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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동영상::갈매기와 함께 춤을]'비발디'의 '사계'중 '봄'의 선율 따라 무수한 갈매기가 춤을 추는 바닷가에서...

문화재방송 2022. 4. 16. 00:01

촬영. 편집:헤리티지

그런 점에서 유교문화는 대중심리를 매우 정확하게 읽어 낸 대표적 대중장르인 셈이다. 삶의 현실적 측면이 아닌 인간 내면이 갖고 있는 심리의 실상을 잘 반영한 점에서 유교문화는 심리적 리얼리즘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대중의 심리를 이처럼 정확히 읽어 내는 심리적 리얼리즘은 종교에도 나타난다.

종교 발생은 크게 두 가지 목적에서 기인하였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신이 존재하기에 그 신의 세계를 구현하려는 목적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염원과 상상이 만들어낸 절대세계의 구현이 목적이다. 두 목적을 좁혀보면 신이 있느냐 없느냐와 관련된다. 사회학적 문명사적 관점에서 보면, 신神은 인간사고의 부산물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부산물에 종속되었다. 즉, 인간은 신을 창조했고 인간은 자신들이 창조한 신에 종속되었다.

인간이 만들어 낸 각종 제도나 법 등에 인간 모두가 다시 종속된 상황과 비슷하다. 신도 인간의 염원과 상상이 만들어 낸 존재이지만 이제 인간은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며 오히려 철저히 종속되었다. 탈놀이는 이러한 사상사적 흐름을 반영한다. 시대를 읽어내는 심리적 리얼리즘적 요소에 충실하여 대중적이 되었고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에도 충실히 종속된 장르였다. 현재 전승되는 경남지역의 탈놀이는 가산오광대, 고성오광대, 김해가락오광대, 마산오광대, 밤마리오광대,진주오광대, 통영오광대 등이다.

경남지역 오광대 탈놀이는 본 과장 연행을 시작하기 전에 동제를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동제를 지내지 않더라도 섣달그믐이나 정월대보름날에 벽사진경이 목적인 구나의식을 배경으로 하였다. 오광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첫 과장을 오방신장무과장으로 연행하거나 양반과장을 오방신장무과장처럼 연행한다. 오방신장무과장이나 양반과장은 동제나 구나의식의 정신을 반영한 과장이다. 인간의 염원과 상상력이 만들어 낸 절대세계가 구현되기를 기원하는 의식인 것이다.

 

인간은 자연과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면서 초자연적인 현상도 접하게 된다. 자연과의 관계나 초자연적 현상은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요소가 많다. 그래서 인간은 이런 요소를 해결해 줄 절대적 존재를 만들었고 그 절대적 존재에 의존적이 되었다. 그 의존성은 절대적 존재를 실존하도록 만들었고 해 뜬 날과 어두운 날의 반반 확률도 절대적 존재의 개입으로 착각하였다. 그 착각은 논리화되고 객관화되어 당연한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오광대 탈놀이에서의 지신밟기 연행과 오방신장과장은 인간 스스로 절대적 존재를 만들고 이를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종속되어간 인간 삶의 변화과정이 들어 있다.

 

오광대에는 사회에 만연된 백성들의 기호와 심리를 잡아내는 리얼리즘적 태도도 선명히 들어 있다. 오광대는 일단, 음악연주로 인간의 내면심리를 잡아냈다. 쇄납, 꽹과리, 징, 장고, 북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소리는 백성, 대중들의 신명을 읽어 냈다. 음악 소리에 백성들의 몸은 자연스럽게 반응하여 팔과 다리를 흔들고 돌리며 춤을 추었다. 대중의 내면에는 신명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절대세계에 종속된 삶이 확대된 인간에게 종속되는 삶, 역으로 인간에게 군림하려는 심리도 있었다. 흔히, 영감할미과장은 처첩간의 갈등을 보여주어 봉건제적 사회를 비판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영감할미과장은 봉건제적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종속적인 태도를 가진 인간의 내면 심리를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종속적 내면은 절대세계를 구현하려는 인간의 오랜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인간에게는 종속을 통해 쾌감을 느끼는 태도와 군림과 지배를 통해 쾌감을 느끼는 상반된 두 개의 심리가 공존한다. 전자를 춘향이즘, 후자를 학도이즘이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이런두개의 상반된 심리가 인간 내면에 있고 오광대는 이런 내면을 영감할미과장을 통해 잘 잡아낸 것이다.

 

글. 심상교 (부산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사진. 문화재청

출처:월간 문화재사랑

 

사천왕상 다리에서 보물급 고서(古書) 250여 권이 쏟아진 보림사

 

 

 보림사 대웅전은 국보 제240호였다   

                    보림사 경내 동편에 서쪽을 향하여 세운 정면5칸 측면 4칸 중층 8작 지붕의 큰 건물이었다               

                    내부는 외관과 달리 2층까지 통해서 한방으로 만들고 중앙단상에는 금동석가여래상을 안치하고 있었다

                    아깝게도 한국전쟁 당시 방화로 타버리고 초석만 남아 있다가

                    1982년부터 1984년까지 3년에 걸처 복원된 건물이다.

