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취재. 촬영. 편집. 내레이션:문화재방송(헤리티지)
[김준의 맛과 섬] [30] 점박이물범의 날
8월 25일은 백령중고등학교 점박이물범 탐구 동아리 아이들이 정한 ‘점박이물범의 날’이다. 2011년 제주에서 구조되어 보호받던 점박이물범 ‘복돌이’가 2016년 8월 25일 백령도 하늬바다에 방류되었다. 이때 동아리 아이들이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갇혀 있던 우리 문을 열었다. 학생들은 이날을 기념해 ‘점박이물범의 날’로 정했다.
이런 어린 학생들의 날갯짓이 어른들 마음을 움직였다. 이미 '점박이물범을 사랑하는 모임(점사모)'을 조직했지만 거의 활동하지 않고 있던 어른들이 술렁거렸다. 아이들이 나서는데 어른들도 제구실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점박이물범은 식육목 물범과의 포유류다〈사진〉. 바다에서 잘 생활하도록 발이 지느러미로 진화한 기각류의 일종이다. 우리나라에서 서식하거나 출현한 기각류는 점박이물범, 바다사자, 큰바다사자, 물개 등이 있다. 강치로 알려진 동해의 바다사자는 남획으로 멸종했다. 물개와 큰바다사자는 우리 바다에서 보기 어렵다. 점박이물범은 서해, 동해, 오호츠크해, 캄차카반도, 베링해, 알래스카 연안에 서식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300여 마리가 백령도를 회유하며, 가로림만에서도 10마리 정도가 발견되고 있다.
점박이물범은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는 아시아의 평화를 상징하는 마스코트 노릇을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까나리, 조피볼락, 노래미 등을 좋아해 어민들의 불청객으로 푸대접을 받았다. 이렇게 천덕꾸러기에서 생명과 평화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은 10여 년 동안 백령도를 오가며 관찰하고 공생을 위해 주민을 설득하는 노력을 해온 녹색연합의 공이 크다. 지금은 동아리와 점사모가 함께 점박이물범 모니터링, 서식지 청소 등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엔 어민과 환경단체와 정부가 함께 점박이물범이 쉴 수 있는 터를 바다에 마련했다. 학생 동아리도 30여 명으로 늘었다. 점사모도 점박이물범 보호를 넘어 지속 가능한 섬과 바다를 미래 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한 고민을 시작했다. 이제 섬 주민들도 점박이물범을 보는 눈이 바뀌고 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학생들이 정한 점박이물범의 날이다.
북녘 마주 보며 철책선 따라 걷는, 강화 '평화의 길'
우리는 대체로 평안함해도 늘 평화를 이야기하고 안전에 민감하다. 분단국의 현실이기도 하지만 그 독특함으로 또 다른 새로운 길이 생겨나기도 하는 걸 본다. 강화도에 가면 민통선 북방 지역으로 ' 평화의 길' 이 있다. 군사 접경 지역의 경계심리가 느껴지는 DMZ이라는 말에 바로 평화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예로부터 국가의 위기 때마다 강화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던 곳이다. 요즘 와서는 이곳으로 도보여행을 위한 발걸음들이 찾아들고 있다. 강화는 철책선 따라 평화 여행의 시작점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무거울 것만 같은 분위기지만 막상 다가서면 사람의 손길을 덜 탄 자연에 스며들어 편안히 돌아볼 수 있는 강화섬이다. 대부분 해안 도로에 인접해 있어서 바닷바람과 함께 시원하게 달릴 수 있다. 산과 바다가 아름다운 강화 평화의 길을 따라 몇 군데 들러보았다.
▲ 해안 철책로를 따라 걸으며 이 땅의 자연과 역사를 만나고 평화의 의미를 접하는 강화의 길이다.
철종의 친구가 살던 곳, 희우당 (喜友堂)
강화 평화의 길로 나설 채비를 하면서 강화읍 동문로 쪽 옥림리의 한옥 희우당 (喜友堂)에 먼저 들렀다. 희우당은 조선말 강화도령이던 철종이 하루아침에 왕이 된 후 어릴 적 친구에게 하사한 집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는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 동네 친구 금씨가 철종이 키우던 개를 데리고 임금이 된 친구를 만나러 궁궐을 찾았으나 낮은 신분으로 입궐할 수 없었다. 이를 본 철종이 그 자리에서 도사라는 9품 벼슬을 내려 궁에 입궐케 했다. 두 사람의 깊은 우정 덕에 금도사가 된 철종의 친구는 이후 강화읍 옥림리의 큰 땅과 이곳 희우당을 하사 받아 편하게 살았고 지금껏 후손들이 여기서 살아왔다고 한다.
▲ 벗과 함께 해 즐거운 곳 희우당 (喜友堂). 평온한 한낮 풍경.
이제 후손들은 떠나고 사유지여서 섣부르게 들어가 보기가 쉽지 않다. 잠깐 구경할 수 있을까 주춤거렸는데 주인이신 할머니께서 마침 내다보시며 들어와 차 한 잔 마시고 가라며 푸근히 불러들이신다. 마루에 앉아 텃밭에서 뜯어온 깻잎을 차곡차곡 다듬으며 희우당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 덕분에 더운 여름날 한옥의 정취를 흠뻑 누렸다.
