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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소현세자(昭顯世子)는 왜 아버지 인조(仁祖)에게 냉대받았을까?

문화재방송 2017. 4. 20. 14:04


 

<삼전도비(三田渡碑) 지정번호: 사전 제101호/ 시대: 1639년(인조17)

소재지: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

 

 

이 비는 병자호란 때 승리한 청나라 태종(太宗)의 요구로 세운 비석이다.

정식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지만 문화재 지정 당시

지명을 따서 '삼전도비'라고 지었다.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왜 아버지 인조(仁祖)에게 냉대받았을까?


인질의 신분으로 외교를 수행했던 비운의 왕세자,


⊙ 소현세자의 숙소인 심양관은 호방·예방·병방·공방 등 갖춘 사실상의 駐淸대사관
⊙ 淸의 派兵·供物 요구 대처, 포로귀환 등 사무 담당
⊙ 소현세자, 北京에서 선교사 아담 샬과 교류… 서양과학서적 등 가지고 귀국
⊙ 仁祖로부터 淸의 앞잡이라는 의심받아… 귀국 두 달만에 疑問死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대표·前 스위스 대사



소현세자 일행이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머물렀던 심양관. 영조가 청나라로 가는 사신들 편에 그려 오게 한 그림이다.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는 조선 제16대 인조(仁祖)의 장자로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동생 봉림대군(鳳林大君·뒤에 孝宗)과 함께 청(淸)에 인질로 잡혀가 8년간 심양(瀋陽)에 머물렀다. 이 기간 소현세자는 천주교 신부 아담 샬(Adam Schall)과 교제하고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을 배워 1645년 귀국할 때 천문, 과학, 종교에 관한 많은 서적 등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이러한 행동은 부왕 인조의 냉대를 받다가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더욱이 세자 빈(嬪)도 사사(賜死)되고,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두 아들은 풍토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멸문지화(滅門之禍)의 변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소현세자를 비운의 왕세자로 기억하고 그의 생애를 종종 드라마의 소재로 삼기도 했다.
 
  소현세자가 인질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조·청 외교의 최일선에서 오늘날의 중국 주재 한국대사와 같이 외교사절로 활동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그가 청에 머무르던 8년은 명과 청의 패권 다툼으로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극히 유동적인 시기였는데, 소현세자는 그의 거소인 심양관(瀋陽館)을 기반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실제 우리 외교사에 기록할 최초의 외교사절 왕세자였던 것이다.
 
 
  외교 실패가 불러온 丙子胡亂과 三田渡의 굴욕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사실을 기록한 삼전도비.
  500년 왕조사의 가장 치욕적인 사건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을 향해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린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치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병자호란(1636~1637)과 삼전도 굴욕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집권한 조선 조정의 외교 실패가 초래한 재앙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날 즈음의 중국 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명은 반란으로 혼란한 상태였고, 이 틈에 청(당시는 후금)은 심양과 요양을 장악하면서 빠르게 세를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조선의 광해군은 지는 명과 떠오르는 청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지혜롭게 구사했으나 ‘폐모살제(廢母殺弟)’를 구실로 광해군을 내쫓는 데 성공한 인조와 반정세력은 외교노선을 ‘친명배청(親明排淸)’으로 전환했다.
 
  청은 명과 패권을 다투는 일전을 앞두고 청군이 남하할 때 조선이 배후에서 공격해 오면 협공을 받게 되기 때문에, 조선을 중립화시키는 것이 우선과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조반정에 성공한 조선의 반청정책은 결국 두 차례의 국난(國難)을 불러왔다. 1627년의 정묘호란(丁卯胡亂)과 1636년의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김상헌(金尙憲)의 주전론(主戰論)과 최명길(崔鳴吉)의 주화론(主和論)으로 나뉘었다. 청 태종의 30만 대군이 남한산성 아래 탄천에 집결했다. 마침내 청 태종은 인조가 성에서 나와 항복하고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소현세자는 인질을 자청했으나 대신들은 명분을 앞세워 반대했다. 청 태종은 최후통첩을 했다. 결국 인조는 삼전도(현재 잠실 석촌호 부근)로 내려와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의 항복의식을 치러야 했다.
 
