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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중계]수능에도 출제된 국가무형유산 제2호 '양주별산대 놀이' / 복날과 삼계탕 / 3300년 전 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멘 무덤에서 발굴된 신비의 유물 1300여 점

문화재방송 2022. 7. 26. 00:32

1인 5역으로 제작 / 기획. 취재. 촬영. 편집. 내레이션:헤리티지

제55회 양주별산대놀이 정기공연[양주시]

국가무형유산 제2호인 양주별산대놀이는 서울과 중부지역을 대표하는 산대 탈놀이로 음악 반주에 춤이 주가 되고, 노래가 따르는 가무적인 요소와 몸짓, 덕담, 재담 등이 따르는 연극요소를 모두 갖춘 민중 놀이다.

이번 공연은 기존 2~3과장씩 편성되는 공연, 초청공연 등 축제성 행사와 다르게 양주별산대놀이의 전과장을 온전히 공연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공연은 시작을 알리는 길놀이로 출발, 관객과 연회자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서막고사를 지낸 후 본격적인 과장 공연이 펼쳐진다.

특히 단순히 공연을 보여주는데서 벗어나 관객과의 적극적인 호흡을 통해 옛 선현들의 놀이문화를 재현하고 공연 중간 휴식시간에 관객과 연희자들이 함께 놀이문화를 공유하는 등 민중극으로서의 원형을 선보일 예정이다.

양주별산대보존회 관계자는 “양주별산대놀이의 즐거움과 전통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이번 정기공연을 야심차게 준비했다”며 “안전한 공연 진행을 위해 관람객을 대상으로 발열체크, 방문객 명단 작성, 마스크 착용, 손소독 등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철저히 준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http://www.newscop.kr/news/articleView.html?idxno=5953

 

양주별산대놀이의 내용은 산대도감계통극과 공통된 것으로서, 조선시대 서민문학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파계승(破戒僧), 몰락한 양반, 무당, 사당, 하인 및 그 밖의 늙고 젊은 서민들의 등장을 통해 현실폭로와 풍자·호색(好色)·웃음·탄식 등을 보여준다. 그 주제는 크게 나누어 파계승놀이와 양반놀이, 서민생활상을 보여주는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제1과장 ‘상좌춤’은 벽사(僻邪)의 의식무(儀式舞)이며, 제2과장 ‘옴중과 상좌’는 주로 옴중과 상좌의 재담으로 엮어진다. 제3과장 ‘옴중과 목중’에서는 옴중의 의관과 얼굴에 대한 재담을 나눈다. 옴중은 옴벙거지로써 자신의 지체를 높이려 하나 결국 옴이 오른 중임이 발각난다는 내용으로, 파계승에 대한 풍자를 보여준다.

 

제4과장 ‘연잎과 눈끔적이’에서는 초월적 능력을 가진 고승 연잎과 눈끔적이가 나타나 파계승 옴중과 목중을 벌한다. 이 과장은 봉산탈춤의 사자의 출현과 견주어지나, 사자보다 훨씬 숭고하고 초월적인 모습을 지녔다는 점이 다르다.

 

제5과장 ‘팔목중놀이’는 염불놀이·침놀이·애사당북놀이의 3경으로 나누어져 있다. ‘염불놀이’는 8목중이 염불의 형식을 빌려 염불을 희화화(戱畫化)시키면서 그들이 타락한 중임을 보여준다. ‘침놀이’는 말뚝이가족의 얘기로서 자식·손자·증손자가 죽게 되어 친구 완보의 소개로 신주부를 불러 침을 놓자 모두 살아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죽음을 극복하고 삶을 긍정한다는, 현세에 더 큰 가치관을 두고 있는 탈춤의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애사당북놀이’는 목중들이 애사당을 희롱하면서 법고 치는 것으로 재담하는 내용인데, 여기서도 승려의 파계상을 풍자하고 있다. 이상의 제5과장은 조선 후기 서민생활의 실상과 승려의 파계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제6과장 ‘노장’은 제1경 ‘파계승놀이’, 제2경 ‘신장수놀이’, 제3경 ‘취발이놀이’로 짜여져 있다. ‘파계승놀이’는 노장의 파계과정을 춤과 동작으로 보여준다. ‘신장수놀이’는 노장이 두 소무와 살림을 차린 뒤 신장수에게서 두 소무의 신발을 외상으로 사고, 외상값을 받으러 간 원숭이는 소무를 희롱하며 그냥 온다는 내용이다.