▲ 오랜 이야기가 구석구석 스며있는 한옥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할머니의 희우당.
희우당은 넓은 터에 두 채의 한옥이 앉혀져 있다. 현재의 주인이 이곳을 사들여 4년여에 걸친 고택 복원 공사 끝에 완성된 희우당이다. 아늑하고 정갈하다. 초록의 너른 잔디밭이 평온하다. 1937년도에 상량했다는 왼쪽의 한옥은 오랜 기간 복원수리로 현재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았다. 오른쪽의 한옥은 1958년 상량으로 성북동 한옥을 옮겨 지은 것으로 현재 살림집으로 활용하고 있다.
주인의 말에 따르면 오래된 집은 폐가처럼 너무 낡고 쓰임이 어려웠다고 한다. 말끔한 한옥으로 거듭나기까지 복원 수리에 많은 시간과 땀이 들어갔다. 팔순이 훌쩍 넘으신 할머니의 겸손하고 차근차근한 말에 한옥 구석구석의 사연이 들려온다.
오래된 나무에서 꽃 피우던 날의 이야기, 가을날 은행나무에서 쏟아지는 노란 은행잎과 은행 열매로 뒤덮인 모습, 돌아서면 눈 깜짝할 사이에 자라는 풀들로 늘 쉴 틈이 없다고. 잘 정돈된 모습은 부지런한 할아버지와 자녀분들의 손길 덕분임을 알 수 있었다. 한옥 뒤편으로 옥창 돈대 기단이 보인다. 많이 훼손되어 일부만 남았고 여전히 개인 사유지여서 소유자가 농사를 짓고 있는데 길이 나질 않아 찾아들기 어렵다고 한다.
바로 옆으로 보이는 연미정과 월곳돈대 아래로 흐르는 염하의 물줄기와 북녘땅도 가리키신다. 마당 빨랫줄에 널어 놓은 이불을 탁탁 털고 뒤집어 널며, 푹신한 잔디밭을 걷다가 발밑의 잡풀 하나씩 뽑으며 전해주시는 이야기에 푹 빠진다. 때론 여행 중에 예상치 않은 곳에서 훌쩍 시간을 보낸다. 너무나 행복했다.
○ 인천 강화군 강화읍 동문로 236번 길 35-1
연미정 & 월곶돈대
연미정은 희우당 코앞에 있다. 곧바로 군부대의 출입검사를 거친다. 강화 8경 중의 하나인 연미정(燕尾亭)이 자리 잡은 월곳돈대가 금방 눈앞에 나타났다. 외적의 침입이나 방어 관찰을 목적으로 쌓은 관방시설이다. 타원형에 가까운 모양의 돈대 안에 들면 가장 높은 위치에 연미정이라는 정자 한 채가 자리 잡고 있다. 정자 양쪽으로 수령 500년이 넘는 느티나무는 이곳의 역사를 품으며 세상을 관조한다. 팔작지붕 형태로 사방이 트여서 정자 안에 서면 시원하다. 날씨 좋은 날은 여기서 멀리 북한 땅이 보이기도 한다.
▲ 성벽 너머로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세월이 느껴지는 느티나무가 지키고 있는 연미정, 월곶돈대
남과 북의 강이 하나 되어 흐르는 곳, 서해와 한강, 염하가 만들어내는 모양새가 제비꼬리 같다는 연미정(燕尾亭). 땀을 식히며 정자에서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평화의 길 위엔 바이크족들이 줄지어 달리는 모습이 보인다.
○ 인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평화의 철책길을 따라, 고려 천도공원
연미정에서 평화전망대로 이동하는 길목에서 만날 수 있는 역사 이야기, 고려 천도 공원의 옛 지명은 승천포였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조선시대 개경에서 강화를 잇는 뱃길이 닿는 포구였다. 황해. 평안도에서 서울로 가는 배들은 모두 승천포를 거쳐 갔을 만큼 규모가 컸던 나루터였다고 한다. 이런 지리적 특성을 살려 국난극복의 역사가 담긴 조형물과 그 시대의 역사를 학습할 수 있는 평화관광지로 공간이 조성되었다. 잔디밭에 나지막한 원형 조형물에 그려진 그림은 강화도 천도 당시 고려 고종의 어가행렬인 듯하다.
▲ 역사환경자원과 함께 쾌적함으로 여행자들에게 유용한 쉼터를 제공하는 고려천도공원
드넓은 들판 사이 길목인데도 한적함으로 휴식이 절로 되는 곳, 고요하다. 공원 안으로 여름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군데군데 정자에서 쉬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하세월 여유롭다. 시원한 인공폭포와 수변 휴게공간은 이 길을 지나는 여행자들은 물론이고 지역 주민들의 쉼터이기도 하다. 야트막한 전망대에 올라 철조망 너머의 북한을 조망해 볼 수도 있다.
○ 인천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388-7
▲ 전망대에서 북한 땅 개풍군이 보이고 철책선 따라 평화의 길은 이어진다.
