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으로 시작하는 이난영의 노래는 193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향토 가요 가사로 당선된 문일석의 노랫말에 작곡가 손목인이 곡을 붙여 만든 「목포의 눈물」이다. 이 노래뿐 아니라 「목포는 항구다」로 기억되는 목포를 광주의 시인 문병란은 「목포」라는 시에서 노래하였다.
더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와서
동백꽃처럼 타오르다
슬프게 시들어버리는 곳
항상 술을 마시고 싶은 곳이다.
잘못 살아온 반생이 생각나고
헤어진 사람이 생각나고
배신과 실패가
갑자기 나를 울고 싶게 만드는 곳
문득 휘파람을 불고 싶은 곳이다.
없어진 삼학도에 가서
동강난 생낙지 발가락 씹으며
싸구려 여자를 바라볼거나
삼학 소주 한 잔을 기울일거나.
······
실패한 첫사랑이 생각나는 곳이다.
끝끝내 바다로 뛰어들지 못한
목포는 자살보다
술맛이 더 어울리는 곳
······
목포를 어째서 목포라고 불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영산강 물과 서해 바닷물이 합쳐지는 이곳의 지형이 마치 ‘길목쟁이’처럼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하여 ‘목개’로 부르던 것을 한자로 옮겨서 목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진을 쳤던 고하도가 목화의 집산지라서 이곳에서 생산한 목화를 일본으로 실어 날랐기 때문에 ‘목화의 항구’라는 뜻의 목포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목포가 큰 항구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주위에 섬이 많고 항만 동남쪽에 있는 영암반도의 돌출부와 남서쪽에 가로놓인 고하도가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배후의 유달산이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여 목포는 지형상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1895년 관제개혁으로 무안군에서 분리된 목포에 목포만호청이 설치되었고, 청일전쟁이 끝난 1897년 10월부터는 개항되어 목포진 또는 목포항이라 부르게 되었다.
목포는 유달리 예술가들이 많이 태어난 곳이다. 소설가 박화성, 천승세가 있고, 작고한 문학평론가인 김현, 우리 시대의 시인 김지하, 극작가 차범석, 동양화가 허건도 이곳 목포에서 살았다.
목포 유달산무안에서 바라다 보이는 영산강 하굿둑 아래가 바로 항구 도시 목포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적을 물리치기 위해 이용했던 유달산 노적봉도 보인다.
목포 하면 떠오르는 삼학도에 얽힌 전설이 하나 있다.
옛날 목포에 무예를 익히려는 한 장사가 있었다. 그는 유달산에서 무예를 익히면서 절벽 같은 암벽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바위와 바위 사이를 건너뛰기도 하며 날아가는 새를 화살을 쏘아 떨어뜨리기도 하고 큰 칼로 호랑이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놓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가 무술을 익히고 있는 유달산 아래에는 세 처녀가 살고 있었다. 아침마다 마을에서 올라와 물을 길어갔는데 늠름한 장사의 모습에 연정을 품게 되었고, 장사 역시 처녀들에게 마음이 끌려서 무예를 닦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러다가 무예 수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할 것 같다고 느낀 장사는 세 처녀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당신들을 사랑하게 되어 마음이 혼란스러워져 무예를 익힐 수 없으니 무예 수업이 끝날 때까지 멀리 떨어진 섬에 가서 나를 기다려주시오.”
이 말을 들은 세 처녀는 어느 맑은 날 돛단배에 몸을 싣고 먼 섬으로 향하였다. 그 광경을 몰래 지켜보던 장사는 세 처녀가 살아 있는 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유달산에서 배를 향해 화살을 마구 쏘아 날렸다. 장사의 화살을 맞은 배는 두 동강이 나면서 목포 앞바다 한가운데에 가라앉고 말았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세 마리의 학이 솟아올라 하늘 높이 날아갔으며, 곧이어 그 자리에 세 개의 바위가 솟아나 섬이 되었다. 그 섬을 삼학도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삼학도는 1968년 이후 목포와 연결되면서 자연이 크게 파괴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목포 앞바다의 섬들로 이루어진 군이 신안군이다. 신안군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1969년이다. 그전에는 지도군이었으며, 1914년에는 무안군에 소속되었다가 1969년에 신안군이라는 이름으로 떨어져 나왔다. 안좌도, 압해도, 암태도, 장산도, 대흑산도 등을 비롯하여 유인도 111개와 무인도 719개로 이루어진다. 흑산도 파시는 우리나라의 3대 파시, 즉 흑산도, 위도, 연평도의 조기 파시 중 제일 남쪽에 있는 곳이다.