 

‘취발이놀이’는 취발이가 등장해 노장에게서 소무 한 명을 빼앗아 살림을 차린 뒤 아이를 얻고 글을 가르친다. 늙음과 젊음의 대결에서 젊음의 승리, 모의적인 성행위와 출산을 통해 자연의 풍요를 비는 제의적(祭儀的) 성격과 아울러 굿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 과장은 전체적으로 노장에 대한 풍자적 공격의 성격을 띠고 있다.

 

제7과장 ‘샌님’은 제1경 ‘의막사령(依幕使令)놀이’와 제2경 ‘포도부장놀이’로 이루어져 있다. ‘의막사령놀이’는 하인 말뚝이가 샌님·서방님·도령님을 모시고 나와 친구 쇠뚝이와 함께 위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양반들을 모욕하고 신랄하게 풍자한다.

 

‘포도부장놀이’는 샌님이 자기의 첩 소무를 평민인 젊은 포도부장한테 빼앗기는 내용으로서, 늙음에 대한 젊음의 승리, 양반에 대한 평민의 승리를 보여준다. 이 과장은 양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모욕으로써 서민정신의 승리를 표현하고 있다.

 

제8과장 ‘신할아비와 미얄할미’는 노인 신할아비가 부인 미얄할미와 다투다가 미얄이 죽자 아들·딸을 불러 장사를 지내는데, 이때 딸이 무당이 되어 지노귀굿을 한다. 남성과 여성의 대립과 갈등 및 서민의 생활상을 보여주며, 굿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이로써 연희는 모두 끝난다.

 

 

복날과 복달임의 탄생

‘삼복더위’란 말은 더위의 절정을 연상시키는 관용어가 되었다.‘삼복三伏’은 초복初伏, 중복中伏, 말복末伏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이 말이 생겨난 것은 2000년 전 중국 진나라 시대(BC 221〜BC 206)부터다. 사마천의『사기史記(BC 104~101)』에는 진나라 덕공德公이란 사람이 사대문 밖에 개고기를 걸어두고 복사伏祠를 처음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초복은 24절기 중 지구가 태양과 가장 가까워지는 하지夏至의 세 번째 경일庚日이다. 하지는 양의 기운이 절정에 달하는 날이다. 그런데 경庚은 가을의 기운을 가진 날이다. 그러나 강력한 여름 기운에 가을의 서늘한 기운은 맥을못추고 쓰러져 엎드려있게 된다.‘복伏’이란 말은 이런 뜻이다. 그런데 가을 기운이 엎드린 탓에 여름의 기운은 더욱 거세지게 된다. 복날이 더운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여름기운이 변하기 시작하는 복날에는 가을 기운金을 가진 음식을 먹어야 몸이 온전하게 보전된다고 믿었다. 복날의 음식은 이런 기본 철학을 바탕으로 하지만 실상은 더위에 지친 몸을 보충하는 실용적인 측면이 더욱 강하다.

 

더워지면 수분은 땀으로 배출되고 차가운 음식을 먹은 속은 더욱 차가워져 배탈이 나거나 서중暑中같은 병이 생긴다. 더위는 더위로 다스린다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원리는 이런 우리 몸의 기본 구조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 과학이다. 한국인은 복날에 먹는 이런 음식을 '복달임'이라 불렀다. 복달임은 한문‘복’과 순수한 우리말‘달임’의 합성어다. 복날에 달여 먹는 따스한국이나 탕을 의미하는 말이다.

삼계탕 이전의 복달임 음식들과 대구의 육개장

지금은 복달임 음식의 중심에 삼계탕이 있지만 20세기 중반까지도 삼계탕은 부자들이나 먹던 귀한 음식이었다. 그 이전에는 개장狗醬즉 개고기 국이 중심에 있었다.

 

19세기에 집중적으로 발간된 세시기歲時記들인『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하나같이 개장국에 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나온다. 그런데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당시에도 개고기를 싫어한 사람들이 제법 있었던 탓에 개장국과 거의 비슷한 모양과 맛을 내는 육개장肉狗醬이 만들어진다.

 

19세기 말에 만들어 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육개장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더운 대구에서 꽃을 피운 음식이 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육개장은‘육개장’,‘대구탕반’으로 불리며 전국적인 음식이 된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밥과 국을 따로 내면서 따로국밥이란 말이 더해졌다. 그 밖에도 복달임 음식은 더위를 몰고 오는 악귀를 물리치는 팥죽과 궁중에서 먹던 깨죽, 여름철에 제 맛이 나는 호박에 민어를 넣고 끓인 민어탕이 삼복더위를 물리치는 대표적인 복달임 음식들이었다.

