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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아름다운 비경 '주왕산' /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다녀간 천년 고찰 '봉정사'/ 국보 '심국유사'가 태어난 '비슬산', 그리고 명승으로 지정된 '영덕 옥계'

문화재방송 2022. 7. 11. 00:01
 
▲ 기암 7개의 봉우리 암석 절벽이다. 주왕산의 대표지질명소다. 주왕산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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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송의 주왕산, 이 곳은 주왕이 은거해서 주왕산이라 불렸다고 한다. 광주에서 무려 4시간 반 거리다. 여행은 정사보다는 전설이나 야사 같은 것이 끼면 재미가 배가 된다. 문화 해설사나 가이드의 설명에 귀를 쫑긋하는 이유다. 주왕산은 우리나라 3대 암산 중 하나다. 높지 않지만 암봉과 수려한 계곡이 빚어내는 절경은 탐방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주왕산은 신라 말부터 주왕이 은거하였던 산이라 하여 주왕산으로 불렸다. 주왕은 중국 당나라 때 주도라는 사람으로 진나라의 회복을 꿈꾸며 반역을 일으켰으나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여 이곳 석병산(주왕산의 옛 이름)까지 쫓겨 왔다. 당나라 왕이 신라왕에게 주왕을 잡아달라 요청하여 주왕은 이곳에서 신라장군 (마 장군 형제들)에 의해 주왕굴에서 최후를 마쳤다.' [자료 출처:청송군청]   

이날 낮 12시, 청송 주왕산에 도착했다. 고대하던 단비가 내린다. '우리 여행을 축복하는 하늘의 선물'이라면서 모두 반긴다. 점심은 주왕산에서 유명하다는 더덕구이 정식이다. 푸짐한 상차림, 더덕의 향기가 입안에 가득 찼다. 막걸리에 묵무침을 가득 입에 넣었다. 피로가 확 풀리는 기분이다.  

6월 5일 1박 2일 버스투어, 운전하기엔 먼 거리라 자가운전은 포기했다. 청송, 안동, 경산, 대구 등 경북 일대를 돌아보기 위해서다. 쭉쭉 뻗은 도로, 아름다운 다리, 둥둥 떠 있는 산 같은 섬, 운무가 깔린 섬 같은 바다... 여행을 나서면 마음이 설렌다.    
설악산, 월출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암산이라는 주왕산은 정상의 높이가 해발 721m다. 주왕산 탐방은 7코스가 있다. 완만한 '주왕계곡 코스'를 택했다. 용추계곡까지다. 초행길이라 무리해서는 안된다는 가이드의 당부도 당부지만, 비가 내려서 위험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기암, 내려다보는 것보다도 올려다보는 것이 기괴하고 신비스럽다. 기암은 기이한 바위라는 뜻도 있지만 주방계곡 초입에 있는 7개 봉우리의 암석 절벽이다.  주왕산을 대표하는 지질 명소다. 서로 감싸고 받쳐주며 오랜 세월 서로를 지탱, 위용을 떨치고 있다. 

대전사 위쪽 탐방로에 들어섰다. 계곡 변을 따라 조성된 흙길이다. 산행이라기보다는 산책처럼 편하다. 재미있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작은 돌로 만든 돌탑들, 큰 바위가 무너지지 않도록 작은 나뭇가지들로 만든 받침대... 마치 아이들이 소꿉놀이하는 것 같다. 소원을 빈다기보다는 산행 즐기기의 일환이 아닐까.  
   
▲ 용추협곡 용이 하늘로 승천한 웅덩이를 뜻한다고 한다. 주변에는 수직 절리가 있고 용추 폭포 등 아름다운 비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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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살피며 걷는 사이 용추 협곡이다. 기암과 계곡, 용추폭포가 한 폭의 수채화다. 폭포가 흘러 운반한 듯 토사가 쌓여 삼각주(?)를 만들었다. 작은 협곡은 왼쪽으로 시루봉, 오른쪽으로는 학소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주왕산 주방계곡의 지하 성부터 용추폭포까지 1km의 구간이 용추 협곡이다. 용추란 용이 하늘로 승천한 웅덩이를 뜻하고 협곡은 암석이 양쪽으로 높이 서있는 좁고 깊은 골짜기를 뜻한다. 
   