눈앞의 북녘땅, 강화 제적봉 평화전망대
"통일, 가보자고". "남한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으로 불리고 싶다." 평화전망대 1층 통일염원소에 빽빽하게 붙어있는 간절한 소망들, 읽어보기 전에는 뭉클한 마음이 들었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경쾌한 응원 메시지들이다. 지하와 4층은 군부대 전용이다. 2층과 3층에선 전시 및 해설 강의 등이 진행된다.
▲ 평화의 전망대 노래비의 버튼을 누르면 울려 퍼지는 노래 그리운 금강산이 이곳에서는 유난히 특별하게 들린다.
이곳 평화전망대는 제적봉이라는 이름의 봉우리 위에 세워졌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과의 거리는 약 2~3km 밖에 안될 정도로 가깝다. 망원경을 통해 방해물 없이 북한을 쉽게 조망할 수 있다. 강화 해협을 사이에 두고 송악산이 지척인 듯 가까이 보인다. 연백평야, 바로 앞의 해안가를 건너 예성강이 흐르고, 오락가락하는 북한 주민의 모습... 북쪽에 고향을 두고 온 사람이라면 가슴 떨리는 순간이다. 최고의 전망을 확인하면서 분단국가의 현실을 확실하게 확인하는 지점이다. 문밖으로는 망배단과 유려한 곡선의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북쪽을 향하고 있다. 탱크가 전시된 야외마당엔 무궁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 인천 강화군 양사면 전망대로 797
전통의 꽃돗자리, 화문석문화관
화문석 (花紋席), 말 그대로 꽃돗자리다. 강화도 특산품으로 입말처럼 따라붙던 강화도 화문석의 모든 것을 이곳에서 알아볼 수 있다. 화문석의 재료인 왕골은 시원하면서도 수분 흡수가 좋아 흔히들 여름용인 줄 알지만 겨울엔 냉기 방지에도 좋다고 한다.
▲ 전시장에서는 전통의 화문석뿐 아니라 현대적이고 멋스러운 다양한 제품들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선 관람 뿐 아니라 체험관도 있다. 원앙이나, 매화, 모란 등의 섬세한 문양을 수작업으로 한 땀 한 땀 짠 정교함은 들여다볼수록 놀랍다. 세 사람이 화문석 한 장 짜는데 약 5일 정도 걸린다 하니 땀과 정성의 가치 또한 높다. 요즘은 각종 생활 도구와 다양한 패션 용품들도 나오고 이곳에서 배우거나 구입도 가능하다.
○ 인천 강화군 송해면 장정양오길 413 화문석문화관
글·사진 이현숙 i-View 객원기자
이달의 역사
8월 29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국치일 in 천안 독립기념관
안녕하세요
독립기념관 한얼이 입니다.
8월이면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날들이 있지요.
그중에서 광복절은 누구나 기억하고 있지만 국치일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많지가 않은 것 같아요.
1910년 8월 29일, 국권을 빼앗긴 치욕스러운 날
일제의 한국 병탄이 이루어진 경치 국치일입니다.
반만년 역사를 이어온 우리 민족은 한말 일제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혀 역사의 줄기가 단절되어 버렸어요.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하고 그로부터 36년의
세월 동안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나라를 되찾게 되었답니다.
1910년 나라를 잃고, 1945년 나라를 되찾은
8월은 우리 민족에게 희비가 갈리는 해의 달로
오늘은 그때의 역사를 살펴볼게요.
산업혁명 이후 서양 열강은 원료 공급지와 상품시장
확보를 위해 인도와 동남아시아 등 여러 국가를 식민지로
만들고, 동아시아에 진출하여 개항을 요구하였답니다.
중국이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여
1842년 난징조약을 맺으며 개항하였고,
미국 페리 함대의 강압에 일본이 굴복하면서 1854년
개항을 결정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나타난
군사력 동원과 불평등한 조약 체결 강요는 이후
조선의 개항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어요.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한 일본은 조선과의
외교 교섭이 어려워지자 일본 군함 운요호는 조선군의
포격을 유도하여 영종진에 상륙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고,
운요호 사건을 이용하여 조선의 개항을 강요하여,
관세 및 사법 자주권 등을 침해하는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을 1876년 2월 26일 체결 개항하게 됩니다.
조선은 일본에 의해서 강제로 나리 문을 열었지만
미국, 영국, 독일 등 서양 열강과도 외교 관계를 맺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며 근대적인 모습으로 변화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일본과 청나라 간섭에 부딪히며
자주독립을 향한 길을 찾아야 했어요.
독립협회를 조직 청나라 사대주의 상징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건립하여 자주독립을 선언,
고종은 대한 제국을 선포하고 독립을 유지하고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을 추진합니다.
조선을 독점하기 위해 일본은 조선에 영향력이 있던
청나라, 러시아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1904년 러일전쟁이 끝난 후 대한 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들을 설득 미국, 러시아, 영국에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고,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 외교권을 빼앗아갑니다.
그 후 사법 행정권을 차례로 빼앗다가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고 8월 29일 이를 공포하며,
경복궁 근정전에 일장기를 걸리며 대한제국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답니다.