파시는 성어기에 어항에서 열리는 생선 시장, 넓은 의미로는 해상에서 열리는 어시장뿐 아니라 연안의 육지 시장까지도 포함한다. 파시에서는 어선과 상선 사이에 또는 어업자와 어부들 간에 매매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매년 봄에 열리는 파시의 광경을 묘사한 기록이 있으며, 칠산해(七山海)의 칠산도는 조기의 어획장으로 성어기에 파시가 형성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파시가 형성되는 곳은 주로 조기의 산란장으로 유명한 대흑산도, 위도, 칠산도, 개야도, 녹도, 고군산군도, 어청도, 연평도 같은 서해안이다. 조기는 제주도 남서쪽 및 중국의 상하이 동남쪽 근해에서 겨울을 지낸 후 2월경에 북상하여 전라남도 영광군의 칠산해, 옹진군의 연평도 근해, 평안북도의 대화도 근해 등지에서 산란하는데, 이 시기가 3~6월경이다. 파시는 주로 이때 일시적으로 열리며, 특히 4월 하순부터 5월 하순까지 이루어지는 연평도 근해의 조기 어장은 전국 최대의 어장으로 파시 또한 유명하다.
파시가 열리면 인근 어촌은 외부에서 어부와 상인들이 모여들어 호황을 누렸으며, 일시적인 촌락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거문도, 청산도, 추자도 등 남해안에는 이 지역에서 많이 잡히는 고등어, 멸치 등이 성어기를 이룰 때 파시와 같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동안의 남획으로 인해 서해안으로 회유하는 조기가 적어짐에 따라 파시가 거의 사라졌다.
흑산도는 술꾼들이 즐겨 찾는 홍어와 홍탁, 삼합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홍어하면 떠올리게 되는 흑산 홍어는 흑산도 근해에서 잡히는 홍어를 말한다. 흑산 홍어는 인천이나 군산에서 잡히는 홍어와 달리 씹으면 생선살 자체가 입에 착 달라붙을 정도로 차지고 맛이 좋다.
홍어를 먹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껍질 벗겨 회를 떠서 초고추장이나 겨자를 넣은 간장에 찍어 먹는 홍어 회, 막걸리와 같이 먹는 홍탁, 얇게 썬 삶은 돼지고기에 배추김치와 함께 먹는 삼합, 양념 구이, 겨울철 파릇하게 자란 보리 싹과 홍어 애(내장)를 넣어 끓인 보리애국, 입안에 톡톡 화끈하게 퍼지는 매운맛이 일품인 삭힌 홍어 등이 있다.
신안군 흑산면에는 수려한 단애절벽이 장관을 이루어 남해의 ‘소해금강’이라고 불리는 홍도가 있고, 전국 새우 생산량의 절반가량을 생산하는 전장포가 임자도에 있다. 면화, 쌀과 함께 전라남도 삼백(三白)의 하나로 손꼽히는 신안 소금은 예로부터 이름이 높았다.
안좌면 기좌도에서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서양화가 김환기가 태어났다. 그는 1964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점 그림’으로 이름난 그를 두고 동향화가인 서세옥은 “이 나라의 서양화 도입기에 남다른 안목으로 모더니즘을 꿋꿋이 추구하면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여 참신한 기법으로 작품을 표현했으며, 특히 만년에 미국에 체재하면서 도달한 작품 세계는 한국 현대 미술의 정립에 한 선을 그었다”라고 평가하였다.
흑산도는 중국으로 오가는 배가 도중에 정박했던 곳으로, 1801년에 일어난 신유사옥 때 정약전이 유배를 왔던 섬이다. 정약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다산 정약용의 형이다. 어려서부터 김원성, 이승훈, 이윤하 등과 사귀면서 이익의 학문에 심취했으며, 권철신의 문하에서 배웠다.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해 전적, 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당시 서양의 학문과 천주교 등의 사상을 접했던 이벽 등의 남인 인사들과 교유하고, 이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신안군 흑산면 사리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복성재(復性齋)를 짓고 섬 아이들을 가르치며 저술활동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유배 16년 만에 흑산도에서 고난에 찬 생을 마감하였다.
