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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집 한 채 값으로 나온 '훈민정음 해례본', 왜 열 채 값을 주고 사들였을까.

문화재방송 2022. 10. 8. 21:22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 전형필 선생>

 

 

<간송미술관>

 

 

 

1. '10만석지기 조선부자' 간송 전형필은 누구? 

 

 

서울 종로4가.
그 일대가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의 생가터이다.
 
  
 
그는 99칸 대가에서 태어나
작은 아버지에게 입양되고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성장한다.
 
집에서 한학을 하다가
12세에 어의동 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를 입학했고,
 
1921년 휘문고보에 들어가서는
학업 이외에 예체능에도 관심을 보이며 
휘문고 4학년 때에는 야구부 주장을 맡아
일본 원정 경기에 오사카고를 대파하기도 했다.
 
학창시절 전형필의 다양한 활동 중 가장 큰 즐거움은 도서 수집이었다.
전형필의 육필 원고인 <수서만록>에는 도서 수집의 열정이 엿보인다.
 

 
"도서 수집의 큰 힘이 된 것은 오로지 가족의 이해 덕분이다.
돌아가신 아버님과 어머님은 내가 책을 끼고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셨을 뿐
싫은 낯을 하신 적이 없으셨다."                
                                                         - <수서만록> 중에서
 
  
 


1915년 친조부상
1916 양조모상
1917년 양조부상
1918 친조모상
1919 양부상
1919 형님상
 .............
 
전형필은 의관 집 2남 2녀의 차남이었지만
집안 어른들의 줄초상이 이어지면서
남자라고는 집안에 아버지 전명기씨와 전형필만 남게 되고
결국 모든 재산이 스물 다섯의 전형필에게 상속되어
그는 '10만석지기 조선 갑부'가 된다.
 
슬픔이 사람을 성숙시킨다고 했다.
 
1926~1930년.
전형필은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일본에서도 <마루젠>이라는 서점을 이용해 도서 수집에 열중했다.
 
"자네 그 목록을 다 채울 수 있겠는가?"
 
한 일본 학생은 노골적으로 전형필을 비웃기도 했지만
전형필은 도서수집의 열정을 놓지 않았다.
 
"목록을 다 채워봐야 조선인이 별 수 있겠느냐는 뜻으로 들렸다.
'오랫동안 책을 모으다보면 이런 목록을 몇 권이라도 채울 수 있지 않겠는가'
라고 댓구해줬다..."                                - <수서만록> 중에서
 
 
2. 위창 오세창 선생과 전형필의 만남!~
 
        '암울했던 시기 민족의 복' 
 
                                                         
위창 오세창 선생, 
1943 <근묵(槿墨)>. 
(고려 정몽주~ 대한제국 말기 민영식까지, 600년에 걸친 명사 1,136명의 친필 수록)
 
전형필의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주신 분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이시고,
근대를 대표하는 서예가 · 전각가이자 서화 감식가인
위창 오세창 선생(葦滄 吳世昌, 1864∼1953)이시다.
 
고고 시절부터 전형필의 예술적 감각을 눈여겨본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등학교 은사, 
춘곡 고희동(1886∼1965)선생님에 의해 소개되어,
 
당시 스무살의 전형필과 60의 오세창 선생은
40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월을 뛰어넘은 우정을 나누며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가운데 부채 든 사람 전형필, 그 왼쪽 오세창 선생님>
 
전형필은 수시로 오세창 선생의 집을 드나들며
많은 작품을 감상하는 법을 배우며
문화유산에 대한 안목을 기르게 되고,
 
우리 문화의 소중함과 가치,
나아가 자신이 조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는다.
 
전형필이 수집하는 문화재는
오세창 선생의 조언과 안목이 보태어지고
선생은 그 문화재의 가치를 글로 기록해두기도 하셨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은
선생이 수십 년간 모은 풍부한 서적과 고서화 · 금석 탁본을 정리한 것으로 
우리나라 서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밤중 자다가 눈을 떴을 때 
두분이 마주앉아 말씀을 나누고 계셨는데
우리나라 서화에 대한 말씀이셨다."
 
"(아버지께서) 뭘 이렇게 쓰고 계시면서,
요전에 너도 봤던 전형필씨가 이걸 샀다는데,
이건 세상에 기가 막힌 보물이다,
그래서 내가(오세창) 이 그림이 기가 막힌 보물이란 것을 칭찬하는 뜻을 쓰는 거야."
                                             
"내가 기억나는 게 겸재그림, 현재 심사정 그림이 있었고,
<소상팔경도>라 그래가지고 크기가 아주 크고 긴 두루마리가 있었어요."
                                          - 오일용(86세, 오세창 막내 아들)
 
훗날 세간에서는
두사람의 만남을
'암울했던 시기 우리 민족에게 내린 복()'이라고 했다.
               
 
3. "우리나라엔 이런 거 없소."
                           - 일제의 문화재 도굴, 수탈!~ 

 
  
           <일본에 빼앗겼다 다시 찾은, 경천사지 10층 석탑(국보 86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경천사지 10층 석탑(국보 86호)>은
원래 경기도 개풍군 경천사에 있던 것인데
1907년 일본에 나타난다.
 
"십층석탑이 이미 동경에 와 있다.
머지않아 우에노 공원 박물관 안에 영원히 보존된다."
                                        - 1907 아사히 신문 기사
 
<경천사지 10층 석탑(국보 86호)>이 일본으로 유출된 경위는
1906년 한국에 방문했던 당시 일본 궁내대신 다나까 미쓰아끼에 의해
개풍 주민들을 강제로 제압하고 석탑을 해체, 빼돌려진 것이었다.
 
"무기를 가진 일본인 130~200명이
지역 관리와 주민들의 항의에도 탑을 해체하여 운반했다.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 대한 매일 신보 1907. 3. 7 사설
 
국내외 비난이 계속 되자
일본은 심하게 훼손된 상태로 10년만에 되돌려준다.
 
이렇게 반환된 우리 문화재는
일본이 약탈해간 것의 빙산의 일각일뿐이다.
 
