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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무패를 자랑하던 조선 수군 전멸의 현장...거제도와 칠천도 사이 칠천량 기행

문화재방송 2022. 7. 21. 00:01

거제도와 그 서쪽 칠천도 사이의 얕은 바다 칠천량, 우리 역사에서 가장 많은 군인들이 전사한 곳이다. 1597년(선조 30) 7월 16일,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를 비롯한 약 1만여 장수와 수군들이 조총에 맞아, 바다에 빠져, 뭍에 매복한 채 기다리던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그 바다 칠천량, 아직 한 번도 찾은 적이 없다면 '국사에 관심이 많은 국민'이라고 자칭하지는 못하리라.

부산 남쪽 가덕도를 거쳐 거제도로 들어선다. 그렇잖아도 대참패의 현장으로 가는 걸음이라 아침부터 별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는데, 문득 마음이 더 무겁게 가라앉는다. 길이 물 속으로 들어간 탓이다. '가덕 해저 터널'이라고 한다. 전조등을 켜고 달리는데도 콘크리트 벽에 막힌 칙칙한 분위기에 눌려 가슴이 답답하다.

일본왜성의 존재를 우려한 이순신과 원균



왼쪽 사진과 오른쪽 맨 위 사진은 왜성의 특징 중 한 가지인 경사진 성벽을 보여준다. 오른쪽 가운데 사진은 또 다른 특징, 즉 성문 안으로 들어서면 길이 꺾여 있어 적이 입성하는 경우 좌우 성벽 위에서 공격하기 좋도록 설계한 흔적을 보여준다. 맨 아래 사진은 장문포왜성을 찾은 답사자들이 성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모습이다. 장문포왜성(문화재자료 273호)과 송진포왜성은 500m 폭의 바다를 가운데에 둔 채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 두 왜성은 장목만 입구를 막기 위해 축성된 것이다. 사진에서 보는 장문포왜성은 1593년 왜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鳥正則)을 비롯한 7,430명의 일본군이 축성한 후 주둔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차에 실려 물밑길을 가면서도 이런데, 시커먼 바다 속으로 떨어지며 숨을 거두었던 1597년 7월 16일의 선조들은 과연 어떠했을까! 고향에 두고온 가족들의 울부짖음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가는 그 순간, 물 밑으로 가라앉으며 이승과의 인연을 끊어야 했던 그분들의 한 많은 고통....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처참한 현장을 찾아나선 오늘의 일정이 그저 우울할 뿐이다.

가덕도 휴게소에서 얻은 '거제 관광 안내도'를 편다. 가거대교를 넘으면 곧장 만나게 되는 영등포왜성(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산29-2)이 보이지 않는다. 그 다음의 송진포왜성(장목면 장목리 산6-3)과 장문포왜성(장목면 장목리 산130-43)도 없고, 통영으로 가는 거제대교 앞의 견내량왜성(사등면 덕호리 267)도 표시가 없다. 안내도를 만든 거제시 공무원들도 왜성들을 지도에 그려 넣으려니 마음이 답답해졌던 것일까.

안내도에는 없지만, 칠천량 해전의 현장을 답사하려면 그 전에 왜성부터 먼저 둘러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칠천량 해전의 참패가 왜성들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도 원균도 삼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수군통제사로 있을 때 부산 일대의 일본 수군을 공격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는데, 그 역시 왜성들의 존재를 우려한 군사적 결정이었다.


조선 수군의 주력선이었던 판옥선의 모습. 사진은 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에 게시되어 있는 서울대 규장각 소장 각선도본의 일부를 촬영한 것이다.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일본 수군을 격파해야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전쟁 초기만 제외하면 조선 수군은 일본 전선 안택선보다 거대하고 전투 기능도 훨씬 뛰어난 판옥선을 보유한 장점과, 익숙한 지형 지리를 잘 활용한 전술 전략의 구사로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그것만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군 지휘부의 판단은 달랐다. 한산도 대패 이후 일본군이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아놓고 주둔하면서 사정이 전혀 달라졌다. 이제는 수군끼리 바다에서 맞붙으면 되는 전투가 아니었다. 일본 수군의 주력 부대가 있는 부산 근해까지 진출했다가는 맞서서 대항하는 적과, 왜성에서 몰려나와 배후를 공격해올 적에게 저절로 포위가 되어버리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이순신과 원균은 육군이 왜성의 일본군을 공격해주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치는 합동 작전을 주장했다. 선조와 조정의 출전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선조는 이순신을 한양으로 잡아올려 고문까지 했다.

부산 앞바다 공격 명령을 따르지 않은 이순신

▲  삼도수군통제사가 타던 통영상선으로,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군조련도병풍의 일부를 칠천량해전공원전시관이 복사하여 게시해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선조는 1597년 1월 23일 "왜추(고니시 유키나가)가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 부산으로 오는 날짜를 가르쳐주면서 해상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치면 그를 죽일 수 있다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가토를 참수하라는 임금과 조정의 명령을 거부하고 출전도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왜추보다도 못하다, 한산도의 장수(이순신)는 편안하게 누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하고 개탄한다. 드디어 선조는 1월 27일 "그런 사람(이순신)은 청정(가토 기요마사)의 목을 베어 와도 용서할 수 없다"면서 이순신을 죽이겠다는 의지도 천명한다.