흑산도 © 유철상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정약전은 그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예수회 신부들이 번역한 유클리드의 『기하원본(幾何原本)』을 읽고 깊이 탐구하였다. 형수의 동생인 이벽의 권유로 『천주실의(天主實義)』, 『칠극(七克)』 등 천주교 관계 서적을 탐독하였다.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지은 『자산어보』는 흑산도 근해의 수산 생물을 실제로 조사, 채집, 분류하여 종류별로 명칭, 분포, 형태, 습성과 그 이용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 관계 서적으로 실제 조사에 의한 저술이라는 점에서 그의 학문적 관심이 실학적 성격임을 알 수 있다.
뒤를 이어 1873년에는 대원군에게 상소를 올렸던 대한제국 말의 의병장인 면암 최익현이 유배를 왔다. 1876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맺어진다는 소식을 들은 최익현이 의분을 참지 못하고 반대 상소를 올리자 조정에서 흑산도로 귀양을 보낸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섬 주민들은 그가 머물 곳을 미리 정하고 집을 지었다. 이들의 정성에 감동한 최익현은 그 집에 서당을 차리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일신당(日新堂)이라는 당호를 붙였다. 일신당 터 뒤에 있는 바위는 위가 평평하여 서너 명이 앉을 수 있는데, 최익현은 이 근처의 풀을 베고 이끼를 걷어내어 그 밑에 흐르는 냇물로 얼굴과 손발을 씻으며 의두석(倚斗石)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편 신안군 지도읍 감정리의 운낭기는 옛낭기 또는 고목포라고도 부르는데, 새날기 서남쪽에 있는 섬이다. 옛날 남해에서 서울로 오가던 배가 머물던 곳이었다.
소흑산도라고 불리는 가거도는 ‘가히 살 만한 곳’이라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는 하의도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났고, 1922년에는 황해도 재령과 평안북도 용천에서 일어난 농민쟁의와 함께 3대 소작쟁의로 꼽히는 암태도 소작쟁의가 일어났다.
나주의 서쪽은 칠산 바다다. 『동국여지승람』에 “해마다 봄에 상선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 판매하는데 서울 저자와 같이 떠드는 소리가 가득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1960년대만 해도 홍농면 칠곡리엔 1킬로미터가 넘게 늘어선 돛단배와 만선을 기원하며 올리던 수산제, 쌀로 빚어 만든 법성포토주 등이 뒤범벅되어 흥청거렸으나 지금은 그러한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택리지』에도 “옛날에는 깊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모래 등이 쌓여 점점 얕아져서 썰물 때엔 물 깊이가 겨우 무릎이 빠질 정도다. 강 한복판의 물길만이 강줄기와 같아서 배들은 이곳으로 다닌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1750년 무렵부터 칠산 바다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칠산 바다 바로 아랫자락에 함평군이 있다. 소리꾼 임방울이 즐겨 부르던 「호남가」 첫머리에 “함평 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을 바라보니”로 시작되는 함평을 조선 초기의 문신 정인지는 “함평은 바다 곁에 있으므로 경비가 해이하지 않고, 토지가 비옥하므로 백성이 많으니 반드시 문무를 겸비한 인재라야 비로소 수령이 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인접한 무안과 더불어 전국에 널리 알려진 양파 재배 단지이면서 고구마의 산지인 함평은 쌀이 좋기로도 유명하다.
영산포 시가지조선 초기의 문신 정인지는 “함평은 바다 곁에 있으므로 경비가 해이하지 않고, 토지가 비옥하므로 백성이 많으니 반드시 문무를 겸비한 인재라야 비로소 수령이 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함평 쌀밥을 먹은 사람은 상여가 더 무겁다’거나 ‘손불면 일대에서 나온 쌀은 경기도 이천 쌀과 안 바꾼다’는 말은 함평 쌀이 그만큼 우수하다는 것을 입증하는데, 1906년에 발행된 『함평군지』에 따르면 이 지방에서 나는 햅쌀, 보리, 밀 등을 왕실에 진상하였다.
