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취재. 촬영. 편집. 내레이션:문화재방송(헤리티지)
삼별초란?
고려 무신정권 때의 특수군대이다
최씨 무신 정권의 군사적 기반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후에 항몽 활동을 전개하는 중심축이 되었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중심이었던 최씨들이 권력을
유지하고 보호가려고 만든 군대.
밤에 개경의 도둑을 잡는 순찰을 하기위해 만들어진
'야별초'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로 나뉘어져 구성되었다.
삼별초 ( 좌별초 + 우별초 + 신의군 )
기존의 좌별초, 우별초에 신의군을 합쳐서 탄생!!
여기서 '신의군'은 몽골에 원한이 깊은 사람들이
스스로 입대해서 만들어진 부대로 보통 몽골에
잡혔다가 도망 온 사람들로 편성되었다.
삼별초 항쟁 : 배중손, 김통정
삼별초는 최씨 사병 부대로 시작하였지만
몽골침입 이후에는 나라의 군대를 대신해서
싸우기 시작.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고려가 몽골에 항복을 하게
되었으나 삼별초 대원들은 끝까지 싸우기로 했다.
그래서 그 유명한 강화도 -> 진도 => 제주도 !!!!
고려가 몽골에 항복을 하고나니 고려정부도 삼별초의 철수 요구. 그러나 삼별초는 강화도를 떠나 진도로 근거지 옮겨.
진도는 큰 섬이고 조류도 빠르다보니 몽골군의 접근 어려웠다 진도에서 여몽 연합군의 기습으로 지휘를 하던
배중손 전사. 김통정이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 탐라(제주도)로 훝퇴
가장 큰 섬인 제주도로 내려가 끝까지 맞서 싸웠으나 여몽 연합군에 의해 삼별초 섬멸.
[출처] 삼별초 항쟁, 역할 #몽골침입 배중손, 김통정|작성자 예사쌤
[임진왜란 비사(秘史)]왜군 선봉장 사야가는 조선군에 귀순, 혁혁한 전과 올려, 그의 이름 김충선
김충선은 1592년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かとうきよまさ · 加藤清正)의 우 선봉장으로 참전하였으나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을 통해 조선에 귀화하였다.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도 적을 물리치며 누차 큰 공을 세웠고, 이후에도 나라를 위해 66세까지 전장에 나가 싸웠다. 선조에게서 친히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정2품 정헌대부의 벼슬까지 올라 그 공을 인정받았다.
김충선, 키워드로 보는 이야기
얼마 후, 한 과묵한 장수의 명령 아래 이번에는 조선군이 조총을 들고 나타났다. 예상치 못한 공세에 왜군은 당황했다. 조선군은 파죽지세로 몰고나가 왜적이 점령한 18개 지역의 성을 탈환했다. 훗날 사람들은 말없이 조선군을 이끌던 장수, 베일에 싸였던 그 인물이 바로 홀연히 사라졌던 스물두 살, 일본의 사무라이 사야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이름이 김충선이라는 것 역시 밝혀졌다.
일본인 사야가, 그의 행적
당시 사야가의 일본에서의 행적은 남아 있지 않다. 사야가 가문도 일본에서 사라졌다. 그의 글이 실린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에도 사야가가 일본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나와 있지 않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사야가의 과거를 복원하려 나섰다. 그 결과 두 인물로 좁혀졌다. 스즈키 마고이치 또는 하라다 노부타네, 이들은 임진왜란 출전 이후 행적이 묘연해진 인물들이다.
하라다 노부타네라는 주장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인연이 드러난다. 일본의 전통가문인 하라다 노부타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영토를 빼앗기고 강압적으로 히데요시의 측근인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에 예속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로 인해 하라다 노부타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가토 기요마사를 원수로 여겼을 것이고, 이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절치부심했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조선에 귀화해서 싸우겠다는 적장의 편지를 받은 병마절도사 박진은 고심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사야가는 왜군들에게서 가져온 조총으로 조선군을 훈련시켜 조총부대를 만들었다. 그는 사기가 떨어진 관군을 격려하면서 한편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한 의병들을 끌어들여 부대를 새롭게 훈련시켰다. 초총의 사용법뿐 아니라 조총과 화약의 제조기술을 전수했다.