  청이 제시한 항복 조건도 받아들였다. 정축맹약(丁丑盟約)으로 불리는 이 강화조약의 내용은
1. 조선은 청에 사대(事大)하고, 왕자와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할 것
2.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원군을 보낼 것
3. 조선인 포로는 속환(贖還)할 수 있다는 것
4. 매년 한 번씩 일정한 양의 세폐를 바칠 것 등이다.
 
  삼전도의 굴욕은 명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명분에 사로잡혀 국제정세의 변화를 외면한 인조반정의 외교 실패가 초래한 국난(國難)이었던 것이다.
 
 
  볼모가 된 소현세자의 거소 심양관
 
  청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비롯해 많은 신료들을 인질로 데려갔다. 소현세자는 1637년 심양에 도착해 임시거처에 잠시 머물다가 그해 청의 궁궐 인근에 신축한 심양관으로 옮겼다. 세자는 청이 명에 승리한 뒤 북경(北京)으로 천도한 1644년까지 8년간 이곳에서 볼모생활을 하게 된다.
 
  《심양일기(瀋陽日記)》에 의하면, 당시 심양에 함께 온 신료는 문관 재신(남이웅, 박로, 박황), 무관 재신(이기축), 시강원(이명웅, 민응협, 이시해, 정뇌경, 이회), 익위사(서택리, 김한일, 허억, 성원, 강문명), 선전관(변유, 위산, 구오), 의관(정남수, 유달) 등 20명 안팎이었으며 기타 자제들과 수행원을 합하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이후 감축 혹은 증원되기도 했다.
 
  심양관은 소현세자의 거소일 뿐만 아니라 외교의 현장이기도 했다. 또한 조선 역사에서 유일하게 타국에서 국왕이 출생한 장소이기도 하다. 1645년 소현세자가 귀국 후 숨을 거두자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봉림대군은 심양관에서 볼모로 생활하던 1641년 맏아들(후에 顯宗)을 낳았다.
 
  소현세자는 심양관에 머물면서 당시 도르곤(Dorgon·多爾袞·淸 초대 황제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을 비롯한 청의 황실, 무장 등과 친교하고 조·청 간의 문제들을 협의했다. 1644년에는 명 정벌을 위해 나선 청군을 따라 북경에 가서 70여 일을 체류했다. 여기에서 독일인 신부 아담 샬과 만나 천주교와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되고 그와 함께 연구진을 구성해 천문, 지리학, 수학, 지동설, 항해법, 화포 제조법, 토목공사법 등을 전수받기도 했다.
 
  그래서 심양관은 역사의 현장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한국사와 관련이 깊다. 훗날 영조(英祖)는 1760년 청에 보내는 사신단에 효종과 현종이 고난을 겪은 심양관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오라고 했는데 당시는 소현세자 일행이 심양관을 떠난 지 110여 년이 지난 뒤여서 건물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신단은 현지인들에게 물어 과거 심양관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들어선 사찰의 모습을 대신 그려 영조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심양관은 양국이 모두 필요로 했던 외교 채널
 
중국 심양시립아동도서관. 이곳에 심양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강점기에는 심양을 점령한 일본이 1920년대 제작한 지도에 표기된 청의 고궁 남쪽의 ‘고려관(高麗館)’을 심양관의 옛터라고 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소현세자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심양관의 현재 위치가 심양시 심하구에 위치한 심양시립소년아동도서관 자리로 추정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러나 아직까지 심양관의 정확한 위치와 모습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청이 많은 인질을 선양으로 끌고 간 것은 조선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명과의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식량, 병력을 조선에서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맺은 강화조약에 따라 청은 조선에 대해 약조 이행을 촉구하며 요구 사항을 소현세자에게 전달하고 장계(狀啓)로 조선 조정에 알려 실행하게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청은 심양관을 대 조선 교섭의 1차적인 창구로 활용한 것이다.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 청은 종종 인조를 청에 불러 볼모인 세자를 즉위시키겠다는 ‘왕위교체론’으로 압박하기도 했다.
 
  조선의 경우는 청측의 압박이 계속되면서 심양관이 조선의 입장 전달 통로뿐 아니라 청으로부터의 요구를 조정하는 역할도 해 주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조선도 소현세자와 심양관을 의사소통과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 채널로 활용하게 된 것이다.
 