 

 

해동 선종의 종찰(海東 禪宗의 宗刹)로 대접받는 전라남도 장흥의 보림사는 고즈넉한 매력이 돋보이는 절집이다. 가지산(伽智山 .. 해발 510m) 기슭에 있으면서도 앞과 옆이 확 트여 있는 평지사찰이다. 번창했던 시절에는 천 여명이 넘는 선승들이 수도를 하였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증명이라도 하 듯, 널찍한 경내에는 국보급 유물이 즐비하다.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가운데 가장 먼저 산문을 개창한 '가지산문'의 중심 사찰이었다.

 

보림사(寶林寺)는 통일신라 말기의 사찰로 860년에 ' 보조선사 체징 (普照禪師 體澄) '이 초당(草堂)을 확대하여 지은 사찰로, 통일신라 시대의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이었다.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근본도량으로 인도(印度)의 가지산 보림사, 중국(中國)의 가지산 보림사와 함께 ' 3 보림 (三寶林) '으로 일컬어졌다.

 

 

 

 

 

 

보림사는 한국전쟁 때의 방화로 사천문과 외호문을 제외하고는 모든 당우가 전소되었다. 그러나 사천문에 있는 목조 사천왕상이 보물 제1254호, 대적광전의 철조비로자나불상이 국보 제117호, 삼층석탑과 석등이 국보 제44호, 보조선사 창성탑이 보물 제157호, 보조선사 창성탑비가 보물 제158호, 동부도가 보물 제155호, 서부도가 보물 제156호, 월인석보 권25가 보물 제745-9호 그리고 금강반야밀경이 보물 제1251호, 성교정본자비도량침법 권 제9-10이 보물 제 1543호로 지정되어 있는 등 국보가 모두 2 점, 보물이 모두 8점의 유물이 남아 있어 고찰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국보 제117호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寶林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사천왕문을 들어서 정면에 위치한 대적광전(大寂光殿) 안에 있는 불상으로, 국보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270cm의 거대한 철불(鐵佛)로, 858년에 무주 장사현(武州長沙縣 ... 지금의 광주와 장흥) 부관 김수종(金遂宗 .. 일명, 김언경)이 헌강왕에게 간청하여 그해 8월 왕의 칙령에 의하여 조성되었다. 이 불상은 조성한 연대가 확실하여 당시 유사한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신라말부터 고려 초에 걸쳐 유행한 철로 만든불상의 첫 번째 예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고 한다.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잃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국보 제 44호 보림사삼층석탑및석등(寶林寺三層石塔및石燈)  

 


 탑 속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석탑은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석탑과 더불어 석등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석탑의 구조는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上륜)을 얹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다. 기단부는 여러 장의 장대석(長大石)으로 구축된 지대석(地臺石)으로 놓였는데, 기단의 구성은 상,하층의 통식을 따르고 있으나 상층기단의 갑석(甲石)이 얇고 부연(副椽 ..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얕아서 평판적인 느낌을 준다.


보물 제155호 보림사동승탑  (寶林寺東僧塔) 
 

 

                  

                         경내의 동쪽 숲속에 있는 다른 부도들에 비해 뛰어나 군계일학 같은 승탑이다

                         팔각원당형을 따른 승탑으로서 눈부신 백색의 화강 석재가 조형미를 더욱  돋보이고 있다

 

 보물 제156호 보림사서승탑  (寶林寺西僧塔)    

보림사에서 서쪽으로 1km쯤 떨어진 구석마을에 있는 승탑 2기이다

                         모두 8각 원당형으로 기본형태는 같으나 장식수법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머리 장식은 온전하게 남아있는데 1941년 사리를 두는 장치가 도굴돼 1944년 다시 만들어 놓았다

 

보물 제157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



보조선사 체증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는 사리탑이다

 

                 이 탑은 팔각단당형을 따른 신라 전형의 부도로 높직한 기단위에 탑신과 옥개, 상륜부로 이루어저있다

                  상,중,하대석의 각부에는 구름과 안상 ,연화문등을 장식하고 탑신에는 문비와 사천왕상을 조각하였으며

                  옥개석은 기왓골로 표현하였다

                  탑비에 의하면 신라 헌강왕6년 (880년)에 보조선사가 입적하자 그의 사리탑으로 건립하였음을 알수있다.

