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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 선생의 숨결 어린 경교장(사적 제465호)

문화재방송 2014. 8. 14. 00:05

 

사적 제465호(2005. 6. 13 지정). 2001년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사적으로 승격되었다.

건축면적 396.69㎡, 연면적 945.45㎡. 이화장(梨花莊)·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한 활동 3대 명소의 하나로 불린다.

광산업을 하던 최창학 소유의 별장으로1938년 완공 당시에는 죽첨장(竹添莊)이라 하였다. 백범이 환국하자 선생의 숙소로 내놓았고 옛

지명을 따라 경교장으로 개칭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한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집무실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되기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건국에 대한 활동 및 반탁,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타이완 대사관 관저, 국군의료진 주둔지, 남 베트남 대사관 관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68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이 인수하였고 병원 부속 건물로 사용했다,

(운영자는 창고로 사용되는 현장을 촬영하여, '병원 창고로 전락한 사적 제465호 경교장'이란 고발 칼럼을

언론기관 등에 송고했다) 

 

2012년부터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2013년 3월 1일에 새롭게 개관했다.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공업고등학교의 전신) 건축과를 졸업한 김세연이 설계했다. 1939년 고전주의풍으로 완공한 경교장은 지상 2층, 지하 1층, 연건평 264평 규모로, 좌우대칭형 2층 양옥으로 지어졌는데, 정면 중앙 1층에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승·하차 시설을 갖춘 현관을 설치했으며, 당구실과 이발실을 둔 초호화 건물이었다.

 

 

중요층마다 도우미가 관리하며 촬영을 금했다. 틈틈히 몰래(?)촬영, 나름대로 역사적인 순간에 따라 포스팅했다.

 

 

 

1945년 12월 3일 환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역사적인 첫 국무회의를 마치고 경교장 입구 계단에 서서 찍은 기념사진으로, 한복을 입은 이시영 선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양복을 차려 입었다.

이시영 선생 옆이 김구 주석.

 

 

 

 

윤봉길 의사는 역사적 의거일인 1932년 4월 29일 일찍 교포 김해산(金海山)의 집에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김구(金九) 단장과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그는 식사가 끝난 후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 1개와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 1개를 김구 단장으로부터 받아
하나는 어깨에 메고 하나는 손에 들었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는 자기가 찬 새 시계와 김구 선생이 찬 헌 시계를 바꾸어 갖고,
사용하고 남은 의거 준비금을 김구 단장에게 돌려주었다.

 “선생님, 제 시계와 바꿉시다. 제 것은 어제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한 시간 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
시계를 맞바꾼 김구 선생은 목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라고 인사했다.

(윤 의사 회중시계는 유서와 함께 보물 제568호)

 

   

 

백범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

백범 선생의 부인 최준례 여사

<아래 내용은 경교장에 없습니다>

(백범과 어머니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

백범이 흔들릴 때… 할머니는 오십 먹은 그의 종아리를 때렸다

입력 : 2014.03.01 07:40

김구 선생 아들 김신 前 공참총장이 말하는 아버지와 가족

 


가족보다 동지가 먼저
형의 폐병 약 사달라 하자 “동지들도 폐병으로 고생 아들만 살릴 수 없다”

13살에 처음 본 아버지
만났지만 알아보지 못해… 27살 돼서야 처음 겸상 꿈인가 생시인가 했지


기개 넘치던 할머니
생일에 비단옷·음식 받자 “윤봉길 의사 피 생각하라” 다 집어던지며 화내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에 있는 김구 선생 흉상 옆에 그의 아들 김신 장군이 섰다.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에 있는 김구 선생 흉상 옆에 그의 아들 김신 장군이 섰다. 김신은 “나는 늘 죽음과 가까이 있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으로 버텼다”고 말했다. /김지호 객원기자
밸런타인데이와 대보름이 겹쳤던 지난 2월 14일. 이날이 안중근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날이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SNS를 통해 혹은 직접 경기도 부천 안중근 공원이나 그의 가묘가 있는 서울 효창공원 등을 찾아 그 의미를 기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한 때에 이 사람을 떠올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고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죽을 때까지 되찾으려 했던 백범 김구 선생. 효창공원 옆에 마련된 백범 김구기념관은 그의 숨결을 오롯이 간직한 듯했다.

