가 30미터, 지름이 2.5미터나 되는 기념탑이다. 탑신이 시작되는 부분에는 장태를 굴리는 농민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장태 한가운데 '동학농민군승전기념탑'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탑의 전면에는 황룡 전투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청동 부조물이 있고, 탑의 좌·우 면에는 동학 농민군의 4대 강령과 곽재구 시인의 시 '조선의 눈동자'가, 후면에는 장성 황룡 전투의 역사적 의의가 새겨져 있다.

동학 농민군이 역사의 승리자가 되면서 이학승 순의비는 땅속에 처박히는 수모를 당했지만, 농민군들의 승전을 기리는 기념탑이 세워지면서 순의비도 왼쪽 감나무밭에 다시 세워진다.

30미터 높이의 동학농민군승전기념탑과 1.6미터 크기의 이학승 순의비는 오늘 웅장함과 초라함의 모습으로 함께 서 있다. 동학 농민군 후손들은 이학승 순의비를 일으켜 세워 농민군을 죽인 중앙군을 용서했지만, 농민군 승전기념탑과 이학승 순의비의 대조적인 모습은 오늘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반영하고 있다.

농민군이 중앙군을 격퇴한 현장, 장성 황룡전적지는 1998년 사적 제406호로 지정된다.

사태가 확산되자 고종과 왕비는 당황해하였다.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톈진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처럼 외세가 개입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9]

하지만 조선에 진주한 청, 일 양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은 청에게 조선의 내정 개혁을 함께 실시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청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불법으로 조선 궁궐 경복궁을 침범(갑오왜란) 명성황후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시켰다.[9] 김홍집, 어윤중, 박영효,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제1차 김홍집내각, 즉 친일 내각은 일본공사 오토리의 입김 아래 일련의 개혁조치를 취했다. 이것이 조선정부와 동학농민군과 맺은 자주적인 개혁 전주화약을 간섭한 친일내각의 갑오개혁이다.[8]

그 뒤 개혁 추진 기구로서 전주화약 당시에 설치된 교정청을 폐지 이후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교정청 출신인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 개혁이 단행되었다.

1894년 음력 11월9일,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농민혁명군 2만명과 조선 관군 1,500여명, 일본 육군보병 19대대 2중대 병력 200명, 일본 육군으로부터 훈련받은 신신군대인 교도중대 350명 등 ‘조일연합군’ 2,000여명이 격돌했다.

 동학농민혁명군이 의지할 것은 수적 우세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불타는 정의감 뿐이었다. 무기라고는 화승총, 칼, 목검, 화살, 죽창이 고작이었다. 농민군 대부분은 죽창을 소지했으며 제대로 된 훈련조차 받지 못한 문자 그대로의 민병이었다.

 반면 일본군과 조선관군은 독일제 쿠르프 야포, 캐틀링 기관총,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 일본이 자체개발한 무라타 소총 등 최첨단 무기로 무장했으며 최신식 군사훈련을 받은 정예병으로 구성됐다.

이것은 당시 일본군에 의해 농민군이 학살 당하듯 토벌 될 때 쓰인 당시 최식식 기관포. 공주 우금치 전투 에서 수 만명의 농민군이 3천명도 안되는 일본군(200명)과 관군(2,500명) 연합 부대에 무참히 학살 당했다고 하니 참으로 처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과는 참혹했다. 야포와 기관총의 가공할 만한 위력 앞에 동학농민혁명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이 전투에서 동학혁명군은 조일연합군이 장악한 우금치 고개를 향해 40~50차례 온몸을 던졌지만, 무위에 그쳤다. 동학군은 전통적인 전술인 밀집대형을 유지하며 1㎞에 달하는 오르막길을 아무런 엄폐물 없이 내달렸다. 그렇지만 밀집대형은 야포와 기관총, 사정거리 1.8㎞인 소총의 조준만 더 쉽게 만드는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이 결과 최소 1만5,000여명의 막대한 희생자가 발생했다. 반면 조일연합군의 사망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1만5000:0.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 학살이자 살육이다. 때문에 우금치전투가 아니라 우금치학살이다.

 



 고종은 운명이 다한 알량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에게 동학농학혁명군 진압을 요청했다. 조선 관군과 일본군이 연합작전을 벌인 것은 고종의 승낙이 없었다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호남의 심장부 전주성을 접수한 뒤 폐정개혁 실시를 확약하는 ‘전주화약’ 체결 후 자진 해산한 동학농민혁명군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자 이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2차 거병했다. 이 땅과 민족의 자존을 지키고자 들불처럼 일어난 동학농민혁명군에게 조선왕실은 일본군과 연합해 발포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군대와 기관총 등 신식무기를 국민에게 들이댄 정권(왕조)의 몰락은 필연이다. 보위를 지키기 위해 일본군을 끌어들인 고종은 결국 조선을 송두리째 일본에게 빼앗기는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동학혁명군과 백성들이 무능하고 부패하며 동포를 살육한 왕조를 용서할 수 있었겠는가? 동학혁명군의 참가자들과 자손들은 3.1 만세운동과 독립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범 등 광복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3.1 만세운동의 민족지도자 33인 중 손병희(동학 3대 교주)를 비롯한 8명이 동학혁명군 출신이고 민족지도자 백범 김구 역시 동학간부를 맡아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참여한 바 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헌장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우금치에서 1만5,000 동학혁명군들이 뿌린 피는 대한민국 정부 출범의 불씨가 됐다. 4.19 혁명과 5.18 광주민주항쟁, 6.10 민주항쟁, 촛불혁명 등의 정신적 뿌리가 동학농민혁명 정신이라는 점에서 동학혁명정신 계승을 헌법 전문에 명문화하는 것은 당연하다.