정탁 등의 구명 운동으로 이순신은 겨우 목숨을 건지지만 삼도수군통제사는 원균으로 교체된다. 하지만 본래 수군 단독 출전론을 펼쳐왔던 원균도 통제사가 된 뒤 생각을 바꾼다. 원균은 1597년 4월 19일 "지금은 춘삼월이라 비가 오지 않는 까닭에 땅이 굳어 있어 말을 달리고 싸움을 하기에 매우 좋은 때입니다, 반드시 4~5월 사이에 육군과 수군을 크게 일으켜 한판의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하고 장계를 보내는 등 이순신과 똑같은 주장을 고집한다.

수군을 빨리 출전시키라는 선조의 독촉이 도원수 권율에게 하달된다. 그동안 원균은 통제사가 된 지 다섯 달이나 되었는데도 전혀 출전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권율은 원균에게 계속 출전을 미루면 군법의 적용을 받게 될 것이라는 선조의 의중을 전한다. 결국 6월 18일, 원균은 가덕도 앞까지 진출한다.

승패가 확연하지 않은 전투를 마친 원균은 한산도 통제영(삼도수군통제사가 근무하는 군영)으로 돌아온다. 권율이 다시 원균을 불러 '빨리 재출전 하라'고 지시한다. 원균은 여전히 수륙 병진론(육군과 수군이 함께 나아가 일본군의 왜성과 수군을 동시에 공격하는 전술)을 주장하며 권율의 지시를 거부한다. 원균은 무수한 장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권율에게 매질을 당한다.

7월 5일, 마침내 원균은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부산포 앞바다로 출정한다. 하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폭풍우 때문에 싸워보지도 못한 채 가덕도, 서생포(울산) 등 육지 쪽으로 밀려난다. 가토가 주둔한 서생포왜성 등 뭍에서 기다리던 일본군들은 지쳐서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조선 수군들을 무참히 살해한다.



▲  '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의 내부 모습


원균의 주력 부대는 거제도와 칠천도가 파도를 막아주는 칠천량 바다에 정박한다. 원균이 한산도까지 가지 않고 그 중간인 칠천량에 머문 것은 신속히 전투를 재개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권율은 '더 빨리 재출전을 하겠다'고 속시원하게 나오지 않는 원균에게 또 다시 매질을 한다.

원균은 곤장을 맞고 돌아와 분을 삭이지 못한다. 이때 경상우수사 배설은 "이곳 칠천량은 좁고 물이 얕아 크고 무거운 판옥선이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왜적이 기습을 해오면 우리가 아주 불리하니 넓고 깊은 한산도 쪽으로 가서 전열을 정비한 다음 전투를 재개해야 승산이 있을 것이외다"라는 취지의 진언을 한다.

경상우수사 배설 "칠천량은 우리가 싸우기에 불리한 곳"

원균은 "한산도까지 물렀다가는 재공격 시기가 늦어지니 전투 이전에 내 목부터 먼저 떨어질 것"이라며 배설의 의견을 묵살한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7월 22일자 기사를 보면, 배설은 7월 15일 원균에게 "촉박한 출전 명령을 따르다가는 우리 군사들을 모두 죽이게 됩니다, 장수들이 명령 불복종으로 처형될지언정 죄없는 병사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을 수는 없소" 하며 버틴다. 그러나 권율로부터 '(원균이 출전하지 않으면) 나라에 법이 있고, 나(선조) 역시 사사로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임금의 말을 전해들은 원균은 칠천량 주둔을 강행한다.

다음날인 7월 16일 오전 4시, 일본군이 칠천량 전체를 에워싼 채 기습을 해온다. 그때까지도 조선 수군은 얕고 좁은 칠천량 바다에 미동도 없이 머물러 있었다. 조선 수군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비가 퍼붓는 캄캄한 밤, 바다에서도 포위되었고, 요행히 뭍으로 도망쳐 올라와도 왜성에서 쏟아져나온 일본 육군들이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데...