"소장이 귀화한 이후에 본국의 병기를 둘러볼 때 비록 칼과 창과 도끼와 활이 있기는 하나 직접 전투에 당해서는 쓸만한 무기가 거의 없으니 개탄할 일입니다. 둔한 무기로 싸우는 것은 자기 군사를 적에게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소장이 화포와 조총 만드는 법을 알고 있으니 이 기술을 군중에 널리 가르쳐 전투에 쓴다면 어떤 싸움엔들 이기지 못하리까?" 귀화를 선언한 직후 김충선이 절도사에게 보낸 서신이다.
평화를 선택한 왜장, 조선인 김충선으로 다시 태어나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의령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바다에 이순신이 있다면 육지에는 사야가가 있었다. 사야가가 이끄는 군사들과 이순신이 지휘하는 군사들이 연달아 승전보를 전해오자 조선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갔다.
1598년 전쟁이 끝난 후, 선조는 사야가의 공로를 인정해 벼슬을 내렸고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새로운 이름은 '김충선'.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는 의미를 담아 김씨 성을 주었고 바다를 건너왔다 하여 본관을 김해(金海)로 하였다. 일본이름 사야가(沙也加)에 모래(沙)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착상한 선조의 기발한 작명이었다. 이름은 충성스럽고 착하다 하여 충선(忠善)이라 하였다. (김충선 가문은 김해김씨이지만 수로왕의 후손들이 아닌 까닭에 특별히 앞에 '임금이 내려준 성씨'라는 뜻의 '사성(賜姓)' 두 글자를 붙여 '사성 김해김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 승정원일기>는 젊은 장수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담력이 뛰어나고 성품 또한 공손하고 삼간다."
조선인으로서 조선을 지키며 살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서른 살의 김충선은 진주 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해 녹촌(오늘날의 대구 달성국 가창면 우록리)에 정착했다. 임진왜란 후 북방 여진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김충선은 1603년부터 10년 동안 자원하여 북방의 국경을 지켰다. 1624년 이괄의 난에 이어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투항했던 항왜 자손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섰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왕의 명령을 받지도 않고 군사를 모아 후금의 군대에 맞서 적군 500여 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올렸다. 삼전도에서 인조가 후금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는 "예의의 나라 군신으로서 어찌 오랑캐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는가, 춘우의 대의도 끝났구나" 대성통곡하며 다시 녹촌으로 돌아갔다.
인조는 그에게 오늘날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자헌대부를 하사했다. 평안히 살라며 논밭도 내려주었지만 그는 백성 된 도리를 했을 뿐이라며 사양하고 평생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했다. 그리고 조선에 온 지 50년이 흐른 72세에, 제2의 고향인 조선땅에 묻혔다.
영웅과 역적 사이,
인도주의자…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김충선의 존재
조선인 김충선, 일본인 사야가. 두 이름은 모두 일본 역사에서 지워졌다. 일본의 입장에서 사야가는 조국을 버린 배신자이자 반역자, 매국노 였다. 일제 사학자들은 김충선이 조선이 만든 허구 인물이라고 했다. 지워진 이름이 복원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일본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김충선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녹동서원을 방문해 착을 쓰면서 분위기가 반전된 것이다. 김충선 귀화 400주년이 되던 1992년에는 일본 NHK 방송이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했다.
이후 일본에서는 사야가 연구단체들이 설립되었고 1998년에는 동시에 한국과 일본이 교과서에 사야가, 김충선의 이야기를 실었다. 2-12년에는 그의 위패를 모신 녹동서원 옆에 '한일 우호관'이 들어섰다. 이곳은 일본 관광객이 대구에 가면 꼭 들르는 명소가 되었다.