도쿄 오쿠라 슈코칸.
일제 강점기 빼앗긴 우리 문화재가 가장 많은 곳이다.
 
출처조차 파악 안된 수천 점의 우리 문화재가
일본 거리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평양 율리사지 팔각 오층 석탑>은
고려시대의 아름다운 석조 미술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고려 석탑을 대표하는 것인데
일본의 한 정원을 장식하고 있다.
 
고려 시조 왕건 사당의 제기(祭器)였던
'순화4년명 청자항아리(보물 237호)'는
용도, 제작년도, 제작자가 모두 남아있어 매우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인데
일제시대 경성미술구락부 경매 도록에 '꽃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오사카 동양 도자 박물관>에는
걸작중에 걸작인 우리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아름다운 고려청자가 어떻게 일본에 보관되고 있을까?
 

 
 
 
 
 
 

 
 
1909년 일본서 발간된 조선도자기 경매도록인 <고려소>를 보면
당시 이미 대규모의 경매가 열릴 정도로
엄청난 양의 자기가 일본으로 빠져 나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 고려자기(高麗磁器)들이 
모두 조선의 무덤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조선백자 탄생후
고려청자는 무덤속에서만 존재했던 유물이었다.
 
일본인들이 도굴하기전까지
조선인들에게조차
고려청자는 낯선 물건이었다.
 
아사가와 하구오시가 지은 <조선의 회고(1945)>에는
이왕가 박물관에서 고려청자를 본 고종황제와 이토 히로부미의 대화가 남아 있다.
 
고종 : "이게 어디서 난거요?"
이토 : "고려시대 것입니다."
고종 : "우리나라엔 이런 물건 없소."
이토 : "......."
 
이토는 차마 도굴한 것이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 박탈 이후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우리 문화의 도굴, 약탈의 선봉에 섰다.
 
그는 대량으로 약탈 및 도굴한 자기를 사들여
일본 왕가와 정치인들에게 수십 점씩 선물했다고 한다.
 
일본내에 청자의 인기가 높아지자 도굴은 더욱 극성을 부렸고
일본 도굴꾼에 의해 조선은 황금알을 낳는 보고로 여겨지며
개성에서 강화, 평양, 부여, 공주 등 고도(古都)들이 마구 파헤져진다.
 
1917년 <고적조사보고서>에서
고적조사위원이자 경성제국대학 교수이며
단군조선을 신화로 왜곡한 이마니시 류(1875~1935)조차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군집해 있는 고분이 도굴로 인해 파잔 황폐하는 참상은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실로 잔인혹심의 극치이다.
이는 현대인의 죄악이며,
땅에 떨어진 도의를 보려거든 고분 군집지로 가 보라."
 
 
4. 전 재산을 바쳐 민족의 혼 - 문화재를 지키다!
 
민족의 문화 유산이 낱낱이 사라져 가는 절박한 상황속에서
전형필은 일생을 건 싸움을 시작한다.
 
현재 서울시 인사동에 있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고서전문점 <통문관(通文館)>
1932년 전형필이 세운 <한남서림>의 후신이다.
 
당시 25세였던 전형필은
일제에 빼앗기고 불태워지던 고서들을 본격 수집에 나서서
우리 문고를 만들겠다던 대학시절의 꿈을 실천한다.
 
전형필의 뜻이 알려지면서
훌륭한 고서들을 가진 사람들이 <한남서림>으로 몰려들었다.
 
금보(琴譜, 보물 283호, 선조 5년(1572), 안상, 거문고 악보)
동래선생교정 북사상절(東萊先生校正北史詳節, 국보 149호),
동국정운(東國正韻, 국보 71호, 세종때, '우리나라의 바른 음')는 이렇게 하여 수집된다.
 
일제시대 한성 경성구락부.
지금의 프린스호텔 자리로
당시 그곳은 합법적인 문화재 약탈장이었다.
 
1936년. 11월. 22일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재 난국초충문병(국보 294호)'의 경매가 있었다.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재 난국초충문병(국보 294호).
 


경매가는 500원에서부터 시작해 가파르게 뛰어올라
마침내 국제적 거상 일본의 야마나까를 누르고
조선의 무명 청년 전형필이 사게 된다.
 
경매가 만 4천 5백 8십원!
'난국초충문병' 하나의 경매가는
그해 회당 총경매 매출가를 넘어선
경성구락부 설립 이래 최고의 낙찰가였다.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재 난국초충문병(국보 294호)'
마치 향기를 뿜어내는 듯한 국화와 난초, 풀벌레를 양각으로 새겨넣은 회화미.
청화, 철화, 진사의 3색의 화려한 채색이 돋보이는
조선 백자의 진수, 제작 기술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건 자연이야 자연!
우선 아름답잖아요!
넓은 면에 문양 가득 채우지 않고 국화에
그리고 난을 곁들이고
거기에다 풀벌레가 있고
이건 가만히 보면 자연이야 자연!"
                                            -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당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일제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 아래 조선의 역사, 제도, 문화 등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 문화 유산의 처지 또한 암담했다.
 

 
전형필은 오세창 선생의 도움을 받으며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서화, 청자, 백자, 불상 등 그에 의해 수집되고 보관된 문화재는
국보 14점, 보물 12점과 더불어 5천 여점이 넘는다고 한다.


1940년대 일제는 조선어 사용 금지와


1942년 조선어학회 탄압 사건 등
우리 민족 말살 정책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3년 6월. 
<훈민정음 원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은 전형필은
상대가 천원이라고 했지만
'귀한 물건은 제 값을 치워야 한다'며
당시 집 열 채 값인 만원을 주고 
천원은 수고비로 주며 사들여
비밀리 보관하다가 해방후 공개한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에겐 지켜야할 목표로서 6‧25 전쟁 당시에도
오직 이 책 한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도 베게삼아 잤다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원본은 국보 70호로 현재 우리나라에 단 한권뿐이며 


숭례문 소실후 국보 1호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대단히 귀중한 문화재이다.
 