▲  칠천도(왼쪽)와 거제도(오른쪽) 사이의 좁고 얕은 바다 칠천량. 사진은, 해전에서 살아남은 조선 수군이 육지로 올라와도 왜성에서 나온 일본 육군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  원경으로 거제도가 보이고, 그 사이 칠천량 바다가 있고, 오른쪽으로 칠천도의 일부(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이 있는 부분)가 보이는 풍경


이제 칠천량 해전의 최종 결말을 보자. <조선왕조실록> 1597년 7월 22일자 기사는 선전관(전투 감독관)으로서 원균의 대장선에 함께 타고 있었던 김식의 보고를 보여 준다.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고성 지역 추원포로 후퇴했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 순천부사 우치적과 간신히 탈출해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걷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보니 왜군 6∼7명이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원균의 생사는 자세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난리 중에 경상우수사 배설과 몇 명의 만호(연안의 수군 병영 책임자)만이 살았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조선 수군의 총본부가 있는)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  거제도에서 칠천도로 넘어가는 칠천연륙교 입구의 '칠천량 해전' 해설 비(2010년 경상남도 건립)

장문포왜성을 둘러본 뒤 도로로 내려오면 이내 칠천도로 들어가는 칠천연륙교가 나타난다. 다리 입구에 세워져 있는 '칠천량 해전' 해설 빗돌 앞에서 발을 멈춘다. 경상남도가 2010년 1월 12일에 건립한 이 현대적 조형물은 용머리가 나와 있고 지붕이 둥근 것으로 보아 거북선을 상징하는 듯 여겨진다. 칠천량 해전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줄 듯한 비문을 읽어본다.

'칠천량 해전은 1597년(정유년) 7월 16일 거제시 하청면 실전리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이다.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은 7월 14일 가덕도와 영등포 등에서 일본군의 습격으로 손실을 크게 입고 후퇴하여 7월 15일 밤에 이곳 칠천량에서 정박하였다.

이튿날인 7월 16일 새벽 다시 일본 수군 600여 척의 기습 공격으로 조선 수군은 160여 척을 잃었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조선 장수들이 장렬히 전사하였으며, 원균 또한 고성으로 퇴각하다 육지에서 전사하였다.

이 해전의 패배로 남해안의 제해권을 일본에 빼앗기자 조선 조정은 초계(현 합천군 율곡)의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던 충무공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제해권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경상남도 이순신 프로젝트 역사고증 자문위원회'의 고증을 거쳤다고 밝혀져 있는 이 글은 패전 사실과 이순신의 복귀 전말에 방점을 두고 있다. 막강한 우리 수군이 어째서 개전 이래 최대의 패전을 칠천량에서 기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반쪽'짜리 해설인 셈이다.

출전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었던 원균


▲  '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 안에서 볼 수 있는 당시 해전 상황 재현 조형물

연륙교 빗돌의 미흡한 해설로는 칠천량 대참패의 원인이 헤아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의 게시물 중 하나인 '칠천량 해전의 수장, 원균'을 더 꼼꼼하게 읽게 된다.

이 게시물은 '원균의 딜레마와 위기'라는 제목부터 범상하지 않다. 선조와 대신들의 지시를 따르면 (경상우수사 배설의 지적처럼) 병사들을 죽이게 될 것이고, 거부하면 본인이 이순신처럼 끌려가 참담한 꼴을 당하게 될 터이다. 이것이 '원균의 딜레마'이다. 혼자 머리를 싸맨 원균이 혼자서 '어쩌면 좋단 말인가!' 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원균(1540~1597)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뒤 수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라는 선조의 명을 받게 되었다. 원균도 (통제사가 되기 전인 1597년 1월 19일)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수군이 단독으로 바다에 나아가 일본군을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원균은 통제사가 되고난 뒤 수군 단독으로 일본군을 제압하는 것이 무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균은 조선 육군을 동원하여 앞세우고 수군이 그 뒤를 따라 진격하자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선조는 원균에게 계속 수군이 단독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원균은 조선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아갔으며, 칠천량의 패전은 그렇게 비롯되었다.'


▲  전시관 안에 진열되어 있는 '부서진 판옥선'

게시물은 '칠천량의 패전은 그렇게 비롯되었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렇게'는 '선조'가 '계속' 원균에게 '수군 단독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요구'한 사실을 가리킨다. 타당한 지적이다. 국가 사이의 싸움을 전쟁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승패의 최종 책임은 당연히 최고 권력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손자병법>도 '군대가 (전술과 전략을 알지 못하는 권력자의 지시에 맹종하는) 미군(縻軍)이 되면 반드시 나라가 쇠약해진다, 전진해서 안 될 때 공격을 명하고, 후퇴해서 안 될 때 물러나라고 하는 명령에 복종하는 군대가 곧 미군'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군사권을 휘둘렀던 선조와 대신들은 처참한 7년 전쟁을 겪고 난 뒤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했다.

군사권을 행사한 최고 권력자의 책임을 묻는다

거제도에는 또 한 군데의 이름 높은 전쟁 유적지가 있다.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이 바로 그곳이다. 그런데 6.25 전쟁을 겪고 난 뒤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한 권력자들 중에도 책임을 지는 사람은 없었고, 도리어 '종신' 대통령을 획책하는 등 권력 강화에 골몰했다. 그런 점에서 거제도는, 권력을 누린 사람에게는 어떤 책임 의식이 있어야 하는지 곰곰 생각해보게 하는 섬이다. 