(참고=역사채널e '역사e: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김충선, 더 몰랐던 이야기
조선시대 '항왜'들의 활약
김충선은 권율과 함께 전투에 참가해 왜군의 목을 베었을 뿐만 아니라, 왜군의 군수품을 탈취해 왔으며, 더군다나 포로가 되었던 조선인 100여명을 귀순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더 이상 그가 일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며, 조선 정부의 왜군에 대한 귀화 및 회유정책이 실효를 거두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이 같은 항왜들의 공훈이 수도 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위에서 본 사야가의 언급내용이 기록된 11월 22일(기유)자에도 "항왜 손시로(孫時老)가 전투에서 역전하다가 탄환을 맞아 생명이 위태로우니 별도로 시상하여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어야 한다. 왜적의 머리 12급과 빼앗은 잡물은 항왜들이 모두 스스로 가지고 올라가기를 원하므로, 요구대로 줘서 올려 보낸다."는 내용이 보이고 있어 항왜들이 얼마나 열성적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는가를 유추해볼 수 있다. (참고=한국콘텐츠진흥원)
마음 속으론 슬픔 안고, 후손들에게 겸손을 가르쳐
명분을 좇았지만 떠나온 고향 땅에 대한 향수는 어쩔 수 없었다. 김충선이 남긴 시문에는 그 애절한 향수가 곳곳에 묻어난다.
"의중에 결단하고 선산에 하직하고/친척과 이별하며 일곱형제와 두 아내 일시에 다 떠나니/슬픈 마음 설운 뜻이 없다 하면 빈말이라(술회가·述懷歌)"
"남풍이 건듯 불어/행여 고향소식 가져온가/급히 일어나니 그 어인 광풍인가/홀연히 바람 소리만 날 뿐 볼 수가 없네/허탈히 탄식하고 앉았으니/이내 생전에 골육지친(骨肉至親) 소식 알 길이 없어/글로 서러워하노라 (남풍유감·南風有感)…"
그같은 설움 탓에 오히려 후손에게 더더욱 고향 이야기를 삼갔을 거란 추측이 많다. 장남 경원(敬元)은 아버지 행장에서 "매양 선대의 제삿날을 당하면 종일 눈물을 흘리시고 남풍이 불면 의대를 풀고 남을 향해 길게 한숨지어 탄식하고 때로 눈물지으셨다"고 적었다. 또 "형제 8인중 가장 끝이라 남들이 형제가 많음을 보면 눈물을 흘려 부러워하셨다"고 했다.
김충선이 되고서도 인간적인 고뇌를 떨치지 못한 그는 술회가를 이렇게 끝맺는다. "국가에 불충(不忠)하고 사문(私門)에 불효되니/천지간 죄인이 나밖에 또 있는가/아마도 세상에 흉한 팔자는 나 하나뿐인가 하노라"
그리고 후손들에게 이같은 가훈을 남겼다. "절대로 영달을 바라지 말 것이며 농사짓고 살라. 여유 있을 때 틈틈히 공부하며 사람답게 보내라." 이방인으로 타국에 뿌리 내리려면 절대로 드러지 말고 겸손하게 살라는 뜻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충선, 전 생(生)을 바친 호국(護國)
김충선, 후대의 이야기
"한반도에서 일본인 시조를 공개적으로 밝힌 일족은 우리가 유일하다. 그만큼 당당하다는 것이다. 후손은 11개 파로 7500명쯤 된다. 김치열 전 내무장관도 우리 문중이다."
최보식 기자의 '최보식이 만난 사람'에서 소개된 김상보(68) 종친회장은 김충선의 12세손이다. 한일 우호관 건립을 추진해왔던 김상보 씨는 "한일 양국이 이제 갈등과 증오의 역사를 씻고 새로운 우호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며 선조 김충선과 한일 우호관이라는 건물이 양국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강조했다.
