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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겸제 정선이 그리다.비온 뒤 자욱한 운무 뒤덮은 곳…산수화 속 가을 명산 '인왕산'

문화재방송 2022. 9. 14. 07:16

인왕제색도와 비슷한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효자동주민센터 옥상에서 앵글을 맞췄다.

금강산을 사랑한 화가 겸제 정선(謙齋 鄭敾)

 

지금부터 볼 그림은 우리나라 국보로 매우 널리 알려진 〈금강전도〉다. 세상의 모든 것을 바위로 만들어 놓은 듯한 만물을 품은 경관과 기기묘묘한 바위 봉우리들이 늘어선 천하의 명승지, 금강산을 그린 그림이다. '전도(全圖)'라는 말은 전체를 그렸다는 의미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정선이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300년쯤 전에 활동했던 화가인데, 84세까지 장수를 누리면서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오늘날 전해지는 옛 그림 가운데 정선의 그림이 가장 많을 정도다.

 

그의 호는 겸재(謙齋)다. 예전에는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크게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선 같으면 '겸재' 하고 호를 이름 대신 불렀다. '겸재'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금강산 그림이다. 그만큼 정선은 금강산 그림을 많이 그렸다. 왜 그렇게 금강산 그림을 많이 그렸는지 먼저 그 이유의 하나는 정선이 살던 당시에 금강산 여행 열풍이 불었기 때문이다.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는 그전부터 무척 유명했는데 고려 시대에 이미 중국까지 소문이 났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다음 생애에 다시 태어난다면 '고려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구경해 보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정선이 살던 18세기는 사회가 발전하고 경제가 넉넉해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름나 있던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금강산에 다녀온 사람은 그것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금강산 그림을 찾곤 했다. 마치 우리가 해외 여행지에 가서 엽서를 사는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이 특히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다. 솜씨도 솜씨려니와 무엇보다도 정선이 금강산을 그리는 새로운 기법을 찾아냈다는 게 중요하다. 그가 그린 금강산 그림을 보면 마치 실제 산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단발령망금강산〉이란 제목의 그림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금강산을 찾아갈 때 거쳐야 하는 단발령이라는 고개와 그 너머에 펼쳐져 있는 금강산을 그린 그림이다. 정선이 새로운 기법을 발휘해 그린 것으로 금강산을 그린 그림 중에서도 특히 유명하다.

금강산은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수많은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 그래서 아래쪽은 숲이 넓고 울창한데다 위로는 만 2,000봉의 바위로 된 봉우리들이 연속으로 솟아 있다. 정선은 금강산의 특징을 잘 드러내기 위해 바위산을 그리는 기법과 나무가 많은 흙산을 그리는 기법을 함께 썼다. 그 사이에는 구름과 안개를 깔아 자연스럽게 두 세계를 연결시켰다. 이러한 독특한 기법이 정선 그림이 가지는 의의라고 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정선 그림에는 큰 것과 작은 것을 교묘하게 섞어 놓아서 보는 사람이 그림 세계로 빠져 들어가게 하는 신기한 힘이 있다. 이 그림을 봐도 그렇다. 나무가 많은 흙산의 고개 위에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서 있다. 자세히 보면 힘든 언덕길을 오른 뒤에 숨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휴~" 하는 숨소리와 함께 "정말 근사 하구나!"라는 감탄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고갯길 중턱으로 시선을 돌리면 짐을 잔뜩 진 노새를 끌고 뒤처져서 올라가는 사람이 보인다. 이것을 보면 누구나 저절로 '아, 가파른 고개인가 보다'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 힘든 고개를 다 올라온 사람들의 상황을 상상하게 된다. 또 갓을 쓴 사람의 손짓을 따라가 보면 구름 속의 금강산을 가리키고 있다. 이 손짓 하나로 그림을 보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림 속의 금강산 구경에 따라 나서게 된다.

이처럼 정선은 새로운 기법을 창안해 내고, 또 그림 속에 여러 아이디어를 심어 놓으면서 당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 물론 그가 금강산 그림을 처음 그린 사람은 아니었다. 그림은 남아 있지 않지만 기록을 보면 조선 시대 초기부터 금강산 그림이 그려졌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 이전의 어떤 화가보다 훨씬 더 잘 그렸고, 또 새롭게 그렸다는 점에서 큰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정말 금강산 그림의 대가라고 할 만하다.

대가는 다른 말로 거장이라고도 하는데, 그림에서 거장이란 강물에 비유하자면 흘러가는 물줄기의 방향을 바꿀 정도의 일을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선이 금강산 그림을 그리는 화풍을 만들어 놓자 물줄기의 방향이 바뀌듯이 이후의 화가들은 대부분 그를 따라 했다.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던 심사정, 김홍도, 김희겸 등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 많은 화가들이 금강산 그림을 그릴 때면 겸재식 화풍을 따랐다. 거기에는 직업 화가나 문인 화가의 구분이 없었을 정도다. 금강산의 만 2,000봉을 그릴 때면 정선처럼 으레 희고 뾰족뾰족한 바위를 그렸고, 바위를 감싸고 있는 산기슭을 표현하기 위해 먹점을 무수히 많이 찍어 숲의 무성함을 나타냈다.

이름난 화가들만 그렇게 그린 게 아니었다. 지방에 있는 무명 화가들도 정선을 따랐다. 금강산 그림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금강산 여행 열풍이 일면서 크게 유행했다. 그래서 지방에서도 금강산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았고, 이들 역시 금강산 그림을 원했다. 서울의 유명 화가가 그린 그림은 값이 비싸니까 지방에서는 이름나진 않았지만 손재주가 있는 화가들에게 금강산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방의 무명 화가들은 이런 요청이 들어오면 당연한 듯이 정선의 그림을 놓고 베껴 그려 주었다고 한다.