삼계탕의 등장

그런데 어느날삼계탕이 복달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 삼계탕이 외식으로 등장한 것은 1950년대 이후다. 1960년대부터 계삼탕 혹은 삼계탕으로 불리던 삼계탕은 1970년대 중반 이후에 여름철 외식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그런데 과연 삼계탕은 195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음식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삼계蔘鷄’란 이름은 19세기 부터 등장하고 삼계탕이란 이름은 붙어있지 않지만 삼계탕과 비슷한 음식들은 여럿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삼계탕의 조상쯤으로 생각되는 음식들은 조선 시대에 여럿 등장한다. 조선중기의 문신 박정현이 1609년에서 1635년까지 기록한 일기인『응천일록凝川日錄』에는 황계탕黃鷄湯이 등장한다. 1773년『승정원일기』에는‘연계탕軟鷄湯’이 기록되어 있다.

 

이 당시 등장하는‘계탕’들은 건더기 중심이 아니라 국물 중심이었다. 이처럼 닭을 푹 고아 국물을 마신 기록은 이외에도 여럿 남아있다. 17세기 중반에 쓰여진 조리서인『음식디미방』에는‘수중계’가 나오고 1766년에 편찬된『증보산림경제』에는‘총계탕’이 있다.‘삼계蔘鷄’란 이름은 개화파 김윤식의 일기인『속음청사續陰晴史』1887년자에 인삼과 닭을 넣고 푹 고은‘삼계고蔘鷄膏’란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1894년 이제마가쓴사상의학서『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에도 삼계고가 설사병 치료제로 등장한다.

 

삼계탕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기록은 1910년에 일본인들이 작성한『중추원조사자료』다. 이 자료에는‘여름 3개월간 매일 삼계탕, 즉 인삼을 암탉의 배에 인삼을 넣어 우려낸 액을 정력精力약으로 마시는데, 중류 이상에서 마시는 사람이 많다.’라고 적고 있다. 보약이 아닌 요리로서 삼계탕과 가장 유사한 기록은 1917년판『조선요리제법』이란 조리서에 닭국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닭을 잡아 내장을 빼고 발과 날개 끝과 대가리를 잘라버리고 뱃속에 찹쌀 세 숟가락과 인삼가루 한 숟가락을 넣고 쏟아지지 않게 잡아맨 후에 물을 열 보시기쯤 붓고 끓이나리라’라고 적고 있다.

삼계탕의 주원료는 어린 닭인 연계

그런데 18세기『승정원일기』의 연계탕 기록에서부터 시작해서 대부분의 닭 요리에 들어가는 닭은 새끼를 낳지 않은‘연계軟鷄’다. 연계를 이용한 ‘연계백숙軟鷄白熟’은 삼계탕이 대중화되기 전에 복날에 먹는 복달임 음식 중 하나였다.

 

연계를 영계라고도 부르는데 연계백숙 혹은 영계백숙이란 말의 ‘백숙’은 간을 하지 않고 닭을 끓인 것을 말한다. 백숙을 끓일 때는 맹물에 보통 마늘을 집어넣는 것이 일반적인 조리법이었다. 백숙에 마늘 대신에 인삼이 들어간 것이 삼계탕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연계백숙 조리법에는 ‘혹 인삼먹는 이는 삼을 넣어’란 구절이 나온다.

인삼가루가 아닌 인삼을 직접 넣어 요리를 해먹은 가장 이른 기록이다. 20세기 초반의 신문 기사들에 종종 등장하는 북한의 복날 음식으로 ‘연계찜’이 있다.

 

연계찜은 연계의 배속에 찹쌀과 여러 가지 고명, 향료를 넣고 쪄낸 것으로 삼복에 함경도 사람들은 연계찜을 반드시 먹었다. 1929년 8월 1일에 발간된『별건곤』제22호에는 황해도 안주를 돌아본 뒤 쓴 기행문이 나온다.

 

‘영남지방에서는 삼복 중에 개죽음이 굉장하다. 하지만 안주의 명물로 삼복중의 닭천렵이 대단하다’고 적고 있다. 경상도나 전라도 같은 남도가 복날에 개를 복달임 음식으로 먹은 것에 비해 함경도에서 황해도에 이르는 북한 지역에서는 닭을 복달임 음식으로 먹어왔음을 짐작하게 하는 구절이다. 삼계탕은 아니지만 복날에 닭을 먹는 문화는 북한 전역에 넓게 퍼져있던 문화였다.