 무능한 조선왕조는 역사적 심판을 받았다. 그렇지만 일본군과 손잡고 동학혁명군의 씨를 말린 조선관군, 일부 양반과 민보군, 일제의 앞잡이로 활약한 보부상 등에 대한 응징과 단죄는 이뤄지지 않았다.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와 결탁한 친일세력은 일제 식민통치 기간과 군사독재 정권 내내 국가권력의 요직을 독차지하거나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헌정질서를 유린했다.

 지금으로부터 125년전, 죽기를 각오하고 죽창 하나 들고 총탄이 빗발치는 우금치 고개를 내달렸던 동학혁명군들의 고귀한 정신을 떠받드는 것은 우리들의 당연한 책무다. 우리에게 남겨진 미룰 수 없는 3대 과제는 동학혁명정신 계승 헌법 전문 명시, 혁명 참여자 독립유공자 지정, 동학군 학살자 및 일제 부역자에 대한 역사적 단죄다.

 


전봉준 대장과 김덕명·김개남·손화중·김인배 등 대접주들은 체포돼 결국 사형을 언도받는다. 또한 동학 2대교주 최시형을 비롯해 차도주 강수, 수제자 손천민 등도 사형을 당한다. 갑오년 동학민중혁명은 전국에서 약 100만~200만 명이 참여해 20만~30만 명이 희생당한 세계 3대혁명사에 빛날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역사다.

아래 사진은 전봉준 대장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될 때의 사진이다.

 <蛇足;벌써 반세기가 흘렀습니다. 헤리티지가 30대에 현역 기자로 왕성하게 취재 활동을 할 때 였습니다.

천안 전씨 족보를 구해 전봉준 칸을 봤더니 아래와 같은 한시가 깨알 같은 크기로 한 컨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가 보도되자 전국 모든 미디어가 제 글을 그대로 보도하여 특종상을 받았습니다.

    

     

時來天地皆同力 (시래천지개동력)  때를 만나서는 하늘과 땅도 힘을 합하더니

運去英雄不自謀 (운거영웅불자모)  운이 다 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 (애민정의아무실)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랴

爲國丹心誰有知 (위국단심수유지)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동학대혁명은 일시적으로 좌절됐으나 천도교에 의해 다시 3.1독립운동으로 이어졌고 상해임시정부를 탄생시켰으며 해방 후 4.19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 등 끊임없는 민주화운동으로 계승되고 있다. 이에 동학민중혁명의 역사적 결실은 바로 분단된 남북의 통일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 같이 노력해야 한다.

 

정읍시, 제55회 황토현 동학농민혁명 기념제 개최

'그때의 하늘, 지금의 우리' 슬로건, 정읍시 주최 (사)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주관
온 가족 함께하는 체험마당 및 프리마켓, 사생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 준비

올해로 55회째를 맞는 ‘황토현 동학농민혁명 기념제’가 5월  7일부터 8일까지 2일간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일원에서 열렸다.

정읍시

‘그때의 하늘, 지금의 우리’라는 슬로건으로 진행된 이번 기념제는 정읍시가 주최하고 (사)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가 주관했다.

갑오 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애국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 행사는 다양한 즐길 거리와 함께 우리 전통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됐다.

5월 가정의 달에 열리는 행사에 걸맞게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체험마당과 프리마켓, 청소년 사생대회·백일장 등 다채로운 참여 프로그램이 준비됐다.

연계 프로그램으로는 우리나라 전통예술의 우수함을 알리는 무형문화재 합동 발표회와 창작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 황토현 전국농악 경연대회 등이 펼쳐졌다.

7일 기념제는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제를 시작으로 오후에는 구민사 갑오선열 제례와 기념식, 축하공연 순으로 진행됐다.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제는 사발통문 작성 행사와 폐정개혁안 낭독, 헌향·헌화, 고유문 낭독, 참석자 헌화 순으로 진행었으며, 이름을 알리지 못한 무명 농민군의 영령을 추모했다.

구민사 갑오선열 제례는 조직위원장의 헌촉을 시작으로 독축, 헌주 순으로 진행됐다.

제례는 계승사업회 김영진 이사장과 이진우 부이사장이 각각 외집사와 내집사를 맡고, 전국 동학농민혁명 유족회 주영채 회장이 초헌, 우크라이나 출신 이주 남성이 아헌, 김봉승 이사장이 종헌을 맡았다.

기념식에서는 지역 내 학생들과 농악단 등으로 구성된 511명 시민의 합동 주제공연 ‘봉기’를 시작으로 격문낭독과 시상식, 주제영상 상영 등이 펼쳐졌다.

특히, 3년 만에 대면 행사를 축하하는 의미로 민중가수 ‘우리나라’와 인기가수 ‘민경훈’, ‘에일리’, ‘홍잠언’의 축하공연으로 기념식의 대미를 장식했다.

시 관계자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된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만큼 그 어느 해보다 의미 있는 행사를 준비했다”면서 “기념제를 통해 정읍이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이자 성지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평희 기자 hphking0323@wikitre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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