  또한 조선으로서는 청의 수도에 있는 심양관의 정세 파악이 빠르고 정확했던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조선 조정의 심양관에 대한 의존도는 계속 증대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외교업무 처리를 위해 심양관은 호방(戶房), 예방(禮房),병방(兵房), 공방(工房) 등 4개 부서를 설치하여 호방은 재정,예방은 물품, 병방은 인마(人馬), 공방은 공장(工匠) 업무를 맡았다. 이러한 조직과 규모만을 보아도 심양관은 오늘날의 외교공관과 비교해 손색이 없을 정도임을 알 수 있다.
 
  청과 조선은 양측 모두 소현세자와 심양관을 통해 대부분의 현안을 처리하려 했다. 그래서 양국 간 현안은 소현세자의 몫이었다. 소현세자와 심양관은 볼모의 상황이기는 하지만 외교 채널로 기능하면서 청의 압박에 대한 완충 역할도 감당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심양관은 주 중국 한국대사관이며 소현세자는 주중 한국대사였던 셈이다.
 
 
  심양관의 외교 업무와 비밀 첩보 활동
 
  현대 외교의 법전이나 다름없는 빈 협정(1961년)은 외교사절의 기능에 관해
 1. 국가를 대표하는 일
 2.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
 3. 주재국 정부와 교섭하는 일
 4. 주재국의 정세를 살피고 본국에 보고하는 일
 5. 주재국과 우호관계를 증진하는 일의 다섯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소현세자와 심양관은 사실상 이러한 근대적 의미의 외교적 역할과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소현세자와 심양관은 양국 간 사신(使臣) 왕래에 관한 문제를 협의했다. 양측 간에는 정기사행 이외에도 사안별로 빈번하게 사신을 교환했는데 이들의 파견과 접수에 관해 협의한 것이다. 청이 요구하는 세폐(歲幣)와 조공(朝貢) 품목에 관한 일도 협의했다. 또한 청측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요구하는 공물과 조선 사신이 가져오는 공물에 대해서도 협의, 조정하는 일을 처리했다.
 
  청의 요구가 무리하면 소현세자는 자신의 결정권이 없고 본국의 결정을 기다려야 함을 내세우면서 청의 요구를 약화시키는 한편 조선의 입장을 반영하는 협상 자세를 견지했다. 심양관에 대한 조선의 의존이 커지면서 그 기능과 역할도 확대되었다. 심양관은 교섭 창구로서 뿐만 아니라 청 내부의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조정에 전달하여 조선의 정책 수립에 기여하는 역할도 함께 수행했다.
 
  청은 원칙적으로 권력의 핵심인 정부와 군 고위층과 세자 일행과의 사적 교류를 차단했다. 명과 전쟁을 하고 있는 청 내부의 비밀스러운 정보들이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양관은 정보 수집을 위해 조선 출신의 청 역관들을 중심으로 청 황실, 군부 고위층을 대상으로 인맥을 관리하고 있었다.
 
  문서의 수발에 민감한 청은 수시로 심양관의 문서를 검열했다. 《인조실록》에 의하면 심양관은 이러한 청의 감시를 피해 조선 조정과 평안도 의주의 두 갈래로 문서를 나누어 수발했다. 특히 급하거나 비밀리에 연락해야 할 사안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평안도 의주를 통했다. 이같이 얻어 낸 정보들은 조선의 조정에 전달되어 정책수립에 이용되었는데 이러한 보고 문서들이 〈심양장계(瀋陽狀啓)〉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오늘날의 비밀문서에 해당하는 문서도 포함되어 있다.
 
 
  조선군 파병문제와 관련한 淸과의교섭
 
수군을 이끌고 對明전투에 참전했던 임경업.
  소현세자가 청과의 교섭에서 가장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던 이슈는 청의 파병 요구에 대해 협의하는 일이었다. 청은 명과 아직 대치 중인 상황에서 여전히 조선과 명의 내통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을 명에서 분리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명과의 전쟁에 조선군을 징병해 출정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청은 조선군을 파병하도록 계속 압박했다. 그러나 친명배청(親明排淸)을 명분으로 집권한 인조 정권으로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중간에 놓인 소현세자는 조선과 청의 양쪽으로부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세자는 청측이 압박을 가할 때마다 전란 이후 징발의 어려움을 강조하며 지연의 이유를 변명했다. 하지만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군 징발을 약조한 인조로서는 청의 요구를 언제까지나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결국 2000의 수군(水軍)을 파병하기로 타협했는데 청군 수장 마부대(馬夫臺)는 1만이 넘는 수군을 계속 요구해 결국 소현세자는 마부대와 교섭 끝에 그 수를 6000으로 감축했다.
 