목포는 예술가들의 노스탤지어
목포는 유달리 예술가들이 많이 태어난 곳이다. 소설가 박화성, 천승세가 있고, 작고한 문학평론가인 김현, 우리 시대의 시인 김지하, 극작가 차범석, 동양화가인 허건도 이곳 목포에서 살았다.
노쇠와 근육량 감소 밀접한 관계
예전에는 이런 신체 기능 저하를 나이 들면 으레 나타나는 현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같은 70대라도 건강하고 활력 넘치는 노인이 있는가 하면 항상 아프고 기운이 없는 노인이 있다.단백질 섭취량 두 배로 늘리고 주 2회 30분씩 근력 운동해야 단골의사 꾸준히 찾는 것도 중요 "늙으면 원래…" 당연시 말아야 이 차이를 의학계에선 ‘노화’와 ‘노쇠’로 설명한다. 노화가 단순히 나이 들어 기력이 떨어지는 정도에 그친다면, 노쇠는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기능이 심하게 저하된 상태를 의미한다. 노쇠는 근육량 감소와 매우 관계가 깊다. 근육은 우리 몸에서 생각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면역력을 높이고 염증은 줄인다. 온몸에 피가 돌고 호흡하는 것도 사실은 심장 근육과 폐 근육(횡경막)이 열심히 운동한 결과다. 근육이 줄어들면 인슐린 기능도 떨어져 당뇨병에 걸리기 쉬워진다. 근육이 더 줄고 심장·폐기능이 더 떨어지면 깨끗한 피와 산소를 공급받지 못한 온몸의 세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평소에 잘하던 밥 먹기, 옷 입기, 걷기 등을 못할 정도까지 신체 기능이 떨어진다. 노쇠가 찾아온 것이다. 집 밖을 나서지 못하고 누워 생활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 입맛도 없어져 영양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근육은 더욱 줄어든다. 각종 만성질환이 몸의 기력을 빼앗고, 노쇠는 더 급격하게 진행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낙상(넘어져 다침) 때문에 사망하는 노인이 한 해 83만 명에 달하는 이유다.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신체 기능이 저하돼 결국 사망에 이르는 것이다. 몸의 내구력이 떨어지면 질병에 걸릴 확률도 그만큼 증가한다. 한번 앓기 시작하면 좀처럼 회복도 되지 않는다. 치료가 끝나도 병을 앓기 전의 몸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다. 일산백병원 가정의학과 양윤준 교수는 “노쇠는 아주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자각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며 “전과 달리 걸음걸이가 늦어지고 쉽게 피로하거나 체중이 줄어드는 등의 변화가 나타난다면 나이 탓으로 넘기지 말고 병원을 찾아 노인포괄평가를 받아보는 게 좋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몸무게 1kg당 하루 0.9g을 먹도록 권장하고 있다. 몸무게 60kg 노인이라면 매일 54g은 먹어야 한다는 의미다. 권장량이 너무 적다는 의견도 있다. 6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한 단백질 섭취 권장량이 별도로 없어서다. 체중 1kg당 0.9g의 권장량은 20세나 80세나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의미다. 경희대병원 가정의학과 원장원 교수는 “나이 들수록 단백질 섭취 능력이 떨어지는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몸무게 1kg당 1.2g은 매일 먹어야 한다”며 “당뇨병·만성폐쇄성폐질환(COPD)·심부전을 앓는다면 단백질 소모량이 더 많으므로 체중당 섭취량을 1.5g까지 늘리는 게 좋다”고 말했다. 단백질을 적게 먹으면 사망 위험이 높아진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김혜련 연구원은 국민건강영양조사를 토대로 30세 이상 남녀 8941명의 단백질 섭취량과 사망률을 12년간 추적조사했다. 그 결과 단백질을 하루 권장량의 75% 미만으로 먹는 노인은 권장량을 섭취하는 사람에 비해 사망 위험이 24% 높았다. 심혈관질환으로 사망할 위험은 61% 높았다. DA 300단백질 섭취와 함께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게 근력 운동이다. 근육은 단백질만 먹는다고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기력이 없고 귀찮다고 운동을 소홀히 하면 더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게 허벅지 근육과 허리 근육이다. 