거제도 역사 여행 순서


가거대교와 해저 터널을 지나
(1) 장문포 왜성
(2) 칠천연륙교 입구 '칠천량 해전' 해설 비
(3) 다리에서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칠천량 조망
(4) 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 둘러보기, 전망대에서 칠천량 조망

(5) 칠천량 해전 공원 둘레의 바닷가 산책로 걷기
(6) 물안 해수욕장에서 칠천량 바닷물에 손 넣어보기
(7) 김영삼 대통령 생가와 기념관
(8) 조선 수군 첫 승전지 옥포대첩 기념 공원 답사
시간 여유가 있으면 거제 해금강(명승 2호)에서 유람선을 타고, 아니면

(9) 거제 포로수용소 (오른쪽 사진은 거제 포로수용소 전시관에 게시되어 있는 포로들의 용변 장면 묘사 그림. 등 뒤에 포로를
의미하는 'PW'가 굵게 쓰여 있다.)




정탁(鄭琢)

1526년(중종 21)에 태어나 1605년(선조38)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도승지, 대사헌, 강원도관찰사 등 고위직을 역임했다. 본관은 청주(淸州).

정탁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좌찬성으로 있으면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했다. 1594년에는 곽재우·김덕령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 중에 공을 세우게 했고, 그 이듬해에 우의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이미 72세의 노령이었음에도 직접 싸움터에 나아가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려 했다. 선조가 그의 연로함을 지적하며  만류하는 바람에 종전을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이 해 3월 옥에 갇혀 있던 이순신을 구해내는 데 앞장섰다. 이순신과 원균이 주장한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신뢰했던 정탁은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고 있다.

출처: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79014&CMPT_CD=P0001

거북선은 없어졌지만 조선소 유적은 남아 있다.

 

 

 

전남 여수 '선소 유적' 답사 및 거북선 체험관 승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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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5월 4일 전라 좌수영 장졸들과 함께 경상도 바다로 나아갈 때 이순신은 판옥선 24척, 작은 협선 15척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외 포작선도 46척 있었지만 그것은 군량 등을 수송하는 고기잡이배이므로 전함에 포함할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판옥선 24척은 이순신이 처음 여수에 왔을 때와 견주면 엄청나게 발전한 규모였다. 부임해서 전라 좌수영을 점검한 결과로는 쓸 만한 판옥선이 겨우 5척뿐이었다. 장부에는 30척을 보유한 것으로 적혀 있었지만 나머지 배들은 거의가 폐선 수준이었다.

이는 전함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빚어진 사태였다. 배는 오랫동안 물에 떠 있으면 자연히 밑바닥에 해초가 달라붙고 조개와 굴껍질 등이 눌러 붙게 된다. 밑바닥이 형편없이 상하는 것이다. 부식을 막으려면 가끔 물 위로 끌어올려 밑바닥을 깨끗하게 청소해주어야 한다.

건조한 지 5년이 경과하면 정성껏 관리를 해온 배도 밑바닥을 완전히 갈아주어야 한다. 10년이 지난 배는 수명을 다한 것으로 간주해서 아예 퇴역시킨다. 이순신이 수사로 부임했을 때 전라 좌수영 안에 쓸 만한 판옥선이 5척뿐이었다는 것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 조선 수군이 장부상으로만 배가 많이 보유했지 실제 전함 출동 능력은 수준 이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 수군에는 쓸 만한 전함이 별로 없었다

또 선조와 조정의 수군 철폐령이 전쟁 발발 직전에 떨어졌고, 이순신이 육군도 수군도 모두 유지해야 한다고 장계를 올린 결과 전라도 수군만 온전히 살아남았다는 1592년 4월 14일자 <선조수정실록>의 증언도 수군 장졸들이 전함 관리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으리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수군 자체가 언제 없어질지 알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전함도 운용하지 않게 될 것이 자명한 상황에 무슨 애정이 남아 정성껏 배를 손질할 것인가.


이순신이 나대용 등과 함께 거북선을 만들었던 조선소 유적이다. 당시 조선소는 여수시 선소마을길 33번지인 이곳 외에도 방답진(돌산읍 사무소 일원)과 본영(전라 좌수영)에 더 있었다. 방답진 선소 유적은 여수 선소 유적만큼 볼 만하지는 못하지만 돌산읍 군내리 987-6번지를 찾아가면 답사할 수 있다.


전함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데에는 수군 병사의 부족 문제도 겹쳐 있었다. 육군은 1년에 석 달을 복무하지만 수군은 그 두 배인 여섯 달을 복무시켰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수군은 배를 타지 않을 때면 궁궐 수축, 축성 등 온갖 잡역에 동원했다. 군량미도 직접 생산해야 했으므로 둔전을 개발하고 쉼 없이 밭일을 했다.

수군 군역은 기피 대상이 되었고, 수군 병사로 동원되는 바닷가 백성들은 도망쳐서 떠돌이 생활도 서슴지 않았다. 재물이나 힘이 있는 자들은 뇌물을 쓰고 권세를 이용해 수군 징집 대상에서 빠져나가고, 가난한 백성들은 병역을 피해 집을 버리고 떠돌아다녔다. 자연히 수사들은 배를 건조하고 관리할 수군을 충당할 수가 없었다.