훈민정음 원본이 발견됨으로 해서 
자음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땄고,
모음은 천지인의 철학을 담았다는
한글의 제작 원리를 실증할 수 있게 되었다.
 
훈민정음은 제작 원리가 밝혀진 세계 유일한 문자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연소답청                                 단오풍정(端午風情) (1805)]

 

   월하정인(1805)  

 

                                                    야금모행

 

 

간송은

<혜원 전신첩(蕙園傳神帖, 국보 135호)>

일본으로부터 사들인다.

 

당시 풍속화는 낮게 책정되고 있었으나

전형필은 진가를 알아본다.

 

<혜원전신첩>에는

'기방무사'부터 '월하정인' '연소답청' '야금모행' '단오풍정' 등

30여 점이 실려 있는데

 

당시 금기시 되던 남녀의 애정을

신윤복은 당당히 자신의 이름까지 밝히며 그리고 있어,

 

양반들의 풍류 생활은 물론

조선 후기 뒷골목 풍경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오늘날 조선시대 다양한 복식 연구에까지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간송 전군이

일본인 부전씨의 손에 들어간 이 풍속화첩을 찾고자 벼른 것이 몇 년이더니

많은 돈을 아끼지 않고 그것을 사들여 진귀한 비장품으로 삼았다."

                                                                - 위창 오세창 발문

 

"우리 문화를 지킨다는 생각으로 수장하셨다고 봅니다.

우리 미술의 우수성, 독자성을 중심으로

걸작을 중심으로 작품을 수장하셨지요.

 

정선의 진경산수화,

단원, 혜원의 풍속화,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 난초 그림 등

간송의 수장품을 통하지 않으면

조선 후기 의미있는 회화사 연구가 불가능하지요."

                                              - 강관식 교수(한성대 회화사) 

 

간송은 그냥 보기좋은 예술품을 지켜낸 것이 아니다.

예술적 가치를 넘어선 

그 안에 담긴 우리 민족혼을 지켜낸 것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는

상감청자 운학문매병(국보 68호)

간송이 수집했다.

 

  

 

수천 마리의 학이 구름 사이를 날고 있는 모습에

흐르는 듯한 원만한 곡선은

고려의 독창적인 상감기법의 절정을 보여주는

현존 고려 청자의 백미, 최고의 걸작이라 평가받는다.

 

전형필은 상감청자 운학문매병을

당시 군수 월급이 70원이던 시절

2만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을 주고 구입한다.

 

한 일본인은 전형필을 찾아와

구입한 가격의 2배를 줄테니 파라고 간청하지만

전형필은 정중하고 단호히 거절한다.

 

"이 고려청자 매병보다 더 좋은 걸 가져온다면

이 매병을 구입한 원금에 드리겠소."

 

이 일을 계기로 사람들은

전형필이 이익을 쫓는 단순한 수집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운학문매병의 가치는

1970년 <동양도자전> 도록을 통해서도 상기할 수 있다.

 

이 도자전에는 한중일 340점의 도자기가 출품되었는데

그중 대표작 9점에 운학문매병이 있었다.

 

"옛날에 나는 매스컴에서 일할 때 (직접 보고)

대단한, 정말로 대단해서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계속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의 평가는 물론 아시아

넓게는 동아시아 전체의 청자 중 가장 훌륭한 물건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나까야마 (前 아사히 신문 문화부 기자, 도자기 전문가)

 

 

"우선 입이 잘 생겼어요.

과장되고 풍만한 어깨와 잘록한 허리에 

잘 생긴 입모양을 가진 완벽한 균형미입니다. "

                                              - 정양모(前 국립중앙박물관장) 

 

"얼마전 영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원나라 청화백자가 288억에 팔렸고

우리나라 17세기 청화백자가 64억에 팔렸습니다.

 

상감청자 운학문매병은

원나라 도자기보다 시대나 작품성으로 볼 때 훨씬 고가일 것입니다." 

                                            - 이상문(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문화재 수집의 최고의 사건은

영국 변호사 존 게스비(J. Gadsby)의 소장품을 인수한 것이다.

 

존 게스비는 영국 출신의 국제변호사로

일본에 30년 거주하면서

일본 고위 관리로부터 

값 비싸고 진귀한 고려청자를 구입해 소장하고 있었다.

 

전형필은

일본 정세가 불안해지면

존 게스비가 소장품을 처분할거라 예측하고

주시하고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 터지고

전형필의 예측이 적중하자

그는 5천석의 땅을 팔아 일본으로 향한다.

 

"어찌 사기그릇을 사기 위해

조상 대대로의 땅을 파느냐."

 

"염려마세요 어머니."

   

"맑은 햇살이 따뜻하게 비치는 응접실에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고려자기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연적, 향로, 매병, 향합 등 진열된 자기들을 정신없이 보고 있을 때

주인 게스비씨가 나오셨다."

 

"이 도자기들은 조선의 도자기입니다.

조선인이 가져가시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 전형필 <수서만록>

 

전형필은 존 게스비에게서 국보 3점과 수십 점의 명품 청자를 구입했다.

 

 

5. 우리 문화 유산 - 후손들이 마음껏 즐기고 빛낼 것!~~

 

 

 

전형필의 나이 33세.

1938년 보화각(保華閣, 현 간송미술관)을 건립하여

1929년부터 그가 모은

우리나라 전적· 서화· 도자기· 불상 등의 미술품 및 국학 자료를 전시한다.

 

 

보화각(保華閣)

 

'빛나는 보석을 모아두다'

 

오세창 선생은 다음과 같은 글을 새긴다.

  

"여기에 모인 것이 천추의 정화로다.

조선의 유물로서 살피고 연구할 수 있게 되었네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

 

해방이 되고 간송은 수집을 중단한다.

이 땅에 존재함으로 충분하고

이제 누구의 손에 있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간송은 수집가를 넘어

자신이 모은 문화유산으로

단절되고 왜곡된 문화재 복원을 계획한다.

보성학교를 설립하고 문화활동을 후원한다.