 

윤철규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에 들어가 한국미술을 소개하는 《한국의 미》 전집 출판을 담당했고, 이후 중앙경제신문, 중앙일보에서 미술 전문 기자로 활동했다. 1999년에 일본으로 유..펼쳐보기

인왕산은 선바위 등 신비한 바위들이 많다.

진경산수화의 걸작… 소나무·활엽수 혼재해 단풍도 좋을 듯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비 온 뒤 인왕산의 신비스러운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1751년 어느 날, 일주일째 내리던 비는 마침내 그쳤다. 그 순간 인왕산 골짜기에 신비하고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자욱한 운무가 산자락을 뒤덮은 것이다. 좀처럼 보기 드문 풍경이었으리라. 조선 최고의 화가 겸재 정선이 이 풍경을 놓칠 리 없다. 즉시 먹물을 가득 묻힌 붓을 들었다. 그리곤 눈앞에 풍경이 보이는 대로 조선 최고의 화성畵聖의 손끝에 안긴 붓은 살아 꿈틀거리는 듯 한지에 고스란히 담겼다.
겸재는 생생한 현장감을 생동감 있는 필치로 그려나갔다. 비에 젖은 뒤편의 암벽은 거대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기 위해 큰 붓을 반복해서 아래로 과감하게 내리 그었다. 능선과 나무들은 섬세한 붓질과 짧게 끊어 찍은 작은 점으로 실감나게 표현했다.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눈에 본 대로 한 편의 산수화를 완성했다.

 

겸재 정선이 75세 때인 1751년 비 온 뒤 운무가 자욱한 인왕산을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화면을 꽉 채운 화풍과 강렬한 필치로 진경산수화의 대표적 걸작으로 꼽힌다. 출처 겸재정선미술관.

 

겸재가 그린 ‘창의문(彰義門)’. 왼쪽 인왕산과 오른쪽 북악산 사이 창의문을 잘 표현했다. 창의문 위 인왕산 부암바위는 항상 빠트리지 않는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겸재가 그린 ‘백운동(白雲洞)’의 당시 풍경은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겸재가 인왕산 자락 아래 살았던 곳으로 알려진 ‘인곡정사(仁谷精舍)’가 그림으로 남아 있다. 출처 겸재정선미술관.

 

겸재가 1739년 그린 ‘청풍계(淸風溪)’. 출처 간송미술관.

 

겸 재의 그림 ‘수성동’에 나오는 수성동계곡을 당시 풍경으로 최대한 복원했다.

 

겸 재의 그림 ‘수성동’에 나오는 수성동계곡을 당시 풍경으로 최대한 복원했다.

 

선 바위 가는 길에 인왕산의 신비한 바위를 바라보고 있다.

 

인왕산은 선바위 등 신비한 바위들이 많다.

노비로 지탱된 조선 봉건 양반제…퇴계도 367명 노비 문서 남겨

종로구 장예원 터 上

 


광화문 한복판의 노비 담당 관청

임란 때 선조 도주 앞둔 밤

궁궐과 장예원, “내부의 적에 불타”

관아 소속 공노비들 소행으로 추정

사대문안 인구중 노비 비중 80%웃돈듯

한쪽 부모가 노비면 아이도 노비

상속 문서 맨 위에 땅보다 노비

해방이 불가능…‘가혹한 노비제’

 

조선 시대 육조 중 형조와 장예원이 있었던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옆 세종로공원에 옛 육조장랑 거리를 형상화한 바닥그림이 돌판에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종로구 세종로 155의 4 장예원(掌隸院) 터 푯돌을 찾아 길을 떠난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7번 출구로 나와서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보면 국호빌딩 앞 보도에 말없이 서 있다. 공간을 덜 차지하고 언제든 이동이 가능한 장점 때문인지 강철판으로 푯돌을 만들었다. 돌로 만든 기존의 벽돌형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진다.

푯돌에는 “장예원은 조선시대에 노비 장부를 관리하고 노비 관련 소송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조선 초기에 설치되었고, 1764년(영조 40) 형조에 소속되어 보민사(保民司)로 바뀌었다”라고 단 두 문장으로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2001년에 세운 것치고는 디자인이나 형태가 신제품이라는 점에 착안, 옛 푯돌을 찾아보았다.

본래 장예원 터 푯돌은 종로구 당주동 11 세종문화회관 뒤 모퉁이 도로변에 서 있었다. 2016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온 것이다. 당시 푯돌엔 “장예원은 조선시대 공사(公私)노비 문서를 관리하고 노비 소송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장예원은 육조의 하나인 형조 아래에 설치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들어와 신분제 해체 현상으로 업무가 축소되다가 영조 40년(1764)에 실질적으로 폐지되었다”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대동소이하지만 두 개의 푯돌 문구를 단순 비교해보면, 첫째 ‘공사노비’를 노비로 단순화했다. 둘째 ‘육조의 하나인 형조 아래에 설치된’이라는 소속 관청을 나타내는 문구 대신 ‘형조에 소속되어 보민사(保民司)로 바뀌었다’로 변경됐다. 셋째 ‘조선 후기에 들어와 신분제 해체 현상으로 업무가 축소되다가 영조 40년(1764)에 실질적으로 폐지되었다’는 폐지 사유와 시대 상황을 빼버렸다.

둘을 견줘보면 새 설명 문구가 이전 내용을 개악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내용만으로 장예원이라는 기관이 품은 정치사회사를 이해할 수 있을까? 보민사는 또 뭔가. 현기증이 느껴진다. 광화문 한복판에 자리한 노비 담당 관청의 흑역사를 물타기하려는 의도가 느껴질 뿐이다. 정확한 위치 찾기라는 차원에서 세종문화회관 뒤에 외떨어져 있던 푯돌을 세종문화회관 옆 제자리에 돌려놓은 것은 마땅하다. 하지만 애초에 웬만한 책이나 지도에 다 나와 있는 육조(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와 장예원의 위치를 무시하고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몰아넣은 처사는 뭔가?