보물 제158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은 일반형 석비이다

                            부리부리한 두 눈과 귀갑문 비좌의 운문이 당시의 기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수의 제액에는

                            "가지산 보조선사 비명"이라는 3행 9자가 새겨저 있으며,그 주변의 용틀임도 웅건하다

                            보조선사는 신라 헌강왕 6년(880년)에 77세로 입적하였다     그는 동국선종의 제 3조로

                            왕은 시호를 보조, 탑명을 창성 이라 내렸으며 보림을 시호로써 사액 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신라 헌강왕 10년(884년)에 건립된 것임을 알수 있다

보물 제 1254호 보림사목조사천왕상(寶林寺木造四天王像)

 
보림사 사천왕상을 뽈 때 다리와 팔부분을 유심히 볼 일이다.
팔과 다리 안은 비어 있는 공간이다. 사천왕상의 훼손이 심해 1995년에 보수 복원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때 팔과 다리 안의 빈 공간에서 국보급 희귀문서가 대량으로 쏟아졌다. 무려 250여 권의 고서(古書)들이 발견된 것이다.
사천왕상은 본존불 등의 등쪽을 파고 그 속에 복장유물을 보관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보림사 사천왕상의 경우 발바닥 속까지 임진왜란 이전의 언해본들을 포함한 유물들을 가득 채어 넣은 사실은 매우 보기 힘든 경우이다.

 

월인석보 권25가 보물 제745-9호 그리고 금강반야밀경이 보물 제1251호,
성교정본자비도량침법 권 제9-10이 보물 제 1543호





보림사 사천왕상 복장유물 가운데 임진왜란 이전의 언해본(諺解本)들이 많아 국문학자들이 잔뜩 긴장한 발견이었다. '월인석보 권제25' 그리고 '금강반야바라밀경 권제1' 또 '상교정본자비도량침법 권제9~10'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모두 우리나라 서지학이나 불교사 또는 국어사에 큰 도움을 주는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월인석보(月印釋譜)의 완질본이 24권으로 알고 있었으나 권25가 발견된 사실은 학계의 흥분을 자아내었다. 이로 말미암아 5802장으로 여겨왔던 '월인천강지곡'도 583징까지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월인석보 권제25는 보물 제745-9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보림사 가는

광주에서 화순을 지나 장흥,보성방면 으로 진행하다가(남광주 깃점 30-35분정도)화순군 이양면삼거리 이앙농협주유소 3거리에서 우측으로 13km 정도 진행 하다보며는 장흥 장평면 봉림마을 3거리에 닿는다

 이곳에서 또 우회전 5km정도 가며는 동양3보림인 보림사에 도착한다

 

전화:061-864-2055

 

UN 최우수 관광마을에 신안 퍼플섬·고창 고인돌·운곡습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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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퍼플섬.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유엔세계관광기구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총회에서 최우수 관광 마을에 대한 시상식을 개최했다고 문화체육관광부가 전했다.

전 세계 75개국에서 170개 마을이 응모해 지난 10월 이 기구 선정위원회 심사를 거쳐 최우수 관광 마을 44곳이 선정됐으며, 이 중 우리나라 마을 2곳이 포함됐다.

유엔세계관광기구는 관광으로 지역 불균형과 농촌인구 감소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올해 최우수 관광 마을 사업을 처음 도입했다.

응모 대상은 농업, 임업, 어업, 축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거주자 1만5000명 미만의 마을이다.

한국관광공사는 지난 6월 국내 지자체를 대상으로 공모를 진행해 후보 3곳을 선정하고 현장 실사와 상담(컨설팅)을 거쳐 유엔세계관광기구에 제출했다.

마을 인구 총 130여 명이 거주하는 '신안 퍼플섬'은 평범한 섬이었던 반월·박지도를 일 년 내내 보랏빛으로 물들여 가고 싶은 관광지로 재탄생시켰다.

▲전북 고창 ‘고창 고인돌.운곡습지 마을’.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마을 인구가 총 380여 명인 '고창 고인돌.운곡습지 마을'은 운곡 저수지 개발로 이주한 거주민들이 고인돌과 람사르 운곡습지를 활용한 생태문화 관광을 통해 고령화, 인구 감소 등의 농촌 문제를 해결했다.

한국관광공사는 이번에 최우수 관광마을로 선정된 2곳을 생태환경과 문화유산을 지닌 지속가능한 관광지로 키우기 위해 다양한 관광상품 개발·판촉 지원 및 바이럴 마케팅 등을 추진해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문체부 관계자는 "인구 130여 명이 거주하는 신안 퍼플섬은 평범한 섬이었던 반월·박지도를 1년 내내 보랏빛으로 물들여 가고 싶은 관광지로 재탄생시킨 곳"이라고 설명했다.

또 "마을 인구가 380여 명인 고창 고인돌·운곡습지 마을은 운곡 저수지 개발로 이주한 거주민들이 고인돌과 람사르 운곡습지를 활용한 생태문화 관광을 통해 고령화, 인구 감소 등의 문제를 해결한 곳"이라고 소개했다.