 

1954년 문화재 보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여 '간송문화'를 연 2회 발간하며

 

김원용, 최순우, 황수영, 진홍섭과 교류하는 등

한국 미술계의 1세대를 이끌며

1968년 미술사 연구도 시작하여 동인지 <고고미술(考古美術)>를 펴낸다.

 

민족문화 수호에 일생을 바친 전형필.

그는 아깝게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1906~1962)

오래 살았다면 문화재사랑에 더욱 헌신했을 것이다.

 

 

 

"조선 팔도에 돈 많은 사람이 간송 한 사람뿐이었겠습니까.

문화재를 수집할 때 골동 가치로 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첫째로 목적이 원대했지요.

우리 미술품을 통해,

우리 문화재를 되찾아,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복원하겠다,

후학들속에서 반드시 그것을 밝힐 사람들이 나올거다 하는 확신말입니다."

                                                      - 최완수 (간송미술관 학예실장) 

 

 

 

"좀 어렵게 이야기하면 문화재하고 전형필은 한 몸이예요.

문화재하고 떨어져 있는 게 아니고 일체예요.

그러니까 그분이 가지고 있는 문화재는

그분의 정신이 베어 있는 것이지요."  

                                     - 진홍섭('고고미술' 동인, 前 이대 박물관장)

 

고서화에서 그 의미를 읽지 못한다면

그것은 한낱 퀴퀴한 종이조각이다.

 

도자기나 석물에서 그 정신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돌덩이나 사금파리에 지나지 않는다.

 

간송 전형필.

그는 우리의 골동 서화에서

우리 민족의 삶과 정신을 찾아내고

그 예술과 역사를 지켜냈다.

                            

우린 2008년

600년 역사의 국보1호 숭례문을 불태웠다.

 

  

 

우리 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유물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동안 역사와 전통 지키는 데 얼마나 소홀했나 되돌아보게 한다.

 

일제 강점기 우리 문화을 약탈 당하던 때

전형필,

그는 사라져 가는 우리 문화에 일생을 받친 분이다.

 

문화 수호에 인생을 바치신 분,

그의 생은 짧았지만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수많은 걸작들이 있다.

 

간송 전형필.

우리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문화유산을 마음껏 즐기고 빛내는 것.

 

이것이 간송 전형필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 일 것이다.

그가 남겨놓은 우리 문화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참고>

 

해외에 유출된 문화재는.. 
일본이 3만 4157점(45%)으로 가장 많고

미국 1만6812점, 영국 6610점, 독일 5289점, 러시아 3554점, 프랑스 1960점, 중국 1434점,

덴마크 1240점, 캐나다 1080 점 네덜란드 820점, 스웨덴 804점, 오스트리아 679점, 바티 칸 500점 등입니다. 

이들 문화재는 대부분 임진왜란과 병인양요와 일제시대 및 한국전쟁 등

사회적 혼란기에 유출된 것들로 국보급과 보물급 문화재가 상당수 포함,

 

그러나 유출 경위가 불확실한 데다

국가간 및 소장자 개인의 사유재산 문제 등이 얽혀 있어

외국에 소재하는 문화재에 대한 환수조치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실정입니다.

 

 

한글은 수많은 의혹과 오해속에서 언문(상스런말), 암클(여자의글), 아햇글 (아이들의 글)등 천한 글자 취급을 받아왔다,

지구상 수천개의 언어중에 백여개의 말만이 글자를 가지고 있으며, 만든 목적과 만든 사람 만든때를 알고있는 문자로 한글이 유일하다.

근대화를 통하여 상당한 정도의 물질적 성취를 이루고, 한글이 디지털시대를 맞아 가장 과학적이고 효율적 문자로 인증을 받는 시점이지만,

한글 창제 575돌을 맞아 이제 내가 누구인지? 한글은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도 다시 돌아볼 때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이야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며 사람은 세모나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 전형필에 의해 1943년에 세상에 나오게 된다

간송은 10만석 부호가의 상속권자로 그의 재산으로 그는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유출되는 것을 막았다.

그가 문화재를 집중적으로 수장하던 1930∼40년대는 일제의 수탈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는데, 문화재 감식에 뛰어난 오세창과 함께 모은 것이 '청자상감운학매병'(국보 68호)·'혜원전신첩'(국보 135호) 등 12점의 국보와 10점의 보물 등 다수의 문화재였다.

​그중 가장 눈여겨봐야할 것은 1943년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을 손에 넣던 이야기가 유명하다.

당시로선 존재 사실만 알려져 있던 훈민정음 해례본이 경북 안동에서 나왔는데 조선시대 이한걸 가문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의 선조 이천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이 하사했다고 한다.

훈민정음 해례본

표지 2장에 본체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로 20센티미터,세로 32.3센티미터 크기이고, 처음 두 장이 망실되었는데 연산군의 기훼제서율을 피하기 위한것이라 한다.

​간송은 이한결이 선조가 하사받은 것을 훈민정음 해례본인줄 알면서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여 생활고 때문에 1000원으로 내 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1000원은 서울의 기와집 한 채 값으로, 고서 가격치곤 비싸다는 주위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개한 이에게 사례로 1000원, 해례본 값으로 1만원을 쳐 주며, "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런 연유로 좋은 문화재가 나오면 상인들은 간송에게 제일 먼저 보였다 한다. 간송이 해례본을 세상에 내놓기 전까진 그 누구도 훈민정음의 창제원리를 알지 못했다.

창제시 “고전(古篆, 옛글)을 모방했다.”는 말에 따라 여러 학설이 있었는데, 인도 구자라트 문자나 산스크리스트어, 몽골의 파스파문자, 갑골문자를 모방했다는 설부터 문고리나 창살모양을 본 땄다는 설까지 분분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해, 한글이 천지인 삼재(三才)의 원리와 태극, 음양오행의 원리를 담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후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에겐 지켜야할 목표로서 6‧25 전쟁 당시에도 오직 이 책 한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도 베게삼아 잤다고 한다.