 

 
노주석 제공

이 푯돌의 내용을 보고 장예원이라는 관청의 정체와 이 관청이 품은 비극의 역사를 알아차릴 서울 시민이 몇이나 될까? 장예원을 노비 장부 관리와 노비 소송을 담당하던 시시한 하급 관청쯤으로 정리했다. 만약 그랬다면 서울하고도 광화문 한복판에 장소의 흔적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나온 ‘도성대지도’에 따르면 광화문 앞 육조거리 왼쪽 전면에는 의정부-이조-한성부-호조-기로소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예조-중추부-사헌부-병조-형조-공조-장예원이 자리잡았다.

수많은 권부 중 육조거리에 관아를 가진 관청은 단 12곳뿐이었다. 6개 부처를 제외하고 의정부, 한성부, 사헌부처럼 힘 있는 부서와 원로대신을 우대하는 기구인 중추부와 기로소가 전부다. 육조 예하 부서로는 유일하게 장예원이 12자리 중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학생들이 2013년 제작한 광화문 육조거리 미니어처. 노주석 제공

장예원 자리가 광화문 한복판이었음이 중요한 이유는 이 관아의 위상 과시가 아니다. 대사건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궁궐을 약탈하고 불을 지른 것으로 흔히 알고 있다. 그러나 1592년 4월14일 왜군의 동래성 점령과 왕의 도주를 앞둔 날,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26권의 기록을 보면 범인은 내부에 있었다.

“도성의 궁성에 불이 났다.…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巨家·문벌 높은 집안)가 떠나자 난민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예원과 형조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노비의 문적(文籍)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는데… 난민이 떼로 일어나서 금지할 수가 없었다.”

누구의 짓이라고 명확하게 적시하진 않았지만 방화범은 ‘간악한 백성’과 ‘난민’이라고 특정하고 있다. 또한 다른 곳도 아닌 장예원과 형조의 노비 문서를 유독 불태웠다면 난민의 정체는 노비라고 봐도 무방하다. 40년 전 광해군 때 작성한 ‘선조실록’에는 방화범이 특정돼 있지 않았다. 주류 당파가 바뀐 인조반정 이후 새로 만든 기록이어서일까. 유성룡의 <징비록>에도 “고개를 돌려 도성 안을 바라보니 남대문 안 큰 창고에서 불이 일어나 연기가 하늘에 치솟았다”고 화재의 소행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일본 측 기록 몇 점에는 점령 이후 멀쩡한 상태의 경복궁 풍경을 묘사하고 있어서 일본군이 나중에 태웠다는 주장도 팽배하다.

궁궐을 불태우고 노략질한 ‘내부의 적’이 조선 사회에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지배자들은 이들의 정체를 간악한 백성이나 난민이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임금과 상전들이 자신들을 버리고 서울에서 도주하던 날 노비 문서를 없앤 분노에 찬 피지배계층이 있었다. 방화범의 정체가 노비라고 적시하고, 모조리 가려내 엄벌에 처할 수 없는 게 이 땅의 현실이었다. 노비(奴婢)란 남자 종 ‘노’(奴)와 여자 종 ‘비’(婢)를 합친 말이다.

노비제는 조선 유교·봉건 사회를 떠받친 기둥이었다. 이날 장예원 화재 사건이 노비제의 모순을 드러내고, 노비제 해체의 활시위를 당겼다. 이날 화재는 전체 노비의 10%를 차지하던 왕실과 관아에 소속돼 근무하던 공노비들의 소행이었다. 공노비는 신분은 노비지만, 조선 관료제도의 골간을 이루는 ‘미천하지만 당당한’ 공인이었다.

조선의 신분제는 양반-중인-상민-노비라는 4단계 신분사회였다.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 조선 인구의 30~40%를 노비가 차지했다. 조선 전기 학자 이심원은 “백성 가운데 노비가 팔, 구할이나 된다”라 했고, 같은 시기 <용재총화>를 남긴 문인 성현은 “인구 가운데 노비가 거의 절반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15세기 총인구 900만 명 중 절반 이상은 노비였다고 볼 수 있다. 17세기 중엽 조선의 인구 1200만 명 중 30~40%로 계산하면 360만~480만 명이 노비 신분이었다. 노비의 비중은 지역별로 달랐다.

특히 왕실과 잘나가는 경화사족(京華士族·대대로 서울에서 살아온 명문가)이나 문벌 고관대작이 모여 사는 서울은 사실상 ‘노비의 도시’였다. 1663년도 한성부 서부 성 밖 십리지역 호적에 따르면 2374명 중 1729명, 즉 73%가 노비로 등록돼 있었다. 사대문 안 인구 중 노비 비중은 80%를 웃돌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에 사는 미관말직 양반 관료도 평균 100명의 노비를 소유하였다. 가장 많은 노비를 소유한 홍문관 부제학 이맹현은 758명의 노비를 재산으로 물려줬다. 퇴계 이황도 367명의 노비 문서를 남겼다. 세종의 왕자 중 광평대군과 영응대군은 각각 1만 명 이상의 노비를 소유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난 이후 신분제는 해이해지고 상공업이 발달하자, 그동안 토지를 매개로 묶여 있다 풀려난 유민들이 증가했다. 17세기 들어서는 농촌 양반가의 노비 규모는 5~20명을 넘기 어려웠다. 보유 노비 수는 관직의 높낮이와 비례했다.

 

 
18세기 재령 이씨 종가에서 발견된 노비 이름이 적힌 문서의 일부. 노주석 제공

미국의 한국학자 제임스 팔레 교수는 “전체 인구에서 노비의 비중이 30%를 훨씬 넘는 조선은 노예제 사회”라고 주장했다. 노예제의 대표 사례인 고대 로마제국이나 남북전쟁 이전 미국의 노예는 인구의 30%정도였다. 미국의 농장주는 100명 이상의 노예를 소유하면 귀족적 농장주로 대접받았다.