▲ 시루봉 생김새가 떡을 찌는 시루와도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람의 옆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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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아래로 둥근 웅덩이와 세 개의 굴이 눈에 띈다. 자연이 만들어 낸 결과다. 마주 보고 있는 암석이 사람 얼굴과 흡사하다. 코를 맞대고 스킨십을 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학소대는 절벽 위에 청학과 백학 한 쌍이 둥지를 짓고 살았다 하여 불린 이름이다. 시루봉은 그 생김새가 시루와 같다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그런데 옆에서 바라보면 얼핏 사람의 옆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밖에도 연화굴, 주왕굴 등 수많은 전설과 이야기가 있는 주왕산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 지질 공원이기도 한 청송 주왕산을 단 몇 시간에 보고, 느끼고 평가한다는 것은 산에 대한 결례와도 같다.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다양한 지질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국립공원 주왕산. 그 백분의 일도 보지 못했지만, 어느새 그득해진 한편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 봉정사대웅전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친 재료의 꾸밈없는 모양이 고려말·조선초 건축양식을 잘 갖추고 있고 앞쪽에 쪽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자료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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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에 이어 다음 행선지는 안동 봉정사다. 신라 문무왕 12년(672)년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 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천년 고찰 봉정사는 국보 2점과 많은 보물 등을 보유하고 있다.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중 한 곳으로 2018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봉정사는 봉황이 머물다 갔다 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안동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방문이 쉽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국보 333점 중 2점이나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극락전은 어떤 모습이고 어떻게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을까.

일주문을 지나니 완경사의 돌계단이다. 오솔길 걷는 느낌도 들고, 전통 사대부 고택을 들어서는 기분도 든다. 닳은 대로 닳은 문지방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준다. 사찰 입구 전각인 만세루다. 누문 위로 대웅전이 뻐끔히 모습을 드러낸다.

조선 초기의 건축 기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라는 대웅전은 다포집 계통의 대표적 건축 양식이라고 한다. 다포집은 각 기둥머리 위 공간에 공포(처마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 쪽)를 짜 올린 집을 말한다.

기둥이 낮고 칸이 넓어 안정감 있어 보인다. 용마루가 반듯한 직선형이고 처마 끝이 급하게 들어 올리지 않은 탓일까. 만세루 누문에서 바라본 모습이 새가 비상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편안한 형태다. 
   
▲ 극락전 우리나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라고 한다. 신라 문무왕 때 창건하여 고려 이후 수차례에 걸쳐 증수한 기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특히, 극락전은 우리나라 목조 건축물의 건축기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하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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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정사 대웅전 측면, 가운데가 화엄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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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승려들이 공부하는 장소로 온돌방 구조인 화엄강당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무량 해회가 위치한다. 대웅전 왼쪽 건물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극락전이다. 고려 초기의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이다. 맞배지붕은 지붕의 옆면이 수직으로 잘린  '∧' 자 모양으로 된 지붕을 말한다.

지금은 생소한 대패, 끌, 톱, 먹줄 등은 어렸을 때 흔히 보던 연장들이다. 목수가 나무에 먹줄을 튕겨 이리저리 재는 모습을 자주 보곤 했다. 텃밭 담벼락 가에는 가죽나무를 심어 집 지을 때 기둥으로 쓰거나 툇마루를 놓았다. 고향은 한옥이 대부분이었다.

고찰 경내를 돌다 보니 어렸을 때 기억이 떠올라 잠시 상념에 빠진다. 불편하다고만 생각했던 생활공간들이 얼마나 역사적 가치가 있는지 새삼 생각게 한다. 다만 다포집, 공포, 맞배지붕 등 목조건축물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국보와 보물 등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봉정사 관람은 만시지탄이지만 나에게는 더없는 보람이었다. 산사, 고택, 한옥마을 등 선조들이 남긴 위대한 문화 유산 들을 찾아봐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했다. 관심을 갖고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안동 방문한 영국 앤드루 왕자, 20년 전 여왕 따라 걷다

 

  •  대구경북기자협회
  •  승인 2019.05.15 10:36
  •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차남 앤드루 왕자가 1999년 어머니가 안동에 다녀간 지 20년 만에 안동을 방문했다. 출처=경북도민일보 홈페이지(경북도 제공)

지난 14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차남인 앤드루 왕자가 안동을 방문해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다.