"아버님이 1946년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 등 유해를 되찾아 오시지 않았어요? 안중근 의사 유해도 꼭 모시겠다며 효창공원에 가묘도 해 놓으셨는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기념관을 덮는 듯했다. 백범 김구의 아들 김신(92) 전 공군참모총장이었다. 왼쪽 귀가 잘 안 들리는 것 빼놓고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매일 신문 7개를 빠짐없이 읽는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회고록 '조국의 하늘을 날다'(돌베개)를 펴냈다. 1922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서부터 1994년 '백범일지' 중국판 출판기념회를 연 72년간의 기록을 담은 책이다. 조국과 아버지에 대한 사부곡(思父曲) 그 자체였다.

가족보다 조국이 먼저였던 아버지

"중국서 독립운동하던 형(김인)이 스물대여섯에 폐병에 걸렸다고. 형수(안미생·안중근 의사 동생의 딸)가 아버지한테 페니실린 좀 구해달라고 애원했지. 그때 아버지가 그랬어. 내 동지들도 폐병으로 수십명이 죽는데 내 아들만 살리자고 죽어가는 동지들을 버려둘 수 있느냐고."

결국 김인은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숨을 거뒀다. 광복 5개월 전이었다. "형수가 많이 힘들어했지. 섭섭했을 게야. 하지만 아버지 뜻을 왜 몰랐겠어. 장남의 죽음에 가장 슬픈 건 당신이었을 텐데 말이지. 그렇게 공(公)을 위해 사(私)는 모르는 분이야."

김신도 아버지에게 서운함을 느껴봤다고 했다. 어린 시절 꿈인 공군이 되고 싶어 1944년 쿤밍에 있는 중국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형 사망 뒤 졸지에 외아들이 되자 하루빨리 아버지를 곁에서 모시고자 했다. "아버지한테 가겠다고 편지를 썼는데 아버지 생각은 달랐어. '남자가 돼서 배우려면 끝까지 해야지 왜 멈추느냐. 나라가 수립돼도 너 같은 인재를 양성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시면서 말이지. 그렇게 단호할 수 없는 거야. 처음엔 굉장히 마음으로 섭섭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어."

나이 오십에 종아리 맞던 김구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요?

"열세 살인가 처음 봤지. 알아보지 못했어. 아버진 신변이 항상 위험해 못 보고 살았으니 익숙지 못하잖아. 좀 뚱뚱하고 시커멓고 곰보가 있고, 예쁘장스럽지 않은 얼굴이라…. 아버지랑 한집에서 오래 살았던 건 1947년 내가 공군 비행훈련 다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 경교장에 있을 때 2년 동안이었어. 내 나이 스물일곱에 평생 처음으로 겸상을 했는데 꿈인가 생시인가 그랬지."

―할머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아버님이 중국 창사에서 총 맞고는(1938년 후난성 창사 남목청에서 지청천 등과 회합을 갖고 민족주의 진영 3당의 통합 문제로 논의하던 중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은 일) 종잇장 한 장 차이로 살았어. 그때 할머님이 아버님을 향해 '무슨 놈이 어찌 동지한테 총을 맞아. 일본 놈한테 맞아야지'라고 꾸지람했어. 또 할머니 생신 때 주변에서 비단옷에 음식을 해왔는데, '우리가 지금 윤봉길 의사 피를 빨아먹고 살고 있는데 이게 무슨 짓이야' 하면서 다 집어던졌다고. 아버지가 나이 오십이 다 돼서 종아리 맞고 그랬어."

―종아리를요?

"아버님께서 '남들은 부모님 모시고 생일도 하는데, 어머님은 고생만 하신다'며 눈물을 보였어. 아버님 마음이 흔들리는 듯싶으니까 '종아리 걷어' 하신 거야. 그걸 때마침 찾아온 안중근 의사 어머님이 보시곤 '나이가 오십인데도 맞으니 젊었을 때는 얼마나 맞았습니까' 했더니 아버지가 '글쎄요. 기록을 안 해놔서'라며 허허 웃으셨다는 거지."

―할머님 기개가 대단했군요.

"그뿐인가. 아들을 위해선 걸식도 노숙도 마다치 않았어. 아버님이 1896년 중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하던 일본군 육군 중위를 죽이지 않았어요? 조모님은 아들 가져다준다며 동냥을 다니다 남의 집 바느질과 밥 짓는 일 해주면서 감옥에 매일 한 보따리씩 사식을 넣어 아버지를 돌봤어. 아버지 사형 날짜가 다가왔을 때인데, 한밤중에 서울에서 인천 감옥으로 전화가 왔어. 고종 황제가 중지를 시킨 거지. 조모님의 마음이 하늘에 닿았달까…."

평양행을 실망스러워했던 아버지

김신 장군에게 아버지와 함께했던 가장 기억나는 순간이 언제인지를 물었다. 그는 "곁에서 숨소리를 듣던 매 순간순간"이라고 답했다. 그는 아버지 김구를 모시고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연석회의에 참석했다. "아버지는 '(죽거나 붙잡혀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며 남으라 하셨지만 한순간이라도 같이 있고 싶었거든."