  조선은 1640년 임경업(林慶業)이 이끄는 수군을 파견했다. 임경업은 잘 알려진 반청론자인데 청이 명을 치는 전쟁에 그를 파견한 것이다. 임경업은 명군과 적극 싸우지 않고 일부 군사를 투항시키기도 했다. 이에 격분한 청은 장수 용골대(龍骨大)를 단장으로 하는 진상조사단을 의주로 파견했다. 이들은 조선의 대신들을 의주로 불러 심문하는 이른바 ‘심옥(瀋獄)’을 벌여 조선은 다시 위기일발의 상황에 빠졌다.
 
  문제 해결은 다시 소현세자의 몫이었다. 소현세자는 양자 사이의 완충 역할을 했다. 용골대는 세자가 이들을 비호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세자는 유화적으로 대응하면서 파문의 확산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소현세자의 외교적 역할이 청의 의구심을 푸는 데 상당한 공헌을 했다.
 
  이후에도 징병은 계속 추진되었고 그 도착의 지연과 군량 문제를 둘러싼 마찰도 계속되었다. 청이 병선의 수군 중 포수 1000을 계속 주둔시키면서 이들의 식량과 말을 조선에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세자는 군량을 조선에서 운반해 오기 곤란하므로 심양에서 쌀을 구입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수군과 포수는 말을 타지 않음을 들어 말을 징발할 필요가 없음을 끝까지 주장해 징병 숫자를 줄이는 등 조선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외교 교섭을 훌륭히 수행했다.
 
 
  포로 송환 문제는 오늘날의 영사 업무
 
  병자호란 이후 심양관에서 처리하기 힘들고 비중이 큰 업무는 약 50만으로 추정되는 청에 잡혀온 포로들을 조선으로 귀환시키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거의 매일같이 심양관의 사무에 등장했는데 오늘날의 용어로는 해외공관에서 다루고 있는 영사업무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세자 일행이 심양에 도착했을 때부터 청측은 포로의 처리와 관련해 강화조약을 상기시키면서 조선의 자의적인 송환을 엄금하고 청군이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한 뒤에 처리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그 후 청측은 심양에 포로 시장을 설치한 후 이들 피로인(被擄人)을 매매하여 풀어주는 소위 속환(贖還·돈 주고 풀려남) 절차를 취하게 되었다.
 
  이의 처리를 위해 심양관은 속환이 가능한 자의 명부와 속환가를 작성해 조선에 보내고, 사신 왕래 시에 대규모 속환을 주선하고, 송환 중에 발생한 개인들의 채무를 변통한 후 본국에 명단을 알려 추심을 요청하고, 심양에서 열리는 속환시장을 감독하고, 절차를 마친 포로들을 거주지로 돌려보내는 ‘황당한’ 일을 해야 했다.
 
  속환을 위해 조선은 국고 지원으로 귀환시키는 공속(公贖)과 개인이 추진하는 사속(私贖)을 병행했다. 공속을 위해 조선에서 속환사가 직접 심양으로 출장을 가기도 했다. 사속의 경우는 어려운 문제들이 뒤따랐다. 심양에 간 개인이 속가의 부족분을 청나라 사람에게 빌려 귀환한 뒤 돈을 갚지 않는 문제들도 계속 일어났다. 또한 청의 실력자들이 자신의 포로들을 시장에 강매하는 일도 계속되어 심양관에서는 이때마다 속환가를 마련해 내야 했다.
 
  또 다른 영사 문제는 김상헌처럼 병자호란 시 주전파로 청에 압송되어 감옥에 수감된 소위 ‘정치범’이라고 할 수 있는 조정 신료들을 보호하고 석방시키는 문제였다. 주전파는 아니지만 최명길과 같은 주화파 신료들도 다수 투옥되어 있었다. 소현세자와 심양관은 청과의 집요한 교섭 끝에 이들의 석방과 송환을 성사시켰다.
 