여왕이 방문한 지 20년 만에 다시 안동 하회마을을 찾아 어머니가 걸었던 길을 따라 걸었다.

지역 언론은 5월 15일 자 1면을 통해 해당 소식을 비중있게 다뤘다. 

각 언론사 기사에 따르면 이날 오전 11시 경북도청에 도착한 앤드루 왕자는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함께 기념식수를 하고 로비에 전시된 작품을 관람했다. 

이어 하회마을로 이동한 왕자는 충효당에서 권영세 안동시장과 인사를 나눈 후 취재진과 관광객들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충효당으로 들어가 사랑채를 둘러본 앤드루 왕자는 충효당 종손의 설명의 들으며 한옥의 고풍스러움과 내력에 감탄했다.

여왕 방문 당시에는 여왕이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충효당 마당으로 나온 그는 20년 전 어머니가 충효당 마당에 심은 구상나무 그 옆에 세워진 ‘The Royal Way’표지판을 보며 관계자들의 설명을 들었다.

앤드루 왕자는 인근 담연재로 이동해 20년 전 여왕이 받은 47가지 전통 궁중음식으로 차린 여왕 생일상을 대신 받았다.

궁중에서 임금에게만 올리던 봉황 모양의‘문어오림’과 매화나무로 만든 꽃나무 떡 등 47가지의 전통음식이 차려졌다.

생일상 앞에 선 왕자는 다양하면서도 화려한 상차림에 놀라움을 표하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영국에서 가지고 온 여왕의 메시지를 대신 낭독했다.

낭독 후 여왕과 생일이 같은 참석자 등과 함께 다과를 시음한 후 권 시장은 왕자에게 색색이 물들인 ‘안동한지’를 선물했다. 

합창단과도 선물을 교환한 앤드루 왕자는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학록정사로 이동했다.

학록정사에서는 오찬을 하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탈놀이인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전통혼례 시연을 관람했다.

이어 안동농수산물도매시장으로 자리를 옮긴 왕자는 사과선별과정과 경매 시연을 관람하고 천년 사찰 봉정사로 향했다.

왕자는 범종을 타종한 뒤 돌탑을 쌓고 대웅전과 극락전을 살펴봤다.

극락전으로 들어갈 때 그는 여왕이 그랬던 것처럼 신발을 벗어 눈길을 끌었다.

왕자는 안동 방문의 마지막 장소로 세계기록유산인 유교책판이 보관된 한국국학진흥원을 찾았다.

앤드루 왕자는 유교책판이 보관된 장판각을 관람하고 특히 퇴계집 책판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관심을 나타냈다.

장판각을 관람한 후 퇴계 이황이 써 선조에게 올렸다는 성학십도 유교책판 인출을 직접 체험했다.

안동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한 앤드루 왕자는 권영세 안동시장과 유림, 시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헬기에 몸을 실었다.

英 앤드루 왕자 메시지.
“어머니께서 다녀가셨던 길을 이렇게 제가 다시 걷게 돼서 너무 기쁘다. 과거에 저희가 같이 했던 일을 다시 축하하는 기회를 만든 것은 양국관계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다음은 영국여왕의 메시지.
“나는 나의 아들 왕자가 안동을 방문하게 돼서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 에든버러 공작과 함께 한국을 국빈 방문한 것이 벌써 20년이 지났다. 1999년 나는 한국의 많은 곳을 방문했고 아주 훌륭했다. 특히 나는 1999년 왔을 때 많은 곳을 다닌 곳 중에 특히 하회마을에 와서 73세 생일상을 받은 것을 저는 정말 깊이 기억하고 있다. 앞으로도 하회마을 주민들과 안동시, 경상북도 여러분들에게 좋은 일만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원문보기

http://www.dgpress.kr/news/articleView.html?idxno=625

 

<국보 제306호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의 자취 깃든 비슬산 기행

 

 