그는 또한 '일본 입장에서 김충선은 '역적' '매국노'일 수밖에 없지 않겠나?'는 질문에 "1997년 일본 NHK는 '출병에 대의(大義) 없다-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등 돌린 사나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한 무사의 의로운 결단,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거부한 인도주의자, 일본의 양심 등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한·일 관계가 악화될 때 김충선은 특히 일본 쪽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녹동서원, 한·일우호관, 신도비, 유적비…
녹동서원
1789년(정조 13) 지역 유림에서 유교적 문물과 예의를 중시하였던 김충선의 뜻을 기려 건립하였다. 이후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거되었다가 1885년 다시 지었고 1971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경내에는 사당인 녹동사(鹿洞祠)와 향양문, 유적비, 신도비 등이 있으며 해마다 3월에 제사를 지낸다.
- 위치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길 218
- 문의 : 053-767-5770 / http://culture.dalseong.daegu.kr
김충선의 무덤. 대구 달성군 가창면에 소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출처: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4/18/20160418010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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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해상왕 장보고, 그의 얼이 살아있는 중국 적산(赤山)을 가다
장보고 대사 영정
국가표준영정
- / 문화체육관광부가 국가 표준 영정 제21호로 지정
- / 서울대학교 동양학교 명예교수 일랑 이종상 화백 작, 1979년
- / 규모 116.5cm * 9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장보고(張保睾 : ? ~ 841)는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중반을 살았던 인물이다. 장보고는 완도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내고 당(唐)나라 강소성(江蘇省) 서주(徐州)에서 무령군중소장(武零軍中小將)으로 활약하다 귀국하여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해적소탕과 동북아 해상무역을 장악한 우리 역사에서 유일하게 해외경영을 한 인물이다.
신라인 장보고, 보통 중국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인물이다. 하지만 위해에서는 이름 석자만 대면 모를 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도 그럴것이 장보고 전기관(张保皋传记管)이 위해 적산에 자리잡고 있는터. 한국에서 민족영웅으로 알려진 장보고의 기념관이 왜 중국 위해(威海) 적산에 세워져 있을가? 이런 의문을 품고 필자는 일행을 따라 위해 적산 풍경구로 향했다.
(사진설명: 장보고 전기관으로 향하는 오솔길)
위해 적산 풍경구는 산동반도의 제일 동쪽끝에 자리잡은 영성(荣成)시 동남부의 풍경이 수려한 석도만 서안에 위치해 있다. 조선반도, 일본열도와 바다를 사이두고 마주하고 있는 석도항만은 산동반도에서 한국, 일본과의 해상거리가 가장 짧은 곳이다.
적산 풍경구에 들어서니 탁 트인 바다와 우뚝 솟은 산이 한눈에 한겨왔다. 그 사이의 올리막길을 지나는 내내 짙은 바다내음이 산바람을 타고 불어와 코를 자극했다.
가이드의 소개에 따르면 이 곳은 적산법화원(法华院)을 중심으로 세계에서 제일 큰 해신상인 적산대명신(赤山大明神), 한국 해상왕 장보고 전기관, 중국북방민속문화박물원인 영성(荣成)민속관, 중국 최대의 수석문화관인 세렴아석관(世廉雅石馆), 삼림공원 천문담(天门潭), 해상낙원 국제해수욕장 등 풍경구가 한데 어우러져 자연, 생태, 종교, 역사, 해양문화, 레저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테마관광지이다.
(사진설명: 장보고 동상)
녹음이 짙은 오솔길 계단을 따라 일행은 장보고 전기관으로 향했다. 전기관에 들어서자 큰 칼을 찬 장보고 동상이 한눈에 안겨왔다. 높이가 무려 8미터,무게가 6톤에 달하는 이 동상은 전기관의 한가운데 우뚝 서 장보고의 영웅적 기백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굳은 날씨에도 그의 위풍당당한 기상은 전혀 흐려지지 않았다.
장보고 전기관은 부지면적이 1.3평방미터이고 총 다섯개 전시구역으로 나뉘어 장보고의 굵직굵직한 행보를 하나하나씩 풀어주고 있었다.