경술국치를 항거하며 자결한 이범진을 비롯해서
단식 순국한 대한제국 문신 장태수,
'망국에 한 사람도 자결하지 않는다면 되겠는가'
망국 직후 칠언절구 절명시 4편을 남기고서 더덕술에
다량의 아편을 타마시고 자결한 매천 황현 선생 등
우리 민족은 나라 잃은 슬픔 속에서도 국권 회복에 대한
의지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답니다.
일본은 1910년 대한제국을 점령한 후에
가혹한 식민통치를 시작하며 조선총독부를 세우고
헌병과 경찰을 동원하고 무단통치를 시작합니다.
전국에 형무소를 지어 자유의 목소리를 억압하고
탄압했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 등을
통해서 토지를 빼앗고, 자본을 잠식해갑니다.
일본인과 차별화하면서도 동화정책을 내세워
일본화시켜 대륙 침략의 교두보로 삼았으며,
만주를 침략하고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에
국가 총동원령을 내려 물적, 인적 수탈을 자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노동자, 군인, 성 노예 등
각지로 끌려가 희생되었답니다.
한일병탄조약이 체결된 후 일제는 온갖 무력을
동원해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탄압했지만
우리 민족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만세시위운동이 벌어집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조선민족대표
33인의 명의로 발표한 3.1 독립선언서
국내외 많은 사람들이 성별, 나이, 직업에
상관없이 거국적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했으며,
곧이어 러시아 연해주에 대한 국민의회,
서울에 한성정부,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 등
여러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어요.
3.1운동 이후 민중이 독립운동의 주제로 성장하며
학생운동, 농민운동, 소년운동, 여성운동 등 다양한
사회계층이 스스로 권익을 보호하고 나아가서 식민지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단체를 조직하고 목소리를
내었으며, 일제의 문화통치에 맞서 민족사학자들은
우리말과 글, 역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답니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 기념(1919.09.17.)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정부로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이후 외교활동, 의열 활동, 군사활동, 문화활동,
교육 활동 등 다양한 독립운동 방략을 꾀하였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고 국내로 돌아올
때까지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했어요.
중국 충칭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1940. 09. 17)
체계적인 독립투쟁을 위해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0년 독립전쟁 원년을 선포하고,
1940년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으며,
1941년 대일선전포고를 하였고,
1910 일제가 가용한 조약이 무효임을 선포하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27년간 정부 조직을
유지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답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경축하는 1948년 8월 15일,
광복 75주년을 맞아 우리가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날이 바로 8월 29일 아프지만 외면할 수 없는 날
'경치 국치일'입니다.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되풀이되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독립을 위해 싸우셨던
애국선열들이 있었음을 기억하는 2020년 8월이
되었으면 바라봅니다.
독립기념관은 역사를 만나고 미래를 여는
역사 문화체험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어요
애국선열들이 남긴 독립운동의 참뜻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승하며
나라사랑 정신 함양에 어떻게 이바지할 것인지
함께 고민하겠습니다.
'가림성 사랑나무' 너머로 읽은 백제 독립운동사
역사 스토리텔러
가림성 사랑나무의 하트 문양 사진. 본래 반쪽 짜리 하트 문양 나뭇가지인데, 이것을 합성해서 온전한 하트 문양을 만드는 것이 요즘의 유행이다. 그것을 MZ 세대의 하트놀이라 한다. |백제역사문화원구원·부여군청 제공
부여 하면 떠오르는 답사코스가 있다. 부여왕릉원(능산리고분군), 부소산성, 관북리, 궁남지, 정림사터, 낙화암, 백마강….
사비백제(538~660) 123년 역사의 숨결이 담겨있는 곳이 아닌가. 결코 백제의 이미지를 벗어난 부여는 생각할 수 없으리라.
그런데 최근 ‘백제와 MZ 세대’를 아우르는 답사코스가 생겼다. ‘가림성 사랑나무’이다. 이름에서부터 역사성이 물씬 풍기는 ‘가림성’과, MZ 세대의 ‘인생사진 핫플’이 된 ‘사랑나무’가 어우러져 있으니 안성맞춤이 아닌가.
지난해(2021년) 10월 부여의 ‘루틴 코스’를 답사하다가 온라인상 ‘부여의 가볼만한 곳’에서 ‘가림성 사랑나무’를 발견했다.
새로움을 좇는 기분으로 성흥산(해발 260m)에 조성된 가림성(성흥산성) 정상부에 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 나무가 서있기에 감히 ‘사랑’자를 붙였을까. 필시 역사적인 근거도 없는 스토리텔링일텐데….
가림성 사랑나무. 키 22m, 가슴둘레 5m40㎝에 달하는 수령 400년 가량의 느티나무이다. 원뿔 모양의 아름다운 몸집에, 판 모양으로 돌출된 거대한 뿌리 등이 늠름한 자태를 풍긴다. 2021년(8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백제역사문화연구원 제공
■‘사랑나무 하트’
마음 한편에 살짝 들었던 회의감은 ‘사랑나무’가 우뚝 서있는 가림성에 오르자마자 말끔히 가셨다.