조선은 명백한 노예제 사회였다. 노비는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었다. 조선 양반의 상속 문서 제일 상단은 노비의 이름이 차지했다. 토지보다 먼저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노비의 값은 저화(종이돈) 4천 장이었는데, 노비의 하루 평균 임금이 저화 6장이었으므로 666일어치의 임금이고, 논 20마지기의 소출에 해당했다. 조선의 노비는 원칙적으로 해방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조선 노비제의 핵심은 신분 세습에 있었다. 양인(상민)과의 결혼이 가능한 ‘양천교혼’(良賤交婚)을 허락하는 대신 부모 한쪽이 노비면 출생한 아이도 무조건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一賤則賤)의 가혹한 원칙이 노비제를 유지했다.

1801년 1월28일자 ‘순조실록’에는 “관아의 노비 문서를 돈화문 밖에서 불태우고 아뢰도록 하였다.… 각 궁방에 소속된 각 도의 노비는 도합 3만6974명이었고, 기로소·종친부·의정부·의빈부·돈녕부·충훈부·상의원·이조·호조·예조·형조 등에 소속된 각 도의 노비는 도합 2만9093명이었다. 형식적으로 유지되던 공노비제는 1801년, 사노비제는 1894년 각각 폐지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전문 칼럼니스트

 

성종 때 공노비만 조선 인구의 10%…임란 때 노비 기관 불태워

종로구 장예원 터 中

 
공노비, 형식적으론 국가·왕실의 재산

1801년 순조 때 공노비 6만6067명 해방

관아 수족도 대부분 공노비, 관기생도

문무 잡직은 종9~6품 벼슬도 받아

신분은 미천했으나 당당한 존재

공노비 남, 양민 처녀에 일등 신랑감

정약용 그들의 신산한 삶 기술

동족을 노예로 부린 동방예의지국’

 

국부의 원천인 공사 노비 대장을 보관했던 장예원의 상급 부서인 형조는 경복궁 앞 육조거리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었고, 장예원은 공조 다음 자리를 차지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종로구 세종로 155의 4 장예원 터 푯돌을 찾아 두 번째 길을 떠난다. 노비 문서를 보관하고 노비 소송을 담당한 관청 장예원이 광화문 한복판 육조거리에 떡하니 자리잡은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조선 양반 관료 사회를 유지하는 최대 밑천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국부는 농작물을 생산하는 토지와 인구의 3분의 1을 넘는 노비에 의해 유지됐다. 노비는 국가를 지탱하는 생산력의 원천이었다. 전체 노비 중 10분의 1정도인 공노비는 왕과 왕실 그리고 관청의 손발 노릇을 했고, 나머지 사노비는 양반 소유의 노동력이었다. 가장 중요한 재산인 노비 문서를 왕의 눈에 잘 보이는 장소에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노비 소송을 통해 사유재산을 지키려는 사대부와의 이해관계도 완벽하게 합치했다.

 

 
 

공노비는 형식적으로는 국가, 내용적으로는 국왕의 개인 재산이었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나라 풍속에 따르면 내노(內奴·왕실 재산을 관장하는 내수사의 노비)·사노(寺奴·중앙 관청 소속 노비)·역노(驛奴·역참 소속 노비)·교노(敎奴·향교 등 교육기관 소속 노비) 등의 부류는 공천(公賤)이라 하고, 사족(사대부)과 서민의 노비는 사천(私賤)이라 한다”고 썼다. 공천은 공노비고, 사천은 사노비다. 1801년 순조가 해방한 왕실과 관아 소속 공노비 6만6067명이 바로 공노비다.

왕실과 궁궐을 유지하는 궁녀와 내시, 궁중 내 생활 공간을 관장하는 액정서 별감도 공노비 또는 관노였다. 성균관 노비는 교노에 속하고, 지방 관청의 노비는 읍노(邑奴)였다. 우리가 흔히 관기(官妓)라고 하는 궁중이나 관아에 딸린 기생과 의녀, 다모는 관비(官婢)의 다른 이름이다.

국가의 재산이기에 왕을 위해 춤추고 노래하고, 지방에 파견된 관리의 시중과 수청을 들어야 했다. 특별한 경우 관리를 따라 상경해 첩 노릇을 했다. 관비는 국경 지대의 군사를 위로하고 사기를 진작할 목적에서 생겼다. 세종 때 평안도 영변부에 기생 60명을 둔 데 이어 큰 감영이나 군영에 100여 명씩 뒀다. 전국 330여 군현도 앞다퉈 관비를 보유했는데, 그 수가 수천 명에서 1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혜원 신윤복의 그림집 중 ‘연소답청’. 18세기 한양 양반가 자제들이 기생을 동반해 꽃놀이 행락에 나선 모습이다.

양반 관료 사회의 핵심인 현직 관료를 보필하는 관아의 수족 또한 대부분 공노비였다. 궁궐과 관서의 업무를 보조하는 자리에 공노비를 썼기 때문이다. 1484년(성종 15) 도망간 노비를 찾는 추쇄도감 통계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 340만 명 중 공노비의 숫자는 35만 명이었다. 서울과 지방의 공노비는 26만1984명, 공문서 전달과 숙박, 관물의 수송을 돕는 역참 노비가 9만581명이었다. 공노비들은 각 기관의 열쇠 관리, 서적 인쇄, 화폐 제조, 종이 제조, 요리, 바느질, 말 기르기, 무기 제조, 토목 기술, 악기 연주, 제수 용품 공급, 정원 가꾸기, 그림 그리기 등 문반 잡직이나 각 영의 군인 등 무반 잡직으로 종9품에서 정6품까지 벼슬을 받았다. 신분은 미천했지만 하는 일은 무시 못할 당당한 존재였다.