기원 807년에 장보고는 친구 정년과 함께 적산포(현재의 석도항만)로 와 당나라 무령군에 입대했다. "용맹하고 씩씩해 말을 타고 창을 쓰는데는 장보고를 당할 자가 없었으니" 그는 곧 무령군의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적산포에는 많은 신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고향 사람들에게 정신적지주를 제공하고저 장보고는 당나라 정부의 허락을 받고 적산포에 법화원을 설립했다.
당시 신라 연해일대에 해적이 창궐하고 신라인이 노비로 팔려가는 행위가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장보고는 돌연 귀국을 결심한다. 귀국한 장보고는 병사를 거느리고 청해에 진영을 설치해 해적을 소탕하고 서남부 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해상을 안정시키고 나서 장보고는 당나라와 일본을 잇는 중계무역에 뛰어들었다.
그는 신라와 중국, 일본 삼개국을 상대로 해상무역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재일신라인 사회와 재당신라인 사회를 연결하는 무역망을 구축하는 한편 조선업과 선박, 선원임대 등을 경영해 조선술과 항해술이 임대한 선원에 의해 아랍 등 지역까지 전해졌다. 아울러 장보고를 "사상 탁월한 해양상업 무역왕"으로 부르고 있다.
(사진설명: 장보고 전기관 전경)
장보고의 활약상은 전시관의 밀랍과 그림, 영상물, 유물 복제품, 장보고 시대의 무역선 복원 모형 등 150점의 유물을 통해 낱낱이 체현되고 있었다. 전시관 곳곳에서 장보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고 장보고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영용무쌍한 기백으로 전장을 누비고 불타오르는 정의감으로 해적을 물리치고 뛰어난 전략으로 중일한 해상실크로드를 개척하기까지 장보고의 일생이야말로 끊임없는 도전속에서 투지로 다져진 삶이 아닐가 싶었다.
한국에서는 이런 장보고를 민족영웅으로 추대하면서 장보고를 기념하기 위해 "장보고 대사 해양경영사연구회",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등 단체를 설립하고 장보고에 대해 전문적인 학술연구를 하고 있다. 장보고를 기념하고저 2005년 한국 KBS에서는 150억한화를 투자해 70부작 대하드라마 "해신"을 선보였다. 현재 장보고 전기관은 한국청소년 애국주의교육기지로 되었다고 한다. 관광구 책임자의 소개에 따르면 2005년 개방한 이래 이곳을 다녀간 관광객 총 800만명 중 한국 관광객이 100만명에 달한다. 한국 이수성 전임총리를 비롯해 13명 국회의원도 이 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사진설명: 당나라로 향하는 장보고(좌)와 정년(우) )
장보고 전기관은 중국 중앙정부로부터 외국인 전기관으로 세번째로 공식 승인을 받고 개관한 것이다. 약 1200년전 중한 해상무역통로를 개척해 우호의 길을 열어준 장보고, 오늘날 중한 양국의 교류를 위해 역사적인 의미를 보태주고 있었다.
전기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중한 교류 및 우호를 상징하는 장보고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기념비는 세계 한민족연합이 주도해 10만달러를 적산그룹에 투자해 세워졌다고 한다. 특히 이 기념비 정면에는 "장보고 기념탑"이라고 씌여진 한국 김영삼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가 있어 더욱 눈길을 끌었다.
거친 파도를 가르며 해상의 길을 열어준 해상왕 장보고, 그의 행적은 오늘날까지도 끈끈한 뉴대로 중한 양국을 이어주고 있다. 장보고의 얼이 담겨있는 이곳 적산에서 그의 웅대한 기개를 피부로 느껴본다.