성의 남문터에 우뚝 서있는 나무 옆에서 보니 부여 시내는 물론이고 논산, 강경, 서천, 익산까지 훤히 조망할 수 있었다. 세상사에 찌든 가슴 속 응어리가 뻥하고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사랑’자가 붙은 나무는 어떤가. 키 22m, 가슴둘레 5m40㎝에 달하는 수령 400년 가량의 느티나무이다. 원뿔 모양의 아름다운 몸집에, 판 모양으로 돌출된 거대한 뿌리 등이 늠름한 자태를 풍긴다. 덕분에 2021년(8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가림성 사랑나무는 부여 성흥산(해발 260m) 정상의 8부 능선에 쌓은 가림성(성흥산성)의 남문 쪽에 우뚝 서있는 느티나무이다. |백제역사문화연구원 제공
그런데 이 나무의 ‘시그니처’는 따로 있다. 바로 하트 모양의 나뭇가지이다. 필자는 답사 당시에는 어떤 가지가 하트 모양인지 발견하지 못했다. 오른쪽 나뭇가지의 모양새가 하트 인가 했지만 어쩐지 반쪽 짜리 같아서 아쉬움만 삼키고 돌아섰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본래 반쪽짜리 하트였던 것을…. 그래서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두 장 찍어서 한 장을 좌우로 반전·편집해서 완전한 하트를 만든다는 것을…. 그것이 MZ 세대의 하트놀이이고, 그래서 ‘사랑나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그걸 두고 ‘반쪽 짜리 하트’니 하면서 애궂은 나무 탓만 했으니 전형적인 ‘할저씨’가 아닌가.
‘할저씨’가 알든 모르든 ‘가림성 사랑나무’는 SBS 드라마 ‘서동요’(2005)에서 서동(조현재분)과 선화공주(이보영)가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키운 나무로 유명해졌다. 이후 ‘대왕세종’, ‘계백’, ‘일지매’, ‘여인의향기’, ‘신의’, ‘대풍수’, ‘육룡이 나르샤’ 등 사극은 물론 현대극인 ‘호텔 델루나’에서도 등장하면서 ‘촬영의 핫플’로 발돋움했다.
가림성 사랑나무는 이른바 MZ 세대의 핫플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반쪽 하트’ 문양의 나뭇가지 옆에서 사진을 찍고 그것을 합성해서 온전한 하트문양으로 만드는 놀이가 유행하고 있다.|부여군청 제공
■가림성주의 정변
필자는 ‘구시대의 인물’임이 분명하다. ‘사랑나무’가 서있는 ‘가림성’의 파란만장한 역사에 주목하고 있으니 말이다.
‘과거의 가림성’를 알면 ‘현재의 사랑나무’에 더욱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담기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에서….
지금은 ‘사랑나무 하트놀이’로 유명세를 탄 가림성은 사실 뼈아픈 백제 멸망의 역사를 웅변해주는 유서깊은 성이다.
가림성은 성왕(523~554)이 사비로 천도하기 37년 전인 501년(동성왕 23) 축조된 산성이다.
알다시피 백제는 한성 함락(475년) 직후 황급히 천도한 웅진(공주)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웅진은 한 왕조의 도읍으로는 좁았다. 따라서 해외진출에 유리하고, 보다 넓은 평야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재천도를 염두에 둔다. 그 0순위 후보지가 부여였다.
동성왕이 사비에서 3번이나 사냥을 했던 이유가 바로 천도를 염두에 둔 사전작업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런 동성왕이 501년 8월 사비(부여)에서도 사방을 조망할 수 있고, 금강 하구를 통제할 수 있는 성흥산에 성(가림성)을 쌓은 것이다. 동성왕은 축조된 가림성의 성주로 위사좌평(국왕 경호실장)인 백가를 임명했다.
그러나 웅진(공주)에 기반을 둔 귀족 출신으로 추정되는 백가는 이 인사발령을 ‘좌천’으로 여겼다. 본거지(웅진)에서 외지(사비)로 쫓겨났다고 여긴 것이다. <삼국사기>는 “백가는 병을 핑계로 왕명을 사양했지만 동성왕은 허락하지 않았다”면서 “백가는 이 때문에 왕을 무척 원망했다”고 기록했다. 3개월만인 11월 끝내 사달이 났다. 동성왕이 사비 벌판에서 사냥에 나섰을 때 마침 큰 눈이 내려 어느 마을에서 묵게 되었다. 이때 백가가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시해했다.
이렇게 첫번째 역사기록부터 정변의 무대로 기록된 가림성은 백제멸망기에는 부흥군의 거점으로 재등장한다.
501년(동성왕 23) 처음 축조한 가림성은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부여 시내는 물론이고 논산, 강경, 서천, 익산까지 훤히 조망할 수 있다.|백제역사문화연구원 제공
■의자왕은 항복했지만…
660년 7월18일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이 나·당 연합군에게 항복함으로써 백제 678년 역사는 공식적으로 종막을 고하게 된다. 8월2일 열린 나·당연합군의 승전의식에서 의자왕과 그 아들 부여융(615~682)은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벌인다.
