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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다큐]6.25 전쟁 중 강화도를 사수한 초등학생들...미군 B 29기가 바다에 추락, 7명의 조종사들을 구출, 월미도 미군 함대에 무사히 인계,

문화재방송 2022. 6. 25. 00:48

기획. 취재. 촬영. 편집. 내레이션:헤리티지

강화에서 고려의 흔적을 찾다

 

강화도는 한반도의 역사를 응축해 놓은 축소판이다. 반만년의 세월 동안 강화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시기가 고려 시대이다. 그 당시 강화도는 ‘강도’로 불리며, 고려의 수도 기능을 했었다. 고려궁지를 비롯해 왕릉, 성곽 등이 아직 남아 있는 이유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 속에서 고려는 조선에 비해 인식은 물론이고 비중도 매우 낮은 편이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이 북녘땅인지라 접근 자체가 어려운 탓이다.

 

이 같은 열악한 환경에도 다행히 강화도에 고려의 역사 흔적을 따라 걷는 길이 조성되어 있다. ‘강화도 나들길’이 그 것인데 이 길은 화남 고재형 선생이 1906년 강화도의 유구한 역사와 수려한 자연을 노래하며 걸었던 강화의 길을 걷기 좋게 재구성한 길이다. 현재 20개 코스가 개발되어 있으며 총거리는 310.5km에 이른다. 그 가운데 제15코스 ‘고려궁 성곽길(11km, 소요 시간 4시간)’은 강도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항전의 시작, 강화산성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 전, 우리 역사가 커다란 위기에 처했던 때가 있었다. 한반도에 침입한 몽골에 맞서 고려가 40여 년간 항전한 것이다. 그 당시 최고 집권자 최우가 이끄는 무신정권은 고종 19년(1232) 장기전을 대비해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겼다. 이로써 강화는 원종 11년 (1270) 개경으로 환도하기까지 38년간 강도로 불리며 임시수도가 됐다. 강화천도는 결정과 함께 빠르게 전개됐다.

 

천도가 결정된 다음 날부터 강화에 궁궐과 관아 등 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천도 후 2년이 지나자 강화의 모습은 급격히 변했다. 궁궐과 여러 관청은 물론이고 국립 교육기관인 국자감과 역대 고려왕의 위패를 모신 태묘까지 세워졌다. 개경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점차 수도다운 면모를 갖춰 간 셈이다.

 

대몽 항전을 위한 산성은 흙으로 쌓았다. 내성·중성·외성 으로 이루어졌으며, 내성은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읍에 있는 성이다. 그 당시 약 9km에 이르렀다는 중성은 내성을 지키는 성이었고, 외성은 몽골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강화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을 통해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기도 했다. 강화산성은 고려가 몽골과 화친하면서 내성을 시작으로 외성과 궁궐까지 모두 헐렸다. 이후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돌로 다시 쌓았으나 1637년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다시 헐리는 비운을 맞았다. 그후 조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규모를 크게 넓혀 쌓았다.


 

성곽이 에두른 군사 요새, 강화도

 

고려궁 성곽길은 강화산성 남문에서 출발한다. 축조 당시 강화의 내성은 흙으로 축성했다. 이후 조선 숙종 37년 (1711) 강화유수 민진원이 허물어진 내성을 읍성으로 고치면서 문을 만들고 안파루라 했다. 성곽을 따라 계절을 노래하는 신록과 지붕 낮은 마을 풍경이 정겹다. 무성한 숲길을 지나면 사적 강화산성 남암문을 마주한다. 문루가 없는 비밀 출입통로인 암문은 전시 때 성안에 필요한 물품 등을 운반하거나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통로로 사용하기도 했다. 강화산성에는 4개의 암문이 있었으나 남은 것은 남암문뿐이다.

 

남암문을 지나면 비탈진 성곽을 따라 오른다. 성곽 정사부에 오르면 강화읍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에 드넓은 평야까지 아득하다. 길은 장군의 지휘소인 남장대에 닿는다. 강화산성에는 남산과 북산에 각각 남장 대와 북장대, 서문 안에 서장대가 있었으나 모두 허물어졌다. 2010년 남장대만 복원됐다. 날씨가 화창한 날 남장대에 서면 김포의 문수산을 비롯해 북녘땅 개성까지 또렷하게 보인다고 한다. 대몽 항전을 위해 개경을 버리고 강화에 터를 잡은 고려인들의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 내친김에 개경이 좀더 가까운 북문으로 잰걸음을 옮긴다.