삼계탕의 대중화

양반이나 부자들의 약선藥膳음식이었던 삼계탕이 대중화된 것은 닭고기가 대중들이 먹을 수 있게 된 1960년대 이후의 일이다. 닭고기보다 더 비싼 인삼도 삼계탕 대중화에서 빼놓을수없는 요소다.

 

1910년대부터 인삼가루가 부자들에게 인기를 모으자 약으로 먹던 삼계고 삼계음을 벗어나 요리에서 인삼가루가 등장한다. 1950년대 인삼가루를 넣은 닭국물이 등장하면서 식당주인들은 ‘계삼탕’이란 이름을 붙이고 영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대중화는 좀 더 시간이 걸린다. 1960년대 이후 인삼가루가 아닌 생 인삼인 수삼水蔘이 정부규제 완화와 냉장시설의 발달로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되자 상인들은 계삼탕보다 인삼에 방점을 둔 삼계탕이란 이름을 내걸고 영업을 한다.

 

1960년대의 과도기를 거쳐 육류 소비가 급증하게 되는 1975년 이후에 닭 한마리와 인삼을 같이 먹을수있는 삼계탕은 여름 최고의 보양식으로 등극하게 된다. 약에서 시작해 부자들의 식탁을 거쳐 대중들의 여름철 최고의 보양음식의 탄생은 긴 과정이 필요했지만 음식이 완성되자 한국인은 물론 동북아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음식이 되었다.

글·사진. 박정배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이미지투데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무엇을 다시 발견했나? 재발굴의 성과

 

일제강점기 조사 이후 최근까지 129호분의 북분을 서봉총, 남분을 ‘데이비드총’으로 불러왔다. ‘데이비드총’이라는 이름은 당시 발굴 비용을 지불한 영국인 퍼시빌 데이비드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유적 명칭으로 좋은 사례는 아니다. 재발굴 후 129호분 전체의 명칭을 서봉총으로, 기존의 서봉총은 서봉총 북분으로, ‘데이비드총’은 서봉총 남분으로 명칭을 바로잡았다.

 

일제강점기 조사에서 보고된 서봉총 북분의 봉분 직경은 37m로 알려졌으나, 재발굴 결과 47m로 밝혀졌다. 또 일제강점기 조사에서는 서봉총 북분의 매장시설을 하나의 덧널 안에 하나의 나무널이 있는 1덧널 1널 구조로 추정했으나 재발굴 결과 내곽과 외곽으로 구성된 이중의 나무덧널 안에 1개의 나무널 구조가 있는 2덧널 1널 구조로 밝혀졌다.

 

재발굴에서는 무덤 안팎을 철저히 조사해 둘레돌 주변에서 큰항아리 안에 음식을 담아 제사를 지낸 흔적을 새롭게 찾아냈다.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상석도 발견했는데 상석은 무덤 제사를 지낼 때 무덤 앞에 제물을 올려놓기 위해 네모난 돌로 만든 상으로 정기적으로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설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신라의 가장 이른 시기의 상석은 제29대 태종 무열왕 무덤 앞의 상석이었다. 이번 발견으로 신라 상석의 출현 연대가 150년 정도 올라가게 된 것이다.

 

서봉총 재발굴의 최대 성과는 무덤 둘레돌 밖에서 시행 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사의 흔적이다. 북분 둘레돌 주변에서 10개, 남분 둘레돌에서 13개, 위치가 분명하지 않은 것 4개 등 총 27개의 큰항아리를 조사했다. 이 항아리들 안에는 다양한 동물의 유체가 있었는데 이는 큰항아리에 제사음식을 가득 채워 무덤 주인공에게 제사를 지낸 흔적이다. 실제 제사에 바친 제물 항아리는 조사된 27개의 항아리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1,500년 전 신라 왕실은 왕족의 장례식에 직접 제물을 올리며 제사 지내는 전통이 있었고, 그것은 서봉총 주인공의 영원불멸을 위한 제사였다.