“당상에 앉은 태종무열왕(654~661)과 소정방(592~667)은 항복한 의자왕과 아들 부여융을 당하에 앉혔다. 어떤 자들은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라’고 조롱했다. 이 모습을 본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흐느꼈다.”(<삼국사기> ‘백제본기·의자왕조’)
9월3일 당나라 소정방이 의자왕과 왕족·신료 93명, 그리고 백성 1만2000명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
왕조의 기둥을 뿌리째 뽑아간 형국이었다. 그러나 백제는 그리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었다. 당나라군이 철수하기도 전인 8월부터 남잠성·진현성(충남 대덕) 등지에 항거의 움직임이 일더니 전 좌평 정무가 두시원악(청양)을 근거로 나당연합군을 습격했다.
성흥산의 8부능선에 조성된 가림성. 나당연합군은 663년 백제부흥군과의 ‘최후의 일전’을 승리로 거뒀지만 이 가림성만큼은 공격하지 못했다. 가림성은 백제 의자왕이 항복하고(660년) 부흥군 지도자인 풍왕이 백강 전투에서 패한 뒤 고구려로 망명한(663년) 뒤에도 함락되었다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는 672년까지도 신라가 가림성을 차지하지 못했다고 전했다.|백제역사문화연구원 제공
들불처럼 일어선 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은 무왕(재위 600~642)의 조카인 원로왕족 복신이었다.
복신(?~663)은 660년 9월초 승려 도침(?~661)과 함께 주류성을 근거지로 본격적인 부흥운동에 나선다.
당나라 장수 유인원(생몰년 미상)의 공적을 기리려고 충남 부여군에 세운 <당유인원기공비>(보물)도 “도침과 복신이 벌처럼 모이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 산과 골짜기에 가득 찼다”고 했다. 이 비석은 당나라 장수 유인원이 부흥군을 진압한 뒤에 세웠다. 따라서 비문 내용은 사실에 부합될 것이다. 거병초기 독자적으로 활동했던 부흥군이 복신의 휘하로 결집되고 있었던 것이다.
“흑치상지(630?~689)가 별부장 사타상여(생몰년 미상)와 함께 험한 곳에 의거하여 복신에 호응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의자왕조’)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부흥군이 특히 백제의 서방을 관할하던 임존성(충남 예산)을 확보하자 10일도 되지 않아 3만명이 모였다. 부흥군이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임존성을 지켜내자 주변의 200여개 성이 호응했다. 사비성에 주둔하던 나·당 연합군은 부흥군에 의해 고립되는 등 곤욕을 치렀다. 부흥군은 곳곳에서 진퇴를 거듭하며 나당연합군을 괴롭혔다.
당나라 장수 유인원(생몰년 미상)의 공적을 기리려고 충남 부여군에 세운 <당유인원기공비>(보물). “도침과 복신이 벌처럼 모이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 산과 골짜기에 가득 찼다”고 했다. 백제부흥군의 기세가 대단했음을 알리고 있다.
특히 당나라가 고구려 침략전쟁에 전념하고, 신라에게 평양행 군량미 수송의 임무를 맡기자 백제부흥군의 운신이 자유로워졌다. 급기야 661년 6월~662년 2월 사이 당나라군이 고구려와의 혈투에서 패했다. 당나라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당나라 고종(649~683)은 백제고토에서 부흥군에게 포위당해 있던 웅진도독 유인궤(602~685)에게 “형편이 어려우니 신라땅으로 가든지, 아니면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칙서를 내린다. <구당서>는 “이 때 백제땅에 주둔하던 당나라군의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돌아가기를 바랐다”고 기록했다. 그래도 유인궤는 “평양을 공격하던 군대가 철수했는데, 웅진의 군대마저 뽑아버리면 백제는 다시 일어설 것인데, 고구려는 언제 멸망시키겠느냐”면서 철군이나 신라 의탁을 거절했다.
이 무렵 부흥군 지도자인 도침은 유인궤가 보낸 사신에게 ‘신분이 낮아 만나 줄 수 없다’고 홀대했고, 복신은 당군 사령관 유인원에게 사람을 보내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라. 우리가 전송해주겠노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실제로 662년 7월 당시 당나라군이 장악한 백제의 고토라고 해봐야 웅진성 정도였다고 한다.
부흥백제국의 도읍지로 알려진 주류성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삼국사기> ‘지리지’는 부흥군의 거점성 중 가림성(충남 부여)과 임존성(충남 예산)등의 위치는 특정했지만 주류성은 ‘이름은 있지만 위치가 어딘지 모르는 지역(三國有名未詳地分條)’으로 분류했다. 충남 홍성 학성산성·한산 건지산성·연기 당산성·세종 운주산성, 전북 정읍의 두승산성, 부안의 우금산성 등이 주류성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다.
■내부분열이 부흥의 걸림돌
반면 최전성기를 맞고 있던 백제부흥군은 이미 661년 9월부터 새로운 왕국의 면모를 갖췄다. 복신 등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풍장)을 백제의 새 임금으로 옹립했다. 백제는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한지 1년 여만에 새로운 임금(풍왕)을 내세워 부활한 셈이다. 풍왕의 등장과 함께 부흥백제왕조의 정통성이 확립됐다.