(사진설명: 전장에서의 장보고)
(사진설명: 법화원을 설립하고 있는 장보고 (좌2) )
(사진설명: 1200년전 장보고의 무역선)
(사진설명: 장보고 이야기를 제작한 드라마 "해신" )
(글/사진: 권향화 기자)
원문보기
중국의 땅 끝에서 만난 한국, 위해(威海)
- 트래블조선
밤바다를 유유히 가로질러 지나온 서해 위로 해가 떠오르는 풍경… 눈앞에 다가온 위해
'산동성의 닭 울음소리가 인천까지 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해시가 속한 산동성과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이에 있다. 서해 백령도에서 위해까지의 거리는 200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는데 이는 서울에서 강릉까지의 거리보다도 짧다. 하늘길이 아닌 뱃길을 따라 위해로 떠난 이유는 오랜 세월 바다가 품어온 이야기들을 천천히 그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라시대 이전부터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과 진귀한 물건 그리고 끝이 없는 사연들이 이 바다를 건넜다.
한때는 해상왕 장보고가 이 바다를 호령했고, 한때는 청나라와 일본 그리고 서양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기도 했던 바다. 해질녘 출발한 페리는 고요한 항해를 마치고 정오 즈음 위해에 도착했다. 낮은 산들과 빨간 지붕의 집들 그리고 모래해변들. 항구에 들어서며 보이는 풍경에서 낯섦과 익숙함을 동시에 느끼며 위해에 발을 내딛었다.
위해의 문을 열다, 행복문
행복문
배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바로 위해의 랜드마크, 행복문이다. 꽃으로 만든 배 모양의 조형물을 지나 바다를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45미터 높이의 행복문과 마주한다. 좋지 않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위해의 대표 명소답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현대화된 위해를 상징하는 이 건축물은 유리로 마감이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한데, 밤이 되면 형형색색으로 불을 밝혀 온 주위를 환하게 꾸민다. 행복문 뒤에는 복을 기원하는 서로 다른 한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진 만복도(萬福圖)라는 이름의 청동 조형물이 묵직한 느낌으로 자리하고 있다. 너도나도 이 반원형 조형물 위에 서서 행복문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긴다.
차례를 기다려 위로 올라가보니 위해를 중심으로 중국과 세계 주요 도시들의 방향과 거리가 표시되어 있다. 금방 찾아낸 서울이라는 두 글자에 괜스레 반가운 마음이 든다. 조개껍데기로 만든 아기자기한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좌판과 아이들을 위한 작은 놀이기구들, 곳곳에 세워진 조형물들이 볼거리를 더한다. 떠들썩한 단체여행객들, 바다를 바라보며 속삭이는 연인들, 바람을 쐬러 나온 위해 사람들과 여행객들이 뒤섞여 빚어내는, 친근하면서도 설렘이 있는 풍경 속을 오가며 여행에 행운이 따르길 바라본다.
해안을 수놓다, 위해의 공원들
위해공원
긴 해안선을 따라 행복문이 있는 해빈공원부터 남쪽으로 행복공원과 위해공원, 열해공원 그리고 해상공원이 이어진다. 갖가지 풀과 나무 그리고 동서양 위인들의 조형물들로 짜임새 있게 꾸며진 해빈공원과 행복공원을 지나면 위해공원으로 이어진다. 공터에 누워 낮잠을 즐기는 이, 자전거를 타는 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는 이들의 평화로운 장면들을 눈에 담는다. 다양한 편의시설들이 잘 갖추어져 있고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공원을 거닐다 눈길을 사로잡는 커다란 조형물의 등장에 걸음을 멈췄다. '위해의 창' 또는 '화중화(畵中畵)'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거대한 액자 조형물 앞에도 행복문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다.
멀리서 바라봐도 멋있지만 가까이서 보는 주름 하나하나의 디테일도 놀랍다. 포항 앞바다에 세워진 상생의 손 조형물과 닮아있다. 등대와 해초방이 있는 열해공원을 지나 해상공원에 닿으면 드넓은 해변이 펼쳐진다. 모래사장과 갯벌이 함께 있어서 조개를 줍는 가족 여행객들과 해변에서 낭만을 속삭이는 연인들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다. 한 길로 이어진 해안길이지만 품고 있는 매력은 다채롭기 그지없다. 도심 주변에 이토록 다양한 해안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공원들을 누릴 수 있는 위해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느끼는 순간이다.
info. 위해 자전거 대여 시스템
위해에서는 어디서나 쉽게 자전거를 볼 수 있다. 누구나 대여할 수 있는 자전거로 어플을 설치하면 간단하게 이용할 수 있다. 시간 당 대여료가 우리 돈 3백 원 정도로 매우 저렴하며, 원하는 곳에서 대여 및 반납이 가능하기 때문에 편리하다. 자전거마다 GPS가 장착되어 있어 도난의 우려도 없다고.