 

돌고래부터 복어까지 궁금증을 낳는 서봉총의 제사음식

 

서봉총 남분의 2호부터 5호까지 4개의 큰항아리에서 출토된 동물유체를 정리한 결과 총 52종류의 동물이 확인되었다. 남생이와 주름다슬기를 제외하고 모두 해산물이다. 특이하게도 돌고래와 성게, 복어 등도 나왔다. 신라 무덤 안에서는 물고기, 조개뿐만 아니라 꿩이나 닭과 같은 조류도 많이 나오지만 여기서는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요즘 흔히 먹는 닭이나 돼지, 소는 왜 없는지, 혹시 순살로만 제사를 지내 그 뼈가 남지 않았던 것인지, 왜 해산물만으로 제사를 지냈던 것인지 많은 궁금증을 유발한다.

 

또한 해산물 중에는 민어가 있는데, 이 물고기는 현재 동해안에서는 잡히지 않고 남해와 서해안에서만 잡히는 물고기이다. 그렇다면 2호 큰항아리에서 나온 민어는 누가, 어디에서 가져온 것인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백제인이 남분 주인공의 장례식에 조문객으로 참가하면서 가져온 음식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1,500년 전에는 지금과 달리 동 해안에서도 민어가 잡혔을까? 해산물은 쉽게 상하므로 한 겨울이 아니면 신선한 상태로 운반하기 어렵다. 그래서 바다에서 잡은 다른 식재료와 함께 소금에 절이거나 젓갈로 만들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소금 재료인 바위 소금이나 바닷물을 이용해 소금을 만들었던 질그릇이 확인되지 않기에 생활필수품인 소금이 이동하는 모습을 알 수 없다. 염장 음식이 소금을 대신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연구도 필요해 보인다. 이처럼 서봉총 재발굴은 지금까지 몰랐던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를 바탕으로 신라 왕족의 무덤을 이해하는 기초 자료가 될 수 있도록 연구를 심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글, 사진. 김대환(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3300년 전 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멘 무덤에서 발굴된 신비의 유물 1300여 점

 

 금, 유리 와 보석으로 상감, / 길이 187cm, 너비 51,3cm,

높이 51 cm. 무게가 110kg이나 나가는

가장 안쪽에 있는 순금 관은 무덤에서 나온 유물 중

가장 멋진 보물이다.

이 관은 미라 형태의 왕을 나타내고 있는데 깃털 옷을 입고

신을 상징하는 턱수염을 하고 있으며

양 손에 왕홀을 쥐고 두건을 썼다.

황금 마스크와 마찬가지로 이 관의 얼굴 표정은 공식적이고

이상적인 왕의 초상을 보여준다.

 

3300년 동안 썩지 않은 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멘의 미이라

이 그림은 프랑스, 미국 및 이집트 연구원으로 구성된 연구팀이

컴퓨터 단층촬영법으로 재구성한 투탕카멘의 얼굴이다.

검사결과 18세의 나이로 사망한 투탕카멘은 말라리아에 감염된것으로

밝혀졌으나 심각한 무릎부상이 사인인것으로 추정된다.

1922년 11월 4일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는

나일강의 서쪽 기슭 왕들의 계곡(Valley of the King)에서

이제까지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3300년전 이집트 제18왕조(BC1352~1343)의 파라오

투탕카멘(Tutankhamun)의 묘를 발견하였다.

발굴 당시의 사진

 

 -왕의 석관을 감싸고 있는 4중의 사당(Shrine)이 있는 현실의 모습-

 전실에서 유물을 수습한 후, 하워드 카터 와 카나번卿은

1923년 2월 17일 현실을 열었다.

이 방은 하나의 거대한 금박 사당이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당의 덮개를 열자 내부에는 사당이 3개 더 들어있었다.

4번째인 가장 안쪽의 사당안에서

발굴자들은 무거운 석관을 발견하였는데,

그 안에 3개의 관이 있었다.

석관과 관을 열기 위해 사당을 먼저 해체하고 치우는데만

몇 달이 걸렸으며, 비좁은 공간에서의 작업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러시아 인형같이 4중으로 겹쳐진 상자 형태의 외관(外棺)-

 

-외관 벽면의 문양-

-보물의 방 북쪽벽의 벽화-

4면의 벽에는 각각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두번째의 외관-

금박을 입힌 목재 / 길이 374cm, 너비 235cm, 높이 225cm

 

-석 관-

석관 내부에서 마침내 미라 형태의 관 3개를 발견했으며

이들 관 내부에도 관이 하나씩 더 겹쳐져 있는것을 발견했다.

가장 안쪽의 관은 110kg의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머리에 황금 마스크를 쓴

투탕카멘 왕의 미이라가 들어 있었다.