<삼국사기>가 사관이 쓴 정사(正史)라면 <삼국유사>는 스님이 쓴 야사(野史)다. 정해진 틀이 있는 유교의 문신귀족이 쓴 <삼국사기>에 견줘 <삼국유사>는 매임이나 걸러짐이 없이 자유롭고 진솔하다.
오늘날 <삼국유사>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다. 만록(漫錄)으로 보기도 하고 미완성 작품으로 여기기도 하며 또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역사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처럼 평가가 엇갈림에도 누구나 크게 인정하는 <삼국유사>의 가치가 있다. 유사(遺事)로서 갖는 특징이다. 정사인 <삼국사기>가 놓친 부분을 <삼국유사>가 제대로 보완하고 있다는 얘기다.
일연(一然, 1206~1289)은 전국을 두루 여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과정에서 얻은 사료의 발굴과 수집, 현지 답사를 통한 유물·유적에 대한 관찰, 사료 검증, 객관적 서술을 위한 배려 등을 고스란히 책에 담았다. 역사가로서 일연의 노력이고 그 결과로 <삼국유사>가 만들어졌다.
유교사관에 젖어 있던 당시 사람들과는 달리 눈길이 기층민의 삶을 따뜻한 애정으로 감싸고 있었음을  때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을지라도 지금 관점에서 본다면 대단한 가치이고 힘이다.
거기에 더해 <삼국유사>를 통해 담아낸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은 권력과 권위, 물질을 지향하는 삶에 찌든 오늘날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바가 크다.
육당(六堂) 최남선(1890~1957)은 일찍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될 경우를 가정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 말했다. 그만큼 매력 있는 역사서가 <삼국유사>다.

 

 

비슬산과 일연은 인연이 깊다. 일연은 지금의 경산(경북)인 장산에서 태어났다. 22세에 승과에 합격해 20년 동안 수도를 거듭하면서 보당암·묘문암·무주암 그리고 인흥사와 용천사를 거쳤는데 이 모두가 비슬산에 있다. 일연이 비슬산에서 묵은 22년 세월이 <삼국유사>의 태동이나 완성과 무관하지 않았다. 일연은 나이 드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경북 군위 인각사로 와서 <삼국유사>를 완성하고 삶을 마무리했다. 일연 스님과 삼국유사의 자취를 따라 떠나는 여행길은 비슬산 유가사에서 시작해 삶을 마친 군위 인각사에서 마감된다.

 

 

- 유가사와 도성암
<삼국유사> 속 관기와 도성의 일화를 떠올리다

 

유가사(瑜伽寺)는 비슬산 천왕봉 기슭인 대구 달성군 유가면에 있다. 827년인 흥덕왕 2년에 도성(道成)이 창건하였으며, 한때는 3000명 남짓 되는 스님들이 머물기도 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탔다. 대웅전 앞에는 인근 원각사터에서 옮겨온 삼층석탑이 있고, 절간 오르는 길목에 승탑들이 있다. 유가사에는 일주문도 불이문도 없다. 대신 돌로 만든 돌문과 돌탑들이 있다.

유가사에서 발길을 돌려 찾아가는 곳은 도성암이다. 982년 성범이 중창한 이곳에는 일연이 지은 <현풍유가사도성암사적>이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널리 알려진 '포산이성(包山二聖)'대목은 이렇다. 관기(觀機)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정했고 도성(道成)은 북쪽 바위 구멍에 자리를 잡아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쯤 됐다.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면서 매양 서로 찾아다녔다. 도성이 관기를 청하려 하면 나무들이 모두 남쪽을 향해 엎어져 마치 환영하는 것처럼 돼서 이를 보고 관기가 갔으며 관기가 도성을 맞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관기는 관기봉으로 남았고 도성은 후세 사람들이 도성암으로 남겼다.
일연은 이어지는 글에서 "두 분 스님이 오랫동안 바위 너덜에 숨어 살면서 인간세상과 사귀지않고 모두 나뭇잎을 엮어서 추위와 더위를 넘기면 비를 막고 앞을 가렸을 뿐"이라면서 "옛날에 은둔생활을 한 인사들의 숨은 취미를 알 수 있으나 본받기는 어렵다"고 적었다.
도통 굴 아래에 있는 도성암 들머리에는 수도에 방해가 되니 말을 삼가라는 안내판이 걸려 있다. 도성암에 들어서자 마당 가운데 삼층석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특별한 것도 없이 무던한 탑이다. 그럼에도 한없이 너그러워 보인다. 빈 공간 때문이다. 비워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발걸음을 대견사지로 돌린다.