해초방
약 3백여 년의 역사를 지닌 해초방은 위해만의 독창적인 가옥 형태로 위해시 연해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짝 말린 해초는 부드러우면서도 질겨지는데 이러한 해초를 사용하여 지붕 위를 두껍게 덮으면 벌레와 곰팡이를 방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지낼 수 있다.
천년 요새, 유공도
갑오전쟁박물관
위해시 앞바다에 떠 있는 유공도는 위해 대표 여행지 중 하나로 위해가 평범한 시골 어촌에서 인구 3백만의 대도시로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곳이다. 해안과 가깝고 주변 지역을 관찰하기 좋은 지리적인 이점을 갖고 있는 곳으로 해적을 막고 영국과 일본제국의 지배와 국공내전 등에서 군사요새의 역할을 하며 위해가 성장하는 데 발판을 마련해왔다. 지금은 더없이 평화로운 여행지이지만 그 역사를 들춰보면 이 섬 에는 끊임없는 수모와 지배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행복문 근처의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유공도로 향한다. 품고 있는 아픈 역사에 반해 섬의 경관은 아름답기만 하다.
부두에 도착하니 갑오전쟁박물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청나라 때 조직되었다는 북양 해군함선을 상징하는 건물과 북양해군장교의 인물상이 하나 된 느낌으로 우뚝 솟아있다. 우리와도 관련이 깊은 갑오전쟁박물관은 북양함대사령관이 쓰던 사무실을 개조해 조성했으며 유공도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사진과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명예롭지 않은 역사를 숨기지 않고 기억하여 미래를 위한 교 훈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가 잘 느껴지는 이곳은 우리나라의 독립기념관과 비슷한 인상을 준다. 곳곳에 우 리나라와 관련된 내용들이 등장하는데, 알고 있던 내용과 중국의 시선으로 바라본 해석을 비교하며 살펴 보는 과정이 흥미로우며 대부분의 설명에 한국어가 함께 표기되어 있어 이해를 돕는다.
밀랍 인형들의 모습이 매우 사실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망해루(望海樓). 당나라 시기 이 지역의 장관이 순시를 나온 측천무 후를 환영하기 위해 지은 누각으로 내부에는 측천무후 일행의 모습을 새긴 목판과 다양한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망해루에서 내려와서 조금만 걸어가면 영국 조차 시기의 물건들과 당시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게끔 조성된 박물관이 나타난다. 그 때의 풍경이 다양한 형태로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밀랍인형들의 모습이 매우 사실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고래박물관 등을 가볍게 둘러보고 팬다와 꽃사슴이 있는 작은 동물원으로 향한다. 중국 최초로 '해상국가삼림공원'으로 지정된 곳답게 동물원으로 가는 길에는 갖가지 나무들이 무성하다. 무더운 날씨에 사람들은 길가에 드리워진 그늘 아래를 걷고 팬 다들은 나무 밑으로 몸을 피해 휴식을 취한다. 이곳의 꽃사슴들은 중국과 대만이 여전히 우호 관계에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타이완에서 보내온 것. 아픈 역사를 돌아보 며 평화를 기원하고 희망이 피어나는 현장을 확인할 수 있어 뜻깊은 시간이다.