일례로 구사(丘史)는 나라에 소속된 남자 종이었다. 왕실의 친척인 종친,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 정승과 판서는 물론 9품 이상 문무 관리에게 나눠준 수행원 격이었다. 오늘날 고급 공무원에게 자동차나 비서를 내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말고삐를 잡거나 교자나 가마를 맸다. 맨 앞에 서서 “○○○ 납신다. 물렀거라!”를 외쳤다.

 

 
1904년 밀입국한 스웨덴 아손 기자가 남긴 140여 컷 중 말을 탄 양반을 모시는 노비의 모습.

신분과 품격에 따라 구사의 수가 달랐다. 세종 때 대군은 10명, 정1품은 9명, 종1품 8명, 정2품 7명, 종2품 6명, 정3품 당상관은 5명씩 배정했다. 종3품부터 4품까지는 3명, 5품부터 9품까지는 2명씩 배분했다. 왕의 눈과 귀 구실을 하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5~6품 대간에게는 1명을 추가 배정했다. 관청에도 소속 구사가 배속돼 출퇴근 때나 행차 때 안내 역할을 했다. 노비 담당 부서인 장예원에는 자체 인원과 다른 기관의 부족분을 메워주기 위한 262명의 여유 인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경국대전>에는 관원의 품계와 지방 관아의 규모에 따른 숫자가 적혀 있다. 병마절도사 200명, 수군절도사 120명, 부사 600명, 대도호부와 목사 450명, 도호부 300명, 군 150명, 현 100명, 향교 10~30명씩 배당했다.

이들은 4교대로 출퇴근하면서 심부름과 잡일을 도맡았을 뿐 아니라 소속 상전이나 관청 업무가 잘못되면 구금되거나, 볼기나 채찍을 맞았다. 구사가 잡혀가면 상전은 바깥출입을 못했다. 관리와 공직의 기강을 감찰하는 사헌부에서 법 집행을 맡은 소유(所由)도 공노비 신분이었다. 세종 대에 90명이 사헌부 직속 상전의 명에 따라 법 집행의 촉수 역할을 했다.

조선 시대 노비는 광대, 기생, 백정, 대장장이·옹기장이, 무당, 승려, 상여꾼과 함께 8가지 부류의 천민 즉 팔천(八賤)에 속했지만 같은 노비라도 공노비는 당당했다. 양민이나 사노비보다 월등한 대접을 받았다. 관아에서 일하는 여비가 출산을 하면 한 달, 남편 종에게는 16일의 출산휴가를 보장했다. 따라서 천민들은 물론 양민까지도 역참 노비와 같은 공노비가 되고자 했다. 서슬 퍼런 사헌부 복장을 차려입은 소유와 구사의 위세는 대단했다. 양인 처녀는 물론 관비, 사비들에게까지 일등 신랑감으로 꼽혔다.

공노비들은 행복했을까.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시노는 온종일 뜰 위에 서서 상전의 명을 기다려야 했고, 수노는 관청에서 소요되는 물건을 사들였다. 공노는 관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었고, 구노는 말을 기르면서 원이 나들이할 때 양산을 붙잡고 따라다녔다. 방노는 방을 따뜻하게 하고 변소를 돌보는 일을 했으므로 방자라고 불렀다. 관노들 가운데 보수를 받는 자는 부엌에서 일하는 포노와 주노, 창노뿐이다”라고 안타까운 지방 관노들의 노역 실태를 그렸다.

 

 
아손 기자가 찍은 서울의 기생. 노주석 제공

임진왜란 때 누가, 왜 장예원에 불을 질렀나. 서울대 이영훈 명예교수는 “고려와 조선의 노비제를 비교할 때 고려의 노비들은 도합 10회에 걸쳐 반란을 일으켰는데, 조선의 노비들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1198년 만적의 난 당시 ‘장상(장군과 재상)에 어찌 종자가 따로 있느냐’면서 노비의 주인을 모조리 죽인 다음 스스로 장상이 되고자 했다.”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조선의 공노비들은 고려 노비가 못한 일을 해냈다. 형조와 장예원에 보관된 공사 노비의 호적을 불태워버려 노비제의 해체와 신분 해방을 주도적으로 쟁취했기 때문이다.

실제 16세기 조선을 집어삼킨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난은 철옹성 같아 보이던 노비제의 근본을 흔들었다. 군역을 질 양민이 부족하자 조정은 군공을 세운 노를 해방하거나, 무과에 응시할 기회를 줬다. 곡식을 헌납한 노비를 해방했다. 노비들은 기회가 올 때마다 도망쳤다. 세조 때 척신 한명회는 “공노비 45만 명 중 10만 명이 도망 중”이라고 했다. 실제 지방에 떨어져 사는 사노비의 상속은 절반에도 못 미쳤다. 대다수의 노비는 도주를 계획하고 결행했다. 그들은 서북 지방이나 해안, 섬으로 달아났다. 1655년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은 노비추쇄도감을 설치해 도망 노비의 실태를 조사했다. 171년 전 35만 명에 이르던 공노비의 수가 19만 명으로 줄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노비대장이 사라져 확인할 길도 없었다. 영조 때 도망간 노비를 찾아 주인에게 돌려주는 추쇄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노비 제도는 신분을 세습한다는 점에서 최악의 신분 차별 제도로 꼽히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맞먹는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신분의 대를 물리지 않았다. 동족을 노예로 부리면서 스스로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칭한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짓이었다. 노비의 존재 양태와 노비 신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힐 필요가 있다. 노비는 궁궐과 관아에서 왕이나 관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살았기에 신분 상승의 기회도 많았다. 우리에게 장희빈으로 알려진 장옥정은 조선 역사상 가장 출세한 여인이다. 궁녀 출신으로 살아서 왕비가 된 유일한 사례이다. 궁녀이기 이전에 여종의 딸이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신분 상승을 이뤘다. 장옥정의 아들 경종은 어미가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종모법에 따라 노비여야 하지만 제20대 왕위에 올랐다.