 

https://www.etoday.co.kr/news/view/2083931

 

[뉴스 속의 한국사] 순장자 14명과 함께 묻힌 금관… 大가야의 최전성기 상징  

가야금관의 비밀

 ①호암미술관이 소장한 가야 금관이에요. 대가야 지배층이 묻힌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두번째 사진) 45호에서 출토됐어요. 처음엔 금관의 제작지가 논란이 됐는데, 금관의 부속 금제품(②)이 나중에 지산동 고분군 45호에서 발굴된 부속 금제품(③)과 똑 닮아 가야에서 제작된 것이 확실해졌죠. ④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의 금관 장식. ⑤경주 금관총에서 나온 신라 금관. /문화재청·국립중앙박물관·국립경주박물관·오세윤 작가
 
경기도 용인에 있는 호암미술관에서 '야금(冶金): 위대한 지혜' 특별전이 열리고 있어요. 호암미술관은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이 30여 년에 걸쳐 수집한 미술품을 바탕으로 1982년 개관한 우리나라 대표적 사립 미술관이에요.

'야금(冶金)'은 광석에서 금속을 골라내거나 골라낸 금속을 정제해서 금속 재료를 만드는 일이에요.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야금 전시품은 바로 '가야금관'으로 불리는 금관입니다. 1971년 국보(國寶)로 지정된 이 금관은 이 선대 회장이 매일 출근할 때 밤새 잘 있었는지 물어봤을 정도로 가장 애지중지한 소장품이었다고 합니다. 대체 어떤 유물이기에 그리 아꼈을까요?

신분과 권위의 상징 '금관'

머리에 쓰는 관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분과 권위를 상징하는 역할을 하지요. 멀리서 봐도 재질과 형태 등으로 신분을 곧바로 드러내거든요.

지금까지 발견된 우리나라 금관은 모두 8점이에요. 그중 가장 많은 것은 신라 금관으로 6점이에요. 모두 5~6세기 때 신라 고분에서 출토됐어요. 일제강점기인 1921년 발굴된 금관총을 시작으로 금령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에서 잇따라 금관이 나왔지요. 나머지 두 점은 가야 시대 금관으로, 하나는 호암미술관에, 하나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있습니다.

고구려는 순금 금관은 없고 청동에 금을 입힌 금동관만 남아 있어요. 백제는 '검은 비단에 금꽃으로 장식했다'는 금관 관련 기록만 있었는데, 1971년 공주 무령왕릉에서 얇은 금판을 오려 만든 금관 장식이 출토됐어요.

신라 시대 금관들은 머리에 두르는 테두리에 가지 달린 나무를 형상화한 '출(出)자' 모양과 사슴뿔 모양 세움 장식들이 붙어 있어요. 또 테두리 아래엔 긴 드림 장식이 귀걸이처럼 늘어뜨려져 있어요. 가장 먼저 발굴된 금관총 금관은 높이가 44.4㎝(드림 장식 포함)예요.

신라 금관에 비해 호암미술관의 가야 금관은 높이 11.5㎝, 밑지름 20.7㎝로 크기가 훨씬 작아요. 그리고 머리에 두르는 띠 위에는 꽃 모양 장식 4개가 붙어 있는데, 신라 금관의 출(出)자 모양 장식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워요. 화려하고 웅장한 신라 금관과는 다른, 서정적인 분위기랍니다. 미술관은 이 금관과 함께 금관에 붙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원형·반구형 등 금제 장식과 귀걸이·반지 등도 함께 보관하고 있어요.

우연히 풀린 금관의 비밀

호암미술관에 있는 금관이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호암 수집 문화재 특별전'에서 처음 공개됐을 땐 금관 제작지가 어딘지 의견이 분분했어요. 1960년대 초 경찰에 붙잡힌 도굴꾼들이 대가야 때 조성된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순금관을 파냈고 이를 장물 업자를 통해 이병철 회장에게 팔았다고 털어놨어요. 그래서 이 금관이 가야 금관이란 의견이 있었지만, 당시 가야가 이런 금관을 만들 정도로 왕권이 강하지 않았다며 신라 초기의 금관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지요.

사실은 우연한 계기로 드러났답니다. 바로 미술관이 금관과 함께 보관하고 있던 부속 금제품이 결정적 단서가 됐어요. 1977년 계명대박물관이 고령 지산동 고분군 가운데 45호 고분을 발굴했어요. 이 무덤은 발굴 전 이미 도굴꾼들이 휩쓸고 가 토기나 철기 정도만 남아 있었는데, 도굴꾼들이 실수로 작은 금제품들을 남겨놨고 그걸 고고학자들이 찾은 거죠.