위해 속 작은 한국, 한락방
신라시대 산동 반도에 신라인들이 모여 살았던 신라방이 있었다 면 지금의 위해에는 한락방이 있다. 한락방은 위해의 주요 상 업지역에 위치해 있는 코리아타운으로 거리 군데군데 자리한 가마행렬, 풍물놀이, 장승, 돌하르방 등 우리의 민속조형물들 이 한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야시장이 열리는 중앙광장의 상점에는 중국식 홍등 대신 한국의 청사초롱 이 걸려 있고 지붕에는 한국식 기와가 올려져 있어 익숙 하고 반갑다. 건물마다 내걸린 한글 간판들의 모습에서 이곳이 한국인가 중국인가 싶을 정도. 한락방은 중국인 들에게는 한국 음식을 맛보고 한국 상품을 구입하고 한국의 문화를 만날 수 있는 다채로운 문화 공간이며 한국 인에게도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을 바라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장소다. 인천의 차이나타운처럼 위해의 대표여행지 중 하나로 자리 잡기를 바라본다.
옥 조각에 스며든 마음, 선고정
선고정은 과거 옥선(玉仙)이 내려와 잠깐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 는 것을 빌고자 할 때 찾아온다. 해발 380여 미터에 자리한 옥선의 사당 주위로 산봉우리 들이 솟아있어 위엄을 자아낸다. 3년 전의 큰불로 인해 풍경이 삭막하지는 않을까 걱정했 지만 초록을 되찾아가고 있는 모습이 다행스럽다. 입구부터 정상까지 이어지는 끝없는 계 단을 따라 옮기는 눈길마다 옥 조각들이 수놓아져 있다. 저마다 그 모양이 다르고 표정이나 질감의 묘사가 생생하여 하나하나 살펴보는 재미에 계단을 오르는 수고스러움은 자연히 잊게 된다. 이쯤이면 대규모 야외 옥 박물관으로 불려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푸른 기와가 올려진 옥선의 사당이 가까워질수록 옥 예술도 절정으로 치닫는다. 마지막 구간에 올라서니 마침내 높이 8.8미터, 무게 약 3백 톤에 달하는 옥선의 조각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옥선을 이루고 있는 부드러운 곡선들 덕분에 조각상은 엄청난 중량에도 불구하고 자애로운 인상을 풍긴다. 짧은 소원을 빌고 다시 사당 밖으로 나와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니 그 풍경 또한 보물이다. 산의 형세를 닮은 계단의 굴곡이 유려하게 자연과 어우러지는 풍경에 가슴이 후련하고 유쾌한 기분마저 든다.
중국 10대 공연, 신유화하
위해에 밤이 찾아오면 중국 10대 공연 중 하나로 손꼽히는 ‘신유화하’를 감상할 차례. 공연이 펼쳐지는 곳은 위해 서부에 위치한 화하성(華夏城).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는 입구를 지나면 잉어 떼가 헤엄치는 연못이 나타나고 돌계단을 오르면 아담한 기와집들과 정원이 조화를 이루는 소담한 산책길이 이어진다. 뒤이어 색색으로 불을 밝힌 터널이 등장하고 이를 지나면 공연이 펼쳐지는 너른 호수가 나타난다. 중국 10대 공연 중 하나라는 명성에 걸맞게 호수 위에 마련 된 배 모양의 관람석은 사람들로 빼곡하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하얀 달이 떠오르자 깊은 산과 호수를 배경으로 공 연이 시작된다. 관람석이 360도로 회전하며 극의 흐름에 따라 서로 다른 야외무대를 향하도록 한 연출이 이색적이다. 스토리는 단순하지만 3백여 명이 하나되어 펼치는 군무와 기예 그리고 화려한 조명은 아쉬운 부분들을 상쇄시 키기에 충분하다. 야외이기에 가능한 웅장한 특수효과가 펼쳐지는 지점에서는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만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극의 분위기는 고조되고 화합을 상징 하는 군무로 공연이 마무리된다. 어둠 속에 반짝이는 화하성의 밤풍경은 해질녘과는 또 다른 운치를 선사하며 위해의 밤을 아름답게 꾸민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http://travel.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15/20171115026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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