21대 왕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도 ‘나인 최가 복순’이었다. 고아로 인현왕후의 시녀로 입궐해 궁녀의 수발을 드는 무수리였다. 공식 기록상 600여 명에 이르는 공노비 나인 중 한 명이었다. 장희빈과의 피 튀기는 경쟁에서 살아남아 왕의 어머니가 됐다. 다행히 영조와 22대 정조는 ‘노비도 백성’이라는 근대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 노비 제도는 한국 전근대사회의 구조와 성격을 밝히는 열쇠이다.

 

 
 
 

※ 장예원 편은 애초 상·하로 고지됐으나 필자의 요청에 따라 상·중·하로 세 번 나갑니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http://photo.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08/2017110803418.html


3000년 이어온 노비제도의 본질은 노예제 그 자체(下)

 

 

[한겨레] 종로구 장예원

조선의 신분제 실상은 6등급제 왕족·문반·무반·중인·상민·천민 양반+상민=서, 양반+천민=얼 개똥이 등 노비 이름 기구한 운명 사노비, 양반 가문 지탱 핵심 노동력 중세 조선은 동족 노비로 움직여 공노비 해방서 폐지까지 100년 노비들의 장예원 방화서 300년 걸려

보물 제527호인 김홍도의 <벼타작> . 일하는 노비들과 놀고먹는 양반의 모습을 절묘하게 대비한 18세기 세태 풍자도이다.

종로구 장예원(掌隸院) 터를 찾아 세 번째 길을 떠난다. 우리 역사의 숨겨진 응달, 노비 이야기의 마지막 회다. 장예원은 춤과 음악을 관장하는 장악원과 함께 ‘장○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비를 다루는 관청이다. 조선 지배층은 노비(奴婢)란 남자 종(奴), 여자 종(婢)일 뿐 노예(奴隸)가 아니라고 강변했지만, 관아 이름에는 버젓이 ‘부릴 예(隸)’자를 썼다. 기자조선 때부터 삼한과 삼국·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까지 3천 년 가까이 줄기차게 이어져온 노비제도의 본질은 노예제도 그 자체였다.

우리가 반상제(양반과 상민) 혹은 양천제(양인과 천인)라고 알고 있는 조선의 신분제는 실제로 왕족-문반-무반-중인-상민-천민의 6등급제였다. 서얼(庶孼)은 양반+상민의 자녀는 서(庶), 양반+천민의 자녀는 얼(孼)이라는 새로운 신분이었다. 양반도 상민도 아닌 서얼의 양산이 중인 신분으로 계층 분화했다. 게다가 천민은 팔천(八賤)이라고 하여 노비·기생·백정·광대·장이(대장장이·옹기장이)·승려·무당·상여꾼 등 8가지로 세분해 숨을 쉴 수 없도록 억눌렀다.

노비는 나라와 양반 가문의 궂은일을 도맡는 핵심 노동력이었다. 공노비는 왕실과 관아, 사노비는 양반가의 일꾼이자 몸종이었다. 내시와 궁녀는 궁궐과 왕실을 지탱했고, 관아를 뒷바라지하는 관기와 사환, 문무 잡직 모두 공노비였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이민족 노예가 인구의 30~40%에 이른 고대 그리스나 로마처럼 중세 조선은 동족 노비에 의해 돌아가는 구조였다. ‘공자 왈 맹자 왈’하면서 무위도식하는 양반 선비를 노비들이 온몸으로 지탱했다.

장예원은 노비 소송 업무의 주무관청이었다. 조선의 사법기관은 형조, 의금부, 사헌부, 한성부였다. 일반 백성 관련 민사와 형사 소송은 형조, 관리와 양반은 의금부, 재심은 사헌부, 토지와 가옥 관련 민사 소송은 한성부에서 주로 다뤘다. 노비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나 물건처럼 매매·상속·증여가 가능했기에 사법기관이 아닌 장예원이 전담했다. 중국도 폐지한 노비제 유지책이었다.

장예원이라는 역사 한 귀퉁이에 등장할까 말까 한 관아가 광화문 육조거리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한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는 왕의 재산인 공노비, 양반의 사유물인 사노비를 증명하는 기록이 보관돼 있었다.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 특수한 재산이기에 눈에 불을 켜고 지켜야 했다. 또 한 가지는 노비의 소유권과 신분을 다투는 소송이 이곳에서 행해졌다. 한양 거주자의 70~80%가 노비이고, 전국 노비 소유주의 대부분이 한양과 경기 지방에 살았으므로 이곳에 두는 게 편했다.

노비 소송의 증거 자료인 호적은 3년마다 갱신했다. 전국의 각 호구는 아버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등 4조(四祖)를 기재한 호구단자를 관아에 제출했다. 관아는 보관 중인 호적과 대조해 변동 사항을 반영 기재한 뒤 돌려줬는데, 개인이 보관하는 호구단자와 관아가 소장한 호적이 신분 확인의 기본 자료였다.

모든 노비의 신원은 장예원의 천적(賤籍)에 기재돼 엄격하게 관리됐다. 노비 문서를 보관한 장예원 창고의 규모는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각종 연구에 따르면 15~17세기 조선 인구 900만~1200만 명 중 노비 비중을 30~40%로 잡을 경우 270만~480만 명쯤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장예원의 조직은 조촐했다. 정3품 당상관인 판결사 1명, 정5품 사의 3명, 정6품 사평 4명이 해결했다.

1896년 박종숙이라는 양민이 빚 때문에 자신과 처첩 등 3명을 스스로 노비로 판 문서. 손을 붓으로 그려 증거로 삼았다.