노인의 근력운동은 앉았다 일어서기, 한 발로 서서 균형 잡기 정도로 충분하다.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면 가벼운 아령 들기, 스쿼트로 넘어간다. 일주일에 적어도 2~3회, 각 20분 이상 꾸준히 하는 게 좋다. 유산소 운동을 먼저 하고 근력 운동을 하면 부상 위험이 적고 더 효과적이다. 단골병원을 두고 꾸준히 찾는 것도 방법이다. 서서히 나타나는 노쇠는 한 의사가 꾸준히 지켜봐야 발견하기 쉽다. 노쇠한 노인에게 병의 치료보다 중요한 건 신체 기능의 유지·회복이다. 당뇨병을 예로 들면, 일반 성인의 경우 당화혈색소 수치를 6.5% 이하로 유지하도록 약을 처방한다. 노인은 노쇠 정도에 따라 7~7.5%로 유지한다. 허약한 노인은 당화혈색소 유지보다 저혈당으로 인한 위험이 더 크기 때문이다. 치료용으로 같은 약을 먹어도 노인에겐 독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양윤준 교수는 “현재 70~80대는 우리나라 고령화 1세대”라며 “나이 드는 것에 적극적으로 대비하지 못했고 노쇠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쇠를 당연한 현상으로 봐선 안 된다”며 “노화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면 노쇠는 본인의 의지와 주변의 관심으로 얼마든지 극복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진구 기자 kim.jingu@joongang.co.kr |
지친 마음과 몸, 폭포에서 내려 놓고 쉬다
복잡한 마음 평안케 하는 폭포 소리
흰 명주실 타래가 풀어져 바다를 향해 흐르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서귀포 정방폭포가 그렇고, 서귀포 항구로 향해 가는 천지연폭포가 그렇다. 어디에서 비롯되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폭포, 몸과 마음이 나른해지는 삼복더위에 사람의 마음을 가장 빨리 서늘하게 만드는 폭포를 두고 김수영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폭포의 소리는 정신을 잃을 만큼, 그래서 물살에 휩쓸려 갈 만큼 웅장하다. 복잡다단(複雜多端)한 세상을 잊게 할 만큼 우렁찬 소음과 거센 물살 속에서 잠시나마 태풍의 눈 속에 있는 것처럼 ‘마음의 쉼터’를 제공하는 폭포를 보면서 옛사람들은 어떤 생각에 잠겼을까? 조선 중기 풍기군수를 지내며 소수서원을 창건한 주세붕은 낙동강변에 위치한 청량산에서 폭포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글을 남겼다.
“산봉우리들을 보고 있으면 나약한 자가 힘이 생기고, 폭포수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욕심 많은 자도 청렴해질 것 같다. 총명수를 마시고 만월암에 누워 있으면 비록 하찮은 선비라도 신선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하면서도 경계해야 할 것이 욕심인데, 폭포소리를 들으면 욕심이 사라지면서 신선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쉬엄쉬엄 살아라, 겸손하게 살아라”, “만물을 사랑하라”, “조금만 더 내려놓고 살아라”. 이것이 곧고도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가 사람에게 들려주는 소리다.
한국적인 우리 폭포의 아름다움
탐험가인 리빙스턴은 빅토리아폭포를 발견하고서 “천사들조차 이 폭포 위를 날아가며 경탄할 것”이라고 했다는데, 그러한 절경이 어디 빅토리아폭포뿐일까? 지난해 명승으로 지정한 부안 직소폭포 일원도 그와 비슷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천마산의 박연폭포와 서경덕 그리고 황진이를 일컬어서 ‘송도삼절’이라고 했던 것처럼, 시인 신석정은 변산의 직소폭포와 이매창 그리고 유희경을 일컬어서 부안삼절이라고 평했다.
직소폭포 아래로 내려가 가만히 바위에 걸터앉는다. 떨어지는 물소리는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고 잔잔한 물결 사이로 보이는 그리움 하나, 문득 바람이 우수수 불고 그렇다. 바람결에 일어난 물살은 또 어딘가를 향해 우르르 밀려간다. 내 마음 역시 내가 알지 못하는 피안의 세계를 향해 날아갈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나만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퇴계 이황은 산수가 아름답거나 폭포가 쏟아지는 곳이 있으면, 간혹 몸을 빼내어 홀로 가서 즐기며 시를 읊조리다가 돌아오기도 했다고 퇴계의 제자 이덕홍은 구술하고 있다.