고고학자들이 찾은 작은 금제품 중 귀걸이가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금관 부속품 금귀걸이와 쌍둥이처럼 닮은 거예요. 이 금귀걸이들은 누금(鏤金·금실이나 알갱이를 붙여 장식하는 세공 기술) 기법으로 화려하게 꾸몄고 속이 빈 금구슬 장식을 덧붙인 독특한 것이었어요. 결국 호암미술관 소장의 금귀걸이가 지산동 45호 고분에서 도굴된 것으로 추정되면서 금관도 가야 것으로 여겨지는 거예요.

금관에 10여 명 순장자까지… 주인은 누굴까

금관이 나온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가야 연맹의 하나였던 대가야(大伽倻)의 지배층이 묻힌 무덤군으로, 현재까지 700여 기가 확인됐어요. 1세기 김수로가 한반도 남쪽 낙동강 유역에 세운 가야는 작은 나라들로 이뤄진 연맹 국가였어요. 초기엔 금관가야가 주도했지만, 후반에는 대가야가 중심 세력이 됐죠.

높은 구릉 위에 커다란 고분들이 밀집해 있는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의 최전성기를 보여주는 듯해요. 특히 금관이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45호 고분은 봉토 지름이 23m에 달하고, 무덤에선 14명이나 되는 순장자의 흔적이 확인됐어요. '순장(殉葬)'은 권력자가 죽으면 노예나 하인 등을 함께 매장하는 걸 말해요. 바로 옆 44호 고분(37명) 다음으로 많은 순장자 수라고 합니다. 금관까지 썼고 많은 순장자와 함께 묻힌 무덤 주인은 대가야의 왕이나 왕비였을 수 있어요.

삼국시대 국가들이 이렇게 거대한 무덤을 경쟁적으로 만든 건 현세에서의 삶이 죽어서도 이어진다는 '계세(繼世) 사상'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신라는 6세기 초 이후 대형 고분도 점차 사라지고 순장도 폐지했어요. 대신 현실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 산성을 축조하고 군사력을 키웠죠. 하지만 가야는 여전히 종전 장례 풍습을 고수했어요. 500년 넘게 번성하던 가야가 결국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한 이유도 어쩌면 이런 시대적 흐름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금관의 나무 장식, '수목 숭배' 보여줘요]

만들어진 국가와 상관없이 금관에는 나무나 꽃 모양 장식이 많아요. 그건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수목(樹木) 숭배' 사상과 관련이 있대요. 수목 숭배는 나무가 죽은 자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자 생명이 내려오는 장소라고 생각해 신성시하는 거예요. 넓게는 '식물 숭배'라고도 해요.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하늘에서 처음 지상으로 내려온 곳이 신단수(神壇樹)라는 나무 아래였던 것도 이런 사상을 보여주죠. 그래서 고귀한 신분이 쓰는 금관에 나무 장식을 했다는 거예요. 마을 어귀 나무 앞에 돌 무더기를 쌓아놓고 비는 '서낭당' 역시 이런 수목 숭배를 보여줘요. 서양의 크리스마스트리도 나무가 나쁜 기운을 물리쳐주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은 데서 시작했다고 해요.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기획·구성=김연주 기자
http://newsteacher.chosun.com/site/data/html_dir/2021/12/01/2021120102702.html

관청 노비에서 일약 세종대왕의 후궁으로…조선 최고의 신데렐라

 이기환의 ‘하이-스토리’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페이지 - 경향신문

경향신문 역사 스토리텔러

www.khan.co.kr

 

 

역사는 히스토리, 히스토리는 이야기입니다.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보는 코너, 이기환의 ‘하이-스토리’ 시간입니다.

세종을 흔히 만고의 성군이라고 합니다.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업적과 함께 세종의 일거수일투족도 인구에 회자되었죠. 그렇다면 세종을 둘러싼 여인들은 어떨까요. 한번 알아볼까요?

 

세종은 2살 연상의 소헌왕후 심씨(1395~1446)를 비롯해서 모두 여섯분의 부인을 두었습니다. 정부인인 소헌왕후와의 사이에는 8남 2녀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영빈 강씨(1남)·신빈 김씨(6남)·혜빈 양씨(3남)·숙원 이씨(1녀)와 궁녀인 상침 송씨(1녀) 등 다섯분의 부인들이 더 있었고, 그 분들과의 사이에 10남2녀를 더 두셨습니다. 슬하에 총 18남4녀를 두신 거죠.

경기 화성 남양동에 있는 신빈 김씨의 묘. 경기도 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여종에서 정1품 빈(신빈)으로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보죠.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국모(중전)의 자리에 오른 대가로 친정이 멸문지경에 빠진 소헌왕후 심씨 보다는 후궁들의 신세가 오히려 행복했던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행복한 세종의 여인은 신빈 김씨(?~1464)가 아닐까요.