―김일성을 만나보니 어떻던가요.

"키가 훌쩍하니 뚱뚱한 청년 한 사람이 와서 우리한테 대선배님 오셨다며 꾸벅 인사를 해. 우리 어르신(김구 선생)이 당시 73세이고 김일성이 37세였지. 군중 대회장 앞을 지나갈 때인데, 누가 한마디 구호를 하는데 거리 전체가 '김구 이승만 타도하자, 타도하자, 타도하자!' 하며 난리가 난 거야. 그걸 본 김일성 얼굴이 홍당무가 됐어."

―당시 '남한만의 단독정부는 안 된다'는 부분만 알려졌다던데.

"안타깝지. 아버님은 그 뒤 '북쪽에서도 단독정부를 세운다면 반대한다'고 했어. 회의장은 바늘이 떨어져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싸늘한 거야. '이 정도로 북이 사전 훈련이 됐으면 뭘 해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신 게지. 대단히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끼리 노력해서 합치는 건 안 되겠다 하고 굉장한 실망을 하셨다고."

그의 회고록 서문에는 '백범 김구의 가족이라는 사실은 자랑의 원천이었지만 늘 나와 가족의 어깨 위에 드리워진 버거운 숙명이기도 했다'라고 적혀 있다. 글자 하나하나 그의 고단한 삶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소원은 첫째도 통일, 둘째도 통일이라고 했다.
최보윤 | 기자

출처:조선일보

기사원문보기: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2/28/2014022802716.html?csmain

 

(운영자는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가 '안중근 의사께서 사형 선고 받은날'이라는 사실을  2010년부터 블로그에 포스팅했다)

속옷에 쓰여진 밀서(1948. 2. 3)

백범 선생이 앉아 계시던 테이블이 보이고 암살범 육군 소위 안두희 발자욱이 그대로 선생을 향하고 있다.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됐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 온 국민들이 경교장 앞 마당에서 통곡하고 있다.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 있는 안두희의 총탄 자욱, 이 가운데 한 발이 선생의 머리를 관통했다.

<아래 내용은 경교장에 없습니다>

김구의 국민장

 1949년 7월 5일 국민장으로 치러진 백범의 장례행렬이 지나는 길목은 애도 인파가 길을 메웠다.

 

(KBS 1 TV의 보도:암살범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 CIC 요원이었다)

반공, 정치사찰의 1인자 - 암살범 안두희  
방송일: 20040924   
예고편:  동영상 :      
제목 : 반공, 정치사찰의 1인자, 암살범 안두희 편
2004년 9월 24일 (금) 밤 10:00~11:00
연출 : 전우성 PD


백범의 죽음 55년, 안두희의 숨겨진 진실을 찾아서
지금까지 안두희의 1950년대 행적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군대를 예편한 후 양구에서 군납공장을 하며 돈을 모았다는 정도의 이야기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1950년대 안두희에 대해서는 많은 풍문이 있었다. 혹자는 그가 이승만의 양아들이라고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여전히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뭔가 수상한 일을 꾸미고있다고도 했다. 지금까지 주로 백범계열 인사들의 입과 입을 통해 음모론처럼 떠돌던 다소 ‘황당한’ 이야기들, 취재과정에서 상당수 그것이 사실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최초 확인, 1959년 북송선 폭파 공작 책임자 안두희
1959년 이승만 정권에게 재일교포 북송사업은 체제의 운명이 걸린 심각한 도전이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의 주간 요미우리신문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북송선을 폭파하기 위해 남한의 비밀 공작대가 일본에 와 있으며 그 실행 책임자가 한독당의 주석 김구를 암살한 A대령이라는 것이다. 김구를 암살한 A대령... 바로 안두희였다. 퇴역군인, 군납사업자로 포장된 그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

최초공개, 美<308 방첩대 보고서> 이승만식 공작정치의 핵심 인물, 안두희
미 육군 308방첩대는 당시 일본 주둔 병력이었다. 1955년 생산된 이 부대의 정보 보고서 <한국 정치사(The History of Korea Polotics)>에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정관계의 거물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그런데 이 보고서에 놀랍게도 안두희가 등장한다. 여기서 안두희는 이승만 반대파 제거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이승만의 손도끼 같은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이 문서를 발굴한 정병준 박사에 따르면 “1955년 현재 안두희가 한국내 상당한 위상을 갖고 있었음을 방증한다”고 해석한다. 미국 방첩대가 주목하고 있던 안두희, 그는 백범 암살이후에도 음지에서 활동하던 이승만 정권의 핵심 정보공작원이었다.