폭포 소리 들려오는 곳에서 글 한 편
막스 뮐러는 그가 지은 『독일인의 사랑』에서 폭포에 관한 글 한 편을 남겼다.
“인생에 다가오기 마련인 이 폭포들은 기억 속에 유착된다. 그래서 이 폭포를 넘어서서 멀리 영원의 고요한 대해로 접근해 가고 있을 때까지도, 우리의 귀에는 여전히, 아득히 그 폭포의 우렁찬 흐름이 들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에게 그나마 남아 있어 우리를 앞으로 촉진시키는 생명력이 바로 그 폭포에 원천을 두고 양분을 끌어오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세파에 쓸린 마음을 내려놓고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는 것이 바로 세상을 좀 더 풍요롭게 사는 지름길이고, 한여름에 만나는 폭포가 바로 그런 장소이리라. 나이아가라폭포나 이과수폭포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곳곳에도 아름다운 폭포가 여러 곳 있다. 겸재 정선의 그림 속에 남아 있는 철원의 삼부연폭포, 소리꾼 권삼득이 득음을 위해 판소리를 연마했던 완주의 위봉폭포,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한 사람인 난계 박연이 노닐었던 영동의 옥계폭포, 설악산의 토왕성폭포와 대승폭포, 김일손과 남명 조식의 자취가 남은 지리산의 불일폭포 등이 참다운 휴식을 꿈꾸는 답사객을 기다리고 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한 줄기 물줄기가 골짜기를 갈 듯 뿜어내니, 용추에 떨어지는 백 길 물소리 우렁차라. 솟아 내리는 물줄기 쏟아지는 은하수인가 싶고, 노한 듯 가로 드리운 물줄기 바로 흰 무지갤세.” 폭포 아래에서 황진이의 시 ‘박연’을 떠올리며 성하의 한 시절을 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글, 사진. 신정일(문화사학자, 천연기념물분과 문화재위원,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멋과 운치를 아는 당신을 위한 길, ‘관동 풍류의 길’
고택에서 느끼는 특별한 멋과 운치
맑은 하늘에 장대비가 쏟아지는 걸까? 그런데 이상하다. 빗줄기는 투명한 물이 아니다. 일정한 굵기의 패턴을 지닌 먹색이다. 주룩주룩 내리는 굵은 먹색 물줄기. 다름 아닌 120여 칸의 화려한 저택을 뒤덮고 있는 기와의 물결이다. 기와는 하늘에서 비질하듯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몇 걸음을 옮겨 다시 유심히 살핀다. 기왓장이 흑진주처럼 반짝인다. 햇빛이 예리한 칼날처럼 측면을 비춘 까닭이다. 한옥 주변에는 야트막한 동산이 병풍처럼 에두르고 소나무가 무성해 바람을 쉬이 막아준다. 도심에서는 볼 수 없는 고고한 운치에 눈과 몸이 편안하다.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이곳은 국가민속문화재 강릉 선교장이다. 효령대군의 11세손이 처음 지은 것으로 무려 10대에 이르도록 증축과 보수를 해온 끝에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다. 햇수로 따지만 300여 년의 세월이다. 선교장이라는 이름은 이 가옥이 위치한 곳이 배다리마을(선교리)이어서다. 그 당시 선교장에서 배를 타고 경포호까지 건너다녔다고 한다. 그만큼 경포호가 넓었던 것이다.