탁상공론에 그치고 만 조정의 수군 확보 대책

조정에서는 1594년 8월 23일 수군 충원 대책을 마련했다. 핵심은, 사변 발발 후 경상도 백성으로서 다른 지방으로 떠도는 자를 우선적으로 수군에 넣는다는 것과, 왜적에게 잡혔다가 도망한 자를 수군에 넣는다는 방침이었다. 그런 자들만 해도 몇천 명을 웃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책은 탁상공론이었을 뿐 시행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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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 부족 문제에 대한 기록은 <난중일기>에도 실려 있다. 녹도 만호 송여종은 1594년 1월 21일 '병들어 죽은 214명의 시체를 거두어서 묻었습니다'하고 이순신에게 보고한다. 바로 다음날인 1월 22일에도 '병들어 죽은 217명의 시체를 거두어 묻었습니다'하고 보고한다. 줄곧 물에서 사는 까닭에 수군은 유난히 돌림병에 약했다.

각 수영에서는 이곳저곳 읍을 다니며 사람들을 강제로 연행하여 수군에 편입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이순신이 전라도의 병방 한 명을 참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군관을 파견하여 수군을 모집하던 중 현(縣)의 군사 담당 아전이 징집 대상자를 빼돌렸다가 발각되었는데, 이순신이 일벌백계로 그의 목을 베어 성문에 내건 것이었다.  

병방 효수 사건은 수군 모집과 관련하여 조정과 이순신 사이에 빚어져 있던 갈등이 마침내 폭발한 사례였다. 처음부터 조정은 '각 고을에서 도망간 군사가 있어도 사변이 평정될 때까지 친족이나 이웃으로 대신 충원하는 것은 일절 하지 말라'는 원칙을 정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1592년 12월 10일 '친족을 대신 충원하지 말라는 명령을 중지하여 남쪽 변방 회복의 기초가 온전해지도록 해 주십시오'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1594년 4월 10일에도 '지금은 나라를 회복할 시기'라면서 '대신 충원하는 폐단을 중지하는 것은 사변 평정 후에 해도 늦지 않으니 조정에서는 적의 침략을 막고 백성을 보호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장계를 올렸다. 수군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수사의 입장이 잘 드러난 장계였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든 조선소 유적을 찾아보다


여수 선소 유적 내에는 뭍의 선돌처럼 보이는 길쭉하고 큰 바위 하나가 쇠사슬 울타리의 보호를 받으며 서 있다. 이 바위는 대체로 배를 묶어둔 계선주로 여겨지고 있다.


1592년 5월 7일 옥포 앞바다에서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군 최초의 승리를 거두는 판옥선 24척과, 5월 29일 사천 해전 이래 일본 전함들을 무찌르는 전투에서 한 몫을 한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했던 조선소, 즉 '여수 선소 유적'을 찾아간다. 도시 가운데로 깊숙하게 들어온 포구 형태의 선소 유적은 여수시 선소마을길 33에 있으며, 사적 392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이다.

'충무공 이순신이 배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던 군관 나대용과 함께 거북선을 만든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가막만의 최북단 후미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입구에 가덕도와 장도가 방패 역할을 하고 뒤로는 망마산을 등지고 있어 그야말로 천연의 요새였다. 원래 명칭은 순천부 선소이다. 거북선은 이곳과 함께 인근의 본영 선소, 방답진 선소 세 곳에서 건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순천부 선소는 임진왜란 전에 생겨 임진왜란 중 전라 좌수영 산하 순천부 수군 기지였던 것이 확실하나 만들어진 연대는 알 수 없다. 주변의 마을은 예로부터 선소마을로 불리었고, 고려 시대부터 배를 만드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일종의 항만 시설인 굴강(掘江, 파서 만든 강)이 남아 있으나 주변의 유적과 유물들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이 훼손되었다. 발굴 조사를 통해 대장간 터를 찾았으며, 세검정과 군기고는 최근에 복원하였다.'


현지 안내판은 거북선 건조에 나대용의 공이 매우 컸다는 사실, 이곳의 본래 이름이 순천부 선소였다는 점, 여수 선소 외에도 방답진(여수시 돌산읍 사무소 일원) 선소와 본영(전라 좌수영) 선소가 더 있었다는 사실, 고려 시대에도 이곳에서 배를 건조했다는 사실, 지금도 배를 보관하고 또 드나들기 위해 만든 굴강 시설이 남아 있다는 사실, 일제 때 많이 훼손되었다는 사실, 근래 발굴을 통해 대장간 터를 찾았다는 사실, 세검정과 군기고는 최근에 복원한 건물이라는 사실 등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다. 다만 본문은 세 곳 선소 중 이곳 여수 선소가 가장 큰 규모와 뚜렷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을 생략하고 있다.