 

 

 

- 대견사지
우주를 온 몸으로 끌어안은 듯한 삼층석탑

 

 

비슬산 휴양림을 따라 올라가다 자동차가 갈 수 없는 지점에서 2.5km 정도를 걸어 올라가면 대견사터와 삼층석탑, 조화봉이 기다리고 있다. 비슬산 정상에서 참꽃군락지를 스쳐지나면서 월광봉을 지나 내려와도 대견사지를 만날 수 있다.
9세기 신라 헌덕왕 때 창건된 절이 대견사(大見寺)다. 이제 절터에는 석탑만이 남아 있다. 대견사라는 절 이름에 얽힌 일화가 있다. 중국 당나라 황제가 절을 지을 곳을 찾았지만 마땅한 자리가 없어 상심하고 있다가 어느 날 세수를 하려고 물을 떠놓은 대야에 경치가 아름다운 산이 비춰졌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 대견사 자리였다.
도성암에서 느꼈던 탑에 대한 감흥은 대견사지 삼층석탑(대구광역시유형문화재 제42호)에서 절정에 이른다. 아득한 낭떠러지 끝에 우주를 온 몸으로 끌어안은 듯한 석탑이 우뚝 서 있다. 실제 몸체에 견줘 열 배는 더 웅장해 보인다.
대견사는 일연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라고 한다. 대견사 복원을 진행하고 있는 조계종의 말이다.
역사 기록에 남아 있는 보당암이 바로 대견사라는 얘기인데, 관련 기록이 <동문선>에 나온다고한다. 일연은 보당암에 머물렀는데 여기서 <삼국유사>의 집필을 시작했거나 구상했을 것이다.
절터로는 씩씩하기 이를 데 없는 경남 합천의 영암사지에 견줘도 전혀 모자람이 없다. 구체적 형상에 치중하기보다 상상할 수 있도록 여지를 허락하는 배려도 그 이상의 힘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떤 모습으로 복원될지 궁금하다.

대견사지 옆으로는 남쪽을 향한 우람한 바위들이 겹쳐 있는데, 그 돌 틈에 열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다. 옛날부터 여기서 사람들이 기도를 드려왔고 그 들머리에는 마애불상이 새겨져 있다.
전체 모양이 '유가심인(瑜伽心印)'과 비슷한데 이는 으뜸 깨달음의 순간을 공(空)으로 표현하고 위로는 부처를 형상화하는 극락 만다라의 세계를 나타내는 밀교 문양이다. 여기 나오는 이 '유가'는 아래쪽 산자락에 있는 유가(瑜伽)사에서 한 번 더 확인되고 유가사가 포함돼있는 달성군 유가면에서 한 번 더 볼 수 있다. 유가는 인도에서 말하는 요가이며 요가는 마음 작용의 멈춤과 사라짐, 즉 열반을 뜻한다. 수련 방법으로 유가(요가)는 호흡을 조절함으로써 마음을 가다듬고 바른 이치에 걸맞은 상태에 이름을 일컫는다.
대견사지에서 비탈을 하나 올라가면 진달래 군락지가 나온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명소다. 30만평의 산이 봄이면 진달래로 붉게 물든다. 진달래 축제도 벌어진다.
대견사지에서 비슬산자연휴양림 쪽으로 걸어 내려오다 보면 바위들이 엄청나게 모여 있는 데를 지나게 된다. 여러 갈래 물길이 흘러내리는 듯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바위들이다. 비슬산 암괴류라 하는데 중생대 백악기에 만들어진 커다란 화강암들이다. 길이 2km, 너비 80m, 두께 5m. 바위 덩어리 하나가 지름 1∼2m여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 인흥사지
일연의 법문 듣고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절

 

 

길 끝에 소재사(消災寺)가 있다.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오래된 단풍나무가 인상 깊다. 늦은 가을이면 불꽃처럼 타오른다. 모든 재앙을 사라지게 한다는 소재(消災)와 잘 어울리는 풍경이다.
2000년 대웅전 중수에서 확인된 상량문에 따르면 스님 300명이 머물던 절이었다지만 지금은 대웅전과 삼성각만 남았다.

