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갑은 1890년대(고종 30년) 전남 고부군수를 지내면서 농민들로부터 무리한 세미를 거두고, 백성들에게 무고한 죄명을 씌워 2만 냥이 넘는 돈을 수탈하는가 하면 부친의 頌德碑閣(송덕비각)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1,000여 냥의 비각세를 강제로 징수하였다. 또한 시급하지도 않은 저수지(만석보)를 축조한다고 농민들을 강제동원하고, 수세(水稅) 700여 섬을 착복하는 등 온갖 탐학을 자행했다. 격노한 군민들은 군수의 虐政(학정)에 항의했으나, 조병갑은 오히려 수탈을 가중함으로써 1894년 마침내 전봉준이가 인근농민을 규합해 고부관아 등을 습격했으니 조병갑의 학정은 동학농민반란(조선왕조입장에서 보면)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다. 조병갑탄압에 분노한 농민반란이 어찌나 크게 확산되고 격렬했는지 조정에서 ..