석관의 상자부분은 규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석관의 뚜껑은 분홍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뚜껑의 재료인 똑같은 규암을

구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진열된 관들-

- 바깥 관 과 가운데 관(앞쪽)-

바깥 관: 회반죽을 바탕으로 금박을 입힌 사이프러스 나무,

은과 청동, 방해석과 흑요석, 준보석 등으로 상감처리

가운데 관: 금박의 나무, 유리반죽과 보석으로 상감. /

길이 204cm, 너비 68cm. 높이 78,5cm. .

 

- 금으로 된 속 관 -

-황금 가면을 쓴 투탕카멘의 미이라-

- 투탕카멘의 장례용 황금 가면-

무게가 11kg인 이 마스크는 미이라의 머리 위에 씌워져 있었다.

이 마스크는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굴된 보물 중 최고로 꼽힌다.

소년왕을 실제와 비슷하게 이상적인 모습으로 묘사한

이 황금 마스크의 우아함은 어느 유물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살아있는 듯한 두 눈에는 석영을, 눈동자에는 흑요석을 삼감해 넣었다. 홍옥수와 청옥수,

터키석으로 장식하였다.

소형 미라 모형의 부장품들 -

투탕카멘의 죽음으로 제 17. 18왕조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된다.

그의 두 자녀도 그와 함께 매장됐는데

하나는 사산이었고 하나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우샤브티-내세의 하인들-

우샤브티("부름에 응하는 자"를 뜻함)라고 하는

작은 미라형태의 조각상들은 장례식이 끝난 뒤 관습에 따라

붕대로 싸서 관에 넣었다.

왕을 포함해 죽은 자들은 예외없이

사후세계의 들판에서 일해야 하는데

우샤브티가 그 의무를 대신해 준다.

 

-동물 모양의 옷깃- -세 줄 목걸이-

 

매 옷깃:너비 44cm, 코부라 옷깃: 너비 33cm

*순금 원반과 채색 파이앙스(faience)로 구성

상이집트 수호신: 독수리, 하이집트 수호신: 코부라(뱀신) 이

황금 원반목걸이는 왕의 충신에게 하사하던 것이다.

 

-디아뎀(Diadem)-

금, 준 보석(semi-precious stones), 파이앙스 도기, 유리, /

직경 : 18.9cm, 띠 : 길이 31.5cm.

** 왕관의 원형이라고 할 수있는 긴 머리띠 모양의 디아뎀은

투탕카멘의 머리에 있던 것이다.

왕의 머리띠에는 전령의 동물인 독수리와 뱀 등을 묘사한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각각 상징한다.

 

-동물 모양의 옷깃-

사진에는 유리관의 모서리가 찍혀있다.

유리관의 높이 때문에 피할 수 없었다.

-양 끝에 독수리 머리가 장식된 옷깃-

-얕은 부조형 사당-

금박을 입힌 나무, 은으로 덮힌 보, 은제 볼트. /

* 높이 50.5cm, 너비 26.5 cm, 깊이 32cm,

**상이집트의 예배당 모양의 이 사당엔 18개의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이 장면은 왕비가 왕을 위해 행동하는것을 묘사하고 있다.

-카노포스 사당(Canopic shrine)-

 

금박을 입힌 나무에 유리와 준보석으로 상감처리. /

높이 198cm, 길이 153cm, 너비 122cm,

** 예배당 형태의 카노포스 사당은 글이 새겨진 모서리 기둥과 함께

천개(天蓋)형 궤가 덮여있고 썰매 위에 놓여있다.

사당의 4면에는 네명의 여신이 각각 보호하듯

팔을 벌려 사당을 지키고 있다.

 

- 네 개의 카노포스 관-

금박에 유리, 라피스 라즐리(lapis lazuli : 청금석),

홍옥수, 흑요석과 수정으로 상감 처리./높이 39.5cm 너비 11 cm.

**네 개의 작은 관의 뚜껑과 몸체는 왕의 내장을 보관하도록 만든 것인데,

각각 두 개의 금박 상자로 구성되어 있다.

상자안의 장식은 돋을 새김으로 되어있고,

바깥쪽은 색색의 유리와 준보석으로 상감 처리되어 있다.

카노포스 단지는 중간 관의 축소형처럼 보이는데 중간 관과는 달리

투탕카멘의 선조를 위해 제조된 것이다.