반공, 정보의 1인자
안두희는 실제로 살아 생전에 자신이 만난 여러 사람들에게 자신이 남한 정치사찰의 일인자였다고 자랑한 바 있다. 하지만 안두희의 주장만 있었을 뿐 아무런 사실 근거를 찾을 수 없었기에 그 중요성이 평가절하 되었다.
2001년 발굴된 미국무성의 기밀보고서 일명 <실리보고서>에는 안두희의 중요한 정보경력이 담겨 있다. 안두희가 우익테러단체인 백의사의 대원이자 미군 방첩대 CIC 요원이었다는 것이다. 실제 암살 당시에도 안두희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정보 공작원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안두희는 김구 암살의 단순한 하수인이 아니었다. 월남 출신의 비밀우익결사의 핵심조직원 이자 미군의 정보원, 반공의식으로 무장하고 훈련된, 고르고 고른 암살의 최적격자였다.

반공의 이름으로 김구를 쏘다.
안두희의 집안은 평안남도에서 손꼽히는 갑부였다. 해방 후 북한의 대대적인 토지개혁이 실시되자 그의 집안은 몰락했다. 빈손으로 남한으로 내려온 안두희는 서북청년단 간부가 되면서 철저한 반공주의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 안두희에게 48년 김구의 행보는 위험한 것이었다. 반공 반탁의 상징이었던 김구가 북측의 제의에 따라 평양행을 발표하고 평화통일 노선을 천명한 것은 반공과 단정을 외치던 많은 우익세력들의 심각한 반발을 초래했다. 반공과 애국의 이름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이승만 정권의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김구는 제거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남한 반공 정보의 1인자 안두희가 그 공작에 투입됐다.

망각과 시간지체의 상징, 안두희
안두희는 지난 96년 자신의 집에서 한 버스기사에 의해 살해되었다. 살해된 그의 집에는 ‘백수청복’이라고 쓰여진 액자가 걸려있었다. 백수청복을 바라던 암살범, 그는 끝까지 자신이 저지른 암살의 정당성을 확신하고 있었고 계속되는 증언과 번복의 악순환으로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공식적인 국가기구가 처음으로 이 사건의 진상규명에 나선 것은 1994년 국회법사위, 김구 사후 거의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안두희는 우리 현대사의 전형적인 특성, 망각과 시간지체를 상징한다.

 

선생의 데드 마스크

 

등록문화재 제439호 김구 선생의 혈의

 

 

<아래 내용은 경교장에 없습니다>

김구 친필 서명 태극기

 

 

 
이호두 기자

백범 암살범 안두희 타살 (1996.10.23)

  • 국제신문
  • 김찬석 기자
  • 2010-10-22 22:59:47
   
백범 김구 살해범 안두희(1917~1996·사진)의 최후는 비참했다. 1996년 10월 23일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버스 운전기사 박기서(당시 47세) 씨에 의해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 79세였다. 박 씨의 행위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백범 살해의 배후를 확인할 길이 없어졌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런 아쉬움이 심지어 박 씨가 미 중앙정보부의 사주를 받아 안두희의 입을 막기 위해 살해했다는 식의 추측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박 씨는 그후 언론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안두희는 살려둬 봤자 더 이상 입을 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자가 호의호식하면서 천수를 누린다면 뒷날 후손들에게 뭐라고 말할 것이며 나중에 백범 선생을 어찌 뵐 수 있겠습니까? 저는 청소부의 심정으로 그를 처단했습니다." 박 씨는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절반 가량 복역하다 석방됐다.

안두희는 6·25전쟁 1년 전인 1949년 6월 26일 백범을 권총으로 살해했다. 이후 종신형을 선고 받았으나 불과 석 달만에 15년형으로 감형됐고 그마저도 6·25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과 함께 포병 장교로 버젓이 복귀했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 배후설 등이 제기됐다. 공권력에 의한 진상규명과 처벌이 불가능해지자 민간인들이 나섰다. 1965년 백범 독서회장 곽태영이 칼로 안을 찔렀다. 1987년 3월 민족정기구현회 권중희(1936~2007) 회장이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몽둥이로 구타해 새삼 주목을 받았다. 권 씨는 1991년과 1993년에도 안을 수 차례 구타했다. 권 씨가 1993년에 펴낸 책의 이름이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이다. 친일역사의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우리의 현실에서 그 말은 여전히 유효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경교장 가는 길

*지하철 5호선 4번 출구 약 500m

*무료입장

*월요일 휴무

*전화:02)735-2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