  귀환된 여자 피로인 ‘환향녀(還鄕女)’는 조선사회에서 훗날 ‘화냥X’으로 불리며 평생을 죄인처럼 살아가야 했다. 이러한 참극은 인조반정 세력의 외교 실패에서 그 원인을 찾게 된다는 점에서 조선의 외교사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광복 70년을 맞아 아직도 주변을 맴도는 위안부 등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를 떠올리면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신채호 선생의 경고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서양 문화와 접하게 된 소현세자
 
소현세자와 교류했던 선교사 아담 샬.
  청군 대장 다르곤은 북경으로 진군하면서 명의 최후를 확인시키기 위해 소현세자를 대동했다. 1644년(인조 22) 산해관(山海關)을 떠난 청군은 한 달 만에 북경에 입성했고 명은 멸망했다. 세자는 북경에서 70여 일 동안 머물면서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였던 아담 샬(Adam Schall·중국명 湯若望)을 만나게 된다. 그에게서 천주교 세례를 받고 서학(西學)과 서양 과학문물을 접하면서 다른 문명세계의 실상을 발견하게 된다.
 
  북경 소재 남(南)천주당의 한 신부가 기록한 〈정교봉포(正敎奉褒)〉에는 “소현세자가 자주 남천주당을 찾아와 천문학 등을 묻고 배워 갔고 샬 신부도 자주 세자의 관사를 찾아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어 두 사람은 뜻을 같이했다”고 전하고 있다. 심양에 돌아와서도 세자는 아담 샬로부터 천문, 지리, 수학, 지동설, 항해법, 화포 제조법, 토목공사법 등 서양 문물을 전수받았다.
 
  여기에서 소현세자는 서양의 과학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소현세자는 8년의 볼모 생활을 마치고 심양관을 떠나 조선에 돌아올 때 많은 종류의 서양 과학 서적과 여지구(輿地球)를 함께 갖고 왔다. 이때 소현세자가 가져온 과학 서적 중에서 훗날 수원성 축성 때 정약용이 설계한 거중기(擧重機)가 발견된다고 한다.
 
  소현세자는 새로운 조선을 설계한 것으로 보인다. 명은 멸망했고 청은 더 이상 조선의 원수가 아니었다. 외교의 관점에서 명분을 떠나 실리로 따진다면 새로운 패권국가로 등장한 청은 조선의 사대국(事大國)이자 후원국인 강대국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성리학 이외에도 여지구가 보여주는 지구 반대편의 새로운 사상과 과학기술은 조선을 발전시킬 수 있는 혁신적인 기제가 될 수 있다고 세자는 인식했던 것이다.
 
 
  소현세자 嬪의 朝·淸 국제무역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더라면 조선의 근대화가 일본 메이지 유신(明治維新)보다 200년이나 앞당겨질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 현실은 너무도 달랐다. 부왕 인조는 소현세자를 타국에서 고생하다 돌아온 아들이 아니라 친청 노선과 서양 오랑케에 편승해 자신의 왕위를 위협했던 몹쓸 아들로 치부했던 것이다.
 
  소현세자와 심양관의 외교 활동을 살펴보면서 반드시 거론해야 할 사람이 있다.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愍懷嬪·1611~1646)이다. 그녀는 우의정에 오른 강석기(姜碩期)의 둘째 딸로 1627년 17세 때 세자빈에 간택되어 한 살 아래인 소현세자와 가례를 올렸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피란하였다가 강화성이 함락되자 청군에게 붙들려 청 황제에게 절을 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때 강빈(姜嬪)은 자신의 의복을 나인에게 내주고 대신 절하게 하는 기지를 발휘하였다고 전한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자 강빈도 소현세자를 따라 인질로 심양에 끌려갔다. 빈은 조선의 왕실 여인 중에서 조선 땅을 벗어났던 유일한 인물이 된 것이다.
 