하지만 이것은 내부분열의 시작점이 됐다. 부흥운동을 이끈 동지였던 복신과 도침이 풍왕의 신하로서 경쟁하는 사이가 됐다.
결국 복신은 도침을 죽인 뒤, 풍왕마저 도모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반란 음모를 알아치린 풍왕이 선제 공격에 나서 복신을 급습하여 죽인다. 그러나 계속되는 내부 분열로 백제 부흥군의 사기는 급전직하했다. 반면 나당 점령군에게는 복음과도 같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당나라 군도 얼씨구나 하고 증원군 7000명을 보냈다.
<일본서기>는 “663년 8월 백제가 좋은 장수(복신)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가 곧장 백제를 공격해서 주류성(부흥군의 최후 거점)을 취하고자 했다”(‘천지기’)고 기록했다. 신라는 김유신 등 28~30명의 장수가 지휘하는 5만 정예병을 파견했다.
주류성, 가림성과 함께 백제 부흥군의 거점성이었던 임존성(충남 예산). <삼국사기>는 “부흥군이 임존성을 확보하자 10일도 되지 않아 3만명이 모였고,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도 성을 지켜내자 주변의 200여개 성이 호응했다”고 기록했다.
■백제-왜, 신라-당나라 간 동북아 국제전
이때 가림성이 등장한다. 당나라군 사이에서 “먼저 수륙의 요충인 가림성(위치 미상)을 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나라의 웅진도독인 유인궤는 “<손자병법>에서 ‘튼실한 곳을 피하고 빈 곳을 치라’고 했다. 가림성은 험하고 견고해서 공격하면 군사들을 다치게 할 것”이라면서 “백제부흥군의 소굴인 주류성을 치면 나머지 여러 성은 저절로 항복할 것”(<신당서> ‘열전 유인궤전’)이라 했다. 위기에 빠진 풍왕은 왜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마침내 왜국 장수 여원군신이 이끄는 지원군 1만여명이 수송선 1000여척에 나눠타고 백제로 향했다.
663년 8월 마침내 한반도 남부 서해안의 백강구(백촌강·백강)에서 백제-왜가 한편이 되고, 신라-당나라가 한편이 되어 치른 동북아시아 국제전의 막이 올랐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자치통감> 등 삼국의 역사서에서 서술한 백강구 전투는 처절했다.
<일본서기>는 “왜·백제부흥 연합군이 전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에 진을 친 당나라군과 잇달아 접전을 벌였지만 실패했다”면서 “당나라군의 포위공격에 물속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많았으며, 뱃머리를 돌릴 틈도 없었다”고 기록했다.
2012년부터 가림성의 보존관리를 위한 발굴조사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는 가림성의 북쪽 성벽과 성 내측 시설물을 확인하기 위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백제역사문화연구원 제공
당나라 측의 사서인 <자치통감>은 “…당나라 수군이 백강에서 왜병을 만나 4번이나 싸워 모두 이겼고, 왜선 400척을 모두 불태워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으며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했다.
<삼국사기>는 “당나라가 수전을 펼치는 사이, 신라군은 당나라군의 선봉이 되어 육지(주류성)에서 백제의 정예기병을 깨뜨렸다”고 기록했다. 이른바 백강구 전투의 백제-왜 연합군의 궤멸이었다. 부흥군을 이끌던 풍왕은 몇몇 측근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백강구 전투의 패배와 풍왕의 고구려 망명 소식에 백제부흥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결국 의자왕의 다른 아들들인 부여충승·충지가 지키던 주류성은 9월초 항복하고 말았다. 주변 두량윤성 등 여러 성도 줄줄이 손을 들었다. 부흥군 장수 지수신 만은 임존성을 근거로 마지막 항전을 벌였다. 하지만 백제를 배신한 흑치상지와 사탁상여의 공격으로 663년 11월 임존성마저 함락됐다. 지수신 역시 고구려로 망명했다. 이로써 3년 3개월에 걸친 백제의 부흥운동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일본서기>를 보면 주류성이 함락되자 백제인들이 서로 부여잡고 피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주류성이 항복했구나. 돌이킬 수 없구나. 이제 백제의 이름이 끊기니 (조상의) 무덤을 어찌 가볼 수 있을 것인가.(州柔降矣 事無奈何 百濟之名 絶于今日 丘墓之所 豈能復往)”(<일본서기> ‘천지기’)
최근 가림성의 북쪽 구간을 발굴조사중인 백제역사문화연구원(백제고도문화재단)은 “가림성 북쪽 구간을 조사한 결과 20m 길이의 사비 백제 시대 성벽(최고 높이 5.2m, 폭 12m)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백제 독립운동의 거점
하지만 백제 유민들의 독립운동은 끈질기게 이어진다.
664년 3월 남은 부흥군의 세력이 사비산성에 웅거하여 저항을 꾀한 일도 있었다. 특히 663년의 최후 공세 때도 나당 연합군이 공격을 기피하고 우회했던 ‘가림성’은 9년이 지난 672년까지 백제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남아 있었다.