선교장에서는 오감이 모두 즐겁다. 은은한 가야금 소리, 눈이 편안한 신록과 그윽한 솔향, 손때 묻은 오래된 나무에서 느껴지는 반질반질한 질감, 정성껏 준비한 음식이 있어서이다. 그 옛날 풍류를 즐겼던 선비들이 선교장을 방문하는 게 그들만의 버킷리스트였다고 하니, 충분히 이해하겠다. 선교장은 족제비를 쫓다가 발견한 터에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그만큼 명당이라는 뜻인데,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활래정을 보면 이구동성으로 이만 한 명당은 보지 못했다며 무릎을 ‘탁’ 치게 된다. 활래정은 선교장 초입에 있는 인공 연못에 세워진 누각 형식의 정자이다. 여름에는 연못에 연꽃이 만개해 활래정에서 보면 마치 신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솟을대문을 지나면 길게 줄을 이은 듯한 줄행랑과 사랑채 ‘열화당’도 선교장의 품격을 한층 높여준다. 특히 열화당의 차양은 선교장에 초대되었던 러시아 공사가 선물한 것으로 값비싼 구리를 소재로 만들어 눈길을 끈다. 안채와 연결된 문의 아래쪽이 특이하다. 문지방으로 막지 않고 트여 있다. 이 집터를 안내해 준 족제비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안채에서 집 뒤쪽으로 가면 초가로 지은 초정이 있다. 선교장에서 가장 높은 곳이어서 이곳에서 보는 풍광이 일색이다. 내친 김에 발걸음을 숲길로 향한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숲길을 따라 이어져 산책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선교장 박물관에는 광해군 하사품 말안장, 추사 김정희의 현판(홍엽산거)을 비롯해 300여 점의 유물이 전시 중이다.
바람과 물이 흐르듯 쉼이 흐르는 곳
관동 풍류의 길 다음 장소는 검은 대나무로 둘러싸인 집이라는 뜻의 보물 오죽헌이다.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친정 별당 건물이다.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 비교적 오래된 건물로 손꼽힌다.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이곳에서 낳을 때 꿈에 용이 나타나서 방 이름을 몽룡실이라 지었다. 신사임당은 시와 그림에 능한 예술가이고, 아들 이이는 성리학을 완성한 대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오죽헌에 들면 정면에 이이에게 제향하는 문성사가 있고 몽룡실은 왼편에 있다. 몽룡실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수령 6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고목이 힘겹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일명 ‘율곡매’로 불리는 나무인데 사임당의 매화 그림과 율곡이 쓰던 벼루 장식의 소재가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오죽헌에는 600년 된 배롱나무와 300년 넘는 소나무 ‘율곡송’ 등이 있어 고택의 운치를 더한다.
별당 옆에는 단아한 모습의 안채가, 그 앞에는 사랑채가 자리를 지킨다. 툇마루 기둥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쓰인 주련이 걸려 있어 가문의 기품을 소리 없이 대변한다. 안채를 지나 협문을 통과하면 정조대왕이 이이를 칭송하여 세운 어제각이 있다. 원래는 문성사 자리에 있었는데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문성사와 자리를 맞바꾸게 되었다.
오죽헌에는 신사임당과 이이의 삶의 편린이 흩어져 있다. 그 조각을 맞추듯 일상보다 느린 걸음으로 오죽헌을 산책한다. 그들이 누렸던 풍류 속으로 성큼 한 발 더 가깝게 다가간 것 같다. 강릉 풍류의 길 마지막에는 경포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보물 경포대를 만날 수 있다. 경포대는 고려 말 안축의 「관동별곡」을 시작으로 조선 가사 문학을 대표하는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도 등장한, 요즘시대의 ‘핫플’ 같은 곳이다.
그런 만큼 경포대 누각 안에는 수많은 편액이 걸려 있어 마치 조선시대 갤러리에 온 듯하다. 경포대는 고려 충숙왕 13년(1326년)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규모가 큰 누정이다. 특이한 것은 일반 누정과 달리 내부에 누마루를 2단으로 설치해 공간을 구분했다는 점이다. 누마루에 오르면 경포호가 한눈에 들어와 가슴 깊은 곳까지 탁 트인다. 경포호 수면을 휘감아 불어오는 바람은 더위를 잊을 만큼 시원하다.
고고한 역사를 품은 양양과 속초
관동 풍류의 길은 동해안을 따라 보물 양양 낙산사로 이어진다. 낙산사는 의상대사가 문무왕 11년(671)에 창건했다. 낙산이란 관세음보살이 거주하는 산을 가리키는데 산스크리트어 ‘포탈라카(potalaka)’를 음역한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바다 근처 험난한 바위가 가파르게 솟아 있는 곳에 머문 까닭에 낙산사 역시 동해를 마주한 언덕에 터를 잡았다. 낙산사는 2005년 화재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때 화마가 삼킨 것 중에는 낙산사동종이 있다. 잔해는 낙산사 내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그 외 보물 양양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 보물 양양 낙산사 칠층석탑 등이 있다.
