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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국보 제18호 부석사 창건 비화...의상대사를 짝사랑한 중국 여인의 슬픈 이야기

문화재방송 2021. 8. 1. 07:50

太白山 浮石寺

경북 영주시와 봉화군의 경계에 있는 봉황산(鳳凰山)은 그 산세가 봉황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높이 818m로 소백산국립공원에 속해 있습니다.

 이 봉황산 중턱에 676년(신라 문무왕 16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고찰(古刹) 부석사(浮石寺)가 있는데요, 부석사는 국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18호)으로 유명합니다. 또 무량수전앞석등(石燈 국보 제17호)과 조사당(국보 제19호),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등외에 국보 제45호인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 제45호)도 있지요. 

국보 제17호 석등
국보 제19호 조사당


국보 제45호 소조여래좌상(浮石寺塑造如來坐像)

 또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255호) 등과 원융국사비, 불사리탑, 삼성각, 취현암, 범종루, 안양문, 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들도 있답니다.  

 

선묘룡이 나르샤-사랑을 위해 용이 된 여인

 

선묘룡 설화가 내려오는 부석사의 전경 ⓒ 최고은

부석사(국보 제18호)의 풍경 ⓒ 최고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라는 말로 유명한 부석사는 빼어난 자연환경이 자랑입니다. 말 그대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보는 풍경은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올라오는 길에서 부석사를 바라보아도 아름답고, 부석사에서 다시 아래를 내려다 보아도 절경이죠. 수려한 소백산의 한 쪽에서 적지 않은 존재감을 빛내고 있는 이 절을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람은 의상스님입니다. 이 분도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요. 바로 원효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원효대사가 해골물로 깨달음을 얻고 돌아가자 혼자서 당나라로 떠난 사람이자 화엄종을 만든 스님이죠.

 

 본래 성격이 호탕하고 자유분방했다고 전해지는 의상스님은 불경을 공부하기 위해 떠난 당나라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바로 선묘. 뾰로롱~ 핑크빛이 감도는 그 만남 덕분에 의상스님은 이 부석사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라 하는데요...? 과연 선묘는 누구이길래 절을 세우는 데에 혁혁한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일까요? 엄청나게 돈이 많은 집안의 여식이었던 걸까요? 아니면 왕실의 딸이었던 걸까요?

 

  부석사가 어떻게 이런 절경에 위치할 수 있었던 것인지, 부석사에서 부석의 뜻이 왜 "떠있는 바위"인 것인지,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과 선묘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 한 번 알아 볼까요?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 ⓒ 최고은

부석사의 중심은 바로 무량수전입니다. 무량수전은 아미타보살을 모시고 있는 곳인데요. 보통 사찰이 부처를 모신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로 아미타불, 약사불 등의 보살들을 모시고 있는 것과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아미타불은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한다고 전해지는데요. 이런 아미타불이 부석사의 중심이 되는 이유는 당시 사회가 혼란스럽고 너무 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힘으로 극락으로 가고자 하는 염원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라고 하네요.

선묘각 ⓒ 최고은

바로 그 무량수전 뒤에는 작은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선묘를 모신 선묘각입니다. 무량수전 뒤에 소박하게 자리해서 눈에도 잘 띄지 않는 이 건물처럼 선묘는 조용하고 은밀하게 의상대사를 도왔을까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선묘는 아주 적극적인 여성이었어요. 대범하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줍니다. 그 이야기에 관해서는 선묘각의 벽화를 따라가며 함께 들어보시겠습니다.

 

선묘각 벽화 ⓒ 최고은

선묘는 의상대사가 불경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로 갔을 때 잠깐 머물게 된 당나라 사람 집의 여식이었습니다. 스님은 본디 속세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사사로운 욕심이나 감정을 가지면 안 되는 존재죠. 그런데 의상대사의 높은 인품에 감동해서인지, 의상대사의 외관이 선묘의 취향이었던 것인지 선묘가 그만 의상대사에게 한 눈에 반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금단의 사랑(?)이 시작된 것이죠.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네요. 

 

 하지만 의상대사는 본디 당나라 사람도 아닌 유학생 신분에, 선묘의 집에는 잠시 머무는 수준일 뿐이었기에 선묘의 짝사랑은 이뤄지지 않고 의상대사는 선묘의 집을 떠납니다. 이후 시간이 흐르고 흘러 유학 생활을 마친 의상대사는 다시 신라로 돌아기 위해 뱃길에 오르는데요. 의상대사가 집을 떠난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선묘는 서둘러 배가 떠나는 부둣가로 달려갑니다. 전할 수 없는 마음일지라도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 보고 싶었던 것일까요.

선묘각 벽화 ⓒ 최고은


  그러나 의상대사를 태운 배는 이미 저 멀리 떠나가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모하는 님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떠나보냈지만 그를 따라갈 마땅한 배편도 없었습니다. 발만 동동 구르던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집니다. 답답한 마음에 삶을 등진 것이냐고요? 아닙니다. 바다에 몸을 던진 선묘는 용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인간이 아닌 용이니 선묘룡이라고 불러야 겠죠.

선묘각 벽화 ⓒ 최고은 

 

 선묘룡은 즉시 의상대사가 탄 배를 따라가 이들이 신라로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호위를 해줍니다. 그리고 신라에 도착해서도 당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의상대사의 주위를 맴돌죠.

선묘각 벽화 ⓒ 최고은

 신라로 돌아간 의상대사는 화엄종을 내세우며 그 도리를 널리 펼치기 위해 왕명으로 현재 부석사의 자리에 절을 지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이미 사특한 무리들(이도교)이 무리를 지어 있었다고 합니다. 본인들이 잡았던 자리에 왠 절을 세운다고 하니 이교도들은 당연히 반발하였겠죠. 이들이 절을 짓는 것을 방해하여 의상대사가 난처함에 처하자 의상대사 1호 팬에 개인 보디가드까지 자발적으로 맡은 선묘룡이 나섭니다.

 

 하지만 때리지는 않습니다. 폭력은 반발을 불러일으키니까요. 대신 신묘한 힘을 보여주어 이들을 굴복시키죠. 선묘룡이 나타나 거대한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올리자 사람들은 놀라서 스스로 굴복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물러난 덕분에 의상대사는 절을 지을 수 있었고,선묘룡의 공을 치하하며 절의 창건 설화를 담아 사찰의 이름을 뜰 부에 바위 석을 사용하여 부석사(浮石寺)라고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묘룡은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하여 무량수전 뜰 아래에 잠들어 있다네요. 

부석사 부석 ⓒ 최고은

 이런 설화에 따라 선묘룡이 들어올렸다는 바로 그 바위(부석)는 무량수전 왼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부석사 부석 ⓒ 최고은

 현재도 바위가 약간 떠있다고 전해지는데요. 조선 영조 때 쓰여진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부석사의 부석에 대해 "위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떠있는 돌임을 알 수 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아마 그 틈새라는 것이 위 사진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거짓말 같은 설화이지만 그 속에는 다양한 역사적 사실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요. 제가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 중 "스쳐 지나가는 날들 가운데 당연한 일이라는 건 분명 없을거야"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가사처럼 한 사찰의 창건 설화에도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고, 의미가 없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저 거짓말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 때는 이랬구나, 이런 이야기가 있을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들어주셨다면 더욱 뜻 깊은 기사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제7기 문화재청 대학생기자단 최고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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