 

-카노포스 함(Canopic Chest)-

방해석에 금도금, 손잡이는 황금. / 높이 85.5cm, 너비 54cm,

** 카노포스 함은 왕의 내장이 들어있는 황금 단지를 넣기 위해

네 칸으로 나뉘어져 있다.

네 칸은 각각 왕의 머리 모양 뚜껑으로 닫혀있다.

함의 뚜껑은 앞으로 경사진 지붕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옆에 있는 금고리를 통해 내려온 끈으로 고정되어 있다.

부조로 묘사된 네 명의 여신은 모서리에서 팔을 양쪽으로 뻗어

함을 보호하고 있다. 함은 운반하기 쉽도록 썰매에 얹혀있다.

 

-운송선 모형-

나무에 채색 / 길이 121cm,

**이것은 복층 구조로 된 선실이 중앙에 있는 운송선의 모형이다.

선체 노 부분과 선미는 격자무늬와 날개 모양 장식으로

꾸며졌고 연꽃 무늬로 마무리 되어있다.

***이집트인들은 사후세계가 나일강 처럼 지류와 운하로

서로 얽혀 있어, 죽은 왕은 강을 통해서

성지와 신들이 사는 곳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성지로 가는 이러한 여정은 무덤에 넣어 놓은

모형배를 통해 가능하다고 믿었다.

 

-달의 배 모형-

나무에 채색, / 길이 133cm,

** 이 모형 배의 선수와 선미는 모양이 같으며 끝 부분은

파피루스의 꽃 모양을 하고 있다.

이 형태는 달이 별들을 헤치고

하늘을 가로질러 항해하는 모습과 같다.

피라미드 시대의 사람들은

죽은 왕들이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다고 믿었다.

- 왕과 신들을 묘사한 여러가지 소형 유물들-

-왕을 떠받친 멘케레트 신의 형상- -표범을 탄 왕의 조각상-
 

한 신이 수의를 입은 왕을 머리에 떠 받치고 있다.

* 검은 표범능 탄 왕은 왼손에 긴 지팡이 홀을, 오른 손에는

멘케레트 신이 하늘을 향해 왕권의 형상을 받들어 도리깨를 쥐고 있다.

표범은 자신의 몸에 죽은 왕을 받들어 올리는 모습을 나타낸다.

받아들이는 고대 하늘의 여신을 형상화하고 있다.

금박을 입힌 목재와 유리, / 높이: 84.5cm. 금박을 입힌 나무에

유리 상감 처리, 장신구는 금박을 입힌 청동. / 높이 : 85.6 cm.

 

-발 받침대가 있는 투탕카멘의 옥좌-

금박을 입힌 나무에 은, 설화석고, 유리와 준보석 등으로

상감처리,**발 받침대는 금박을 입힌 나무에 상감처리 /

높이 104cm, 너비 53cm, / 발 받침대 : 길이 63.5cm,

이 유명한 옥좌의 등받이에 새겨진 왕의 이름은

투탕카멘이 아홉살에 왕위에 올랐으며

당시에는 아직 투탕카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자 등받이의 장면은 아마르나 시대의 종교적 전통에 따라

생명을 주는 아텐의 태양 아래 있는 국왕 부부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쓰인 왕의 이름은 후에 "아멘"이 붙어

투탕카멘으로 수정됐다.

그림에서 투탕카멘은 편안한 자세로 기대어 쉬고 있고,

그의 아내 안케세나멘은 옆에서 남편의 어깨에

향유를 발라주고 있다.

나무 발 받침대는 푸른 파이앙스로 상감 처리 되어 있다.

받침대에는 세명의 누비아인과

다른 세명의 근동지방 사람들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파라오의 발밑에 굴복한 이국의 우두머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왕의 전차-

석고 가루와 금박을 입힌 나무에 유리와 보석으로 상감.

/차축길이 216 Cm, 연결대 길이 250 cm.

이 금박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전차는 왕이 사용하던 공식전차다.

몸체를 둥글게 휘어진 나무로 만들고,

그 위에 석고와 금박을 입혔다.

전차 바닥은 서로 엇갈리게 짠 가죽끈의 그물망으로 만들었다.

몸체는 바깥부분이 소용돌이 무늬로 동그라미가 처져있고

가운데 부분은 백합 모양으로 갈라졌으며,

윗부분은 네 왕의 이름을 새겨넣는 것으로 마감했다.

굴대는 금속상감으로 장식됐으며,

양 끝에 여섯개의 살로 이루어진 바퀴가 달렸다.