 

북문은 축성 당시 누각이 없었다. 현재 진송루라는 현판이 붙은 누각은 조선 정조 7년(1783) 강화 유수 김노진이 세웠다가 전쟁으로 부서졌던 것을 1977년에 복원했다. 성곽을 따라 오르면 북장대 터를 알리는 표지판만 남아서 개경을 향해 덩그러니 서 있다. 기대했던 것처럼 남장대보다 개경이 한결 가깝게 느껴진다. 고성능 관측 망원경이라도 있다면 북한 주민들의 얼굴도 또렷이 보일 정도이다. 북문을 내려선다. 길은 어느덧 사적 강화 고려궁지로 향한다. 이 길은 매년 봄날 화사한 벚꽃이 만개해 춘심을 자극하기로 유명하다. 벚나무엔 초록 잎사귀가 무성해져서 벚꽃 엔딩조차 상상할 수 없지만,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한가로운 강화읍의 풍경과 남산의 남장대는 계절과 상관없이 또렷하다.

 

궁궐이 있던 고려궁지의 전각들은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할 때 모두 허물어졌다. 이후 조선시대에 행궁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지금 남은 것은 동헌, 이방청, 외규장각 정도로 고려의 흔적은 없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거치면서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렸지만, 고려궁지가 뿜어내는 아우라는 궁지로서 손색이 없다. 우선 병풍처럼 펼쳐진 송악산이 궁지를 에워싸고 있어 아늑하다. 외규장각 뒤편 송악산 기슭에 올라 옛 궁궐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자연의 너른 품에 안긴 강화 삼랑성

 

강화도에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깃든 사적 강화 삼랑성이 있다. 강화산성에 비해 낯선 성이다. 정족산(222m)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아 정족산성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산성은 전등사를 품고 있다.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이다. 절에 가려면 산성의 남문이나 동문을 지나야 한다. 이 절의 정문이 삼랑성 남문인 셈이다.

 

삼랑성 축성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토성이었던 것을 자연석으로 고쳐 쌓은 것을 봐서 삼국시대에 만든 성으로 추측한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몇 차례 개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문은 규모가 꽤 크고 위엄 있는 누각도 세워져 있다. 성곽을 따라 깃발이 꽂혀 있어 용맹스러운 기개가 느껴진다. 남문을 지나 곧장 직진 하면 전등사로 이어지고 성문을 지나 오른쪽 비탈을 오르면 삼랑성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둘레가 3km 남짓해 한두 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거리이다. 남문을 지나서 동문으로 향하는 구간이 경사가 가파르지만 나머지 구간은 수월하다.

 

강화읍에 있는 강화산성이 다소 분주하게 흘러가는 역사의 시간이라면, 삼랑성은 자연의 품에서 느릿느릿 흘러가는 역사의 시간을 보는 듯하다. 돌맞이 고개에 이르자 온 수리 일대를 비롯해 강화도 동쪽 일대와 김포까지 아스라 이 눈에 담긴다. 고개를 내려서자 누각이 없는 반원형으로 생긴 작은 홍예문, 동문에 닿는다. 그 아래에 ‘양헌수 승전비’가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이다. 비각에서 내려가면 전등사 경내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전등사에는 보물 약사전을 비롯해 문화재를 상당수 보유하고 있다. 그중 ‘정족산사고지’가 있다. 조선 현종 1년(1660) 마니산 사고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을 삼랑성이 있는 정족산 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지었다. 외적의 침입을 막을 만한 안전한 곳으로 판단한 이유에서이다. 현재 건물은 1998년 복원한 것이다.


 

돈대와 돈대 사이를 걷다

 

강화외성은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교차해 서해와 만나는 지점인 동쪽 해안에 설치됐다. 강화도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수도인 개경, 한양과 모두 가까워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특히 바다에서 내륙 어디로나 통할 수 있는 수로가 있기에 더욱더 그렇다. 이점을 간파한 조선은 한양을 지키는 전초기지로 섬 전체를 아우르는 동서남북 해안 전역에 5진 7보 53돈대를 만들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강화나들길 제2코스 ‘호국돈대길’은 강화도와 김포 사이로 흐르는 염하강을 따라 돈대와 돈대를 이은 길이다. 갑곶돈 에서 출발해 초지진까지 총거리는 17km, 6시간 정도 소요 된다. 길에서 마주하는 돈대. 말 없는 성벽에서 항쟁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다. 그 소리는 다름 아닌 용틀임을 하며 밀려오는 염하강의 파도의 소리이다. 출발지인 사적 강화 갑곶돈은 고려가 대몽항쟁을 펼칠 때 왕궁을 방어한 외성 으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으며, 훗날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곳이다. 갑곶돈에서 발걸음을 옮기자 염하강의 갯벌이 벗이 된다.