 

신빈 김씨는 세종의 자식을 8명이나 낳은 분입니다. 그중 두 명의 딸은 일찍 죽었지만 남은 6명은 모두 왕자였습니다. 계양군(1427~1464), 의창군(1428~1460), 밀성군(1430~1470), 익현군(1431~1463), 영해군(1435~1477), 담양군(1439~1450) 등입니다. 자식들의 출생연도를 봐서 짐작하겠지만 신빈 김씨는 1427년부터 1439년까지 12년만에 아들만 여섯분 두었으니 세종의 사랑이 지극했음을 알 수 있죠.

세종대왕과 그 부인들. 정부인인 소헌왕후와 8남2녀를 낳았고, 5명의 후궁들과 10남 2녀를 두었다. 그중 내자시 여종 출신인 신빈 김씨와 6남을 두었다.|출처:두피디아

그런데 뭐 요즘 말로 치면 신빈 김씨는 그야말로 신데렐라라 할 수 있어요.

왜냐면 신빈 김씨의 신분이 원래 내자시의 여종이었기 때문입니다. 내자시는 대궐에서 쓰는 물품을 관장하는 관청이죠. 천민에서 일약 내명부 정1품인 후궁(빈)으로 출세했으니까 신데렐라 소리를 들어도 돼죠.

 

신빈 김씨는 바로 그 관청의 종이었는데, 13세의 나이로 세종의 어머니(원경왕후 민씨·1365~1420)에 의해 중궁전으로 발탁됩니다.

 

신빈 김씨의 출세기는 <세종실록> 1439년 1월27일자에 자세하게 나와있는데요. 세종의 육성입니다. 세종은 “소의(정2품) 김씨를 귀인(종1품)으로 올리고 싶다”고 도승지 김돈(1385~1440)에게 의견을 구합니다.

 

“김씨의 천성이 부드럽고 아름다워…중궁(소헌왕후)이 막내아들(영응대군)을 기르게 했다. 성품이 근신하지 않았다면 중궁이 하필 소생 아들을 기르게 했겠느냐.”

남편 세종과 함께 묻힌 소헌왕후(경기 여주 영릉). 원래 왕후가 될 수 없었지만 지아비인 충녕대군이 임금이 되면서 중전으로 책봉됐다. 그러나 외척의 발호를 염려한 상왕 태종에 의해 친정 아버지(심온)가 죽임을 당하는 등 친정이 멸문지경에 빠졌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소헌왕후가 막내아들(영응대군)의 교육을 맡길만큼 신빈 김씨의 심성이 고왔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소헌왕후가 천민 출신인 신빈 김씨한테 아들 교육을 시켰으니까요. 그리고 세종은 김씨를 칭찬하면서 “예부터 궁녀의 세계(世系·조상으로부터의 계보)엔 본래 귀천이 없었다”면서 “노래하던 아이를 궁중에 들인 자도 있고, 일찍이 남을 섬기다가 궁중에 들어온 자도 있었다”고 길게 부연설명합니다.

그러면서 “김씨의 계보는 비록 천하지만 겨우 13세에 궁중에 들어왔으니 이후에 쌓은 부덕(婦德)은 바른 것”이라면서 “과인이 김씨를 빈(嬪)이나 귀인으로 승격시키고자 한다”고 의견을 물었습니다.

 

이때 도승지 김돈은 “셋째 부인 이하는 계보의 귀천을 따지지 않았다”면서 “김씨를 귀인으로 삼아도 하등 문제될 게 없다”고 동의합니다. 훗날 김씨는 내명부 정1품인 신빈으로 승격합니다.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했을 때 신빈 김씨는 ‘선왕의 후궁들은 머리를 깎는다’는 풍습에 따라 비구니가 되었어요. 지금 같으면 말도 안되는 일이죠. 선왕의 부인들이 대궐에 남아있으면 헷갈린다는 거에요.

 

지금 임금이 선왕, 즉 아버지의 부인에게 마음을 두게되면 그것은 패륜이 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머리를 깎게 했답니다. 그러나 단종이 즉위한 1452년에 특별히 “신빈 김씨만은 머리를 길러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신빈 김씨는 “환속해도 좋다”는 조정의 결정을 따르지 않습니다.

보물 2049호 ‘청송 찬경루’. 청송 군수 하담이 1428년 객사와 함께 이에 부속된 관영 누각으로 처음 건립했다. 청송이 당시 왕비였던 소헌왕후와 그의 가문 청송심씨의 관향임을 들어 관찰사 홍여방이 그 은덕을 찬미하며 찬경루라 이름 지었다.|문화재청 제공

그만큼 절제하고 조신하는 성격이었다는 겁니다. 그 덕분에 훗날 왕위에 오른 세조는 1458년(세조 4년) 신빈 김씨가 목욕을 하러 강원도를 방문하자 “강원도 관찰사는 군자미 5석을 신빈에게 주라”는 명까지 내립니다. 그리고 신빈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1464년·세조 10년) 쌀과 콩 70석을 부의(賻儀)로 하사합니다.