인흥사(仁興寺)는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이른바 인흥에 절터로 남았다. 일연스님이 영일(지금 경북 포항) 운제산 오어사(烏魚寺)에서 여기 주지로 오자 그 법문을 들으려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는 절이다. 일연스님이 여기로 올 때 이름은 인홍사(引弘寺)였는데 스님이 절을 중창하고 그 크기에 걸맞은 이름을 지어 달라고 임금에게 요청해 인흥사(仁興寺) 현판을 받았다.
마을 이름 '인흥'과 마을 개울 건너에 있는 인흥서원은 인흥사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지금 절터에는 남평문씨 세거지가 있다.
경북 군위군 인각사에 1295년 세워진 보각국사비(보물 제428호)에는 비슬산에서 수행하던 일연스님의 모습이 적혀 있다. 1227년 겨울 선불장(選佛場)에 나가 장원인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한 뒤 포산(包山·비슬산) 보당암(寶幢庵)으로 옮겨 수행했고 1236년 가을 몽고병란이 일어났을 때 같은 비슬산 무주암(無住庵)에 머물 때 '생계(生界)는 줄지 않고, 불계(佛界)는 늘지 않는다'는 화두(話頭)로 참선하다가 문득 깨우쳐 "오늘에야 삼계(三界)가 꿈과 같음을 알았으며, 대지에 터럭 하나만한 장애도 없음을 보았다"고 했다. 말하자면 비슬산은 바로 일연의 득도처다. 그러나 비슬산에 살던 관기와 도성에 관한 '포산이성(包山二聖)'을 도성암사적에서 썼고 22년 동안 수도한 이런저런 암자들은 자취를 찾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경북 청도 운문사와 더불어 <삼국유사>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인흥사(仁興寺)는 이미 허물어져 남평문씨 세거지로 바뀌는 등 그야말로 무상(無常)이 느껴진다.

 

 


- 인각사
<삼국유사>를 탈고한 곳

 

 

군위 인각사로 나설 차례다. 사적 제374호로 기록돼 있고 경내가 경상북도기념물 제80호이기도 하다. 군위는 ‘삼국유사의 고장’을 자처한다. <삼국유사>가 구상되고 준비되고 태동된 데가 비슬산 일대였다면 <삼국유사>를 완성한 곳은 인각사다.
인각사(麟角寺)는 642년(선덕여왕 11년)에 의상 스님이 또는 한 해 뒤에 원효 스님이 창건했다는절인데 여기서 <삼국유사>를 탈고한 일연스님은 여기서 두 차례 구산문도회(九山門徒會)를 열었다.
인각사에 있는 같은 보물 제428호인 보각국사 정조지탑(靜照之塔)은 일연스님의 승탑이다. 중대석에 동물상, 상대석에 연꽃무늬가 있으며 탑신에는 '보각국사정조지탑'과 사천왕상과 보살상을 새겼다. 이밖에도 석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9호), 미륵당석불좌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6호) 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7호) 등이 있다. 인각사는 아직 터만 넓고 제대로 된 건물이 적어 휑뎅그렁한 편이다. 여러 차례 발굴이 이뤄졌는데 유물이 많이 나왔다. 인각사 전시관과 일연학(一然學)연구소도 있다.
인각사에서 좀더 올라가면 일연공원이 나온다. 2010년 11월 준공됐다.

머리에 이고 있는 군위다목적댐 아래에 놓여 있는 공원인데 일연 스님과 <삼국유사>를 중심 주제로 삼아 만들어졌다.
일연 스님의 글은 "자신의 기억이나 지식으로 소화된 자료들을 주관적으로 엮어 서술"하는 대신, "당시 나라 안팎 여러 고전 문헌들에서 폭넓게 인용"해 쓴 부분이 많다(<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중).
자료와 문헌을 찾아내는 데 그만큼 정성을 쏟아부었다는 의미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중국 고전만 해도 27가지고, 우리나라 고전은 책명이 확실한 것만도 50가지 안팎, 고기(古記)·향기(鄕記) 약칭 또는 범칭으로 표시한 문헌은 매우 많으며 비문(碑文)이나 옛 문서에서 끌어쓴 대목도 많다. <삼국사기>가 담지 못한 '가락국기'를 요약해 남기기도 했다. 일연이 뚜렷한 목적의식에 따라 <삼국유사>를 썼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가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앙리 144, 문의: 053-614-5115) 대견사지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용리 산1, 문의 : 053-668-3161) 비슬산 자연휴양림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용리 산10정자, 전망대, 산책로, 등산로, 물놀이터, 어린이놀이터 등이 있으며 숙박시설로는 통나무집, 콘도형, 청소년수련장, 양영데크 40개소, 텐트장 120개소 등을 갖추고 있다. 문의 : 053-614-5481) 소재사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용리 4 문의 : 053-614-5481) 인흥사지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 인각사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612, 문의 : 054-383-1161)