선소 유적 중에서도 '꽃'인 굴강이다. 거북선은 둥그렇게 판 강이라는 뜻의 굴강에서 제조되었다. 직경 42m가량의 굴강에는 거북선이 동시에 두 척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선소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여수 유적


선소 유적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아주 운치가 있다. 왜적을 맞아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이곳에서 배를 만들고 수리하느라 구슬땀을 흘렸지만 420여 년 뒤에 찾아온 나그네는 너무나 유유자적하다. 물가를 따라 석축이 쌓여 있고, 그 아래로는 바닷물이 남긴 검은 흔적과, 그 토양분과 수분을 먹고 자라난 풀들이 햇살과 바람을 받아 무성하게 흔들리면서 빛나고 있다. 142m 높이의 망마산이 길게 꼬리를 늘여 세검정(지휘소) 및 군기고(수군 무기고)까지 이어지는 풍경도 군사 유적답지 않게 평화롭기만 하다.

10분 가량 천천히 산책로를 걸으니 '굴강'이라는 제목의 안내판이 마중을 해준다. 안내판은 '굴강은 조선 시대 해안 요새에 만든 조그만 군사 항만 시설로서 선착장이자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배를 머물러 두었고, 고장 난 곳을 수리했고, 군사 물자를 싣고 내렸다. 굴강이라는 이름은 대피한 배를 보호하기 위해 방파제를 작은 만처럼 둥그렇게 만든 데서 유래한 듯하다'라고 해설해준다.

이곳 여수 선소의 굴강은 면적 1338㎡, 직경 42m 안팎의 타원형으로 거북선 두 채가 들어갈 만한 규모이다. 깊이는 돌벽 위에서부터 바닥까지 5~6m 정도로 추정된다. 북쪽으로 폭 9m 정도 되는 자연석과 깬돌로 막쌓기를 하였고, 남은 돌과 흙으로 뒤를 채운 것으로 보인다. 1980년과 1985년에 한 발굴 조사에서 나온 쇠로 된 화살촉, 못, 쇠붙이 같은 유물 565점은 국립광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거북선 두 척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의 굴강

굴강 둘레를 한 바퀴 돌면서 이순신과 나대용, 그리고 전라 좌수영 장졸들이 거북선을 만드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이곳 지휘소로 추정되는 세검정과 무기 창고였던 군기고 쪽으로 발을 옮긴다. 두 건물은 ㄱ자 모양을 이루고 있고, 대장간 터는 굴강과 군기고 사이 지점이다. 대장간 터는 빈 땅으로 두면 찾기가 쉽지 않겠지만 집 안에 단야로(쇠를 달구고 벼리는 아궁이) 시설을 갖춘 작은 건물 한 채를 지어놓아 단숨에 눈에 들어온다.

대장간 앞에도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은 '물을 모으는 집수구와 쇠를 불에 달구어 벼리는 단야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무기를 만들고 수리하던 대장간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면서 '집수구의 남쪽 면은 자연 암반층이지만 북쪽 면은 인위적으로 만든 흔적이 있다. 암반의 중심 부분에 직경 10∽20m의 자갈들이 있는데 여기서 물이 계속 솟아 나와 지속적으로 물이 공급되어야 하는 단야로를 설치하기에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한다.


거북선은 사천 전투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순신이 처음 출동한 1592년 5월 7일 옥포 해전부터 합포, 적진포 해전에 이르는 1차 출전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사천 전투는 5월 29일에 치러졌다.


대장간 옆에 세검정과 수군기가 있다. 굴강 쪽으로 바라보고 서 있는 세검정은 집무 및 지휘소 기능을 담당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터에 남아 있는 주춧돌의 간격으로 보아 세검정은 정면의 크기가 최소 7칸에 길이 15.8m 정도였을 듯하다. 안내판에는 '옆면의 크기는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건물은 1986년에 맞배지붕의 앞면 7칸, 옆면 1칸 규모로 복원한 것이다.

군기고 또는 수군기라는 이름의 무기고는 1980년 선소 1차 발굴 때 세검정과 같이 조사한 뒤 복원한 건물이다. 발굴 조사 결과, 군기고는 외부의 침입을 막을 수 있도록 주춧돌과 주춧돌 사이 벽체를 토담으로 튼튼하게 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건물을 무기 창고로 보는 것은 집터 앞에서 쇠로 된 화살촉, 배 못들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복원한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서향이다.

실물 거북선을 타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거북선 제조창 유적을 둘러보았으니 이제 실물 거북선을 한번 타볼 일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거북선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크기마저도 박문수가 영조에게 "충무공 이순신의 기록을 보니 귀선의 좌우에 각각 여섯 개의 총 쏘는 구멍을 내었는데 지금은 각각 여덟 개의 구멍을 내었습니다(길이 34m, 너비 10m). 거북선이 종전에 비해 지나치게 커졌으므로 개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고 아뢴 <영조실록> 1751년 2월 21일자 기사에 근거를 두고 길이 25.4m, 너비 7.6m로 추정할 뿐이다. 조금 전에 본 굴강의 안내판이 '굴강은 지름이 42m 안팎으로 거북선 2대 수용할 수 있었다'라고 해설한 것이 이제야 수긍이 된다.