간송의 이런 행적과는 반대로 지난 2008년 7월 배모씨가 "집을 수리하던 중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발견했다"고 공개하면서 복마전이 시작됐다.

상주본은 현재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과 동일한 판본으로, 서문 4장과 뒷부분 1장이 없어졌지만, 보존 상태가 좋아, 전문가들이 "가치가 1조원도 넘을 것"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한글 사랑에 평생을 바쳐온 주시경 선생이 어느집 안방 벽에 도배로 붙여진 몇장의 해례본 내용을 찾아내어 한글의 문법을 최초로 정리하고,

1894년 갑오개혁 때 언문을 국문이라 개칭한것을, 1913년 국문을 한글이란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1928년 주시경이 세운 조선 어학회에서 “가갸날”을 한글날로 바꾸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구성을 보면 총 33장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하여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를 26장 51면 3행으로 하여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1자 내려싣고, 그 끝에 ‘정통 11년’(1446)이라 명시하고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에서 서문과 함께 정인지가 근작(謹作)하였다는 해례를 비로서 알게 되었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는 『훈민정음(해례본)』은 국보 제71호로 지정되어 있는 『동국정운』권1, 6과 함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주촌의 이한걸(李漢杰) 씨 댁에 전래되던 것이다. 1940년에 발견될 당시 원 표지와 첫 두 장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는데 그 후 보충하여 끼워 넣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

세종 서문의 마지막 글자 ‘이(耳)’가 ‘의(矣)’로 잘못 씌어지고, 구두점과 권성이 잘못되었거나 빠진 것도 있다. 이 책에는 구점(句點; 右圈點)과, 두점(讀點; 中圈點) 및 파음자(破音字)의 성조를 표시하는 권성(圈聲)도 정확하게 표시한 책이다. 구두점과 권성을 다 표시한 것은 『성리대전(性理大全』(1415년)의 체재와도 일치한다. 최근에 이 책 외에 또, 다른 『훈민정음(해례본)』 한 책이 경북 상주에서 발견된 바 있다. 훈민정음은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국보 제71호 동국정운<권1,6>

동국정운<권1,6>(東國正韻<卷一,六>)-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조선 세종 때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이 왕의 명으로 편찬하여 세종 30년(1448)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으로, 6권 6책이며, 활자본이다.

중국의 운(韻)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이란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이다. 당시 혼란스럽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되었다.

이 책은 세종 29년(1447) 9월에 완성되자 간행하라는 임금의 명이 있었고, 이듬해인 세종 30년(1448) 11월에 성균관, 사부학당 등에 보급되어, 이 책이 간행되고 보급되었던 시기를 알 수 있다.

현재 이 책은 전 6권 가운데 1권과 6권만이 남아있다. 내용을 보면 본문의 큰 글자는 나무활자이고, 작은 글자와 서문의 큰 글자는 갑인자이다. 글자체는 큰 글자가 진양대군의 글씨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자음을 우리의 음으로 표기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국어연구자료로서의 중요성도『훈민정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한자음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글자를 만든 배경이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 기본자료가 된다.

세종대왕 기념관 홈페이지에 액자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세종대왕기념관(홈페이지 http://www.sejongkorea.org)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고 이를 길이 보존하기 위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1970년 11월 준공하고 1973년 10월 개관하였다. 갖가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세종대왕기념관에는 한글실, 과학실, 국악실, 일대기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옥외전시물에는 ‘세종대왕신도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1호)‘ 와 ‘수표(수위측정기)(보물 838호)‘ 등이 있다.

 

 

570년 세월 그대로… 世宗의 숨결 느낀다

[간송 전형필 소장본 '훈민정음 해례본'… 한글날 앞두고 복간]

1940년 안동서 간송 전형필 발견… 방종현·홍기문, 本紙에 단독 보도

간송미술문화재단·교보문고 제작
"일반인 접하기 어려운 국보 70호… 곁에 두고 역사의 소중함 느끼길"

이한수 기자

입력 2015.10.07 03:00 | 수정 2015.10.07 10:52

1940년 7월 30일 조선일보에 놀라운 기사가 실렸다. 1446년(세종 28년) 간행 이래 자취가 드러나지 않았던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解例本)이 494년 만에 실체를 드러냈다는 특종 기사였다. '원본 훈민정음의 발견'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원본 발견 소식과 함께 해례본의 내용을 번역해 8월 4일까지 5회에 걸쳐 연재했다. 기사는 조선일보 출신의 국어학자 방종현이 썼다. 그는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지낸 홍기문과 함께 해례본을 한글로 번역했음을 밝히고 "누구의 이름으로 되든지 공동 노작'이라고 적었다. 조선일보는 해례본 번역 연재를 마친 직후인 8월 10일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됐다.

복간된 간송본 훈민정음 해례본. 한지에 인쇄하고 옛 방식으로 제본해 최대한 원본에 가깝게 만들었다. 1446년 간행된 해례본은 1940년 간송 전형필이 발견·구입해 494년 만에 존재가 알려졌다.

국보 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그대로 복원한 복간본이 한글날(9일)을 앞두고 나왔다. 해례본을 소장한 간송미술문화재단이 기획하고 교보문고가 제작을 맡았다. 간송본과 동일하게 한지에 인쇄하고 4침안정법(4개의 구멍을 뚫어 실로 꿰매 책을 만드는 방법)으로 제본해 최대한 원본에 가깝게 복간했다. 훈민정음 연구자인 김슬옹 워싱턴 글로벌대학 교수가 해제한 해설서 '한글의 탄생과 역사-훈민정음 해례본'도 함께 출간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1446년 음력 9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알린 뒤 정인지·신숙주·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창제 목적과 글자의 원리 등을 설명한 한문 해설서다. 해례본은 책 표지에 '훈민정음'이라고만 되어 있으나 '훈민정음 해례'라는 목차 아래 글자의 제작 원리와 사용 방법 등을 적고 있어 '언해본'과 구분해 '해례본'이라고 부른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잘 알려진 언해본은 해례본의 앞부분인 '어제(御製) 서문'과 '예의편(例義篇)'만을 한글로 번역해 세조 이후 만든 책으로 여러 판본이 있다.