 

용진진에 포함된 용당돈대로 향한다. 잠시 숲길을 지나자 해안으로 돌출된 용당돈대를 마주한다. 돈대 아래에 염하강이 유유히 흐르고 그 너머에 김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달걀 모양으로 생긴 돈대에는 4개의 포대와 병사가 주둔하던 건물터가 있다. 용당돈대를 나서면 바닷가 제방길을 따라 화도돈대, 오두돈대가 차례로 모습을 보인다. 발걸음은 어느 틈엔가 사적 강화 광성보에 닿는다. 원래 강 화외성이었던 것을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 (1658)에 광성보를 처음 설치됐다.

 

신미양요(1871) 때 치열한 격전지 중 한 곳으로 당시 조선군을 이끌었던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과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있다. 사적 강화 덕진진을 거쳐 호국돈대길의 마지막 지점인 사적 강화 초지진에 이른다. 거대한 소나무가 초지진을 보호하듯 서 있다. 1656년에 심었다고 하니 강화에 불어닥친 숱한 풍상을 모두 지켜봤을 것이다. 게다가 신미양요 때 총을 맞은 흔적까지 남아 있다.

 

말없이 스쳐 간 돈대와 목숨을 바쳐 이 땅을 지켰던 선조의 바람이 마침내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고려와 조선 왕조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용사들이 지켜 냈다. 왕조의 길은 결국 ‘민초의 길’이 아닐까.



글, 사진. 임운석(여행작가)

 

 

 

사적 경복궁(景福宮),명승 서울 백악산 일원 (서울 白岳山 一圓)

 

명승 백악산 남쪽에 자리한 청와대는 고려 숙종 때인 1104년 완공된 남경, 이궁(離宮·별궁)이 있던 곳으로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지금의 청와대 자리는 후원(後苑, 대궐 안(뒤쪽)에 있는 동산)으로 사용했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후, 고종 때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지어졌다. 해방 이후,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이승만 대통령은 이화장에서 일제 총독 관저였던 경무대로 거처를 옮겼고 경무대는 제4대 윤보선 전 대통령 시절부터 푸른 기와라는 뜻의 ‘청와대’란 이름을 가지게 됐다.

 

5월 10일, 74년 만에 청와대가 전면 개방된 가운데 문화재청은 청와대국민개방추진단을 설치하고 5월 23일부터 위임 해제 시까지 청와대 개방과 관련한 관람객 예약 및 출입, 경내 시설물 관리 및 경내 문화행사 기획 등 전반적인 청와대 개방 관리업무 전반을 수행한다. 문화재청은 청와대가 대한민국의 대표 미래유산으로 자리매김해 온전히 국민이 주인되는 공간이 되도록 노력할 방침이다.

 

사진. 대변인실 신준영

 


#1 고양송포호미걸이(高陽松浦호미걸이) / 고양송포호미걸이 전수관

 

호미걸이는 마지막 김을 매고 난 뒤 내년을 대비하여 ‘호미를 씻어 걸어둔다’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농사를 가늠할 수 있는 두벌 김을 맬 때쯤 두레패가 모여 농사가 잘되었다고 판단될 때만 호미걸이를 했다. 호미걸이는 음력 7월 백중 무렵 행해졌으며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와 함께 농민들이 몸을 쉬고 노는 일종의 축제였다.

소재지 :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무궁화로 18(장항동)
문의 : 고양시 문화유산관광과 031-8075-3388

 

#2 파주 보광사대웅보전(普光寺大雄寶殿)

 

보광사의 여러 부처와 보살을 모시고 종교의식을 치르는 건물인 불전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축물이다. 1667년에 지간(智侃), 석련(釋蓮) 두 스님이 관음전과 함께 다시 세운 것으로 1901년에 대한제국 황실의 후원으로 고쳐 지었다. 기둥머리의 용 조각과 공포의 연꽃 장식, 벽면을 가득 채운 벽화에서 조선 후기 불전 건축의 화려한 장식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재지 : 경기 파주시 광탄면 보광로474번길 87(영장리)
문의 : 파주시 문화예술과 031-940-5831


 

#3 남양주 봉영사 신중도(神衆圖)

 

좌우로 대표적 호법신인 제석천과 범천의 세계를 그린 그림이다. 남양주 봉영사 신중도의 제석천과 범천은 거의 같은 모습이지만, 오른쪽 존상이 풍성한 모란꽃 가지를 들고 있어 제석천임을 알 수 있고, 범천은 아무것 도 들지 않은 채 합장하고 있다. 조선 화원 두흠(斗欽)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서울·경기 지역을 주무대로 활동한 화승이다.