 

신빈 김씨가 태어난 해가 언제인지 기록되어 있지는 않아요. 그러나 세종의 어머니인 원경왕후(1365~1420)는 태종의 재위(1400~1418) 중에 13살이던 내자시 여종을 중궁전으로 불렀다는 거니까 1400년대 초반에 태어났겠죠. 신빈 김씨가 1464년 세상을 떠났으니까 당대로서는 장수한 편인 60대 초반까지 사셨던 겁니다.

■친정이 멸문지경에 빠진 본부인

 

물론 여섯분의 부인 중 최고는 소헌왕후겠죠. 남편(세종)과 낳은 문종·세조·안평대군 등 아들 8명은 물론이고, 그 어렵다는 역법과 산학에 능했으며, 일설에는 훈민정음 창제에도 도움을 줬다는 정의공주까지 낳은 분이죠. 세종의 유전자 또한 뛰어났지만 당연히 어머니인 소헌왕후의 DNA 또한 우월했으니까 똘똘한 자식들을 낳았겠죠. 그러나 소현왕후의 삶이 행복했을까요. 전 ‘아니다’에 한 표 던질게요.

 

돌이켜보면 소헌왕후는 참 기구한 신세였습니다. 심씨는 원래 임금 자리와는 상관없는 태종의 셋째아들 충녕대군과 혼인했잔하요. 그러나 창졸간에 남편이 세자위를 받는 바람에 심씨 역시 세자빈이 되었습니다. 남편의 즉위(1418년)와 함께 왕후의 자리에 올랐지만 행복한 순간은 잠깐이었어요.

 

외척의 발호를 지나치게 염려한 태종(재위 1400~1418)이 소헌왕후 심씨의 아버지인 심온(1375~1418)에게 역모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심온은 자결을 강요받았습니다.(1418년)

 

왕위를 물려받은 세종이었지만 상왕에 올라 군권을 휘두르던 부왕(태종)의 위세에 눌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처가가 멸문지경에 몰렸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역적의 딸’이라면서 당장 중전의 자리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상소가 밧발쳤습니다. 간신히 국모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소헌왕후는 천갈래만갈래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삭이고 국모의 체통을 지켜야 했습니다.

세종이 죽은 부인(소헌왕후)를 위해 지은 <월인천강지곡>(국보 제320호). 석가모니를 찬양하는 노래를 지으면서 “(부인은)~눈에 보이는듯 생각하소서. 귀에 들리는 듯 생각하소서”라는 부인을 위한 비밀 사랑코드를 넣었다는 해석이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그러면서도 소헌왕후는 내명부(궁궐 여성의 조직체계)의 귀감이 되었어요. 성격이 워낙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기강이 엄정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후덕한 소헌왕후의 내조 덕분에 남편인 세종이 최고의 성군이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남편 세종이 훗날 군주의 본보기가 된 것처럼 이상적인 왕비의 ‘롤모델’이 된겁니다.

소헌왕후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1446년(세종 28년) 승하했습니다. 그런데 <세종실록> 1448년 8월4일자를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임금이 만년에 지병이 겹쳐 고생한데다 두 아들(광평대군·평원대군)이 잇달아 죽고 여기에 소헌왕후(부인)마저 승하하여 임금의 마음이 기댈 곳이 없었다. 이에…궁궐 옆에 불당을 두었다.”(<세종실록>)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대궐 옆에 불당을 세운다는 것은 엄청난 반발을 초래하는 거죠. 역시 신료들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평생 부인의 가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나봐요. 황희 정승까지 나서서 “절대 안된다”고 반대했는데, “내가 임금 자리에서 물러나면 되는 거 아니냐”는 양위 소동까지 벌이면서 끝까지 관철시킵니다. 세종은 둘째아들(수양대군·세조)을 시켜 석가모니의 일대기(<석보상절>)를 편찬하게 하고는 이를 한글로 번역하게 했습니다. 불교신자인 소헌왕후를 추모하자는 겁니다. 그렇게 편찬한 <석보상절>을 보고 세종은 583곡에 이르는 노래를 지었는데, 이것이 <월인천강지곡>입니다.

 

돌아가신 소헌왕후로서는 하늘에서 남편의 가없는 사랑에 위안을 삼았을 겁니다. 소헌왕후는 비록 현실의 행복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똘똘한 자식들을 낳았으니 후손들에게는 그나마 다행이겠죠.