 

 

비슬산 이름의 유래

 

일연스님은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승려이다. 가지산문은 신라 말기 도의선사가 전남 장흥군 가지산 보림사를거점으로 산문을 일으켰다. 도의선사는 우리나라 선종의 원조로 꼽힌다. 선종의 흐름은 고려시대 3대 종파 가운데 하나인 유가종으로 이어졌는데 여기에 일연스님이 있었다. 비슬산 자락에 있는 유가사나 유가사가 들어 있는 지역 지명인 유가면에서 자취를 느낄 수 있다.
비슬산은 그 이름에서도 신비로운 냄새가 난다. 신라시대 인도 스님들이 와서 산을 보고 '비슬(琵瑟)'이라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비슬은 인도의 범어(梵語) 발음을 그대로 소리로 옮긴 것인데, '덮는다'는 뜻으로 한자로 쓰면 포(苞)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포산'이라 했고 지금도 일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포산을 쓴다. 의병장으로 이름높은 망우당(忘憂堂) 곽재우(1552~1617)의 본관이 바로 포산인데, 유가면 바로 옆 현풍면을 이른다. 그런데 일연은 <삼국유사>에 주(註)를 남겨 "그 지역 사람들은 소슬산(所瑟山)이라 불렀다"고 적었다. '소슬'과 '비슬'은 통하는 바가 있다. 소슬은 '솟다'에서 왔고 비슬은 '(닭)벼슬'에서 왔다. 둘은 공통점이 있다. 우뚝하다, 둘레에서 가장 높다는 것이 그것이다. 비슬산은 둘레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뜻이 담겼다.

 

 

 

 

지정일: 2022. 2. 25.

기암괴석에 둘러싸인 신비로운 계곡

경북 영덕군 달산면에 자리한 영덕 옥계 침수정 일원은 예로부터 빼어난 경관으로 문인들의 글과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또한 ‘남반구북옥계(南盤龜北玉溪)’라 하여 『달산면지(達山面誌)』에서도 동남부의 ‘제일가경(第一佳境)’으로 꼽는 경승지였다. ‘옥계’라는 이름은 옥같이 맑고 투명한 물이 흐르는 계곡이란 뜻으로 그 이름에 걸맞은 풍광을 자랑한다. 맑고 깨끗한 물살이 갖가지 모양의 기암괴석을 만나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돌아드는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옥계는 계곡의 중심에 있는 침수정(枕漱亭)에서 절정을 이룬다. 침수정은 조선시대 침류재(枕流齋) 손성을(孫 聖乙)이 정조 8년(1784)에 지은 정자로 손성을은 세심대, 구정담, 탁영담, 부연, 삼귀담, 병풍대, 학소대 등 주변 계곡과 암벽의 지형지물 37곳에 이름을 지어 ‘옥계 37경’으로 삼았다. 침수정의 건너편 기암절벽에는 ‘산수 주인 손성을(山水主人孫聖乙)’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 돌개구멍: 암반의 오목한 곳에 물이 소용돌이치면 모래나 자갈이 함께 섞여 암반을 마모시키며 만들어진 구멍


오늘날까지 간직된 산수화 같은 경관

보물 〈청구도(靑邱圖)〉에서도 ‘옥계’가 표시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청구도는 김정호(金正浩)가 순조 34년 (1834)에 제작한 전국 조선전도이다. 18~19세기 여러 문인들의 시와 기문에 침수정과 옥계 일대의 경관이 묘사 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산수화 같은 경관을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어 선조들이 자연을 누리는 방식을 이해하는 자료로서 역사 문화적 가치 또한 뛰어나다. 침수정 주변의 소나무가 우거진 수림 속에는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등이 자리하고 있어 경관을 즐길 수 있고, 암벽 사이에는 희귀·멸종위기 식물인 ‘둥근잎꿩의비름’ 자생지가 형성되어 있는 등 생태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정리. 편집실 자료. 천연기념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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