소재지 : 경기 남양주시 내각2로 84-77(진접읍, 봉영사)
문의 : 남양주시 문화예술과 031-590-2064

 

#4 의정부회룡사오층석탑(議政府回龍寺五層石塔)

 

높이 3.3m로 6·25전쟁 기간에 폭격을 맞아 상륜부와 옥개석 일부가 파괴된 것을 1979년 원형을 근거로 복원했다. 기단부는 석재 1매를 가공하 여 3단으로 나누어 하층 기단 측면에 방광 4개와 안쪽에 안상을 새기고, 윗면에 면마다 5개와 가장자리에 각각 1개씩의 복연 등 총 24개가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소재지 : 경기 의정부시 전좌로155번길 262(호원동, 회룡사)
문의 : 의정부시 문화관광과 031-828-4334

 

#5 가평 월사집목판(月沙集木板)

 

조선 중기 한문 사대가의 한 사람인 월사 이정구의 문집 『월사집(月沙集)』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목판이다. 원집(原集) 799판, 별집(別集) 79판, 연 보 61판 등 총 939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기는 28.0x53.0cm, 두께 3cm 내외이며, 책판의 양 끝에 나무를 끼워 평평하게 했다. 월사의 손자 이은상의 『동리집』, 월사의 6대손 이천보의 『진암집』도 남아 있다.

소재지 : 경기 가평군 상면 태봉리 산115-1
문의 : 가평군 문화체육과 031-580-2063

 

#6 하남 선법사 석조보살좌상(河南 善法寺 石造菩薩坐像)

 

선법사 대웅전에 위치한다. 보관을 쓰고 있고 보관 안쪽 중앙에 트레머리가 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각져 있지만 턱 쪽이 둥글고 눈썹은 호형으로 예리하게 나타나 있으나 눈은 작게 그려 형식화된 모습이다. 목에는 삼도가 일부 보이며 범의는 독특한 형태로 오른쪽 어깨 위에 겹쳐지게 표현했다. 형태 등을 고려할 때 영남과 호남에서 조성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소재지 : 경기 하남시 서하남로588번길 125
문의 : 하남시 문화체육과 031-790-5116


 

#7 포천 청성사(淸城祠)

 

청성사는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인 최치원을 모신 사당이다. 최치원은 869년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과거시험에 합격했는데 879년 중국 당나라 말기의 농민반란 주모자인 황소가 황소의 난(黃巢-亂)을 일으키 자, 이를 정벌하기 위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적을 물리쳤던 명문장가였다. 최치원은 신라로 돌아와 정치 개혁을 꾀했으나 실패했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은둔생활로 여생을 마쳤다.

소재지 : 경기 포천시 신북면 청성사길 99(가채리)
문의 : 포천시 문화체육과 031-538-2106

 

#8 김포통진두레놀이(金浦通津두레놀이) / 통진두레문화센터

 

통진 지역의 두레는 1960년대 이후 영농환경의 변화로 단절되었으나 윤덕현을 중심으로 옛 전통을 재현해 1997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후 김포통진두레놀이의 계승을 위해 통진두레 놀이 보존회가 발족했으며, 2008년 4월 통진두레문화센터가 건립되었다. 지방 무형문화재 초청 시연, 김포통진두레놀이 자체 발표회 등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소재지 : 경기 김포시 통진읍 김포대로 2347-8
문의 : 김포시 문화예술과 031-980-2484

 

#9 구리 나만갑선생신도비(羅萬甲先生神道碑)

 

조선 인조 때 문신인 나만갑(羅萬甲)의 행적을 기록한 비이다. 본관은 안정 (安定)이고 호는 구포(鷗浦)이다.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 사건이 일어나자 낙향했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단신으로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며, 관향사(管餉使)가 되어 군량 공급에 큰 공을 세웠다. 효종 9년 (1658)에 건립된 신도비는 사각형 받침돌 위에 비신(碑身: 글씨를 새기는 부분)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을 갖추고 있다.

소재지 : 경기 구리시 사노동 산163번지
문의 : 구리시 문화예술과 031-550-2546

 

#10 연천 오봉사지부도(五奉寺址浮屠)

 

오봉사는 신라 말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글자가 새겨진 기와 등이 발견되어 1677년경에 중건된 것으로 확인 되었다. 오봉사는 6·25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는데 현재 부도는 오봉 사지의 서쪽 골짜기 사이로 형성된 개울 건너에 세워져 있다. 이 부도는 규모가 상당히 큰 대형으로 하나의 돌로 거칠게 다듬은 석종형 양식을 취하고 있다.

소재지 : 경기 연천군 연천읍 고문리 산73-2번지
문의 : 연천군 문화체육과 031-839-2144




정리. 편집실 자료,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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