즉 <삼국사기> ‘신라본기·문무왕조’는 “671년(문무왕 11) 6월 신라가 장군 죽지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가림성의 벼를 밟도록 했다”고 했다. 신라 군사들이 가림성의 벼를 밟았다는 것은 백제군의 군량미 확보를 사전에 막으려고 한 고육책이었다.
그럼에도 가림성은 신라의 수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삼국사기>는 이듬해인 672년(문무왕 12) 2월 “백제 가림성을 쳤지만 이기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신라가 의자왕이 항복한 지 12년이 지나도록, 백강구 전투에서 패한 풍왕이 고구려로 망명한 지 9년이 지나도록, 가림성만큼은 차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번 잃은 나라를 수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만 35년, 햇수로 36년간이나 끈질기게 이어온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사가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
가림성 북쪽구간에서 확인된 백제시대 성벽. 발굴결과 20m 길이의 사비 백제 시대 성벽(최고 높이 5.2m, 폭 12m)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백제역사문화연구원 제공
■모습을 드러낸 백제성벽의 흔적
최근 가림성에서 백제시대에 쌓은 성벽을 찾아냈다는 발굴 성과가 공개됐다. 백제역사문화연구원(백제고도문화재단)이 가림성 북쪽 구간을 조사한 결과 20m 길이의 사비 백제 시대 성벽(최고 높이 5.2m, 폭 12m)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성벽 안쪽에서는 성과 나란히 만든 폭 0.9∼1m인 석축 배수로가 발견됐다. 노출된 성벽이 501년 백가의 반란 스토리를 담은 초축 성벽의 흔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요즘 MZ 세대 사이에서 부여 하면, ‘가림성 사랑나무’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발굴단은 백제 이후에도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5차례 이상 가림성을 고쳐 쌓았고, 성벽을 다시 쌓을 때마다 성 안쪽에서도 시설물을 지속적으로 조성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백제역사문화연구원 제공
그러나 뭐 어떤가. 경주의 경우도 ‘황리단길’이나 ‘벚꽃길’이 유명세를 타고 있지 않은가. 백제·신라의 고도(古都)라 해서 만날 1500~1000년 전 유적만 떠올릴 필요는 없다.
사랑나무, 황리단길, 벚꽃길 같은 새로운 스토리가 ‘구시대의 유물’ 이미지를 좀더 밝고 윤택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필자는 옛날 사람인가보다. ‘사랑나무’를 찾아갈 때 ‘가림성’에 담긴 백제의 멸망사와 부흥운동사를 한번쯤 기억해주기를….
(이 기사를 위해 최병화 백제역사문화연구원 문화재조사부장과 성현화 팀장, 도의철 백제왕도핵심유적보존관리사업추진단 학예연구사,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부여군청 관계자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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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206030856001
하반기 경복궁 야간 관람 9. 1.~11. 6. / 8.25. 오전 10시 1차 예매 시작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소장 최재혁)는 하반기 경복궁 야간 관람을 9월 1일부터 11월 6일까지 52일간 개최한다. 관람 시간은 오후 7시부터 오후 9시 30분까지이며 오후 8시 30분에 입장을 마감한다.
* 야간개방 없는 날 : 매주 월·화요일,
* 추가 개방 : 추석 대체휴일(9.12.(월)), 2022 가을 궁중문화축전 기간(10.3.(월)~10.4.(화))
경복궁 야간 관람은 도심 속 고궁의 야간 나들이라는 이색 체험이 가능해 해마다 봄가을 기간에 예매 시작과 동시에 매진될 만큼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대표적인 궁궐 활용 행사이다.
야간관람을 위해서는 인터넷 예매사이트(‘11번가 티켓’ https://ticket.11st.co.kr/)에서 사전 예매를 하거나, 관람 당일 현장 구매할 수 있다. 1차 관람기간(9. 1.~9. 30.)의 예매는 8. 25.(목) 오전 10시부터, 2차 관람기간(10. 1.~11. 6.)의 예매는 9. 23.(금) 오전 10시부터 진행된다. 잔여 표가 있을 시 관람 희망일 1일 전까지 예매가 가능하며, 관람 전일 오후 5시 이전에 취소하면 환불이 가능하다.
* 인터넷 예매: 1일 2,000매(1인당 2매 구매 제한)
* 현장 발권(당일권, 선착순): 1일 500매(내국인), 200매(외국인)(1인당 2매 구매 제한)
무료관람 대상자는 국가유공자 본인 및 배우자, 중증장애인 본인과 동반 1인, 경증장애인 본인, 국가유공자 유족증 소지자 본인, 만 6세 이하 영유아, 만 65세 이상 어르신, 한복 착용자이다. 대상자는 별도의 예매나 현장발권 필요 없이 흥례문에서 신분증 및 관련 자료 확인 후 입장이 가능하다. 단, 만 6세 이하 영유아의 보호자는 사전예매나 현장발권을 통해 반드시 입장권을 구입해야 한다. 야간 관람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경복궁관리소 누리집(www.royalpalace.go.kr) 또는 전화(02-3700-3900~1)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는 관람객들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인 경복궁의 아름다운 야경을 즐기며 특별한 추억을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하며, 앞으로도 우리 국민들이 고궁을 다양하게 향유할 수 있도록 체험 기회 확대에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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