- 방 패-

-곤 봉- - 발 밭침대가 있는 옥좌-

 

* 나무와 금, / 높이 각각 81.8cm 와 82cm.

* 의식용이나 장례용

- 활과 화살-

- 왕의 샌들-

-슈(Shu)신이 받치고 있는 머리 받침대-

상아 / 높이 17.5cm, 너비 29.1cm,

*이 머리 받침대를 지지하고 있는 슈(Shu)는 공기의 신으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의 임무는 하늘을 받드는 대신 잠자는 투탕카멘의 머리를 받쳐주는 것이다.

-뇌문(雷紋) 세공 장식이 있는 손궤-

상아 장식의 목재 / 길이 47 cm, 너비 31.7cm, 높이 34.5cm,

*이 손궤는 양쪽에 금박을 입힌 상형문자가 있는 점이 특징이다.

투탕카멘과 그의 아내 안케세나멘의 이름이 상아판에 새겨져 있다.

이 장식함의 내부는 16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왕의 필기도구와 거울상자가 들어 있었다.

-뚜껑이 달린 상아 장식함-

-왕의 토르소- -왕의 소형 조각상-
 

회반죽을 바르고 칠을 한 목재 금, / 높이 8.4cm,

높이 76.5cm, 너비 41.5cm

*이 조각상의 얼굴 표정은 확실히 투탕카멘을 닮았다.

이 물건은 옷이나 보석 장신구를 입혀보거나 보관하는데

사용되었던 마네킹 역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 받침대가 있는 옥좌-

목재, 금박판, 유리와 준보석, 흑단, 상아상감 장식

/ 왕좌: 높이 102cm, 너비 70cm

/ 발 받침대: 길이 58.7cm, 너비 31.7cm.

** 이 옥좌는 접이식 의자를 본 따서 만든 것이다.

-게임 보드-

흑단에 상아로 상감하고 금박으로 장식.

/ 길이: 44.6cm. 나비: 14.3cm. 높이: 8.1cm.

** 말을 한쪽 끝으로 옮기는 새네트 게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보드게임이다

-아이벡스 보트-

방해석(설화석고), 금, 유리, 상아,

/ 길이: 58.3cm. 높이: 37.3cm

** 아이벡스 보트는 최고의 솜씨를 자랑하는 공예품으로

배 가운데에 연꽃기둥 4개가 받치고 있는 정자가 있고

정자안에 작은 사당이 들어있다.

연꽃을 든 나체의 시녀와 나체의 여자 조타수가 있다.

- 사자모양 뚜껑의 연고 함-

*설화석고, 금, 상아 / 높이 : 26.8cm

-이중 항아리-

설화 석고(방해석) / 높이 28.3cm,

* 이 이중 항아리는 설화석고 한 덩어리를 조각해 만든 것이다.

향유나 연고를 보관하는데 사용하였다.

-상아 손궤-

상아 와 금 . / 높이: 13.1cm. 너비: 15.7cm. 깊이: 12.6cm.

** 이 작은 손궤는 질 좋은 상아로 만든 아름다운 공예품이다.

-의식용 낫-

나무, 금, 합금, 유리, 방해석 / 길이 27cm, 높이 22cm

** 곡식을 자르는 일상용 낫은

나무 손잡이와 수석 날로 만들어졌고 이것은 장식용 이다.

왕을 포함해 죽은 자들은 모두 내세에 농사를 짓고

자급자족해야 한다.

-아동용 도리깨 와 홀-

도리깨와 갈고리 모양의 홀은 파라오의 전형적인 휘장이다.

이것은 다른 것과 비교했을 때 크기가 작으며

아홉살에 즉위한 어린왕의 대관식에 사용했던 것이다.

작은 홀에는 옛이름인 투탕카텐이 새겨져 있다

.

-아시아 와 누비아의 죄수들의 모습이 조각된 지팡이-

금박을 입힌 나무에 상아와 흑단으로 상감처리.

길이: 104 cm

** 이 지팡이의 곡선형 손잡이 끝 부분에는

적군 포로 2명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수염을 기른 남자는 아시아인으로 추정되고

곱슬머리의 사람은 누비아인을 묘사하고 있다.

** 이집트 고고학자와 독일 고고학 기술진에 의해 재현된

실물크기의 복제 유물들은

2011년 10월 15일~2012년 5월 13일까지

과천국립과학관에서 장장 8개월간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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