풍류길 가운데 속초 신흥사는 국립공원 설악산 초입에 있어 등산을 겸해 많은 사람이 찾는 곳으로 보물 속초 신흥사 목조 아미타여래삼존좌상, 보물 속초 신흥사 극락보전, 보물 속초 신흥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등이 장구한 세월을 일깨운다. 평창의 월정사는 관동 풍류의 길 마지막 장소이다. 이곳 역시 보물상자를 품고 있는 듯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탐방객의 발걸음을 느리게 만든다. 국보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국보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외에도 문화재 60여점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찬란한 문화재 못지않은 명품 숲길이 있어 휴식을 원하는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일주문에서 시작되는 1km 남짓한 전나무 숲길은 마치 터널을 지나는 듯 아늑하고 깊다. 숲에서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치유가 있어 풍류길의 매력이 더 깊고 넓다.
글, 사진. 임운석(여행작가)
경복궁 부엌으로의 초대 「수라간 시식공감」 예매 시작
- 5.25.(수) 오후 2시 예약 시작 / 행사 6.8.(수)~20.(월), 경복궁 소주방 권역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본부장 정성조)와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최영창)이 함께하는 <2022년 상반기 수라간 시식공감>이 오는 6월 8일부터 20일까지 경복궁 소주방 권역에서 펼쳐진다. 행사 예매는 오는 5월 25일 오후 2시부터 ‘인터파크 티켓(ticket.interpark.com)’을 통해 시작된다.
* 추첨제 운영기간(6.15.∼17.)의 경우 5.25.(수) 16:00부터 예매 시작
<수라간 시식공감>은 ‘밤의 생과방’과 ‘식도락(食道樂)☓시식공감’ 중 하나를 선택하고 경복궁 소주방 권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다양한 궁중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밤의 생과방’은 경쾌한 국악과 함께 경복궁 생과방에서 제공하는 음식을 맛볼 수 있고, ‘식도락☓시식공감’은 수라간 최고 책임자인 상선 영감(도설리)과 대령숙수, 수라간 상궁과 함께 소주방 음식 이야기를 들으며 궁중음식을 체험할 수 있다.
* 도설리(都薛里): 조선 시대 내시부에 속하여 궁궐의 음식을 주관하는 일을 맡아보던 설리들의 우두머리
* 대령숙수(待令熟手): 조선 시대 궁중의 잔치 때 음식 만드는 일을 맡아 하던 남자 전문조리사
그리고 수라간 시식공감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주방골목’에서는 행랑채 골목을 산책하며 초여름 밤의 더위를 달래줄 다양한 골목 간식(포계, 수박, 연근부각, 약식, 도라지정과, 박하계피)을 맛볼 수 있다. 또한, ‘내소주방의 궁중다식 만들기’와 시식공감에서 준비한 선물과 함께하는 ‘노방 보자기 체험’, 왕실전통 ‘격구 놀이’ 등 조선왕실의 여름 맞이 행사를 체험할 수 있다.
* 포계(炮鷄): 조선시대 닭고기 구이로, 주방골목에서는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요리로 제공됨
* 노방: 얇은 비단의 종류
* 격구 놀이: 말을 타고 달리며 공을 쳐서 상대의 문에 넣는 놀이(행사 시 말은 타지 않음)
이번 수라간 시식공감 행사는 사전 예약제로, 1인당 참가비는 2만 5천원이며, 최대 4인까지 예매할 수 있다. ‘밤의 생과방’과 ‘식도락×시식공감’ 중 하나를 택하여 예매할 수 있고, ‘주방골목’은 자유롭게 체험할 수 있다. 6월 8일부터 20일까지의 일정 중 15일부터 17일까지의 3일간 일정은 선착순이 아닌 추첨을 통한 방식으로 예약 받아 참여 기회를 확대할 예정이다. 자세한 사항은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누리집(royal.cha.go.kr), 한국문화재재단 누리집(www.chf.or.kr)을 방문하거나 전화(☎02-3210-0778)로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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