지금 소헌왕후의 삶을 반추해보면서 한편으로는 여종의 신분으로 ‘해동의 성군’인 세종의 사랑을 받아 정 1품 후궁이 된 여인(신빈 김씨)의 존재를 알릴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시간을 거슬러 마주하는 창덕궁의 밤, 「창덕궁 달빛기행」 개최

- 4.21.∼6.12. 매주 목∼일요일 / 4.14.(목) 오후 2시부터 예매 중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본부장 정성조)와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최영창)이 추진하는「2022년 창덕궁 달빛기행」이 오는 21일부터 6월 12일까지 매주 목~일요일 창덕궁의 밤을 밝힐 예정이다.
  * 운영시간(회당 25명) ① 19:20, ② 19:35, ③ 19:50, ④ 20:05 (회차당 약100분간)


  「창덕궁 달빛기행」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창덕궁에서 펼쳐지는 대표적인 고품격 문화행사로, 13년째 참여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창덕궁 야간 관람 프로그램이다. 은은한 달빛 아래 청사초롱으로 길을 밝히며 창덕궁 곳곳의 숨은 옛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후원을 거닐며 밤이 주는 고궁의 운치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어 인기가 높다.


  올해 창덕궁 달빛기행은 그동안 야간에 개방하지 않았던 희정당 권역을 포함한 새로운 관람구간을 선보인다.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됐다가 1920년 재건되었으며 문화재청은 중장기 계획을 세워 지속적인 보수⋅정비 중에 있다. 최근 2년여에 걸쳐 창덕궁 희정당·대조전 영역의 전등과 전기시설을 현재의 안전기준에 맞게 보수⋅재현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며, 이러한 결과물의 일부로 야간에 불을 밝힌 희정당의 모습을 이번 창덕궁 달빛기행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1920년대 당시 희정당을 밝혔던 각종 근대식 조명과 중앙 홀에 자리 잡은 화려한 샹들리에, 재정비된 근대식 응접실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이번 달빛기행만의 특별함을 선사할 것이다.
  * 희정당은 대조전과 더불어 조선 시대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창덕궁의 내전에 속하며, ‘밝은 정사를 펼치다(熙政)’는 의미를 담고 있는 전각. 편전(便殿)인 선정전이 종종 국장(國葬)을 치르는 공간으로 사용되면서 희정당은 업무보고, 국가정책 토론 등 왕의 집무실로도 활용됨


  또한, 낙선재 후원 내 상량정에서는 대금의 청아하고도 깊은 소리를 도심의 야경과 함께 즐길 수 있으며, 달빛기행의 묘미인 부용지와 주합루의 풍경을 배경으로 후원을 찾은 국왕과 왕비의 산책 모습도 만나볼 수 있어 살아있는 궁궐의 모습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애련정과 애련지 권역의 가곡 공연에 이어 연경당에서는 효명세자를 주제로 한 전통예술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달빛기행 관람 후에는 창덕궁의 아름다움을 담은 변온 머그컵과 궁중약차를 기념품으로 제공한다. 특히, 컵은 뜨거운 물을 부으면 부용지에 달이 떠오르는 형태로 궁중약차와 함께 즐긴다면 관람객들이 창덕궁 달빛기행에 대한 추억을 집에서도 오래도록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올해 달빛기행에서는 참여자들의 안전한 관람과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참여인원을 1일 100명으로 제한하고, 25명씩 소규모 인원이 조별 이동하는 방식으로 안전하면서도 고즈넉한 멋이 장점인 창덕궁의 야경을 특별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2022 창덕궁 달빛기행」입장권은 오는 14일(목) 오후 2시부터 인터파크 티켓(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2004172)을 통해 판매한다. 단, 궁중문화축전 기간(5.10.~22.)의 입장권은 별도 예매를 시행할 예정이다. 1인당 2매까지 사전 예매를 통해 참여할 수 있으며, 1인당 요금은 3만원이다. 만 65세 이상, 장애인, 국가유공자는 회차별 선착순으로 1인 2매까지 전화(인터파크 고객센터 ☎1544-1555)로 예매할 수 있다.
  더 자세한 사항은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누리집(royal.cha.go.kr), 한국문화재재단 누리집(www.chf.or.kr)을 확인하거나 전화(☎02-3210-3503)로 문의하면 된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와 한국문화재재단은 많은 참여자들이 창덕궁 후원을 거닐며 밤이 주는 고궁의 운치를 만끽하고 궁궐의 야경과 어우러진 전통예술공연을 관람하는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지쳤던 몸과 마음을 위로하고 휴식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백두산 정상에 핀 아름다운 야생화 

백두산 서파에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드넓은

초원지대가 펼쳐지는데 특히 6~8월이면 각종 야생화가 만발해 그 생명감을 뽐낸다.

이 백두산 일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트래킹 코스를 따라 1~2시간 정도 여유 있는

걸음으로 환상적인 '자연 화원'을 감상할 수 있다.

출처:https://blog.daum.net/hong50300/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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