(위 왼쪽부터)전형필, 방종현, 홍기문. (아래)훈민정음 해례본 발견을 단독 보도한 조선일보 1940년 7월 30일자.

훈민정음 해례본은 실록 등 역사서에 기록돼 존재가 알려져 있었지만 간송 전형필 선생이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해 구입하면서 처음 실체가 알려졌다. 전형필은 소유주에게 책값 1만원과 별도 사례금 1000원을 주고 해례본을 구입했다. 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이었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는 소장자를 '시내 모씨'라고만 썼다. 김슬옹 교수는 "소장자를 익명으로 처리하고 사진도 없이 보도한 것은 우리말과 글의 교육을 금지한 일제 치하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간송본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일본이다. 지난 2008년 경북 상주에서 또 다른 판본(상주본)이 발견됐으나 간송본에 비해 훼손된 부분이 많고 이후 도난에 이어 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배모씨의 집에 화재가 나면서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다. 해례본의 발견으로 세종대왕이 창틀과 문고리를 보고 한글을 만들었다는 일부 일본 어용학자들의 억측을 반박할 수 있게 됐다. '어금닛소리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등으로 글자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대해 세계 언어학자들은 한글의 과학적 원리를 극찬하고 있다.

간송 소장본은 광복 직후인 1946년 이후 몇 차례 영인본이 발간됐지만 원형 그대로 복간본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전형필 선생의 손자인 전인건 간송미술문화재단 사무국장은 "연구자만이 아니라 국민들이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우리의 소중한 역사와 문화를 체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원문보기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0/07/2015100700025.html

 

 

 

 

 

지식인 정약용, 아버지 정약용

 

“원래 역사를 좋아했지만 역사 웹툰을 하면서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저에게 역사는 재미있는 이야기예요. 특히 역사 속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아서 사적(私的) 기록이 담긴 문화재를 보면 반가운 마음이 들죠. 그중에서도 정약용 선생의 가족 사랑이 담긴 『하피첩』은 문화재 지정 여부를 떠나 제 마음속 ‘보물’이에요.”

 

무적핑크는 웹툰 작가로 데뷔한 지 5년 만에 SNS에 올린 『조선왕조실톡』이 주목을 받으며 ‘톡(Talk)’ 형식의 역사 웹툰으로 이름을 알렸다. 『조선왕조실톡』을 비롯해 『세계사톡』과 연재 중인 『삼국지톡』은 흥행에 힘입어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인기 비결은 기록 속에 갇혀 있던 역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인물 간의 생생한 대화이다. 그 뒤에는 몇 장면으로 압축된 웹툰 한편 한편을 위해 온갖 역사 기록물을 찾아 읽는 치열한 노력이 숨어 있다.

 

“저는 시각디자인과에서 메타버스와 VR(몰입형 가상현실), AR(증강현실)을 전공했어요. 언뜻 지금 하는 일과 동떨어진 공부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대학교는 ‘지식이 아닌 태도’를 배우는 곳이라는 말이 있더라고요. 저는 미술대학에서 디자인학도로서 ‘어렵지만 중요한 정보를 쉽게 표현하는 방법론’을 배웠어요. 역사 웹툰을 작업할 때도 대학교에서 배운 대로 항상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려고 하죠.”


 

대화가 흥미롭게 읽히려면 말을 하는 사람의 캐릭터가 살아 있어야 한다. 무적핑크가 공식적인 기록보다 사적 기록에 더 큰 애정을 갖는 이유이다. 역사 속에서 사적 기록을 많이 남긴 인물은 흔치 않은데, 정약용(1762~1836)은 다방면에서 업적을 남긴 관료이자 지식인으로 다수의 저서와 기록을 남겼다. 그중 『하피첩』은 그가 강진 유배지에 있을 때 아내가 보내준 빛바랜 치맛감을 잘라 두 아들에게 교훈이 될 이야기를 직접 써준 것이어서 그 안에 담긴 정서가 각별하다.

 

정약용 선생의 가족 사랑이 담긴 『하피첩』은 문화재 지정 여부를 떠나 제 마음속 ‘보물’이에요. 유배를 떠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고자 충고의 말을 기록했다니, 참 숭고하지 않나요. 그 마음을 헤아려볼수록『하피첩』의 존재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져요.


 

“존경하던 군주를 잃고, 사랑하던 형제를 잃고, 홀로 유배를 떠나는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어요. 원망스럽기도 했을 테고요. 그런 상황에서도 세상에 도움이 되기 위해 지식을 집대성한 저서를 펴내고,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자식들에게 애정 어린 충고의 말을 남겼다니, 참 숭고하지 않나요. 그 마음을 헤아려볼수록 『하피첩』의 존재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져요.”


 

역사 속 진짜 사람들의 이야기

 

역사 속 인물의 사적 기록에 기울이는 무적핑크의 각별한 애정과 관심은 그의 웹툰에 등장하는 캐릭터에 독특한 생명력을 불어넣곤 한다. 단순히 기록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행간에 담긴 저자의 심정을 헤아리면서 역사적 평가에 담기지 않은 성격의 실마리를 찾아내 표현하는 것이다. “흔히 제갈량은 신선 같은 이미지로 그려지는데요, 『삼국지톡』에서는 상당히 신경질적으로 표현했어요. 『제갈량문집』을 읽으며 ‘이 사람, 성격이 장난 아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멍청한 팀원에게 시키느니 내가 다 하고 만다!’라며 잔업하는 팀장 같다고 할까요.”