조선 시대 소송은 노비 소송과 조상 무덤을 둘러싼 산송(山訟)으로 크게 나뉜다. 조선 초 노비 소송은 지방일수록 격렬했다. 민사 소송 대부분이 노비 소송이었다. 노비들은 면천해 양인이 되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1400년대 100년간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된 소송 건수가 600건이 넘었다. 심지어 억울함을 호소하는 신문고에 노비에 관한 청원만 계속 올라오자, 노비 문제로는 신문고를 울리지 못하도록 했으나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태종실록>에 남아 있을 정도였다. 세종 때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그 소생은 무조건 노비가 되는 종모법을 시행한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1596년(선조29) 3월13일 전라도 나주에서 보기 드문 노비 소송이 벌어졌다. 피고는 여든 살의 노파 다물사리였는데 “어머니가 성균관 소속 관비인 공노비였으므로 자신도 공노비”라고 주장했다. 원고인 양반 이지도는 “다물사리는 집안의 사노비와 결혼한 양인”이라고 반박했다. 증거 조사에 나서 한 달여 동안 호적단자와 관청의 천민 명단을 조사한 이후 나주목사 학봉 김성일은 “다물사리는 양인”이라고 판정했다. 공노비로 신분을 세탁, 자식도 공노비로 만들어서 처우 개선을 노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는 달리 대부분의 노비 소송은 노비가 양인으로 신분을 바꾸려고 다투는 양상이었다. 양란 이후 노비 문서가 불타버렸거나 다른 문서와 섞이는 혼란을 틈탄 소송이 많았다. 관찰사·부사·목사·현령 등 지방 수령의 업무 중 재판이 70%를 차지했다.

하급 공무원 노릇을 한 공노비가 팔천(여덟 종류 천민계층) 중 최상의 대우를 받은 반면 사노비는 최악의 피지배 계층이었다. 사노비는 상전(주인)집 행랑채나 담 너머 집에 기거하면서 24시간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 의식주를 제공받는 솔거노비와 따로 독립해 농사를 짓는 대신 1년에 면포 1.5~2필 정도의 몸값을 바치는 외거노비로 나뉜다. 솔거노비는 주인집의 농사와 길쌈, 심부름,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외거노비는 기회가 생기면 서해안 섬, 이북 오지, 강원도 산간으로 도주했다. 청지기나 집사 역을 맡은 수노는 ‘마름’이라고 했는데 위세가 당당한 우두머리 사노비였다.

여자 종은 출처에 따라 윗대서부터 전해 내려온 전래비, 당대에 사들인 매득비, 안주인이 시집올 때 데려온 교전비로 나뉜다. 임무에 따라 정월 초하룻날 안주인을 대신해서 친척에게 세배하는 문안비, 초상이 나면 곡을 해주는 곡비, 문 앞을 지키는 직비, 안주인과 비슷한 시기에 출산한 유모비가 있다.

노비의 이름은 기구한 운명의 흔적이다. 성이 없는 이름은 십중팔구 노비 이름이었다. 동물이나 식물, 얼굴, 성격, 시간 등에 빗대 흔하고 천하게 지었다. 영화나 사극의 단골 이름인 갑돌이와 갑순이, 돌쇠, 마당쇠, 언년이, 간난이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개똥이(갓동이·실동이), 개떡이, 강아지, 똥개, 도야지, 두꺼비 같은 동물 이름은 물론 어린놈, 작은년, 뒷간이, 개부리, 소부리, 개노미, 개조지 같은 막말 이름을 붙였다.

태어난 순서대로 일○, 이○, 삼○을 넣거나, 마지막이나 끝을 의미하는 막동이나 끝동이, 끝순이라고 불렀다. 물 긷는 물담사리, 소 기르는 쇠담사리, 똥 푸는 똥담사리, 붙어산다는 더부사리, 집 담에 붙어 있다는 담사리, 청소 전담 빗자리, 아무개를 지칭하는 거시기…식이었다.

이름만으로 식별이 가능하고, 저항 의지를 갖지 못하도록 열등의 정체성을 부여했다. 더불어 살아갈 사람이라는 뜻의 다물살이나 이쁜이, 꽃분이, 곱단이, 바우 같은 긍정적 이름도 있었다. 요즘 우리말 이름 짓기가 유행하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실감한다.

스웨덴 신문기자 아손 그렙스트가 1905년 전후의 대한제국 곳곳을 여행하면서 찍은 140여 장의 사진 중 한 컷. 노비들은 신분에서는 해방됐지만 농촌에서는 머슴, 도시에서는 빈민으로 살았다. 노주석 제공

1801년 1월28일자 <순조실록>에서 순조는 “임금으로서 백성을 대하게 되면 귀천도 없고…노나 비라고 하면서 구별해서야 어찌 동포라 할 수 있겠는가…내노비 3만6974구와 사노비 2만9093구를 모두 양민이 되게 하라…아, 내 어찌 감히 은혜를 베푼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동족을 노예로 부린 왕조의 잘못을 뉘우쳤다.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소생으로 노비의 피를 절반 이어받은 21대 영조 이후 22대 정조와 23대 순조 3대에 걸쳐 노비 신분의 대물림을 끊은 것이 공교롭다.

노비를 사람으로 본 영조는 ‘노비의 어버이’라고 칭할 만하다. 장예원을 ‘보민사’라고 이름을 바꾸고, 노비 소송 업무를 형조로 이관했다. 정조는 도망간 노비를 잡아들이는 노비추쇄도감을 없앴고, 서얼 차별과 노비제 폐지를 진행하다가 급서했다. 왕위를 이어받은 순조가 1801년 공노비를 해방했으나 1894년 완전한 철폐가 이뤄지기까지 또다시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 노비들 스스로 장예원의 노비 문서를 불태운 뒤 신분 해방까지 300년이 꼬박 걸렸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 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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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4432.html 


[잊을 수 없는 기억, 잊어서도  안 될 기억]병자호란과 남한산성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가장 크게 패배한 전쟁이었다. 수많은 백성이 죽거나 다쳤고 청나라로 끌려갔다. 왕은 무릎을 꿇었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인질이 되었다. 그런데 병자호란의 참혹한 결과에 비해 조선이 왜 그렇게 속절없이 당해야 했는지 그 원인과 책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픈 상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병자호란이 남긴 상처를 따라 길을 나선다.