돌산공원 아래 유람선 선착장 옆에 떠 있는 '거북선 체험관'



여수시 돌산읍 돌산로 3617-22 유람선 선착장 옆에 '거북선 체험관'이 떠 있다. 체험관의 홍보물에는 '본 거북선은 각종 고증을 참고로 통제영 구선(거북선)과 똑 같은 실물 크기로 건조하였으며, 선내 구조는 2층으로, 단층은 당시 병사들이 전투하는 모습을 (인형) 130개로 재현했습니다. 전투 장비로는 천자포, 현자포 등 14문을 복제 배치하고, 하층은 24칸의 각 선실에 병사들의 생활상을 인형으로 재현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이곳 외에 여수 진남관 앞 '이순신 광장', 경남 남해군 노량 포구, 통영 포구 등지에도 거북선 모형이 있다. 아쉬운 것은, 이들 거북선 모형들이 노군(櫓軍)에 의승군(義僧軍)을 전혀 배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순신 장군은 1593년 3월 10일 조정에 장계를 보내어 '의승 수군들이 관군들보다 두 배 이상 고생하고 있다'면서 포상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의승 수군들의 피땀어린 노고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충무공의 장계는 말하고 있다.


당항포에 세워져 있는 거북선 모형. 안에 들어가 답사를 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원문보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01584&dable=10.1.4

 
 

이순신 장군도 반했던 섬 목포 고하도

지형이 전선을 감추기에 적합하다

이돈삼(ds2032) 




  목포를 감싸안은 형태를 하고 있는 섬 고하도와 목포대교 전경. 목포대교 아래로 크고 작은 배들이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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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일찍 찾아왔다. 건강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때다. 트레킹을 겸한 여행도 건강관리법 가운데 하나일 게다. 걸으면서 보고 느끼며 건강까지 챙길 수 있는 곳으로 간다. 자동차를 타고도 건널 수 있는 가까운 섬, 고하도로 간다. 지난 5월 24일이다.

고하도는 목포 앞바다에 떠있다. 행정구역이 전라남도 목포시 달동에 속한다. 반달처럼 생긴 섬이 목포의 남쪽 해안을 감싸고 있다. 지리적으로 목포의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북쪽 비탈은 유달산과 마주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영산강 하굿둑이 자리하고 있다.

높은 산(유달산) 밑에 있는 섬이라고 고하도(高下島)라 이름 붙었다. 보화도(寶和島), 비하도(悲霞島), 칼섬으로도 불렸다. 섬의 형상이 바다로 나아가는 용을 닮았다고 '용섬'이라고도 했다.

▲  목포 대반동에서 본 고하도. 섬 앞으로 흑산도와 홍도로 가는 쾌속선이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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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하도의 소나무 숲. 이 솔숲에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모충각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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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이순신 장군 유적지가 있다. 아름드리 솔숲에 들어앉아 있다.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이 1597년 10월 29일부터 이듬해 2월 17일 고금도로 옮기기 전까지 107일 동안 머물렀다. 여기에서 군량미를 확보하고 전열을 가다듬으며 일본군과의 전투를 대비했다.

'서북풍을 막아주고, 전선을 감추기에 아주 적합하다. 섬 안을 둘러보니 지형이 대단히 좋다. 그래서 머물기로 했다.'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쓴 고하도 부분이다. 고하도는 전략적으로 요충지였다. 섬의 둘레 12㎞에 불과하지만 '명량대첩'의 현장인 울돌목으로 통하는 바닷길에 자리하고 있다. 제주도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이순신은 만약 이곳이 무너지면, 호남의 곡창지대를 흐르는 영산강을 일본군에게 내어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봤다. 작은 섬 고하도를 통해 영산강과 호남을 지키고 나아가 조선을 지키려했다. 고하도가 조선의 파수꾼 역할을 담당한 셈이었다.

  고하도 소나무 숲길. 이 길을 따라 여행객들이 모충각으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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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하도에 있는 이순신 사당 모충각. 소나무 숲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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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유적지 내 모충각에 그 기념비가 있다. 이순신이 머물다 간 지 175년이 지난 1772년(경종2년) 8월에 세워졌다. 통제사 오중주와 이순신의 5대손 이봉상이 세웠다. 비문을 남구만이 짓고, 글을 조태구가 새겼다. 비석에 당시의 상황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비신의 높이 227㎝, 폭 112㎝에 이른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야산에 버렸다. 광복 이후 주민들이 되찾아 여기에 다시 세웠다. 비석에 일본인들이 쏜 총탄 자국이 군데군데 남아있다.

모충각을 둘러싼 다름드리 소나무 숲도 멋스럽다. 적송과 육송이 많다. 소나무 숲에서 내뿜는 피톤치드 향도 달달하다. 심신의 피로를 풀어주는 삼림욕까지 할 수 있다. 이순신 유적지는 전라남도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돼 있다.