 

이제 7분 능선을 넘긴 『삼국지톡』 연재를 마치고 나면 다음 작업으로는 『조선왕조실톡』 외전이 예정되어 있다. 이번에는 역사 속 인물 사이로 좀더 깊이 들어가 정사(政事)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중전, 공주와 옹주, 군주와 왕이 되지 못한 왕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갈 참이다. “우리 모두가 역사를 만드는 주인공”이라며 어떤 등장인물도 ‘적당히’ 넘어가지 않는 무적핑크가 보여줄 조선왕실의 ‘주변인들’은 또 어떤 대화로 우리를 흥미진진하게 혹은 놀라게 할까. “제가 그린 웹툰이 제가 좋아하고 재미있어 하는 역사의 매력을 더 많은 분에게 전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와 더불어 숨가쁜 연재 일정에도 흥미로운 소재 덕에 신나게 작업하고 있는 『문화재사랑』의 ‘기록에 담다’도 관심 있게 봐 주세요.”




글. 편집실 사진. 와이랩


서구인들을 사로잡은 한국 도자

 

19세기 후반 서구인이 조선에서의 경험을 담은 책이나 확인되지 않은 소문으로 한국 도자에 환상을 품었다면 20세기 초에는 직접 한국을 여행하며 도자를 구입하기 시작 했다. 20세기 초 유럽에서는 아시아 여행이 붐을 이뤘는데, 이때 한국 여행안내서는 도자를 꼭 사야 하는 물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조선 황제의 소장품이었던 15엔짜리 대접이 오사카 경매에서 90,000엔에 팔렸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한국 도자 구매가 경제적 이득이 될 수 있음을 암시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동양 미술에 대한 순수한 관심으로 수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영국인 오브리 르 블론드 (Aubrey Le Blond)는 여행 중 한국 도자를 수집한 대표적인 수장가이다.

 

그가 동양 도자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극동지역을 여행하면서부터이다. 1912년 르 블론드는 부인과 함께 이집트에서 유람선을 타고 아시아 여행을 시작했다. 그중 한국 여행 일정은 짧았지만, 홍콩에서 만난 아치볼드헨리 세이스(Archibald Henry Sayce) 교수의 조언으로 고려시대 도자를 구입하기 위해 예정보다 긴 시간을 머물렀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언어학을 가르쳤던 세이스 교수는 “미국과 일본 수집가들이 한국의 고려시대 도자를 수집하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는 합리적인 가격에 구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르 블론드의 부인 미세스 오브리가 1928년에 출판한 자전적 저서 『Day in, Day out』에는 한국에서 도자를 구매한 구체적인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부부에게 물건을 팔려는 사람 중에는 관직에서 쫓겨난 전직 관료가 많았는데, 가장 좋은 몇 점은 이들에게서 구매한 것이었다. 르 블론드는 고려시대 도자는 무덤을 도굴해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도굴꾼에게서 구매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 정부가 도굴을 금지하는 규제를 강화하면서 도굴꾼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에 물건을 비싸게 팔기 위해 기다리기보다 빨리 팔기를 원했다.

 

부부가 직접 기차를 타고 특정 지역으로 이동해 도자를 구매한 경우도 있었다. 한국인 판매업자가 안내하는 지역으로 가면 농민들이 도자를 지고 와서 바닥에 펼쳐놓았고, 그 중 좋은 물건을 골라 가격을 흥정했다. 이렇게 구매한 한국 도자는 대부분 고려청자였으며, 일부 조선시대 자기와 중국 송, 원대 자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도자를 구매한 부부는 시베리아횡단 열차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한국 도자 연구의 기틀을 마련한 르 블론드 컬렉션

 

르 블론드는 한국에서 구매한 도자 가격과 관련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비싸지 않은 값을 치렀을 것으로 추정 된다. 그런데 그의 한국 도자 컬렉션은 가격보다 유럽에서 한국 도자 연구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 더욱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는 여행 직후인 1914년 영국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 한국 도자 컬렉션 기증을 의뢰했고, 전문적인 연구가 이뤄지길 희망했다.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큐레이터였던 와일드(C.H.Wylde)는 르 블론드의 한국 도자 컬렉션을 조사한 후, 당시에는 접할 수 없었던 새롭고 다양한 종류의 한국 도자가 매우 중요하고 흥미로운 전시가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에 박물관은 1918년 르 블론드의 한국 도자 컬렉션을 연구한 『Catalogue of the Le Blond Collection of Corean Pottery』를 출판했다. 카탈로그에는 통일신라 도기, 고려 청자, 중국 송·원대 도자 등 총 143점이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카탈로그는 1장은 독창적인 한국 도자, 2장은 한국과 중국 중 기원이 불분명한 자기, 3장은 고려에 수입된 중국 자기로 나누어 구성했다. 한국에서 발견한 다양한 도자와 관련한 학술적인 접근을 시도했고, 박물관의 동양 도자 큐레이터였던 버나드 래컴(Bernard Rackham)이 집필을 담당했다. 르 블론드의 한국 도자 컬렉션 카탈로그는 유럽에서 한국 도자를 대상으로 한 최초의 전문 서적으로 20세기 전반 유럽의 한국 도자 연구자들에게 필독서가 되면서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글, 사진. 김윤정(고려대학교 문화유산융합학부 교수)


충(忠)·효(孝)·애(愛) 3개 주제별 체험구역 운영, 10.7.~10, 10.14.~16. 오후 6시~10시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소장 이성희)는 아산시(시장 박경귀)와 함께 오는 10월 7일~ 10일, 14일~16일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문화예술 행사인 <제5회 현충사 가을 달빛야행>을 공동 개최한다.

  현충사가 민족성금으로 중건된 지 9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서 그 의미를 기념하고 코로나19로 지친 국민들의 심신을 위로하기 위한 취지로, 지난 봄(5월)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리는 문화행사이다.

  이번 행사는 현충사를 충(忠)·효(孝)·애(愛) 세 개의 주제별 공간으로 나누어 다양한 역사교육 및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데, ‘충(忠) 체험구역’에서는 조선시대 무과시험 재현과 전통무예 시연, 이순신을 주제로 하는 춤극, 이순신 일대기 해설, 어린이 대상 거북선 꾸러미(키트) 조립 등 다양한 체험이 준비된다.

  ‘효(孝) 체험구역’에서는 전통차 예절을 배우고 시음할 수 있는 다도체험,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을 활용하는 전통한지 공예품 전시, 우수공연 초청 춤극, 조형물을 감상할 수 있는 달빛전시회 등이 펼쳐진다.