  소현세자가 외교 활동에 몰두하는 동안 강빈은 심양관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 문제를 자신이 해결해 보려고 했다. 심양관에 입주한 수백여 대식구의 식생활을 해결하는 것부터가 큰 문제였다. 강빈의 일은 아니지만 피로인 속환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문제도 쳐다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 무렵의 사정을 적은 〈심양장계〉에 의하면 당시 속환가는 수백 또는 수천 냥이나 되어 희망을 잃은 조선 백성들이 도로에 가득 찼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빈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 수단이 자금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녀는 돈을 벌기로 작정했다. 청의 고위층이 고액을 지불하면서 조선에서 면포·표범가죽·수달피·꿀 등을 구입할 정도로 물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그녀는 청 지배층의 든든한 재력과 조선의 질 좋은 물품을 연결시키면 큰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면포·가죽뿐만 아니라 종이와 약재와 생강 그리고 담배도 좋은 무역 품목이었다. 그녀는 조·청 무역을 시작한 것이다.
 
  또한 그녀는 조선 피로인들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했다. 여기서 생산한 곡식은 심양관 살림에 큰 보탬이 되었다. 조선 포로들도 청나라 사람들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심양관의 세자 밑에서 일하기를 원했으므로 강빈의 경농사업은 일거양득의 탁견이었다. 강빈은 이렇게 수확한 곡식을 청의 진기한 물건들과 맞바꿔 차액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조선 사신들이 가져오는 인삼 등을 청에 팔아 막대한 이득을 남기기도 했다.
 
 
  소현세자는 왜 아버지 仁祖에게 냉대받았을까?
 
  이 자금으로 피로인들을 속환시키고 경농사업에 활용하는 한편, 소현세자와 심양관의 관리들이 청의 고관들과 교분을 나누는 외교활동을 돕기도 했던 것이다. 그녀는 볼모라는 현실에 구애받지 않고 오히려 기회로 삼아 어려움을 극복한, 슬기로우면서도 강인했던 ‘시대를 앞서간’ 조선 여성이었던 것이다.
 
  명을 멸하고 북경을 수도로 정한 청은 더 이상 조선의 인질이 필요하지 않았다. 1645년 소현세자는 영구 귀국했다. 귀국 길에 선 세자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한 해 전, 장인 강석기의 사망으로 일시 귀국했을 때 인조가 냉담하게 대했을 뿐만 아니라 빈소에 곡(哭)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귀국하니 걱정이 현실로 다가왔다. 냉대 분위기가 역력했다. 세자에 대한 군신의 진하(進賀)조차 저지되었다. 세자 일행이 북경에서 가져온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과 물자는 오히려 인조의 노여움을 가중시켰다. 인조는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부터 청의 간섭으로 소현세자에게 왕위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청이 소현세자를 임금으로 내세워 자신을 폐출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였다. 그래서 인조는 심양관에 밀정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조정의 반정 집권세력도 반청 정책을 견지하면서 심양에서의 소현세자 처사를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수백 명의 관원을 거느리고 막대한 경비를 국고에 부담 지우고 있는 소현세자가 청의 요구를 막지 못하고 그들과 영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소현세자가 친청적인 인물로 반청 노선의 인조 후계자로서 부적격하다고 간주한 것이다.
 
  세자가 장인상으로 일시 귀국했다가 심양으로 돌아간 직후, 반정 1등 공신 심기원(沈器遠)이 군사를 일으켜 인조를 축출하려 했던 일도 있었다. 심기원은 “주상을 추존하여 상왕(上王)으로 삼고 세자에게 전위(傳位)시키려 했다”고 말했다. 심기원 등은 사형당했지만 조정은 이 일로 어수선할 수밖에 없었고 인조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인조가 세자를 의심하는 것을 눈치 챈 일부 정치세력은 세자를 모함하고 나섰다. 인조의 후궁인 조소용(趙昭容)은 심양관에서 세자의 과도한 영리 추구가 잠도역위(潛圖易位·세자가 인조를 대신해 왕위에 오르기 위한 공작)라고 모함하였다. 더 나아가 그녀는 세자와 강빈이 인조를 내쫓으려 한다고 참소하기도 했다. 8년 만에 환국한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하례조차도 막을 정도로 그를 냉대하는 분위기에서 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병석에 누웠다가 발병 사흘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의문의 죽음과 세자 일가의 滅門之禍
 