  모충각에 서 있는 이순신 장군 기념비. 비각에 일본인이 쏜 총탄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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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초등학교 충무분교에 서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순신 장군 동상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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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진영과 성터의 흔적도 고하도 곳곳에 남아 있다. 진영이 있었던 곳은 큰산 아래에 있는 불당골이다. 칼바위에서 말바우 가는 길에 성터의 흔적도 일부 남아있다. 자연 그대로의 큰 바위를 이용해서 쌓은 석성이다. 칼바위 아래 석축도 옛 진성의 흔적이다.

고하도는 육지면(陸地棉)이 처음 재배된 곳이기도 하다. 1904년 목포 주재 일본영사에 의해서였다. 육지면은 고려 말 문익점이 가져온 재래면과 달리 남미가 원산지다. '미국면'이라고도 했다. 면사의 품질이 재래면보다 훨씬 더 좋았다.

당시 목포에 솜밭이 지천이었다. 솜을 타는 공장도 많았다. 일제가 우수한 솜을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부러 공장을 많이 설치했다. 모충각에서 가까운 곳에 '조선육지면 발상지비'가 세워져 있는 건 이런 연유다.

  고하도의 능선을 따라가는 둘레숲길. 용을 닮은 섬의 지형을 따라 꼬리에서 머리까지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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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도랑 잔등마을. 고하도 둘레숲길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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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도를 차분히 돌아볼 수 있는 용오름 둘레숲길도 있다. 모충각에서 가까운 뒷도랑 잔등에서 시작된다. 용의 등을 닮은 섬의 능선을 따라 용머리까지 가는 길이다. 탕건바위, 칼바위, 말바우, 뫼막개를 거친다. 왕복 6㎞ 가량 된다. 숲길이 호젓하다. 한낮의 햇볕도 피할 수 있다.

모충각에서 감자, 고추 심어진 밭이랑을 지나 숲길로 접어든다. 옛날 불당골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올라와 불을 지폈다는 큰산이 있다. 바위가 평평하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뒷도랑 마을 풍경이 아름답다.

용의 등으로 올라설 때는 약간 오르막이다. 용의 등에 올라타면 금세 평탄해진다.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느낌도 좋다. 길 양쪽으로 소나무가 빼곡하다. 솔숲에 찔레꽃과 아까시꽃이 많이 피어있다. 간간이 때죽나무꽃도 보인다. 길섶에는 자란, 남산제비꽃, 둥굴레, 우산나물, 마삭줄도 지천이다. 걸으면서 나무와 풀꽃에 눈 맞추는 재미가 쏠쏠하다.

  고하도에서 내려다 본 목포항 전경. 유달산이 품은 목포 앞바다에 크고 작은 배들이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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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 유달산과 앞바다. 고하도 둘레숲길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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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숲 밖으로 돌리면 오른편으로 목포항과 유달산이 펼쳐진다. 이 배경으로 크고 작은 배들이 물살을 가르며 오간다. 왼편으로는 다도해가 내려다보인다. 저만치에선 목포대교가 위용을 뽐내고 있다. 숲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도 정겹다. 바닷바람도 살랑살랑 마음속까지 청량하게 해준다.

길은 큰산을 거쳐 칼바위와 말바우로 이어진다. 바위의 생김새가 영락없이 칼과 말발굽을 닮았다. 칼바위에서 말바우 가는 길에 성터의 흔적도 남아 있다. 안내판이 없어서 지나치기 십상이다. 일제강점기 소년원이었던 감화원 터에 들어선 장애인복지시설 공생재활원은 왼편 바닷가에 있다.

  목포 북항과 고하도를 이어주는 목포대교 전경. 이 대교를 건너 자동차를 타고 고하도로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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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하도 말바우. 바위의 모양이 말의 발굽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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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위를 지나자 고하도 풍광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흡사 용틀임을 준비하는 한 마리의 용 같다. 고하도와 목포대교의 전경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나무 데크가 전망대 역할까지 해준다.

용오름길의 끄트머리에서 만나는 용머리는 용이 날개를 펴고 승천하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목포대교 바로 아래까지 뻗어있다. 점점이 떠있는 장자도, 달리도 등 다도해 풍광도 매력적이다. 해질 무렵 시뻘건 해가 바닷물에 몸을 담그며 자지러지는 풍광도 황홀하겠다.

  유달산에서 내려다 본 목포 도심 풍경. 고하도를 돌아보고 유달산에 올라서 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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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고속국도 목포요금소에서 북항으로 직진, 목포대교를 건넌다. 대교를 건너자마자 왼편에 고하도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순신 동상이 서 있는 서산초등학교 충무분교를 거쳐 이순신 유적지로 간다. 내비게이션에 의지하려면 전남 목포시 달동 780-18을 입력하면 된다.

출처: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16267&dable=3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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