 


- 서울에서 강화까지, 그 비탄의 길

 

 

서울에서 강화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갑곶나루 선착장. 지금은 평화롭게만 보이는 이 선착장은 정묘호란(1627년) 때 인조가, 병자호란(1636~1637년) 때 봉림대군이 다급한 걸음으로 인조를 모시고 몸을 피했던 쓸쓸한 길이다.
정묘호란 당시, 도성을 떠나 강화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머물렀던 인조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이곳에 행궁을 짓도록 했다. 하지만 정묘호란에서 배워야 했던 건 피난처 건설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대비책이었다. 연미정에서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도 언제든지 침략할 수 있다는 청나라의 경고를 안일하게 받아들였고 그 결과는 병자호란으로 이어졌다.


 

- 인조, 남한산성에서의 47일

 

 

그로부터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1636년 겨울, 청나라의 10만 군대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다시 조선 땅을 침범한다. 인조는 싸워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향한다. 강화도로 가려 했으나 청군에 의해 길이 막히자 임시로 몸을 피한 것이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오며 거쳤을 남문 앞에 서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350년이 넘은 나무의 의젓한 풍모가 오랜 세월을 이겨낸 성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남문에서부터 성곽을 따라 시계 방향으로 걷다가 문득 고개를 내밀어 성 밖을 내려다보았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산성이 청군에게 포위되었으니 이곳에서 인조는 까맣게 몰려드는 청나라 군사의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더 이상 도망 갈 곳 없이 마지막 은신처를 위협받던 순간,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성곽을 따라 계속 걸어나가면 수어장대가 나타난다. 인조가 이곳에서 직접 군사들을 지휘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는 큰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이 공격을 하는 대신 성 안의 물자와 식량이 다하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성에 갇힌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하러 올 지원병을 기다렸지만 조선 어느 곳에도 그럴 만한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수어장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서문이 있다. 지금은 야경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붐비지만 이곳은 인조가 청군에게 굴복하기 위해 나섰던 문이다. 47일 만의 항복과 그에 따른 엄청난 대가들을 생각하면 인조가 이 문을 걸어 나갔던 순간이 한층 무겁게 다가온다. 남한산성의 정문으로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는 남문에 비해 초라한 서문의 모습이 굴욕적인 그날의 항복을 보여주는 듯하다.
서문에서 연주봉 옹성을 거쳐 30분 정도 걸어나가면 북문을 만나게 되는데, 그 근처에 남한산성 행궁이 있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남한산성 행궁은 병자호란을 피해 온 인조가 머물렀던 곳이다. 십장생도 병풍과 보료와 장침, 주칠조각경상, 발 등이 재현돼 있어 조선시대 왕의 생활사를 엿볼 수 있으므로 한번쯤 들러봄직하다.


 

- 난공불락의 성도 지킬 수 없었던 것

 

 

해발 500미터의 험준한 산세를 따라 지어진 남한산성은 누구에게도 함락되지 않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이었지만, 위기 관리 능력을 상실한 조선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몇몇 일화만으로도 당시의 상황이 쉽게 짐작된다. 전쟁이 터지자 인조는 자신을 왕위에 올리는 데 공을 세웠던 김류의 아들 김경징을 강화 검찰사로 보낸다. 하지만 김경징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연일 술판을 벌이며 청군이 강화까지 침입할 수 없다고 장담한다. 결국 그는 아무런 준비 없이 청군을 맞이해 강화를 내준다. 세자와 왕족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가 함락되자 조선은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 광주 목사였던 한명욱은 산성까지 곡식과 물자를 운반하는 번거로움을 없앤다며, 평지에 있는 창우리로 갑사창을 옮겨 군량과 물자를 저장했다. 하지만 남한산성에서 창우리까지는 무려 40리나 떨어져 있었고, 그 때문에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에 도착했을 때 산성에는 1만여 명의 군사가 한 달가량을 버틸 분량의 식량밖에 없었다. 당시 성내에는 1만 5,000명에 달하는 인원이 있었으므로 최대한 절약해도 두 달을 넘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성 안에 식량을 비축해야 비상시에 쓸 수 있을 터인데 한명욱은 왜 그런 결정을 한 걸까? 남한산성 학예연구사의 도움을 받아 창우리 갑사창 터를 찾아보기로 했다. 갑사창이 사라진지 오래라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지만, 남한산성 북문에서 하남시로 연결되는 길 어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도로 위였다. 학예연구사는 한명욱이 갑사창을 옮긴 이유가 산 위까지 물자를 올려야 하는 백성의 노고를 덜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인들과 야합했다는 설도 있다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진실은 역사의 뒤편에 잠시 묻어두더라도 우리는 지배층이나 관리들의 잘못된 판단이 역사적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갑사창 터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보존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 아닐까, 길을 돌아 나오며 생각해본다.

 


- 잊을 수 없는 기억,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

 

인조는 항복을 하기 위해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서, 잠실 부근의 삼전 나루터까지 걸어서 가야만 했다. 굴욕적인 패배의 흔적이 담겨 있는 비석 앞에 서니 병자호란을 둘러싼 안타까운 사건들이 가슴을 친다. 이미 몇 차례 전쟁을 겪었음에도 제대로 된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남한산성이라는 훌륭한 요새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조선의 무기력함이 원망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병자호란의 교훈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비추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위기 상황과 그에 제대로 대처하고있는지 돌아보라는 것이, 이 길이 던져주는 교훈일 것이다.


 

 

 

 

- 함께 가보면 좋을 곳들

 

 

 

● 길에서 만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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