  ‘애(愛) 체험구역’에서는 충무공 고택을 활용한 설치미술작가 초청전시가 이루어지며 활터 앞 잔디밭에서는 한밤에 어울리는 클래식 공연이 관람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할 예정이다. 또한 관람객들은 현충사 정문에서 무료로 청사초롱을 대여하여 야경 아래 산책을 즐길 수도 있다.

  사전예약 없이 야간개방 시간(오후 6시~10시)에 자유롭게 입장해서 참여할 수 있고, 자세한 사항은 전화(☎041-539-4614)로 문의하면 된다.

우문성

-호머 헐버트박사와 한글 띄어쓰기-

중국의 한문원서를 번역할 때 종종 오역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 중 하나는 한문에 띄어쓰기가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는 문장을 띄어쓰기를 잘못하면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가 되듯 한문을 번역할 때 띄어쓰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뜻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도 오랜 옛날부터 줄곧 한문만 쓰다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시자 처음에는 중국한문의 표기방식을 그대로 차용하여 띄어쓰기가 없었다.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맞지 않으니...”로 시작되는 훈민정음 서문부터 띄어쓰기도 없고 쉼표도 없는 문장이다.
이렇게 띄어쓰기도 없고 쉼표도 없는 문장을 읽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다.

이런 불편을 개선해 준 사람이 바로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Homer Hulbert; 1863~1949)였다.

'헐버트'박사는 우리 한글이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고, 영어식으로 띄어쓰기를 하도록 계도했다.
'헐버트' 박사가 그렇게 계도해 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띄어쓰기와 쉼표가 없는 불편한 중국식 문장을 그대로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중국 한문은 지금도 띄어쓰기와 쉼표가 없는 것을 보면 능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23세의 청년이었던 '헐버트' 박사는 조선의 청년들에게 서양문화와 영어를 가르쳐 달라는 조선정부의 요청을 받고 1886년,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
그렇게 조선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헐버트' 박사는 조선인보다도 조선을 더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는 조선에 들어온 지 3년 후인 1889년에 '선비와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의 '사민필지 (士民必知)'를 저술했는데, 이 책은 순 한글로 만들어진 조선 최초의 교과서라 할 수 있다.
미국인 선교사로서 짧은 시간에 한글학자가 된 그는 미국에 한글 교본을 출간하는 등, 다수의 논문을 통해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기 시작했고 서재필(徐載弼, 松齋; 1864~1951), 주시경(周時經, 白泉; 1876~1914) 등과 함께 ‘독립신문’을 발행했는데, 그 신문은 최초로 띄어쓰기를 한 한글신문이었다.

누구보다 한글의 우수성을 잘 알고 있었던 '헐버트' 박사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중국인들이 익히기 어려운 한자를 그만 버리고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그랬던 그는 1949년 8월 5일, 서울에서 눈을 감았고 대한민국 정부는 1949년 8월 11일,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사회장’을 거행한 후, 현재의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에 안장했다.
그리고 1950년에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또 2014년 한글날에는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그가 죽은 지 50년이 되는 1999년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더 헌신했던 '빅토리아' 풍의 신사 '호머 헐버트' 박사 이곳에 잠들다.'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글자에만 쉼표와 마침표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쉼표와 마침표가 없으면 숨이 막혀 살지 못한다.
쉬는 일요일이 있어야 하고 친구들과 차 한 잔을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하루 일과도 쉼표와 마침표가 있는 과정이고 작품도, 여행도, 농사도 모두 쉼표와 마침표가 있는 과정이다.
쉼표 없는 인생, 마침표와 재출발이 없는 인생, 그런 인생은 지옥 중의 상지옥이다.

우리말에는 '바쁠수록 둘러가라'는 속담이 있고,
영어에는 'Slow and steady wins the race. (천천히 꾸준히 가는 자가 이긴다)'라는 경구가 있다.

인생 일장춘몽(人生一場春夢) 이라고들 하지만, 인생 100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며 일하고, 한 가지 한 가지씩 마무리를 지어가면서 새 마음, 새 기분으로 도전해 가자!

‘틀림없이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것이다.’

천억 원을 요구하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미스터리

  • 기자명 이선기 기자 
  •  

 

YTN화면캡쳐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라 불리는 이유는?

행방이 묘연했던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최근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고서적 수집상 배익기 씨가 “정부가 1000억 원을 보상해 주면 상주본을 내놓겠다”고 문화재청에 의사를 전했다.

배 씨는 문화재청이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가치를 1조 원 이상이라고 밝힌 만큼 자신에게 10%를 보상해 주면 나머지 90%는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것.

배 씨는 개인 재산인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그냥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10%인 천억 원 정도는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보상 금액이 너무 크다”면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실물을 먼저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은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사용법을 기록한 책으로 국보 70호로 지정된 ‘간송본’과 함께 딱 2권 뿐 인 귀중한 문화재로 지난 2008년 7월말 경북 상주에서 발견돼 '상주본'으로 불린다.


서문 4장과 뒷부분 1장이 없어졌지만 상태가 좋고 간송본에는 없는 표기, 소리 등에 대한 연구자의 주석이 있어 학술적 가치가 더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주본은 세상에 알려졌을 때부터 줄곧 배씨가 보관해 왔지만 골동품 상점을 운영하던 조씨가 "자신의 가게에서 훔쳐간 것"이라며 민사소송을 제기해 소유권을 확정받았다. 이에 배씨는 2011년 상주본을 훔친 혐의(문화재보호법 위반)로 구속기소됐다가 지난 2014년 대법원은 훔쳤다는 확실한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대법원이 소유권자로 인정한 조 씨는 사망했고, 배 씨는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절도범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국가에 기증할 의사가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배씨는 무죄를 선고받은 이후에도 상주본의 존재만 확인해줄 뿐 행방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게다가 배씨의 집에 화재가 일어나 상주본의 상태를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원문보기

http://www.sisafoc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4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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