  세자가 급사하면서 그의 사인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인조실록》에 기재된 세자의 병명은 학질이었다. 실록은 세자의 시신 상태에 관해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와 검은 천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외인(外人)들은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34살의 건장한 소현세자 급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학질 환자에게 사흘 동안 침을 놓았던 어의 이형익(李馨益)에게 의혹이 집중되었다. 이형익은 인조의 후궁 조소용의 집안과 관련 있는 의사로 추문이 많던 자였다. 대사헌 김광현(金光炫)이 이형익의 처형을 주장했다. 김광현은 강빈의 오빠 강문명(姜文明)의 장인이었다. 조선시대에 왕이나 세자가 죽으면 의관들은 특별한 잘못이 없다 해도 국문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인조는 이형익을 비호하면서 처벌하지 않았다.
 
  세자가 사망하자 후궁 조소용은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이제는 세자빈을 모함했다. 강빈의 궁녀들은 임금 상에 독을 넣은 혐의로 가혹한 고문을 당했고, 강빈은 후원 별당에 감금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 홍금(紅錦) 적의(翟衣)를 만들어 놓고 외람되게 왕비의 칭호를 사용하였다”는 이유로 폐출하여 사저로 내쫓은 후 사약을 내려 죽였다.
 
 
  형 소현세자와 동생 봉림대군의 엇갈린 운명
 
  소현세자와 빈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중 큰아들은 원손(元孫)이었으므로 세습의 원칙대로라면 그가 인조의 뒤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인조는 종법을 어기고 원손이 아닌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두 아들은 풍토병으로 죽었다. 세자와 빈은 졸지에 멸문지화를 당한 것이다. 소현세자 독살설이 주목받는 이유이다.
 
  《인조실록》은 소현세자가 영민하고 총명하였으나 기국과 도량은 넓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세자 일가의 멸문지화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인질로 심양에 가서 조선을 위해 헌신했던 외교사절 왕세자와 강빈 그리고 세손들의 죽음, 이것은 분명 인조의 세자에 대한 의심과 공포, 그리고 증오심과 함께 후궁 조소연의 질시와 과욕이 부른 ‘정치적 타살’이라고 생각된다.
 
  봉림대군은 인조가 죽은 후 조선 제17대 임금(효종·孝宗)으로 즉위했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를 제치고 왕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봉림대군은 명의 몰락 장면을 바라보는 관점이 소현세자와 달랐다. 소현세자가 여진족 청이 중국의 새로운 패자가 되는 현실을 인정했다면, 봉림대군은 그들에 대한 설치(雪恥)를 다짐했다. 이 다른 관점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았는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봉림대군의 배청(排淸) 인식은 인조가 그를 왕위 계승자로 선택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추론해 본다.
 
  이런 조건하에서 즉위한 효종은 10년 남짓한 재위기간 중 단호하고 용의주도한 정치력으로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으로 기울어져 가는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재건했다. 아버지 인조와 자신의 즉위 공신인 김자점(金自點)을 제거하고 송시열(宋時烈) 등 경도(經道)에 밝은 학자들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관료들을 대거 기용하는 인적 쇄신을 단행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대동법(大同法)을 통해 조세제도를 전면 개혁하는 등 국가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혁해 나갔다. 이 개혁은 조선을 유교문화권의 중심국가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국가개조 사업이었다.
 
  소현세자가 외교에 능했다면 봉림은 정치에 능했다. 그들의 시대는 명·청 교체기 한반도 주변정세가 요동치면서 조선의 운명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소현은 지는 명을 버리고 떠오르는 청에 편승해 기우는 조선을 지탱시켰고, 봉림은 청을 배척하면서도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로 국가를 개혁하고 인재를 등용해 국력을 키워 부왕 인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았다.
 
  소현과 봉림 형제의 운명은 달랐지만 두 형제는 난세의 시대에 필요했던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고 생각된다.
 
  효종 이후 재건된 조선은 반청을 내세워 군대를 양성하면서도 패권국 청과 별다른 마찰 없이 200년 동안 평화를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조선은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청의 몰락과 일본의 부상으로 다시 찾아온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일본에 국권을 유린당하고 만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출처:조선pub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3&nNewsNumb=20150918275&nidx=18276&dable=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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